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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최근에, 그러니까 벌써 3,4년 전부터 전 군은
이산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그의 마누라쟁이가
고향에서 대학교 선생 노릇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때 놀리느라고 "김 교수"라고 부르곤 했던
전 군의 아내는 내 고향에서 일찍이 위장병의 진단과
치료에는 명의라고 소문이 난 '김일우내과'의
셋째딸이다. 그녀는 유복한 가정의 셋째딸답게 어릴
때부터 앙감질하듯 한쪽 발로, 그것도 엄지발가락
끝으로 뛰어다니기를 잘 해서 뻔질나게 무용
콩쿨대회에 출전, 입상했고, 그 나무랄데 없는 몸매를
더욱 가꾸고 과시하기 위해 서울의 어느 시립
여자대학 무용과에 입학, 졸업했다. 그리고 곧장
대학원에 다니면서 어느 사립 여자고등학교의 선생
노릇을 했고, 교사로 재직중에 서로 내노라 하는
지방유지의 자제들답게 전 군과 중매결혼을 했고,
배가 불러오는데도 불구하고 모교에 시간강사 자리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마침내는 고향의 어느
여자대학에 전임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전 군의
실토정에 의하면, 고향의 그 어느 여자대학에
무용과를 신설하는 데 그녀의 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요로에 막강한 로비를 했다고 하며, '맡아놓은
당상자리나 다름없는' 그 전임강사 자리에 '김
교수'가 비집고 들어가는 데도 그 여자대학 졸업생 두
명 이상을 전 군의 맏형이 재단 책임자로 있는
지방(전 군의 부친의 고향이므로 시골구석이다)사립
여자중고등학교에 선생으로 취직시켜주겠다는 조건을
그 대학 설립자 겸 재단 이사장에게 헌납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방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서, 그리고
지방대학 졸업생의 취직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상부상조를 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물론이고 그녀의 양
쪽 부모들은 그녀가 지방대학 교수로 머물러 있기를
추호도 바라지 않았다. 연줄만 닿으면 '돈을
써서라도' 그녀를 서울의 어느 여자대학 교수로
재취업시킬 꿍심에 온 집안이 몸이 달아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전 군은 무사태평이었다. 그리운 것
모르고 자란 부잣집 막내아들이 대개 다 그렇듯이
그는 아내와 자식마저도 자신의 생존에, 나아가서
자신이 사람 노릇을 하는 데 얼마쯤 필요로 하는
장신구나 돈쯤으로 여겼지, 그들이 그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여겨질 경우에는 돈으로
때워버리거나 그런 경우 자체를 미리 경계해 버리는
인물이었다.
하기야 오늘날 대다수의 월급쟁이들이 피로에
절어빠져서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급급한 터이기는
하고, 제 자식이나 아내도 제대로 건사할 정신적,
육체적, 시간적 여유가 없기는 하다. 대개 다
건성으로, 가식으로, 의무감 때문에 미지근한 관심과
싸늘하게 식어빠진 애정을 쏟는 체할 뿐이고, 그런
세련된 위선으로 포장한 가족적인 유대감이 이제는
제도화되어버렸다.
아무튼 전 군은 방이동에 백 평이 채 못 되는 이층
양옥집 한 채를 여벌로 가지고 있으면서 잠실께의
서른세 평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데, 요즘 들어
함께 사는 시간이 워낙 차이가 져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마누라쟁이보다 오십대 중반을 넘어선 가정부에
대해 할말이 더 많다. 그가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장씨는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하나 둔
중늙은이로서 일찍부터 그의 처갓집에서 입원환자들의
간이 없는 멀건 식사를 해댄 부엌대기였다고 하며,
최근에는 위장병 환자들이 종합병원으로 몰려가기도
하려니와 전문의 김일우 박사도 나이가 있는 만큼
진단만 명쾌히 할 뿐 치료에는 등한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서 수술환자나 입원환자를 극구 '시설 좋고
힘 좋은 큰 병원의 젊은 의사한테로 보내버리는 통에'
그녀에게는 일거리가 전만 못했고, 그래서 그의
처갓집에서는 그녀를 막내사위의 감시, 감독자 겸
수발꾼으로 보낸 것이었다. 아무려나 장씨는 환자들의
식사를 워낙 오랫동안 만들고, 대령한 이력이 있어서
여섯 시에는 정확히 일어나며, 일곱 시에는 토스트 두
쪽과 계란 프라이 한 개와 우유 한 컵, 그리고 당근과
오이를 손수 채에 갈아서(전 군은 음식에는 성의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어서 미제
믹서기를 나의 집에 양도해 버렸다) 그 즙 한 컵을
매일같이 전 군에게 갖다바친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식사시간이 시계처럼 정확해서 전 군이 오히려 기합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하며, " 그 한 시간쯤 늦출 수
없습니까, 아주머니?" 하고 전 군이 통사정을 하자,
장씨는 대뜸 "안돼요, 영감님이 아시면 큰일나요"라고
'김일우내과'에서 일할 때의 말버릇을 그대로
해버렸다고 한다. 마침 그때 전 군은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홀아비 신세에
은근히 부아가 일기도 해서 "아주머니, 그 음식에 간
좀 푹푹 쳐요. 소금기라고는 없는 음식을 먹으려니
난생 처음 입맛이 다 떨어져가네. 나 원 참, 무슨
팔자로... 음식이란 게 다 짠맛으로 먹는 건데
어쩌자고 그러실까?"라고 불평을 중얼대자, 장씨는 또
돌아보지도 않고 "안 돼요. 영감님이 아시면 날벼락이
떨어져요. 사람이 배힘으로 사는데 짠 음식 먹으면
위장이 명주올처럼 삭는대요. 싱거운 음식을 많이
자시고, 스무 번 이상 씹어서 삼키라는 게 영감님
말씀이에요"라고 말해서 전 군은 제 장인영감의
치부술이 얼마나 간단, 명료한지를 대충 짐작했다고
한다.
이제 전 군은 장씨의 "로봇같이 끈기 있는 그
성의에 오직 감사할 따름이며, 술 퍼마시고 밤 두세
시에 들어가도 일본여자처럼 안 자고 기다려주는
아주머니가 마누라보다 훨씬 편하다"고 자랑이 늘어져
있는 형편이다. 여북하면 그가 "자제분도 여기서 먹고
자고 하라 하세요. 비싼 기숙사비 내고 할 것 없이요.
요즘 애들은 부모가 고생하는 줄을 모른다니까!"라고
장씨에게 그녀의 숨가쁜 형편을 권면해도, 이
중늙은이는 "안 한대요. 그렇게는 못 하겠대요.
군대도 못 갈 모양인께 어디 취직이라도 시켜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르지요. 인저 지 밥벌이 할 때가 몇
년 안 남았는데, 지도 얼굴이 있지 여기서 어떻게
공밥 먹겠어요"라고 말하며 그를 무안하게
만들어버린다고 한다.
김 교수는 한동안 주말마다 두 애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마도 그러기를 일 년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지난해부터는 큰애가 국민학교에
들어갔고, 둘째인 딸애도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으므로
김 교수는 전 군에게 비행기표를 끊어주며 주말마다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명했다. 막내아들답게 전 군은
윗사람이(그는 한자 성씨를 들먹이며 자신의 아내가
뭣을 더 달고 있으니 '윗사람'이라고 우스개 삼아
지껄인 적이 있다) 시키는 일은 불평이 있어도 입
안에서만 우물거릴 뿐 수굿수굿 잘 따르는 터이다.
그래서 그는 대단히 바쁜 무슨 사업가처럼 비행기표
다발을 양복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서울과
고향을 한동안 오르락내리락했다. 지난해부터는
자가용을 사서 손수 운전으로 고향에 내려가기도
했는데, 내려갈 때마다 그가 음주상태로 차를 끌고
있는 터여서 양가 부모들이 "술 마시고 차 몰려면
도장부터(그의 친부모는 그의 이름 앞으로 올라 있는
부동산을 처분하려면 그의 도장이 필요할 것이고,
그의 처가에서는 막내딸이 배필도 없이 대학교수
노릇을 하는 건 말이 안 되고, 혹 그런 불상사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이혼'을 들먹이며 그의
인감도장을 맡기라고 했을 것이다) 챙겨놔라"고 하는
통에 그는 간신히 고향가는 억지걸음을 한 달에 한
번꼴로 면제받은 터이다.
그의 고향에는 물론 김 교수 이름으로 등기된 고층
맨션 아파트가 한 채 있었다. 지방 사람들의 케케묵은
사고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바꿔지기가 힘들어서
그들은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아파트 따위를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아파트 전세값이 매매가보다 더 비싼
형편이고, 서울 아파트보다 재료를 월등히 나은
것으로 곰살ㄱ게 지었는데도 서울 물건의 반 값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 군 내외는 손쉽게 아파트
한 채를 고향에 마련하여 그들은 이제 일 가구 세
주택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도대체 불평불만이나 걱정거리가 있을
수 없었다. 불평불만이나 걱정거리가 있다면 억지로
만들어서 그걸 각자가 자위(自慰)하듯 쓰다듬는
식이었는데, 예를 들면 애들이 표준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투박하기 짝이 없는 경상도 사투리에
익숙하게 길들여져서 큰일이라든지, 전 군에게
숨겨놓은 참한 여자가 있어서 어느 공휴일 오후에
불쑥 갓난애를 안고 출몰한다든지, 폭음과 폭식벽이
있는 전 군이 알게 모르게 위궤양에 걸려(전 군의
장모는 막내사위 몸걱정에 극성스러운 바가 있어서
만날 때마다 "전 서방, 밥은 끼니때 맞춰 찾아 먹고
있지? 그저 밥 잘 먹는 게 보약이야"라는 인사부터
건넨다는데, 전 군의 먹성은 그의 여자편력만큼이나
게걸스럽고, 당연하게도 그의 위장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유별나게 튼튼하다) 어느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하혈을 쏟고 졸도해 버린다든지, 김 교수가
학교에서 깡마르고 시커먼 얼굴의 데모꾼으로부터
공연히 말꼬리가 잡혀서 망신살이나 뻗치지 않는지
따위의 지레 걱정들이다. 한심하게도 전 군 내외는,
그리고 그의 일가권속은 이런 자질구레한 지레
걱정마저 없으면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지도 못하는
온상 속의 곱고 단조로운 풀포기들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전 군과 김 교수에게는 중차대한
문젯거리가 불쑥 고개를 디밀어서 골치를 썩이게
되었고, 마음이 늘 바빠지게 되었고, '문젯거리를
극복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보람'을 만끽하게 되었다.
그 문젯거리는 '돈을 한도까지 쓰는 한이 있더라도'
김 교수가 서울의 어느 여자대학교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시급한 고민이었다. 그 고민은 요컨대
인사청탁 건이라고 할 수 있었고, 시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 내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산가족으로
지내야 할지 기약할 수도 없는 막막함에 서로 지치게
되었고, 전 군은 국내 유수의 재벌급 대기업체에서
성실히 근무하고 있는 만큼 월급쟁이들이 꿈속에서도
그려본다는 이사(理事)자리에 앉아보고 나서 '있는
돈으로 제 사업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김 교수는 전공이 전공인 만큼
공연무대가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서울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제 발표회도 가져야만 차일피일하다
외국유학도 못 가고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자신의 약점을 상쇄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투리로만 말해 대는 두 자식들의 교육과
장래를 위해서도 그들은 서울에서 살아야 했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고향이 있으나마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라도 고향을 등질 수 있었고,
등져야만 제구실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불행한 일을 당해 보고 나이를 먹어봐야 어머니의
품이 그리운 것을 깨닫는 것처럼 그들은 아직 젊고,
정력이 왕성하고, 행복한 처지이므로 고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평생토록 행복할 것이므로, 또 웬만한 불행
따위에 돈으로 무화(無化)시킬 능력과 수완이 있는
확고부동한 상류 귀족계층이 되어 있기 때문에
고향쯤이야 고적지(古蹟址)의 돌무더기만한 가치 밖에
없었다.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일 년에
한두 번꼴로 '바람쐬러 갔다'가 쑥 훑어보고 오는
다보탑이나 석가탑 따위의 돌무더기 말이다.
인사청탁 건은 연줄을 잘 잡는 것이 문제해결의
요체다. 그래서 아무리 수소문을 풀어놓고 알음알이를
넣어보아도 국회 문공분과 위원회나 문교부에는
인사청탁을 드릴 만한 사람이 잡히지 않았다. 따라서
설혹 그런 유력인사를 잡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그렇게 단안을
내려야 양심의 가책도 덜 받고, 자존심도 덜 상했다.
대신에 '허름한'(전 군의 말투가 그 모양이었다) 여자
사립대학은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터여서, 백방으로 들쑤셔보았다.
마침 연줄이 닿았다. 전 군이 다니는 회사의
부사장이(그는 그 회사의 돌아가신 창업자의
맏아들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 수소문을 듣고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손아래 처남이 회장으로 있는 그
회사에서 부사장 노릇을 하는 만큼 그는 아랫사람의
애로사항에는 관심이 남달리 많고, 그게 바로 그의
성격이자 팔자인 모양이었다) 자청하고 나섰다. 즉 그
부사장의 사모님이 서울의 어느 삼류 사립
여자대학교에서 서양요리를 전공하는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그 사모님이 이산가족의 가장의 고충을
듣고는 곧장 그 대학의 기획실장에게 김 교수를
천거하겠다고 했으며, 기획실장은 인사담당
부총장에게, 인사담당 부총장은 총장과 재단
이사장에게 조교수 한 분을 새로 채용해야 한다는
당면 숙제를 빨리 처리해버리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일이 잘만 풀리면 만사형통일 것 같았다. 따지고보면
김 교수의 모교인 그뜨르르한 명문 사립 여자대학교에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고, 김 교수가 명절마다
그녀의 학창시절 은사를 자발없이 찾아뵙는 짓거리도
'속이 터져서'못 할 노릇이며, 외국의 정규
발레학교에서 공부하고 온 김교수의 후배들이
호시탐탐 모교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데다가 지방대학
교수가 무용발표회를 해봐야 그 성과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 신문에 나오는 단신기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체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전 군은 지난해 겨울방학중에 마누라쟁이 김 교수를
데리고 강남의 어느 그럴듯한 왜식집으로 나갔다.
정장 차림에 자가용을 손수 몰고 갔고, 약속장소
'쇼우궁'에는 이미 이층 방 하나가 예약되어 있었고,
부사장 사모님과 기획실장이 정시보다 다소 늦게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쇼우궁'의 두툼한 갑옷
속으로 발을 디밀어놓았을 때, 그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딸자식을 데리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얼마쯤 우쭐거렸다. 까만 나비넥타이 차림의 왜식집
일꾼이 안내해 준 방 속으로 두 내외는 당당하게
들어갔다. 이른바 '다다미'라는 돗자리 방에다, 하얀
종이를 뒤집어쓰고 있는 교자상이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교자상 앞에는 다리는 없으나 등받이가 있는
앉으뱅이 빨간 의자가 두 개씩 마주보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교자상 한가운데는 운두가 거의
없다시피 한 널찍한 수반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갖가지 예쁜 꽃들이 촘촘한
송곳방석에 꽂혀 있었고, 그중에는 말라 비틀어진
덩굴줄기 같은 것이 몇 가닥 또아리를 틀며 천장
쪽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전 군이 허리를 못 펴고 있는 나비넥타이에게
의식적으로 약간 거드름을 피워보이며 말했다.
"이 방 찾는 손님이 두 분 올 거야. 중년신사에
여자 한 분이야. 잘 안내해. 이 집에 국산양주 있지?"
나비넥타이가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웃음을
보일듯말듯 입가에 묻히고 나서 대답했다.
"네, 있다마다요. 손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다
있습니다. 시바스리걸부터요."
"됐어. 누가 먹다가 죽은 그런 술은 필요 없고. 응,
알았어."
김 교수는 어린애처럼 조금 상기된 눈치였다. 곱게
화장한 탓도 있을 테지만 얼굴색이 희미한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래서 건강하고 활동적인 여류명사다워
보였다.
김 교수가 대번에 착 가라앉은 방 분위기를
털어내버리듯이 탄성을 질렀다.
"아, 꽃향기 좋네. 누가 정성스럽게도 꽃꽂이를
해놨네!"
그리고 김 교수는 한국사람이 장삿속으로 그렇게
치장해 두었을 것인데도 "역시 일본사람을 못 따라가.
손님들 구미 맞추는 데는"이라고 덧붙였다.
그 탄성에 한국사람 손님인 전 군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꽃이야?"
"이게 무슨 꽃인가? 모르겠네. 프리지언가?
꽃향기가 유달리 좋지요? 꽃향기에 취하겠어."
담배를 하루에 한 갑 반씩이나 피워대는 전 군이
꽃향기를 맡아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담배를 꼬나물며 "꽃향기에 취한다?"라고 혼자소리를
지껄이며, 잠시 김 교수의 발그레한 얼굴을 아무런
느낌도 없이 쳐다보았다. 김 교수는 머리도 잔뜩
부풀려서 얼굴이 꽤나 화사하게 보였고, 그 윤기
흐르는 용모에는 그런대로 수수한 매력이 넘쳐흘렀고,
매일같이 후학들을 가르치느라고 마룻바닥을 굴릴
터이므로 그녀의 탄력 있는 몸매는 아직도 '향기 없는
꽃' 정도의 신선미는 간직하고 있었다.
전 군은 얼핏 아내의 알몸을 어루만져본 지가 꽤
오래 됐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
주책스러운 잡생각을 빨리 지워 버리려는 듯이 양복
저고리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가서 가계수표장이 들어
있는가를 확인했고, 지갑 속에는 두 개의 빳빳한
뿔딱지 신용카드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윽고 미닫이 창호지 문짝이 뻘쯤하게 열리면서 방
앞에 사람이 당도했음을 내색했고, 뒤이어 "아이구
늦었네요. 차가 남산부터 꽁꽁 막혀서 말이지요.
어쩌나 어쩌나 하고 마음은 바빠서 동동걸음을
치는데... 전 차장님, 실례가 너무 많습니다. 아이구,
우리 김 선생님도 올라오셨네, 언제 올라오셨지요?
신입생들 입학사정은 끝났지요?" 어쩌구 해대는
중년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방 속에 질펀하게
깔렸고, 빤질거리는 이마가 훤하게 떠오르는
중년사내가 넉살좋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방금 일어선 전 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남자끼리 일어선 채로 손을 잡았고, 명함들을
서로 교환했고, 여자는 여자들끼리 두 손을 맞잡았고,
한쪽 팔에 매달려 있는 핸드백을 한동안 흔들어댔다.
다들 코트를 벗었고, "이제 부터 본격적으로 날씨가
추워지나 보죠?"라고 부사장 사모님이 종알 거렸고,
남자들은 양복 저고리가 거추장스러운 듯이 몸에서
떼어냈고, 그것들을 나비넥타이가 차례로 받아서
한쪽구석에 세워져 있는 나무 옷걸이에 차곡차곡
걸었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마주보고 펑퍼짐하게 앉았다.
전 군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돈 놓고 돈 먹기 판에
뛰어들었다'는 각오를 새롭게 했고, 생선회 따위의
정갈스러운 음식이 한상 가득히 널브러져 있는 좌중을
이끌어가야 했으므로 아무런 화제나 주워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대학교 기획실장이면서도 중년사내는
대학생들의 데모, 나아가서 데모의 근절책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뚜렷하게 서 있는 듯했고, 서양요리
전문가인 부사장 사모님은 즉각 "같은 말로 흔히
쓰는데 엄격하게 따지면 달라요. 모양과 색깔이
다르듯이요. 홍당무라고, 붉은 보랏빛이 도는
앙증맞은 무우가 있지요? 총각 김치 담그는
알타리무우보다 사춤 작은 거요. 속은 하얗고, 바로
그거예요. 당근은 바로 이거고요. 속이나 겉이나 다
잘 익은 감빛 도는 주황색에다 섬유질 조직이
치밀하고 약간 향긋한 냄새에 석유기름 냄새 같은 게
조금 배어 있지요" 하고 자상하게 설명했고, 김
교수는 "요즘 우리 시장에서도 홍당무는
팔잖아요?"라고 맞장구를 쳤고, 부사장 사모님은
"그럼요. 우리 김 선생님이 바쁘신 중에도 언제 그걸
자세히도 보셨네"라고 낯 간지러운 면찬을 했고,
기획실장은 "아. 우리 시장에도 그 홍당무를 팔긴
팔군요. 국산품을요?"라고 짐짓 호들갑인지
우스개인지 모를 말을 주워섬기며 전 군 내외의
눈치를 살폈다.
부사장 사모님이 드디어 김 교수의 학력과 경력,
나아가서 현재 지방의 어느 여자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음을 기획실장에게 자세하게 일러주었고,
김 교수는 입을 앙다물고 자신의 객관적인 사회경력과
학력, 지위가 꾸준히 나열되고 있는 것을
귀담아들었고, 전 군과 기획실장은 그런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양주잔을 주거니받거니 했다. 그리고
기획실장은 오늘날 사학재단들이 대개 다 형편이
"말이 아니고 엉망이라고" 했고, 전 군은 "아, 정말
그래요? 실상은 그 지경이었군요. 우리는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라는 투의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사립대학교의 운영실태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묻기도 했고, 기획실장은 "어려운 사정을
문교부에 매학기마다 건의는 하지요. 시간강사로야
충실한 강의를 기대할 수 없지요. 학생들 보기가
민망해요. 곧 무슨 대책이 나와야 할 겁니다"라는
당연한 말을 넙죽넙죽 주워섬겼다. 대화는 대체로
헛돌고 있다는 기분이 전 군에게는 지배적이었다.
그날 밤은 "그 작자가 탁 까놓고 말을 할 듯 말
듯하다가 안 하는 통에 양주를 반 병이나 남겨놓은
채로" 네 사람은 짝을 맞춰 헤어져야 했다.
싱거워빠졌기로 따진다면 네 사람 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음식을 먹어치우는 먹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솜씨, 예의를 갖추는 거동까지도 서로 지나치게
세련된 격식만 찾는 통에 그 향응은 결국 변죽만
울리고 만 셈이었다.
그 실속 없는 향응자리가 있고 난 직후의 어느 날
낮에 전 군은 무슨 대단한 경험이라고 했다는 듯이
그걸 들려주고 싶어 좀이 쑤셔서 애매한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공밥인 터이라 내가 그 초대를
거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내가 짐짓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석 장? 그러니까 삼백 말이야?"
전 군은 엉뚱하게도 내게 화를 벌컥 내며 대들었다.
"삼백? 너도 세상물정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느구나. 헛살았다 헛살았어. 누구처럼 허우대만
멀쩡해 가지고서는. 삼천이야 삼천. 삼백 정도라면
떼먹든지 말든지 내가 말 떨어지기 전에 인편에다
수표를 끊어줘버렸지. 그까짓 액수가 요즘 세상에
돈이야."
세상물정에 워낙 어둡고 돈 단위에 대해서는
좀생원인 내가 일부러 깜짝 놀란 체하며 전 군의
비윗살을 맞췄다. 그의 검붉은 혈색은 보기에 좋았고,
정력과 흥분과 여유와 다혈질과 패기가 두루뭉수리로
잘 녹아 있었다.
"아니, 그러면 시방 자네가 말한 삼천이라는 액수가
진짜 요새 돈으로 삼천만 원이라는 거야? 조교수 자리
하나 얻는 데 말이지. 아니지, 그냥 생다지로 얻자는
것도 아니지. 결국 자격 있는 사람이 지방에서 서울로
자리 옮기는 거 아냐. 그것도 빈자리 메우는 것도
아니고, 법에 정해져 있는 자리를 이때껏 불법으로
비워두고 있다가 규정대로 채워넣는데 그 엄청난 돈을
재단 운영비로 내놓아라 이거야?"
그의 울화를 내가 얼마쯤 희석시켜주어서인지 전
군은 곧장 얼굴색을 누그러뜨리며 맥풀린 소리를 토해
놓았다.
"음성 낮춰. 니가 왜 흥분하고 난리야. 글쎄,
그렇대. 삼천만 원을 내놓으래. 학교에 기부금으로.
완전히 돈장사야, 학교가. 후세 교육 시킨다는 것들이
그 지경이니 나라가 이 지경으로 개판이지."
이번에는 내가 알은체를 했다.
"원래 그런 건데 뭐, 자리장사지, 사람장사고,
학교가 말이야. 원래부터 매관매직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따라갈 머리가 없지. 그런데 그것도 무슨
오입값이나 화대처럼 공정가격이 있는 모양인가?"
전 군이 또 벌컥 화를 냈다. 그의 이빨에는 납작한
소갈비짝 한 개가 물려 있었고, 그것을 개처럼
물어뜯느라고 언제나 말이 없이 덩실하게 올라앉아
있는 그의 코까지 할말은 하겠다는 듯이 움찔거렸다.
"몰라. 그런 공정가격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박사학위도 없고, 외국 가서 춤공부를 안
했다는 게 하자라는 거야. 원 니미랄 거. 삼천이라면
잘 봐준 거래. 더러는 오천도 한대요. 그뿐인가.
인편이 그러는데 인사 발령받고 난 다음에는 재단
이사장에게 하나에 몇십만 원, 몇백만 원 하는 화분을
사들고 인사를 꼭 가야 한대. 인편이 그렇게 하래."
"그 인편이 도대체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말 전하는 우리 부사장이고, 이쪽
의사를 옮기는 그쪽의 그렇고 그런 작자지."
"알 만하군. 이런 일이야 원래 그런 떨거지가
혹처럼 매달려 있어야 일이 일답게 성사되지. 화분
하나에 정말 몇십만 원짜리가 있나?"
"야, 야, 숨통 막힌다. 말 마라. 귀한 제주도
한란(寒蘭) 한 포기에는 몇백만 원 하는 것도 있어.
소나무 분재 하나에도 기백 하는 게 수두룩하고."
"그럼, 포기했나? 이산가족이 함께 모여 살 계획
말이야."
"내가 그짓을 어떻게 해. 삼천이 무슨 뒷집 똥개
이름이야? 그 돈을 단자회사에 넣어두고 이자로
잘먹고 잘살겠다. 집 팔아서 마누라 직장 옮겨주라고?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야.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지. 나야 뭐 불편한 줄도 모르겠어. 떨어져 사는
게 오히려 홀가분하게 사는 셈이지 뭐. '메주
덩어리'가 일본사람처럼 워낙 곰살궂게 나한텐 잘
해주는데 나야 만판이지."
"'메주 덩어리'?"
"일하는 아주머니 말이야. '메주 덩어리'가 외모야
볼품없고 당장에야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나중에는
집구석에 꼭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또 늘 마누라
대신에 구들장 차지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여자로서 다소곳한 면이 없어서 나는 김 교수를 좀
싫어하는 편이다. 시샘이 불철주야 희번덕거리는
그녀의 눈매도 그렇고, 여자들도 능력껏 사회활동을
하여 자기발견과 자기성취를 사는 보람으로 느껴야
하며, 기어코 이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 한자리를 해야
한다는 그 집요한 신분절상(身分切上)에 대한 욕구를
당당하게 과시해 대는 데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덧붙인다면 그녀 자신의 모든 능력, 경제력, 집
안팎의 온갖 배경 따위를 무시로 끌어모아 자기자신과
가족들이 이 사회의 대다수 무지렁이들과는 현격하게
격이 달라지도록 만들어 내는 그 맹렬성이 나는
무조건 싫은 것이다. 사람이란 때때로 멍청할 필요도
있으며, 모르는 분야도 당연히 많아야 하고, 배고픔도
알아야 하듯이 울분도 집어삼킬 줄 알아야 하고, 돈이
궁해서 맥을 놓고 있을 때도 간혹 있어야 하고,
요컨대 한때 실패하는 삶도 살아볼 의무 같은 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 교수에게는 그런 경우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질적으로 풍족했고, 때맞추어 기도로 하느님에게 복을
빌었고, 이 사회의 모든 제도, 관행, 이데올로기를
제멋대로 이해하고 이용했고, 그래서 삶 자체에
따르게 마련인 여러 불평, 불만, 불편 따위를
일찌감치 그녀 자신과 그녀의 가족들로부터 떼어놓을
줄 알았다. 대단히 현명한 여자였고, 타고난 제복을
누릴 줄 알 뿐만 아니라 그 복을 더 늘이고 펼쳐갈
줄도 아는 여편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군은 제
여편네에게 불평, 불만이 많고, 특히나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모양이었다.
우선 그녀는 다방면에 걸쳐 아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전 군이 회사의 부사장과는 비교적
가까우나 직속상관인 영업담당 상무이사와
인사부장과는 '성격상' 알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다소 소원한 인간관계를 풀라고 종용하며
'점심도 자주 사고, 술자리도 가끔씩 만들어보라고'
그녀는 전 군을 배후조종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자식들 건사에는 극성스러운 바가 있었다. 전 군이
못마땅해 하는 눈치를 하얗게 무시해 버리고 그녀는
'만능인을 만들려는지' 두애에게 과외로 웅변, 주산,
수영, 피아노, 바이올린, 스케이트 따위를 배우게
했다. 이산가족 신세를 면하게 된다면, 그녀는
애들에게 '서울말 학원' 같은 데 보내지 못해
안타까워할 위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일 년 내내
감기 같은 것도 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고,
자신의 용모와 몸매에 언제나 자신만만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남편이 옛날과 다름없이 자신을
귀엽게 지켜봐준다고 생각했으며, 어쩔 수 없이
자기자신에게 애정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헛똑똑이의 부황이고 억지스러운,
시대착오적인 형세판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기와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이런 답답한 여자의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어떤 집념이나 정열, 곧
발가벗은 행복만을 추구하는 만성적, 자기과부하적
욕망은 보기에 딱할 지경으로 병적임은
말하나마나이다. 전 군처럼 세속적이고, 상식적이며,
눈치 빠르고, 분별력도 있고, 몸과 마음이 두루
건전한 위인이 제 마누라의 그런 병적인 욕심,
아전인수 격인 극성, 허술한 구석 투성이인
여유만만함을 모를 리가 없었고, 그것을 적당히
눈감아주고 또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중매결혼을 한 만큼 첫애를 낳기 직전까지는 시중의
여느 젊은 부부들처럼 흔해 빠진 사랑을 만끽한 바가
있었지만, 이제 결혼생활 자체가 사랑을 좀더
승화시키지도 않고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오로지 판에 박힌 듯한 생활만이
그들 사이에 묵직한 바위 덩어리처럼 가로놓여 있어서
가정생활에 사랑이란 게 도대체 필요한 물건이기나
한지도 모르고 그들은 꾸역꾸역, 그리고 늠름하게
살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전 군 내외에게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없는 사랑도 있는 체하며
살아가는' 각별한 눈치가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돈에 찌든 가정생활은 부부 사이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무효시키든지 더 애닯게 만들 터인데, 그들에게는
돈이라는 윤활유가 있었으므로 사랑은 가식으로
얼마든지 만들어낼 능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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