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10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무바라크, 퇴진 요구 거부…시위대 ‘분노의 눈물’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10일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면서 헌법개정을 지시했다. 하지만 무바라크 대통령의 이러한 발표는 그가 대통령직을 유지하면서 개혁 과정을 관장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위자들의 즉각 퇴진 요구에 크게 미흡한 것이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 발표를 기대했던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자들은 그의 연설내용에 놀란 표정을 짓고 분노감에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일부 시위자들은 눈물을 보이거나 경멸의 뜻으로 구두를 머리 위로 들고 흔들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끝내자 시위자들은 "물러가라!" 계속 외쳐댔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15분의 연설 말미에 "나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부통령에게 이양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 헌법 조항은 대통령이 "잠정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으나 사임할 의사가 없을 경우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한다고 되어 있다. 무바라크는 시위자들의 요구가 정당하고 타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시위자들의 개혁요구에 부응해 헌법 6개 조항을 개정할 것을 제안하고 긴급조치법을 해제하겠다고 말했지만, "치안이 확보되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는 술레이만 부통령이 앞서 제시한 약속으로 시위자들이 거부한 내용이다. 【카이로=AP/뉴시스】우동성 기자 /한겨레 2011-02-11 오전 09:14:53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462916.html
[오늘의 역사] 08.02.10 숭례문, 방화로 전소 2008년 2월 10일 밤 11시 30분쯤,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 4시간 만에 숭례문 2층 누각이 불에 타 완전 붕괴했다. 소방 당국은 화재 발생 직후 진압에 나서 화재 발생 2시간쯤 뒤인 오후 10시 30분 화재를 완전 진압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그 시각 2층 현판의 5m 안쪽 지점에서 다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해 숭례문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이며 잿더미로 변했다. 국보 1호 문화재라는 이유로 소방 당국이 적극적으로 화재 진압을 시도하지 않아 화재가 확산되었다. 또한 문화재 내부에 소방 시설 설치 규정이 마련되어있지 않아, 숭례문 내부에는 화재에 대비한 스프링클러나 화재경보장치 등 화재 초기 진압 설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한편 숭례문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혐의로 구속 기소된 채모(당시 70세) 노인은 2006년 창경궁에 불을 낸 후 집행유예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채모 노인은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다. /문화일보 11.02.10
2008 -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래미상 5관왕 ‘사고뭉치’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래미상 5관왕 영국 출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에이미 와인하우스(25·사진)가 제50회 그래미상을 석권했다. 11일 오후(한국 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2008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신인’ ‘여자 팝 보컬’ ‘팝 보컬 앨범’ 등 5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 재즈와 소울, 아르앤비 가수인 그는 알코올과 약물중독 등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영국 타블로이드신문의 단골 손님이 된지 오래다. 이런 이유로 애초 미국 비자를 거절당하기도 했다. 뒤늦게 비자를 받았지만 결국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영국 시간으로 새벽 4시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위성 생중계를 통해 공연을 펼쳤다. 재활치료원에서 잠시 나와서 한 공연이었다. 주요 부문의 하나인 ‘올해의 앨범’상은 재즈 아티스트 허비 행콕의 ‘리버:더 조니 레터스’가 차지했다.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팝스타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남자 팝 보컬’ ‘댄스 레코딩’ 등 2개 부문상을, 젊은 밴드 마룬5가 ‘팝 그룹’ 상을 받았다. 왕년의 팝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솔로 록 보컬’ 등 3개 부문 상을 받아 저력을 과시했다. 8개부문에 후보로 올라 최다 노미네이트로 관심을 모았던 힙합스타 카니예 웨스트는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한겨레 2008.02.11 19:21
2006 - 제20회 동계올림픽 개막 (2.10~2.26, 이탈리아 토리노) 제20회 동계올림픽경기대회 [The 20th Olympic Winter Games, 第二十回─冬季─競技大會] 요약 2006년 2월 10일부터 26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올림픽대회이다. 총 84개 세부종목에 세계 80개국에서 2,508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종합 1위는 독일이 차지하였고, 한국은 스웨덴에 이어 7위를 차지하였다. 본문 대회 슬로건은 '열정이 살아 숨쉬는 이곳(passion lives here)'이다. 마스코트는 부드럽고 다정한 눈뭉치를 상징하는 네베(Neve)와 발랄한 각빙을 상징하는 글리즈(Gliz)이며, 각각 동계 스포츠의 두 가지 요소인 눈과 얼음을 나타낸다.
2005 -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Miller, Arthur) 사망 밀러 [Miller, Arthur, 1915.10.17~2005.2.10] 미국의 극작가. 1915년 10월 17일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의류 제조업자이며 어머니는 전직 교사인 유대인계 중류 가정의 3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 대불황으로 집이 몰락하여, 고등학교를 나온 후 접시닦기·사환·운전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고학으로 겨우 미시간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 쓴 몇 편의 희곡으로 상을 받은 것이 그에게 자신을 주었다. 졸업 후 뉴욕시에 가서 생활을 위하여 라디오 드라마를 쓰고, 그 여가에 희곡 창작을 계속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의 군수산업의 경영자와 아들의 대립을 다룬, 전쟁 비판적인 심리극 《모두가 나의 아들 All My Sons》(1947)로써 비평가 및 일반 관객의 절찬을 받았다. 이어 《세일즈맨의 죽음 Death of a Salesman》(1949)으로 퓰리처상 및 비평가 단체상을 받고, 브로드웨이에서 2년간의 장기공연에 성공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샐러리맨의 꿈과 현실과의 괴리에 부자(父子)간의 사랑을 곁들여, 회상형식의 교묘한 무대처리로 현대의 불안을 강렬하게 그려낸 걸작이다. 밀러는 이 작품으로 전후 미국 연극계의 제1인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도가니(가혹한 시련) The Crucible》(1953)는 리얼리즘의 수법을 버리고,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의 마녀재판(魔女裁判)을 주제로, 그 당시 전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 선풍을 풍유(諷喩)한 희곡이다. 그후 여배우 M.먼로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혼했다(1960). 그밖에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A View from the Bridge》(1955, 퓰리처상 수상), 먼로를 모델로 한 《전락(轉落) 후에 After the Fall》(1964) 등의 희곡과 소설·라디오 드라마·평론이 있다. 그는 T.윌리엄스와 함께 미국 연극의 발전과 실험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의 희곡은 대부분 미국인의 공통된 비극적 생활면을 주제로 한 점에서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네이버
손인실 [孫寅實, 1917~1999.2.10] 대한적십자사 부회장과 대한 YWCA연합회 회장을 지낸 손인실 여사가 1999년 2월 10일 지병으로 미국 뉴욕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였다. 손여사는 평생을 여성 운동과 시민 운동에 헌신한 여성계 원로다. 1935년 이화여전에 입학하면서 인연을 맺은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에 평생 봉사해온 그는 이사와 실행위원, 연합회 회장, 명예 연합위원까지 지냈다. 학생 시절 스케이트 선수로도 이름날린 그는 훤칠한 인물과 활달한 성격에,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합리적 일처리로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여성 운동 일선에서 존경받아왔다. 1917년 기독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그곳서 자랐다. 정동제일교회 담임 손정도 목사가 아버지. 대한 YWCA 활동 외에도 재건 국민운동본부 중앙 부녀국장(63∼64), 범여성 가족법 개정촉진위원회 부회장(73∼78) 소비자보호단체 협의회 회장(80∼82)을 지내며 시민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조선
1996 - 슈퍼컴퓨터와 인간의 체스 대결 [오늘의 경제소사/ 2월 10일] <1617> 컴퓨터 체스왕 1996년 2월10일, 미국 필라델피아 컨벤션센터. 러시아 국적의 가리 카스파로프(32세)와 IBM의 슈퍼컴퓨터 '딥 블루(Deep Blue)'가 맞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딥 블루의 압승. 과연 컴퓨터는 인간의 판단력을 넘을 수 있을까. 아직은 무리라는 게 정설이다. 딥 블루의 승리는 개발자들의 승리일 뿐이며 딥 블루의 종합적 사고력은 동물의 절반 수준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왠지 오싹하다. 2050년이면 인간의 지능을 지닌 컴퓨터가 등장한다니.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1002/e2010020918021897490.htm
1992 - 소설 `뿌리`와 `말콤X`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Haley, Alex) 사망 헤일리 [Haley, Alex Palmer, 1921?.8.11~1992.2.10] 소설 `뿌리`와 `말콤X`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70)가 1992년 2월 10일 급환으로 미국 시애틀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1982 - 65세 이상 노인에 대한 경로우대제 실시 보건복지부가 사회복지시책의 일환으로 노인의 복지를 증진하고자 실시한 고령자에 대한 우대제도. 종래에는 70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1982년부터 65세로 낮추어 실시하고 있다. 노인복지법에 의하면 국가나 자치단체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65세 이상의 노인에게 국가나 자치단체의 운송시설·기타 공공시설을 무료 또는 할인된 요금으로 이용하게 할 수 있으며, 노인의 일상생활에 관련되는 사업을 경영하는 자에게는 65세 이상의 노인에 대한 할인우대를 하도록 권유할 수 있고, 그와 같은 할인우대를 행하는 사업자에게는 적절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할인우대를 적용한 사업의 종류와 할인율은 보건사회부장관이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 후 공고하는데, 현재 시행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공립공원·고궁·능원·국공립박물관·전철·지하철 등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철도운임(통일호까지)은 50% 할인된다. 경로우대를 받고자 하는 65세 이상의 노인은 관할 읍·면·동장에게 경로우대증 발급을 신청하면 된다. /네이버
1977년 2월10일,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이전·건설하는 문제를 구상하고 있다”고 발표하자 서울 시민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착잡함이 교차했다. 교통난 해소를 반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사시 정부가 서울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적의 지상포화 사정거리 안에 수도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 전국토의 0.63% 면적에 남한 인구의 20%(725만명)가 집중된 인구과밀이 행정수도 이전의 이유였다. 서울에서 고속도로·전철로 1시간~1시간 반에 닿을 수 있는 지점이 후보지 요건이었다. 후보지로 거명된 지역에서 투기 조짐이 일고 언론도 연일 관련기사를 쏟아내자 박 대통령은 3월7일 “10년 혹은 그 이상 걸릴 것” “서두르지 않겠다”며 분위기를 식혔다. 한편으로는 차분하게 수도이전을 준비해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마련, 국회에 제출(6월20일)했고 후보지도 내정했다.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충남 연기군 장기면이 후보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경 10km 부지에 인구 50만명 규모 도시가 당시의 계획. 설계도면·조감도·5층짜리 종합청사 모형까지 완성된 상태였으나 박 대통령 서거로 유야무야됐다. 1981년 새 정부가 임시행정수도 건설계획을 백지화한다고 발표, 수도 이전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조선
역사속 오늘[1977년 2월 10일] 스페인국왕 교황 방문 1977년 오늘,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 부부가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다. /YTN 2011-02-10 목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090253010591&s_mcd=0422&s_hcd=
KIST, 즉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1966년 오늘 발족한다. /YTN2010-02-10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연혁]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발족(1966. 2. 4)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재단법인 설립(1966. 2. 10)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와 기술교류협정 체결(1966. 6. 10)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1966. 10. 6)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1969. 10. 23)
- 소양댐 사진, 관광인 (춘천 허선구 님 자료제공) 1965년 오늘! /YTN 2011-02-10 목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090251116246&s_mcd=0422&s_hcd=
- Rudolf Abel (1903~1971) [책갈피 속의 오늘]1962년 미-소 첫 스파이 교환 1962년 2월 10일 독일 베를린 근교의 글리니케 다리.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잇는 이 다리의 동쪽과 서쪽 끝에 각각 한 사람이 섰다. 이들은 천천히 다리 위를 걷기 시작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지나갔다. U-2기는 소련의 방공망이 미치지 못하는 고고도(高高度)를 아음속(亞音速)으로 순항하며 소련 깊숙한 곳까지 촬영할 수 있도록 개발된 정찰기였다. 공기가 희박한 고고도에서도 작동하는 특수 엔진과 가느다란 동체에 25m의 긴 날개를 가진 이 정찰기는 ‘엔진 달린 글라이더’에 가까웠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90210/8694185/1
역사속 오늘[1961년 2월 10일] 가나 인공항구 테마(Tema)항 개항 1961년 오늘, 아프리카 중서부 가나의 ‘테마(Tema)항’ 개항식이 열렸다. /YTN 2011-02-10 목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090252344892&s_mcd=0422&s_hcd=
1951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어제의 오늘]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ㆍ“공비 소탕” 어린이 등 719명 살해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1951년 2월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대량학살된 사건이다. 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을 포함해 민간인 719명이 살해됐다. 박산 골짜기에 방치된 죽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도 3년이나 걸렸다. 이승만 정권의 은폐공작 탓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어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구분해 화장한 후 박산에 안장하고 60년에야 묘역에 위령비를 세웠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2-09 21:11: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2092111185&code=100100&s_code=ap005
1948 - 김구, '3천만 동포에 읍소한다'는 남한 단정 수립 반대 성명 발표 (발췌) 1945년12월28일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의가 있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애국민들이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46년2월에 비상국민회의가 탄생했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는 『국민회의』로 개편 되었다. 뉴스타운 2006-08-02 오후 4:27:25 한반도 시대별 反美의 역사 /뉴스타운 2006-08-02 오후 4:27:25 http://www.newstown.co.kr/newsbuilder/service/article/mess_main.asp?P_Index=36083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백범 김구 선생의 외침 (1948.2.10)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이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선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궃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3천만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하라. ……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나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죽음의 굴)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여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와 같은 원칙은 우리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중3 국사-교사참고자료 http://www.classroom.re.kr/uploadfile/content/content04/second04/data05/1_6/sub03/07/add1.htm
비오 11세 [Pius XI, 1857.5.31~1939.2.10] 로마 교황(1922∼39). 본명은 아킬레 라티(Achille Ratti). 1879년 사제가 된 뒤 교황청 도서관 관장, 폴란드주재 교황대사를 역임하고, 추기경 및 밀라노대주교를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가톨릭인민당과 다른 반파시스트 정당들과의 협력을 금하여 위기에 봉착한 파시즘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인민당 대신에 <가톨릭행동>이라는 대중단체의 재건·강화에 힘쓰고, 해외포교, 특히 극동에서의 활동에 진력하였다. 무솔리니정부와 장기간에 걸친 교섭 끝에, 1929년 이탈리아국가와 화해(라테란협정)를 실현하고, 1933년에는 A. 히틀러의 독일과도 정교화약(政敎和約)을 맺었다. 1936년까지 파시즘체제에 호의적이었으나, 그 뒤 B. 무솔리니가 나치스로부터 도입한 인종이론에는 비판적이었다. 또 교황청과 타협하지 않은 악시옹 프랑세즈와 나치즘을 비난하였고, 특히 공산주의에는 적대적이었다. 교황청에 과학아카데미를 창설하였다. /야후 백과
1938 - 카자흐스탄 출신의 소련 정치가 리스쿨로프(Ryskulov, Turar) 사망 리스쿨로프 [Ryskulov, Turar Ryskulovich, 1894.12.26~1938.2.10] Turar Ryskulov (1894—1938) — soviet politician, the chairman of the Central Electoral Committee of Turkestan ASSR. Turar Ryskulov was born on 26 December 1894 in East-Talgar volost' of Semirechensk Province in natural boundary Besagash (now — Talgar district of Almaty Province). During the Soviet Revolution he founded Turkish Communist Party. He defended that all the Turkic nations should organize in one state and one communist party. His policy was rejected and his party was ordered to join Russian Communist Party. He was shot in the head (execution style) in 1938 by Stalin's order accused of being a National Communist like Sultan Galiev. Today he is considered a national hero and honored with a large statue at the entrance of Kazakhstan Economic University in Almaty (Reph, 2008). http://en.wikipedia.org/wiki/Turar_Ryskulov
- 한글학회 창립 50돌 기념
조선어연구회가 1927년 오늘 연구지 ‘한글’의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았다. 편집인 신명균 명의로 발간된 한글지의 내용은 주로 한글의 보급과 선전에 주력했다. 그 이듬해인 1928년 12월까지 겨우 9호로써 휴간하고만 한글지는 기관지라기보다는 동인지에 불과했으며 또 일제의 가증스런 탄압, 그밖에 여러 가지의 어려운 조건 때문에 큰 성과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실정이었다. 내용은 한글의 수호와 보급을 위한 것으로만 채워졌었는데 이에 발표된 논문은 이중건 권덕규 최현배 이병기(가람) 신명균 정열모 이상춘 등이 집필한 24편이었다. 그 내용은 △한글 문자에 관한 것 △성음에 관한 것 4편 △사투리에 관한 것 2편 △그 밖에 2편으로 어문정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어학자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서 이같이 활동이 아닌 가위 전쟁을 하다시피 한 것이었다. /충청투데이 2010.02.10 00:1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1656
뢴트겐 [Röntgen, Wilhelm Conrad, 1845.3.27~1923.2.10]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 사망 X선을 발견한 W. C. 뢴트겐이 1923년 2월 10일 71세의 나이로 뮌헨에서 사망했다. 뢴트겐은 1869년 취리히공과대학 졸업 후 A.쿤트의 조수가 되어 1872년 그를 따라 뷔르츠부르크대학으로 옮겼다가 1874년 슈트라스부르크대학 강사, 1875년 호켄하임농과대학 수학 ·물리학 교수, 1876년 슈트라스부르크대학 초청교수, 1879년 기센대학 물리학 교수 ·물리연구소 소장을 냈으며, 1888년 뷔르츠부르크대학 물리학 교수로 돌아왔다가 1900년 뮌헨대학 교수가 됐다. 뢴트겐은 1895년 바바리아에 있는 브르소브루크대학에 있을 당시 음극선관에서 방출되는 새로운 방사선을 발견했다. 그는 이 방사선의 성질을 잘 몰랐고 X는 수학적으로 미지의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므로 그것을 X선으로 명명했다. 사람 손의 뼈를 보여주는 첫번째 X선 사진은 몇주 후 찍혀졌으며, 뢴트겐의 발견은 급속도로 의학에 이용되어서 질병을 진단하고 몸속의 물질들을 탐지했다. 1901년 그의 업적을 기리며 첫번째 노벨물리학상이 그에게 수여됐다. /조선
리스터 [Lister, Joseph, 1827.4.5~1912.2.10] 영국의 외과의사. 에식스주(州) 업턴 출생. 무균수술의 창시자이다. 1852년 런던대학을 졸업하고, 1853년 에든버러대학 외과학교수 J.사임의 조수가 되어, 염증 ·괴사 ·혈액응고에 관한 연구를 하고, 1860년 글래스고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외과적 질환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화농 문제에 대하여 파스퇴르의 발효 ·부패에 관한 세균감염설을 토대로 연구를 진행시켜 1865년 페놀에 의한 무균수술법을 고안하였다. 이듬해 이의 실제적인 응용에도 성공하여 외과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1897년 의사로서는 최초로 남작(男爵)이 되었다. /네이버
1911 - 소련의 우주항공 과학자 스티슬라프 켈디시(Keldysh, Mstislav) 출생 켈디시 [Keldysh, Mstislav Vsevolodovich, 1911.2.10~1978.6.24] Mstislav Vsevolodovich Keldysh (Russian: Мстисла́в Все́володович Ке́лдыш 10 February [O.S. 28 January] 1911, Riga - 24 June 1978, Moscow) was a Soviet scientist in the field of mathematics and mechanics, academician of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46), President of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61–1975), three times Hero of Socialist Labor (1956, 1961, 1971), fellow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1968). He was one of the key figures behind Soviet space program. Among scientific circles of USSR Keldysh was known with epithet "the Chief Theoretician" in analogy with epithet "the Chief Designer" used for Sergey Korolyov. Family
피르 [Pire, Dominique (Georges), 1910.2.10~1969.1.30] 벨기에의 목사·교육자.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피난민들의 구호사업을 전개해 1958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28년 벨기에 위이 지방에 있는 라사르트의 도미니쿠스 수도원에 들어가서 1934년 성직자가 되었다. 1932~36년에 로마의 도미니쿠스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해 라사르트 수도원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다(1937~47).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후에는 심각한 난민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1949년 난민 원조 단체를 설립해 국적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난민들에게 정신적·물질적 도움을 주는 활동을 폈으며, 유럽 전역으로 그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1950~54년에 나이 든 피난민을 위해서 벨기에에 4개의 '환영의 집'을 세웠다. 계속해서 독일·벨기에·오스트리아에 7개의 유럽인 '마을'을 건설했다(1956~62). 또한 외국인들이 피난민을 도와줄 수 있는 후원제도도 만들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에는 위이에 마하트마 간디 국제평화 센터를 설립했다(1960). 이 기관은 나중에 평화대학교로 알려졌으며 주로 젊은이들에게 평화의 원칙과 실천방안을 가르쳤다. 인종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세계 형제회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난민들을 돕는 세계 후원회도 창설했다. 1966년 피르의 평화 빌딩(Bâtir la paix)이 세워졌다. /브리태니커
1910 - 몰도바 태생의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체보타리(Cebotari, Maria) 출생 체보타리 [Cebotari, Maria, 1910.2.10~1949.6.9] Maria Cebotari (10 February 1910 – 9 June 1949) was a celebrated Moldavian soprano and actress born in Bessarabia, Russian Empire (now Republic of Moldova), who made her career in Germany & Austria.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Maria_Cebotari 또 하나의 칼라스 Maria Cebotari (마리아 체보타리) 1910년 당시 러시아-베싸라비아에 속했던 몰다비아의 치시뉴(Chisineu)라는 마을에서 평범한 노동자 가정의 12자녀중 다섯째로 태어난 마리아 체보타리(원래 이름은 Cebotaru)는 마리아 칼라스의 전임자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아티스트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4살 때 성당에서 노래부를 때부터 발견되었다. 마리아는 정말로 노래를 잘 불렀다. 마리아는 해가 지날수록 노래를 잘 불렀고 점점 예뻐졌다. 어느날, 모스크바에서 유랑극단이 마을을 찾아왔다. 마침 이 극단은 러시아어로 노래를 부를수 있는 젊은 아가씨를 급히 찾고 있었다. 그때쯤해서 마리아는 이미 뛰어난 노래솜씨로 잘 알려져 있었고 더구나 뛰어난 미모였다. 극단장은 배우인 러시아의 알렉산더 비루보프(Alexander Virubov)백작이었다. 백작은 당장에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백작은 파리로 갈 계획이었고 마리아는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결혼하였다. 얼마후 백작은 공연을 위해 마리아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어느날 당대의 음악교사인 오스카 다니엘(Oscar Daniel)이 마리아의 노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스카 다니엘은 마리아에게 석달 동안의 개인지도를 해 주었다. 드레스덴오페라의 프릿츠 부슈(Fritz Busch)가 마리아의 노래를 듣고 그 자리에서 드레스덴오페라에 3년간의 계약을 맺었다. 얼마후 거장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마리아의 노래를 듣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초청하였다. 그때 마리아는 겨우 21세였다. 어학에도 재주가 뛰어났던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루마니아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사용했으며 독일로 온 이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독일어에도 능숙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첫 오페라 데뷔는 드레스덴에서 미미(라 보엠)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시로서 현대작품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달베르, 로타르, 헤거, 주터마이스터등의 오페라 초연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것은 마리아의 재능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미지 창조는 1919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없는 부인’(Die Schweigsame Frau)에서 아민타를 맡은 것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마리아를 대단히 숭배하였다. 마리아는 1934년, 24세때에 드레스덴오페라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캄머쟁거린(Kammersänerin)에 임명되었다. 전통과 명예의 전당인 드레스덴오페라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캄머쟁거린에 임명된 경우였다. 1935년부터는 베를린오페라에 고정적으로 출연하였으며 가장 재능있는 소프라노로 인정을 받았다. 마리아의 대표적인 역할은 나비부인, 다프네, 미미, 아민타, 안토니다, 카르멘(와~), 살로메(와우~), 투란도트, 맛달레나, 올림피아-안토니아-줄리에타(호프만의 이야기), 가브리엘에(쇠크의 뒤란드성), 수잔나, 체를리나, 조피, 알마비바 백작부인, 타티아나, 비올레타, 콘스탄체, 아라벨라, 유리디체, 돈나 안나 등 끝이없다. 마리아는 수많은 역할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스스로 가장 만족해한 여할은 살로메였다. 한편, 해마다 정기적으로 출연한 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의 역할로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당시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히틀러의 치하였다. 마리아는 나치정권에서 대단한 대접을 받는 유명인사였다. 마리아는 여덟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몇편은 베냐미노 질리가 상대역이었다. 1938년 마리아는 비루보프백작과 헤어지고 10년 연상의 영화감독이었던 구스타프 디쓸(Gustav Diessl: 1899-1948)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사이에는 아들 둘이 태어났다. 1943년, 베를린에 있던 그들의 집은 폭격으로 부서졌다. 집을 잃어 갈곳이 막막했던 마리아는 다행하게도 비에나 슈타츠오퍼와 계약을 맺게 되어 비엔나로 옮겨 살게 되었다. 1947년 마리아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고트프리드 폰 아이넴(Gottfied von Einem)의 ‘단톤의 죽음’(Dantons Tod)의 초연에서 루실을 맡아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남편 구스타브 디쓸은 두어번 심장마비를 경험했으며 결국 1948년초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후 마리아는 친구들에게 그가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해왔다. 결국 마리아는 남편을 따라 바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가 겨우 39세였던 1949년 6월이었다. 마리아의 마지막 오페라 출연은 세상을 떠나기 한달전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밀뢰커(Millöcker)의 ‘거지학생’(Der Bettelstudent)이었다. 그의 두 아들은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 마리아의 친구였던 클리포드 쿠르존(Clifford Curzon)이 양자로 입양했다.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후 드레스덴에서 그가 살던 파르크슈트라쎄는 마리아-체보타리슈트라쎄로 명칭을 바꾸었고 비엔나의 되블링(Dobling) 거리는 체보타리베그(Cebotariweg)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리아 체보타리는 대단히 뛰어난 재능의 성악가였다. 체타보리는 간혹 마리아 칼라스의 전임자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두 소프라노는 많은 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진정한 아티스트로서 전적으로 예술에 전념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대단히 ‘신뢰할수 있는’ 디바였다. 리허설에 빠지는 법이 없었고 공연 약속은 모두 철석같이 지켰다. 두 사람은 무슨 작품이든지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대단히 빠른 시일안에 마스터하였다. 세계의 유명 지휘자들이 이 두 마리아를 모두 깊이 사랑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생활, 이것은 마치 영화의 스토리와 같은 것이었다. 열정, 사랑, 이혼, 전문분야에서의 위대한 성공, 그리고 개인적인 비극...모두 공통점이 있다. 베를린에서의 일이었다. 체타보리는 어느날 저녁 카르멘을 부른후 다음날 저녁에는 수잔나(피가로의 결혼)를 맡아 공연하였다. 비엔나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루 저녁에는 미미를 부르고 그 다음날 저녁에는 살로메를 불렀다. 아마도 이러한 놀라운 재능의 오페라 아티스트는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체타보리의 음악인생에 있어서 깊은 영향을 준 네 사람이 있다. 모차르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베르디, 푸치니였다. 체타보리는 이들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예술과 인생을 공연하였다.
1906 - 미국의 영화배우 론 체이니 2세(Chaney, Jr., Lon) 출생 체이니(체니) 2세 [Chaney, Jr., Lon, 1906.2.10~1973.7.12] Lon Chaney, Jr. (February 10, 1906 – July 12, 1973) was an Americancharacter actor, known mainly for his roles in monster movies and as the son of famous silent film actor, Lon Chaney. Originally credited in films as Creighton Chaney, he was first credited as "Lon Chaney, Jr." in 1935. Chaney had English, French and Irish ancestry. http://en.wikipedia.org/wiki/Lon_Chaney,_Jr.
* 론 체이니 2세의 아버지는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 불렸던 론 체이니(Lon Chaney, 1883~1930)로, 무성영화시대 소름 끼치는 성격묘사의 1인자였습니다. 출연 영화는 1925년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
1902 - 미국의 물리학자 월터 브래튼(Brattain, Walter) 출생 브래튼 [Brattain, Walter Houser, 1902.2.10~1987.10.13] 미국의 과학자. 존 바딘, 윌리엄 B. 쇼클리와 공동으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수상업적은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물질인 반도체의 특성에 대한 연구와 트랜지스터의 개발이었다. 트랜지스터는 여러 용도에서 부피가 큰 진공관을 대체했고 초소형 전자공학 부문의 선구자였다. 1929년 벨 전화연구소 물리연구원이 되었다. 그의 주요 연구분야는 고체의 표면 특성들, 특히 표면에서 물질의 원자구조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는 보통 물질 내부의 원자구조와 다르다. 워싱턴 왈라왈라의 휘트먼대학 조교수로 있었고(1967~72) 그뒤에는 명예감독에 임명되었다. 수많은 특허권을 얻었고 고체물리학 분야에서 많은 논문을 썼다. /브리태니커
1898 - 독일의 시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recht, Bertolt) 출생 브레히트 [Brecht, Bertolt, 1898.2,10~1956.8.14] [역사속의 인물]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의 시대에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詩(시) 한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자괴감과 서글픔, 허무, 냉소, 패배주의…. 온갖 회한을 몸에 휘감은 채 불면의 밤을 지샌다. 이 시를 쓴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도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그는 1898년 오늘 바이에른주에서 태어나 부르주아 계급의 탐욕과 사회 비판을 그린 희곡 '서푼짜리 오페라'를 쓰면서 유명해졌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해 좌파 지식인을 탄압하자 체코, 미국 등을 떠돈다. 1956년 동베를린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사극'(관객의 의식을 일깨우는 연극) 이론을 실천하는 작업을 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말년에 동독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풍자하는 시를 썼고 노동자 봉기를 옹호했다. 행동하지 못하고 늘 회의하는 것은 어디 그 혼자뿐일까.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2월 1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206&yy=2009
1896 - 영국의 해양생물학자, 동물학자 앨리스터 하디(Hardy, Alister) 출생 하디 [Hardy, Alister Clavering, 1896.2.10~1985.5.22(23)] 수생 유인원 이론의 역사 수생 유인원 이론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수생 유인원 이론을 처음 발표한 사람은 옥스퍼드 대학의 동물학 교수인 앨리스터 하디. 하디는 해양생태학 중 플랑크톤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플랑크톤이 해양 먹이사슬 체계의 기초가 된다는 이론을 발표했으며, 이 연구를 통해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파퓰러사이언스 2008-07-11 17:26:53 http://popsci.hankooki.com/popsci_news/view.php?news1_id= 4689&cate=35&cate_seq=&page=8&news2_id=8408
파스테르나크 [Pasternak, Boris Leonidovich, 1890.2.10~1960.5.30] 파스테르나크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를 쓴 러시아의 작가이며 시인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자 수상을 거부했다. <의사 지바고>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한 지식인의 삶의 역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혁명이나 사회주의 건설을 찬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되었으며 시민권 박탈 압력까지 받았다. 흐루시초프에게 탄원서를 내어 국외 추방만은 면했으나, 이 사건으로 그는 큰 타격을 입었다. 1987년에야 사후 복권되었고 불법으로 되어 있던 작품들이 적법성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의사 지바고>가 소련 내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브리태니커
"사람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지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삶 그 자체, 삶이라는 현상, 삶이라는 선물은 그토록 숨막히게 진지한 것이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881 - 오펜바흐 ‘호프만 이야기’초연 [책갈피 속의 오늘]1881년 오펜바흐 ‘호프만 이야기’초연 19세기 중반 무렵까지만 해도 오페라는 상류계급의 오락이었다. 그것을 좀 더 서민적인 가벼운 오락으로 만들기 위해 오페라의 대중판 격인, ‘작은 오페라’라는 뜻의 ‘오페레타(operetta)’가 탄생했다.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줄거리, 구어체 대사와 화려한 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인 자크 오펜바흐(1819∼1880).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그는 재미있는 줄거리, 재기가 넘치는 대사, 아름답고 친근한 음악으로 단번에 파리 오페레타계의 왕이 됐다. 그는 1855년에 ‘부프 파리지앵’이라는 극장을 경영하면서 100편의 오페레타를 만들어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오페레타는 ‘지옥의 오르페우스’(1858) ‘아름다운 헬렌’(1864). 그리스 신화의 골격을 이용해 프랑스 황실과 상류 부르주아 계층의 퇴폐적인 삶을 풍자한 작품들이다. 검열이라는 장치가 활개 치던 19세기 오펜바흐의 작품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기득권층이 그의 오페레타에서 위험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쾌한 음악과 교묘한 아이러니, 솜씨 좋은 패러디를 당국에서는 그저 단순한 오락으로만 보았다. 그의 인기는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최고였다. 당시 처음 등장한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도 오펜바흐의 인기에 가려 처음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오페레타 ‘천국과 지옥’은 무려 1600만 명이 관람한 1876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도 상연됐다. 이렇듯 부와 명성을 구가했던 오펜바흐는 그러나 늘 회한에 시달렸다. 아무리 유명해져도 그는 진짜 오페라를 쓸 수 없는 3류 작곡가, 싸구려 음악인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평생 공부하고 경험한 모든 것을 다 걸고 오페라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이미 그의 몸에는 죽음의 병마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유작으로 남긴 단 하나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로 오펜바흐는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의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호프만 이야기’는 1881년 2월 10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돼 그해에만 101회나 상연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의 낭만파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1776∼1822)의 몇 가지 소설에서 따온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엮은 작품이다. 젊은 시절 사랑에 실패했던 작곡가의 추억이 담긴 이 오페라에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삽입됐던 유명한 아리아 ‘뱃노래’와 기괴한 자동인형의 춤 등 환상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2007-02-10 02:59:00 http://news.donga.com/3//20070210/8405989/1
화이트 [White, William Allen, 1868.2.10~1944.1.19] 미국의 언론인. '엠포리아의 철인(哲人)'으로 알려졌다. 정치적으로는 자유공화정과 지방주의를 지지하고, 절제력과 낙관적인 삶의 태도를 지닌 그는 전형적인 미국 소도시 사상가였다. 소도시 신문에 불과하던 엠포리아의 〈가제트 Gazette〉가 그의 사설로 인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로렌스에 있는 캔자스대학교에서 수학한 화이트는 1980년 캔자스 주 엘도라도의 〈리퍼블리칸 Republican〉 신문사의 영업과장이 되었다. 1892~95년에 〈캔자스시티 스타 Kansas City Star〉의 논설가로 활동했으며, 〈엠포리아 데일리 앤드 위클리 가제트 Emporia Daily and Weekly Gazette〉를 매입했다. 그의 사설 〈캔자스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What's the Matter with Kansas?〉(1896. 8. 15)에서 화이트는 농민의 이익과 자유로운 은화 주조권을 주장하는 정치사조인 인민주의(Populism)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이 사설은 미국 공화당 대표에 의해 재인쇄되어 전지역에 널리 배포되어,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 후보가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이자 인민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대되고 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제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2년 화이트는 공화당의 주류파를 거부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이끈 진보당을 지지했다. 화이트는 '연설의 자유'를 주창하던 1922년 7월 27일자 사설인 〈염려하는 친구에게 To an Anxious Friend〉로 192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24년에는 캔자스 주 주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화이트는 몇 권의 소설과 단편 모음집, 우드로 윌슨과 캘빈 쿨리지의 전기, 자서전(1946, 사후 출판) 등을 썼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로서 〈가제트〉의 편집장과 발행인을 겸임했던 윌리엄 린지 화이트(1900~73)는 종군기자로 활약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인 〈전쟁의 소모품 They Were Expendable〉(1942)을 쓰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37 -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Pushkin, Aleksandr) 사망 푸시킨 [Pushkin, Aleksandr Sergeevich, 1799.6.6~1837.2.10] 러시아의 국민적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이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大帝)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유년시대를 백부 바실리와 그 친지인 카람진 제코프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하에서 자랐고, 1811∼1817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그 곳의 자유주의적 기풍, 나폴레옹 전쟁의 국민적 고양(國民的高揚),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사상형성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 ‘알자마스’에 참가하여, 1814년 시 《친구인 시인에게》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혁명적 사상가 차다예프와의 교류,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 ‘녹색 등잔’에의 참가 등으로, 그의 농노제 타도의 정치사상은 차차 확고한 것이 되었다. 시 《차다예프에게 K Chaadaevu》(1818) 《농촌 Derevnya》(1819)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인 것들이다. 1820년 최초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judmila》를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보수적인 의고전취미(擬古典趣味)에의 통타(痛打)가 되었다. 동년 《농촌》 등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되고,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이 시절에 데카브리스트 남부회의 구성원들과 사귀고, 그들의 사상에 공감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 Kavkazskii plennik》(1822)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iskii fontan》(1823)을 비롯하여, 낭만주의의 특질이 강한 많은 작품을 썼다. 1824년 국외 망명에 실패하고 가령(家領)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유폐되어 여기서 서사시 《집시 Tzygany》를 완성, 사실적인 시형소설(詩形小說)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23∼1830)의 집필을 계속하였고,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 백작》(1825)을 탈고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 ·예술적 성장을 가져다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하여 깊은 통찰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 괴멸 후, 그들과 친교가 있던 그는 이듬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친구를 잃었던 수도에서의 고독에도 좌절하지 않고, 1828년 역사시 《폴타바 Poltava》를 완성하였다. 1830년에는 보르지노 마을에서 소비극(小悲劇) 4편 《인색한 기사 Skupoi rytsari》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tsart i Salieri》 《돌의 손님 Kamennyi gosti》 《질병 때의 주연(酒宴) Pir vovremya chumy》, 그리고 《벨킨 이야기 Povesti Belkina》 등을 탈고하였다. 그 해에 《예프게니 오네긴》도 완성하였으며, 이것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의 달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질을 남김 없이 그렸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산문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등을 써,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마지막 서사시 《청동(靑銅)의 기사 Mednyi vsadnik》(1833)에서는 전제적 국가권력과 개인과의 대립 모순을 조명(照明)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하였다. 1837년 1월 27일 그는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이 결투는 명백히 그의 진보적 사상을 미워하는 궁정세력이 짜놓은 함정이었다고 한다. 푸슈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志向)하였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후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流派)는 모두 ‘푸슈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버
1775 -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Lamb, Charles) 출생 램 [Lamb, Charles, 1775.2.10~1834.12.27] [책갈피 속의 오늘]1775년 英수필가 찰스 램 탄생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이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피천득의 ‘수필’ 중)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다. 자기 내면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수필가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영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의 꽃을 화려하게 피운 영국 수필가 찰스 램(1775∼1834)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775년 2월 10일 런던의 빈한한 집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세에 동인도회사 회계원으로 입사해 33년을 근무하면서 시인 S T 콜리지 등과 교유했다. 21세 때인 1796년에는 정신병을 앓던 누이 메리가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살해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램은 열한 살 연상의 미친 누이를 돌보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같이 지냈다. 남매는 1806년 셰익스피어 희곡 요약판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함께 펴냈다. 이 책을 어린이용으로 번역했던 소설가 현기영은 “‘비극’은 램 자신이 집필하고 ‘희극’은 누이에게 맡겼던 것은 아마도 누이의 건강을 염려하는 램의 자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고 저간의 사정을 추측했다. 램은 1820년 ‘런던 매거진’에 ‘엘리아’라는 필명으로 ‘엘리아 수필집’을 연재하면서부터 영국 문단 최고의 수필가로 인정받게 된다. 그의 수필은 삶에 대한 섬세한 통찰과 톡 쏘는 위트로 가득하다. “내가 독신인 까닭에 결혼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즐거움을 놓치고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여러 가지 약점을 적어 두는 것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기혼자의 거동에 대한 미혼 남자의 불평’) 그는 50세에 동인도회사를 정년퇴직하게 되자 ‘비로소 자유롭게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3년 후 자기의 퇴직을 축하해 주던 여직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바빠서 글 쓸 새가 없다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글을 쓰지 못하는군요. 좋은 생각도 바쁜 가운데서 떠오른다는 것을 깨달았소. 아가씨는 부디 내 말을 가슴 깊이 새겨 언제나 바쁘고 보람 있는 나날을 꾸며 나가기 바라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동아닷컴 2006-02-10 05:47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210/8274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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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 [Montesquieu, Baron de La Brède et de, 1689.1.18~1755.2.10] 보르도 출생.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보르도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파리로 나가서 많은 학자들과 사귀었다. 1714년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評定官)을 지내다가 뒤에 원장이 되었다(1716∼1726).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 서간체(書簡體)의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재치 있는 기지(機智)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은 그를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하게 하였다. 그는 곧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어 1728년부터 유럽 각국을 여행하였고 영국에 3년간 체재하였다. 그 동안 각국의 정치 ·경제에 관해 관찰하고,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여 《로마인의 성쇠원인론(盛衰原因論)》(1734) 등을 저술하였고, 또 10여 년이 걸린 대저(大著) 《법의 정신》(1748)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곧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版)을 냈다. 법을 연구하자면 선험적인 이론으로서는 안 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믿은 그는, ‘자유의 거울’인 영국 헌법의 원리를 상세히 분석하였다. 어떤 영국인은 그에게 ‘당신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우리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 ·입법 ·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 ·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된다고 하는 그의 3권분립의 이론은, 왕정복고(王政復古),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옹호하게 되는 기본적 자유의 규정에 공헌하였다. 또 그 구체적 사회의 분석은, E.뒤르켐도 말하였듯이, 근대의 사회학에 방법과 연구의 영역(領域)을 주었다. 만년에는 시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저작에 착수하였으나, 대부분이 그의 생전에는 간행되지 않았고 《여행 노트》 《서간(書簡)》 등은 1941년에 겨우 출판되었다. /네이버
- 부석사 무량수전
- 영주 부석사 (공중전화카드)
676(신라 문무왕 16) - 부석사 창건 부석사(浮石寺)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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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