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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о『漢詩인산』 스크랩 징비록-비열한 역사와의 결별(배상열)
인산 추천 0 조회 89 15.02.22 09:0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징비록-비열한 역사와의 결별ㅣ배상열 지음ㅣ추수밭

 

 

2014년 04월 16일 전남 진도군 세월호 참사 희생자 수 사망 295명 실종 9명
2003년 02월 18일 대구 성내동 지하철 참사 희생자 수 사망 192명
1995년 06월 29일 서울 서초동 삼풍 백화점 희생자 수 사망 501명

10년씩 반복되어 온 우리 현대사의 참사, 그리고 400여 년 전인 1598년, 위기를 넘긴 조선은 30년이 채 지나기 전인 1627년, 비슷한 위기를 또 다시 맞았다


출판사 서평


가장 한심하고 가혹했던 시대를 책임졌던 류성룡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다

우리에게 위기는, 그저 위기였을 뿐일까?
우리에게 역사는, 망각으로 싸인 나이테일 뿐일까?

첫 번째 기억

1592년 4월 30일, 선조는 한양을 떠났다. 그는 애원하는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고 막아서는 류성룡을 파직시켰다. 왕에게 버림받은 것을 안 백성들은 경복궁을 불태웠다. 동파에 닿은 선조는 배를 가라앉히고 주변의 인가들을 철거시켰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전쟁을 끌어안은 이들은 이름 없는 의병들과 아들임을 부정당했던 광해군, 이순신, 그리고 류성룡이었다. 조선은 그들의 피로 300년을 더 견뎠다.

두 번째 기억
1950년 6월 28일, 이승만은 서울을 떠났다. 대전으로 피난한 그는 미리 녹음된 담화를 통해 서울 시민들을 거짓으로 달랬다. 이어서 800여 명의 시민들이 이동 중인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난리에서 살아남아 국가를 재건한 이들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그들의 땀으로 한국은 수많은 환난을 견뎠다. 다만 그때 폭사당한 이들을 위해서는 위령비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세 번째 기억
2014년 4월 16일, 선장은 가라앉는 배를 떠났다. 배 안에는 제자리를 지키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책임져야 할 인물들이 자리를 비운 가운데 배의 마지막을 지킨 이들은 젊은 교사와 어린 선원들이었다. 비극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우리들은 또 한 번 반복된 역사적 비극 앞에서 이쪽과 저쪽으로 분열했다. 다만 살아남은 이들은 세월을 견딜 뿐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2015년의 새로운 징비록

류성룡이 지금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나의 조선과는 달라야 한다”

망각에 길들여진 우리의 역사
한국의 역사는 곧 비극의 반복이었다. 위기를 겪고 나면 과거의 경험에서 끝내지 않고, 이를 반성하며 한 단계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수한 위기를 반복만 했다. 과거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그저 묻어야만 할 짐이었고, 위기는 위기일 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임진전쟁 이후 병자호란과 을사늑약을 거쳐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위기 앞에서 마치 재방송처럼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미래를 바꾸고자 시대의 책임자가 피로 쓴 교훈
일찍이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에서 피로 써내려간 책이 있다. 바로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미증유의 환난을 맞은 시대를 책임지며 위기를 역전시킨 류성룡은 같은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겪은 지옥을 망각에서 끄집어내 공개했다. 그 책에서 류성룡은 전쟁 이전 정세부터 전쟁의 진행 과정, 그리고 종전 이후 평가까지 전쟁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복기했으며, 스스로를 포함해 잘못된 부분은 철저하게 비판했다. 여전히 같은 위기를 반복하는 지금, 그의 기록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2015년의 새로운 징비록
그러나 조선시대의 《징비록》을 현대 한국의 우리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징비록》을 여기에 소환하는 의미 있는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시민 누구나 거리감을 참아내고 책 안에 담긴 교훈과 임진전쟁의 실상에 접근하기에는 여전히 장벽이 높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 책은 십여 년간 16~1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이순신을 전문으로 연구?집필했던 저자가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아, 16세기 조선의 위기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의의가 있는지 류성룡과 임진전쟁을 해체해 재구성함으로써 《징비록》에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새롭게 풀어 썼다.

입체적으로 해석한 생생한 류성룡
이처럼 이 책은 《징비록》을 중심으로 삼아 전시 행정 수반으로, 외교의 책임자로 시대를 짊어졌던 류성룡의 삶을 추적하되, 필요하다면 이순신을 비롯한 당대 인물들의 관련 기록도 아울러 교차했다. 예를 들어 같은 시간대 최후방에서 피를 말렸던 류성룡과 최전방에서 피를 흘렸던 이순신을 나란히 세워두고 그들의 교감을 더듬어 감으로써 류성룡의 삶과 그의 전쟁을 보다 입체적으로 복원하고자 했다.
이 책에 나오는 류성룡은 신음하는 백성들을 보며 눈물 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지도자이자, 전쟁의 당사자이면서도 전쟁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자존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명에게 항거하는 강단 있는 정치인이었으며, 때로는 진흙탕 싸움과 같은 정쟁에서 함께 뒹굴며 한숨 쉬는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인본주의자였다. 류성룡은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사역에 동원된 백성 누구에게도 절대로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병졸들이 휴식을 애원하면 목을 베는 시절과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류성룡은 단지 ‘이순신을 천거한 벼슬아치’가 아니라, 그 시절의 아버지였다.

임진전쟁을 둘러싼 모든 논쟁과 의문에 대한 검증 ‘그것이 알고 싶다’
나아가 류성룡으로 당시를 되살리는 시도를 통해 정설이 없었던 전쟁의 원인을 비롯해 전쟁 이전 통신사들의 보고가 엇갈렸던 이유, 신립이 탄금대에서 일본군을 맞았던 까닭부터 전쟁 이후 광해군의 실정까지, 풀리지 않은 채 파편처럼 흩어졌던 조선사 미스터리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고자 했다. 더하여 지금까지 우리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임진전쟁에 대한 주장들과 인물평가론을 하나하나 다시 짚어봤다.
예를 들어 김성일, 신립, 광해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원균과 선조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해져 박제화된 관련 인물들이 역사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왜 그들이 역사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 각각의 주인공처럼 상세하게 다루었다.

《징비록》과 류성룡에게도 예외가 없이 이루어지는 철저한 비판
이러한 ‘낯설게 바라보기’에는 이 책의 바탕이 되는 류성룡과 《징비록》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징비록》에 나오는 ‘류성룡이 신립에게 조총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대목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조선에서 조총은 임진왜란 직전 쓰시마로부터 진상 받은 즉시 군기시에 처박혔다. 그런데 아무리 영민하다고 해도 문신인 류성룡이 조총을 한 번 보고 그 위력을 간파해 최전방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에게, 그것도 임진전쟁 이전에 경고를 보냈다는 기록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또한 그동안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아온, 적의 수급을 가져오면 신분에 상관없이 관직을 주었던 류성룡의 정책에도 허점은 없었는지 검증을 시도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거북선의 운용에는 조선 수군을 백병전 상황에서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만큼 일본군은 근접전에서 매우 강했다. 그런데 정예군도 아닌 조선의 백성들이 줄줄이 수십 급씩이나 들고 왔던 일본군의 머리는, 과연 진짜였을까?

《징비록》 이후 동아시아 역사를 통으로 아우르다
이 책은 류성룡의 죽음이나 《징비록》의 간행에서 끝을 맺지 않고 광해군의 시대와 인조반정, 그리고 병자호란 직전까지 전쟁 이후 동아시아 삼국의 전개 과정에 대해 별도의 챕터를 마련해 소개했다. 그럼으로써 임진전쟁이 동아시아에 어떤 충격을 주었고 따라서 국제질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폈으며, 전쟁 이후 조선은 왜 다시 같은 위기와 비극을 반복해서 맞았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했다.

2015년, 나란히 세워보는 류성룡의 조선과 우리의 한국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우리들의 조선과는 달라야 한다’
일정한 주기로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그때마다 해결책이 많이 제시되었지만 그럼에도 비극은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극과 위기는 현대 한국인에게 습관이자 일상이 되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과거를 뒤돌아 어지러운 발자국을 확인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류성룡은 조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비열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용기 있게 끄집어냈다.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너희들의 내일은 우리들의 어제와는 달라야 한다.’
이 책에서는 미래에 말 걸기를 시도한 류성룡의 간절한 목소리를 빌려 16세기 조선과 현재를 살아가는 21세기 한국의 교차를 시도했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를 버티며 책임지는 수많은 류성룡과 이순신, 원균과 권율, 선조와 광해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누르하치, 만력제와 이여송, 김성일과 황윤길들, 바로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위기의 리더' 류성룡 통해 본 임진왜란 [한국경제] 2015.02.06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 배상열 지음 / 추수밭 / 432쪽 / 1만6000원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된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영웅은 이순신이다. 이순신이 해상 전투에서 왜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면, 서애 류성룡은 군사와 외교 행정 등에서 두루 활약하며 나라를 구했다. 혼란에 빠진 조정을 수습하고 전세를 뒤집기 위해 노력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징비록'을 썼다. 다시는 이와 같은 참혹한 피해를 겪지 않기 위해 당시 일어난 일들을 냉정하게 회고했다.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전쟁의 전후 사정을 다시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역사저술가인 저자는 7년 전쟁의 결정적 장면을 포착해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저자는 "류성룡은 단순히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아니라 백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애쓴 인본주의자였다"고 말한다. 류성룡은 겉벼 2000석을 명군에 바치려 했으나 콩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1000석을 덜어 굶고 있는 백성에게 나눠주고, 사역에 동원되지 않은 백성은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 해도 임의로 전쟁터에 끌고 나가지 않았다.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던 그는 전쟁 막바지 명군과 왜가 강화를 맺으려 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황제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결기를 보였다.

저자는 류성룡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정책과 '징비록' 내용에 대해선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징비록엔 류성룡이 조총의 위력을 파악해 신립에게 경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전쟁 전 쓰시마에서 진상한 조총은 바로 군기시(軍器寺)에 처박혔다"며 문신이 무신에게 무기의 위력을 경고했다는 기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적의 머리를 갖고 오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관직을 줬던 류성룡의 정책에 허점은 없었는지도 검증한다. 왜군은 근접전에 상당한 강점을 보였는데 정예군도 아닌 조선 일반 백성들이 줄줄이 들고 온 머리는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저자는 징비록 이후 광해군과 인조반정, 병자호란 직전까지 동아시아 정세의 전개 과정을 소개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란 두 번의 엄청난 전쟁을 치른 조선이 왜 다시 위기를 맞았는지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역사에서 무얼 배울까” 임진왜란을 통해 묻는다 [동아일보 2015.02.07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배상열 지음/432쪽·1만6000원·추수밭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 ‘징비록(懲毖錄)’의 서두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저술한다.”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은 ‘징비록’의 교훈을 토대로 임진왜란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의문점, 주요 인물의 심리를 통해 임진왜란을 재해석한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과 관련된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내용을 담았다.

대표적인 예가 통신사 김성일과 신립 장군. 김성일은 동료 통신사 황윤길이 1590년 일본을 다녀온 후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 것과 달리 “전쟁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보고했다.

김성일은 후대에 비판을 받아왔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일본이 정말 침공할 계획이 있다면 공공연히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당시 김성일의 판단이었다.

더욱이 일본 통일 후 내부 안정화에 급급했던 점을 고려할 때 당시 김성일로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게 현실적인 분석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신립 장군 역시 1592년 탄금대 전투에서 주력인 기병을 활용하지 못하고 조총부대에 속절없이 당한 무능한 장수로 기억된다. ‘징비록’에도 유성룡이 전쟁 전부터 조총의 막강함을 경고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신립이 대비를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인 신립조차 조총의 위험성을 몰랐는데 유성룡이 전쟁 전부터 조총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징비록’이 전쟁이 끝난 후 집필됐기 때문에 결과에 맞춰 신립을 평가했다는 것이다.

1593년 평양성 전투는 전 세계 최신무기의 시험무대였다. 명군의 주요 화포 ‘불랑기’는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최신형 무기였고 일본의 조총 역시 신무기였다.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미국, 중국 등 강대국들이 첨단무기를 쓰며 대치한 것과 유사하다. 명나라는 왜란 당시 ‘우리가 조선을 구한다’는 의미의 ‘항왜원조(抗倭援朝)’를 내걸었다. 약 350년이 지난 6·25전쟁 때도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 부분에서 책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한반도에서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1592년 4월 선조가 왜군에 쫓겨 한양을 떠나며 백성들을 거짓으로 달래는 모습은 1950년 6월 미리 녹음된 담화로 서울시민을 위로하며 대전으로 피란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 오버랩된다는 것이다. 가라앉는 배에 있던 학생들에게 ‘자리를 지키라’는 안내방송을 하며 도망친 세월호 선장도 마찬가지다.

“위기를 겪으면 그 경험을 토대로 반성하고 한 단계 성숙해야 하는데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위기를 반복하고 있다.” 저자의 비판이다. 유성룡도 “후손들의 한국은 나의 조선과 달라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 같다.

 

 

 

유성룡은 왜 탄핵 됐을까…‘불편한 진실’  [메일경제] 2015.02.07

징비록-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 배상열 지음 / 추수밭 펴냄
소설 징비록 / 이번영 지음 / 나남 펴냄

 

 

지난해 방영된 KBS 대하사극 ‘정도전’은 매회 최고 화제를 뿌렸으며 그 열기는 출판계로도 이어져 정도전 삶과 사상을 담은 서적들이 서점에 쏟아져 나왔다. 올해에는 ‘징비록’이 정도전에 버금가는 명성을 남길 수 있을까. KBS 1TV 50부작 ‘징비록-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이 오는 14일 첫선을 보이면서 시청자들과 방송가 안팎에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서점가에서는 벌써 ‘징비록’을 소재로 한 역사서와 소설이 속속 판매대에 올라온다.

배상열이 쓴 ‘징비록-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부제에서도 볼 수 있듯 망각에 길들여진 한국 역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문이다. 7년이나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거의 모든 고을이 참혹하게 유린됐고 인구 절반이 원통하게 희생됐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정무와 군무 최고기관인 비변사 수장으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란을 겪고 난 뒤 그런 모진 환란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에서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저술이다. 자신을 포함한 조정 신료들과 임금, 사대부, 군지도부 등 지도층의 잘잘못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전쟁 초기 골든타임이 있었지만 군지도부는 이를 무시했다. 유성룡은 “수군에서 좌수사 박홍은 군사를 한 사람도 출동시키지 않았다. 우수사 원균은 배가 많았고 또 적병이 단 하루 동안에 모두 몰려든 게 아니었는데도 적군을 바라만 보면서 싸우려들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적군이 처음 육지에 오르자 원균은 전선 100여 척과 화포, 병기 등을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힌 다음 도주했다. 임금은 한술 더 떠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할 궁리만 했다. 그가 “떠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하자 선조는 앙심을 품고 유성룡에게 사지인 도성 방어 책임을 맡기려고까지 했다.

‘징비록’ 가치는 일본에서 높게 인정받았다. 임진왜란 후 비공식적인 경로로 일본에 유입돼 1695년에는 국책사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징비록’을 읽고 성찰하지 못했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완성한 지 불과 32년 만에 조선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한다. 그러고도 외부를 향해 물꼬를 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졌던 조선은 일본에 멸망했다.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된 다음에도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임진왜란과 놀랍게도 닮았다. 온 국토가 외세의 힘이 부딪치는 전쟁터가 되면서 무수한 국민이 죽어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지도자란 자들은 한결같이 저 살기에만 급급했다.

이번영 쓴 ‘소설 징비록’ 역시 관점은 다르지 않다. 이순신이 전사하고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류성룡의 능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선조의 의중을 간파한 반대파들의 중상비방과 탄핵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고 낙향한다. 소설은 유성룡과 이순신이 왜 탄핵을 당해야 했는지, 전란 당시 임금과 신료들은 무엇을 했고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명나라는 과연 우리 우군이었는지 임진왜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파헤친다.  2014년 4월 16일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우리에게 새겨져 있다. 선장은 어린 학생들과 젊은 교사들에게 제자리를 지키라는 안내방송만 남긴 채 가라앉는 세월호를 떠났다. 우리 역사에서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되는 비극이 오늘도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징비록', 비열한 역사의 기록을 소환하다 [아시아경제] 2015.02.10

 <배상열 지음/추수밭 출간/값 1만6000원>

 

 

'징비록', 우리는 국사 시간에 '시험에 나오니까 밑줄 쫘악'하는 정도로 치부한다. 그 징비록을 오늘의 역사가 다시 소환하고 있다. 소환장에 날인한 주체는 위기앞에서도 정쟁을 일삼고, 분열을 획책하며, '세월호' 같은 참사가 되풀이하는 현실이다. 실상 우리가 겪은 위기의 시대는 언제나 임진왜란 속 조선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닮아 있다. 세월호 사태 하나를 처리해 나가는 모습이 그 사례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고록이자 모범으로 꼽힌다. 회고록이 자기 미화와 변호에 빠질 때 후대에게 엄청난 부담을 준다. 실례로 이명박 전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출간된 지 며칠도 안 돼 당장 민족이 반목하고, 정치권이 갈등하고, 국민이 분열, 정쟁의 도구로 변질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회고록의 가장 큰 원칙은 자신의 기록을 통해 시대와 소통하고 후대의 풍요로운 삶을 도와줘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징비록은 회고록이 갖춰야할 덕목을 두루 보여준다.

서애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조정의 여러 실책을 반성하고 지난 일을 경계하고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는 말로 회고록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현재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선조 37년) 저술된 다음 1647년(인조 25년)16권7책으로 간행됐다.

1695년 일본 에도막부는 징비록을 입수해 국책사업으로 번역, 출간한 다음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조선 연구의 자료로 삼는다. 일본 사학자들은 예외 없이 징비록을 조선 연구의 기반으로 한다. 서애는 임진왜란이 끝남과 동시에 실각, 귀향해 징비록을 집필했다. 1607년 서애가 사망하자 선조는 이순신에게 했던 것처럼 시호조차 내려주지 않았고 겨우 직첩을 돌려주고 삭탈관직의 불명예를 일부 회복시켜주는 정도로 외면하고 무시했다.

징비록은 시대를 짊어진 자의 혹독하고도 참혹한 반성문이다. 또한 위기의 시대에 스스로를 전쟁 한복판에 밀어넣고 국가의 족속을 위해 헌신한 이의 기록이기도 하다. 징비록은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회고록으로 오늘날 소환해야하는 이유는 임진왜란과 같은 참사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어서다. 서애는 전쟁에 신음하는 백성을 보며 정치인이자 학자로, 한 인간으로 진흙탕 속 정쟁이 취한 조정을 대신해 자신을 기꺼이 버린 인물이다.

 

한 손으로는 당쟁의 참화에 희생될 뻔한 이순신같은 영웅들을 보호하고, 한 손으로는 물자와 군사를 모으고 , 머리로는 명과의 외교, 전략을 수립하고 다리로는 전쟁터와 민생현장을 누비며 온 몸을 던져 전쟁에 맞섰다. 최전방 바다위에서 이순신이 피 흘리는 동안 서애는 '영의정'이라는 행정수반으로서 최후방을 담당했다.

서애는 징비록을 통해 전쟁 이전부터 전쟁의 모든 과정을 상세히 기록, 후세에 경계를 삼는 것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전쟁의 역사를 철저히 복원한다. 특히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을 교차 검증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사료다. 징비록은 정치와 정략이 전쟁을 부르고, 전쟁으로 인한 새로운 흐름과 전쟁 참여자들의 더럽고도 음습한 인간관계, 정쟁, 그 가운데서 끝내 이겨내야 하는 책임자로서의 처절한 삶이 녹아 있다. 또한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정확히 진단하고, 지옥을 살아온 자신에게는 혹독한 비판과 반성을 담고 있다. 비판에는 어느 한군데 성역을 두지 않고 있으면서도 원균, 김성일, 토요토미 히데요시, 선조 등 당대의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서애의 사망 이후 조선은 징비록의 교훈을 새기지 못 하고 병자호란, 일제 침략 등으로 이어지면서 멸망의 비운을 맞았다. 이에 후대들은 늘상 왜 조선은 전쟁을 치루고도 위기와 비극을 반복하는 지 의문에 휩싸인다. 저술가 '배상열'이 집필한 징비록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은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양을 사수하겠다던 선조, 서울을 지키라던 이승만, 먼저 배에서 도주한 세월호 선장 등 위기의 과정에서 놀랍도록 재현되는 인물들이 왜 나타나는지도 확연히 일러준다.그간 서애의 원작은 번역본을 접해도 지금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다. 또한 통렬한 반성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원작에서 불필요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제거하고 행간의 숨은 뜻을 발굴하고자 했다"며 "서애의 시대가 바로 우리가 겪어온 현대사와 놀랍도록 일치한다"고 강조한다.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배상열 저, 추수밭 출간) 이 책은 한국의 역사가 곧 비극의 반복임을 반추하며 위기를 과거의 경험으로 끝내지 않고, 이를 반성해 한 단계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 역사가 임진전쟁 이후 병자호란과 을사늑약을 거쳐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위기 앞에서 실수해온 반복을 징비록을 통해 반추하고 있다. 유성룡이 환난의 시대에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 공개한 용기와 그 의미를 주목한다. 그간 서애의 원작이 번역본을 접해도 지금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을 쉽게 풀어쓰고 있다.

 

 

 

조선은 왜군에 왜 짓밟혔나, 피로 쓴 반성문 [중앙일보] 2015.02.14

서점가에 부는 『징비록』 바람. 류성룡, 지도층 과오·무능 질타. 승리보다 패배에서 교훈 찾아. 혼돈의 우리 사회 비추는 거울

 

 

1593년(선조 26) 1월 하순의 어느 날, 류성룡은 개성에 있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군영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이여송은 “명군에게 군량을 제때 보급하지 않은 죄를 물어 군법을 집행하겠다”며 호통을 쳤다. 류성룡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한 나라의 재상은 왜 이런 수모와 치욕을 겪어야 했을까.

이 일이 있기 며칠 전, 이여송은 파주의 벽제관 싸움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한 뒤 개성으로 도망쳐 왔다. 그러고는 “이제 일본군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한다. 명군만 믿고 있던 조선은 충격에 빠진다.

류성룡은 연일 이여송을 찾아 “빨리 명군을 진격시켜 일본군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 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여송은 “싸우려면 너희들이 직접 싸우라”며 거부한다. 그럼에도 류성룡이 채근을 멈추지 않자 군량을 핑계로 군법 집행을 운운하며 무릎까지 꿇리는 수모를 주었던 것이다.

『징비록(懲毖錄)』은 이처럼 무릎을 꿇는 것까지 감내해야 했던 약소국의 재상 류성룡(1542~1607)이 남긴 기록이다. ‘징비’란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뒤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서 7년의 임진왜란을 겪으며 느꼈던 반성과 회한, 또 다시 그 같은 환란이 닥치는 것을 막는데 필요한 대책과 마음가짐을 기록한 회고록이자 비망록이다.

17세기 초반 간행된 『징비록』이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면서 빛을 발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류성룡이 보인 솔직한 고백과 통렬한 자기반성 때문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서문에서 “나같이 불초한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태로운 시국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며 몸을 낮춘다. 그러면서 자신을 비롯한 조선 지도층의 과오와 무능을 사실대로 서술한다.

『징비록』에는 실제로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이겼던 기록보다는 패했던 기록의 내용이 더 상세하게 적혀 있다. 누가 잘못해서, 무엇이 부족해서 패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충정이었다.

류성룡이 서술한 일본군의 모습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비록 무고하게 침략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원수였지만, 류성룡의 일본군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이다. 신무기 조총의 놀라운 위력,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군의 용맹함, 치밀하고 꼼꼼한 그들의 축성술·용병술 등을 담담하게 서술했다. 적개심을 넘어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만 그들과 맞설 수 있다는 신념의 소산이었다.

류성룡은 고백과 반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징비록』에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주국가’를 염원했던 류성룡의 비전이 담겨있다. 조총과 대포, 병법을 비롯한 일본과 명의 선진 무기와 군사 기예를 배우는 것, 전쟁에 지치고 일본군과 명군에 시달렸던 백성들을 보듬는 것, 유사시에 활용할 수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기르는 것 등 ‘전쟁 이후’를 대비한 구체적 대안이 조목조목 제시돼 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17일 만에 수도를 빼앗기고, 싸울 의지조차 없는 명군 장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일본군과 싸워달라고 애원해야만 했던 치욕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비원(悲願)이 절절하다.

하지만 ‘징비’의 정신은 제대로 계승되지 않았다. 류성룡이 강조했던 안민(安民)과 양병(養兵)의 비전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웃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경고 또한 무시됐다. 그 결과 왜란 당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참담한 고통은 30여 년 뒤 병자호란에서 다시 반복됐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보다 더 예민하게 『징비록』을 주목한 것은 일본이었다. 『징비록』은 1695년 일본에서 간행된다. 초판 『징비록』의 서문에서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은 이렇게 썼다. “조선인이 나약하여 빨리 패하고 기왓장과 흙이 무너지듯 한 것은 평소 가르치지 않고 방어의 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것은 전쟁을 잊은 것이다.” 날카롭고 뼈아픈 지적이었다.

이윽고 1712년(숙종 38),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오사카의 거리에서 『징비록』이 판매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경악한다. 보고를 받은 숙종과 신료들은 조선의 서책들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부산을 떤다.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조선보다 ‘징비의 정신’을 더 강조하는 서글픈 장면이 빚어졌던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 바야흐로 류성룡을 다룬 드라마의 방영을 앞두고 『징비록』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징비의 정신’은 실종된 지 오래다. 안팎으로 산적한 난제를 풀어가는 데 필요한 솔직한 반성과 탁월한 리더십이 아쉬운 오늘, 류성룡이 남긴 ‘징비의 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S BOX] 제2의 정도전인가 … 류성룡 평전·해설서 잇따라

서애(西厓) 류성룡을 주인공으로 한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14일 시작된다. 서점가에도 관련 책이 쏟아지고 있다. 원작 해설서는 물론 당시 시대상을 재구성한 소설, 류성룡 평전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현재까지 15종이 넘는 책이 출간됐다. 지난해 ‘정도전’ 열풍을 이어가는 모양새다.

소설 중에는 『소설 토정비결』을 쓴 이재운의 『소설 징비록』(책이있는마을)이 눈에 띈다. 류성룡의 원작은 물론 관련 사료를 망라해 7년 전쟁의 참상을 담아냈다. 드라마작가 이한솔의 『징비록』(푸르름)소설가 박경남의 『소설 징비록』도 있다. 팩션 소설가 이수광의 『소설 징비록』(북오션)은 파란만장했던 서애의 일대기를 그린다.

『징비록』 번역본은 아카넷·역사의 아침·현암사 등 여러 곳에서 나왔다. 출판인 김흥식이 옮긴 『징비록: 지옥의 전쟁, 반성의 기록』(서해문집)은 원본에 ‘류성룡 종군의 기록’을 덧붙여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김기택이 옮긴 『징비록』(알마)은 쉽게 풀어 쓴 문장이 돋보인다. 역사저술가 배상열씨의 『징비록』(추수밭)은 당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다각 분석한 교양역사서다.

미술사학자 이종수의 『류성룡, 7년의 전쟁』(생각정원)은 류성룡의 활약을 평전 형식으로 쓴 책이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시루)는 『징비록』은 물론 상소문·공문 등 자료 549건을 분석해 류성룡의 리더십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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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2.22 09:09

    첫댓글 성현들에 "처음 보는 " 방비록'" 혼자 보기 아까와서 옴겨 왔네요, 심심 풀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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