✿࿐ " 정 말 "/이 정 록 ࿐✿
고교교사 이정록 시인이 쓴
"정말"이란 재미난 시한편을 소개합니다.
남편을 일찍 죽음의 슬픔을
유모러스 하게 표현 했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쨘~해지는, 전혀 외설스럽지 않은 시입니다.
✿࿐ " 정 말 "/이 정 록 ࿐✿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이정록 시집 '정말' 중에서 ]
이정록(1964~) 시인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이 시 참 재밌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1연에서는 일찍 저세상으로 간
신랑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돌아가신 분이 성격이 참 급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일찍 가시는 분들은 뭔지 모르게
급하게 서두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2연은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오토바이에 맞선녀를
번쩍 안아서 태웠을까요.
오토바이에 태웠으니
남정네의 등에
여자의 가슴이 스치면서
젊은 혈기에 확 불을 싸 지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요.
그것도 바야흐로 봄날인데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 순간에 끝장나다니”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순간이
2연에서 펼쳐지는데
1연에서의 슬픔의 정조는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읽는 내내 웃음이 삐죽삐죽
새 나오게 만드는 서사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마지막 3연은 더 절창입니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얼마나 빨리 끝났으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절묘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가 나옵니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어쩜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단박에 바꿔칠 수 있는 걸까요?
거의 마술처럼 슬픔과
웃음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웃음 마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워낙 첫 행사를 빨리 끝내신 양반이라서
바람 한 번 피울 여력이 없으셨겠지요.
그런데 가정용도 안되었으니,
어떻게 상업용이 되었겠냐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정말 날랜
양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빨리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내공으로 가득찬 시인의
넉살 때문에 많이 웃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접한 최고의 詩였습니다
[ 이정록 시인의 약력 ]
이정록 시인, 중고등학교 교사
출생1964년 7월 29일 (만 56세),
충남 홍성군학력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데뷔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수상경력
2010 아산 설화고등학교 교사
"첨언" 외설과 예술에 대한
조정현의 정의(ㅎㆍㅎ)
예술:작품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 짐
외설:작품을 보면 육신이 뿌듯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