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70년 史
조 흥 제
내가 서울에 처음 온 것은 70년 전이다.
1951년 1월4일 서울 창동에 왔었다. 한국 전쟁 때 두 번째 국군이 내리 밀리던 때를 1·4 후퇴라고 한다. 1월4일 날 서울을 중공군에게 빼앗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우리는 그때 양주 외숙댁에 있다 피란 나왔는데 늦게 나와 의정부에서 양군이 싸우는 가운데 들었다. 새벽에 서울을 향하여 왔는데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였다고 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이 창동이라고 했다. 다시 양주 외숙댁에 들어가 중공군 속에서 살았다.
3개월 후 국군들이 들어 와 좋아한 것도 잠시 또 내리 밀려 피란 나왔다. 어느 고개를 넘으니 집들이 많았다. 거기가 서울 미아리 고개다. 서울은 다 부서졌다. 전신주에 전깃줄도 끊어져 바람에 흔들리고, 길 가운데 기찻길이 있는 것이 이상했다. 우리 동네는 외곽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 놓고 기찻길을 놓았는데 서울에는 세멘트 바닥에 기찻길을 놓은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기찻길이 아니라 전찻길이었다. 서울을 지나자 넓은 들판이 나왔는데 외삼촌네 짐을 싣고 가던 소가 반란을 일으켜 맴을 돌아 짐을 죄다 떨어뜨리고 서울로 뛰었다. 거기가 왕십리 벌이라고 했다. 광나루에서 배 타고 건너 천호동, 용인을 거쳐 충청도로 피란 갔다.
세 번째는 55년 대전에서 살 때다. 그때 우리는 조선일보를 보았는데 서울 소식이 사진과 함께 매일 오는 것이 멋 있어서 마음이 들뜨게 했다. 서울역의 둥그스름한 지붕, 큰 기와집의 남대문, 희고 큰 돌집의 중앙청, 큰 탑의 국회의사당, 사람으로 가득 찬 벚꽃이 핀 창경원의 야경……, 서울에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립던 서울을 갈 기회가 와서 펄쩍 뛰었다. 양주에 사는 이종사촌 형이 55년도에 결혼하여 어머니가 가시는데 나도 데리고 간다고 해서였다. 대전역에서 9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창가에 앉아서 성냥곽을 꺼내 놓았다. 역을 하나 지날 때마다 성냥 개비 하나씩 창틀에 놓았다. 안양 쯤 오자 서울 냄새가 났다. 집들도 크고 많았다. 한강을 건너는데 철교 교각이 늘느리 기와집 같았다. 오후 2시에 드디어 종착지인 서울역에 왔다
‘서울역~ 서울역~, 승객 여러분 장거리 여행에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여기는 이 열차의 종착역인 서울역입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묵직한 중년 남성 역무원의 안내 방송이었다. 160㎞에 5시간이 걸리고 창틀의 성냥개비가 29개였다. 역을 나와서 사진에서 보았던 서울역 시계탑을 보았더니 감격스러웠다. 버스를 탔다. 대전에서는 걸어다녔는데 서울에는 시내버스가 있다. 버스가 서면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안내양이 ‘종로, 동대문, 청량리 가요, 서대문, 아현동, 신촌 가요.’하고 손님을 불렀다. 우리도 버스 타고 한참 가다 내린 곳이 중구 필동 일가 아저씨네 집이었다. 이튿날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어 서울 구경을 혼자 나갔다. 못 찾아 오면 큰 일이다. 주소도 모르고 전화도 없던 때다. 모퉁이 돌 때마다 머리에 익히면서 갔다. 한참 가니 길 건너에 큰 건물이 있는데 동화백화점이라고 써있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이다. 길 건너가니까 신문에서 보던 조선호텔이 있다. 서울의 3대 건물이 조선 호텔, 반도 호텔, 중앙청이라고 했던 그 조선호텔이다. 조금 가니 반도 호텔이 있다. 지금의 프레지던트 호텔과 롯데호텔 자리다. 길을 건너니 조선일보 건물이 보인다. 우리가 보는 신문이어서 반가웠다. 큰 길을 건너 한참 가니 경기도청이 있다. 경기도청이 왜 서울에 있나? 길 건너에 보니 크고 흰 4층짜리 돌로 지은 집이 있다. 중앙청 같은데 촌놈 소리 들을까 보아 누구한테 물을 수도 없었다. 친구들이 하는 말이 서울 가서 촌놈으로 보이면 얻어 맞는다고 해서였다. 그 건물이 중앙청이 맞고 경기도청은 미 대사관 옆에 인사동으로 꺾어지는 자리에 있었다. 올때는 눈에 익혔던 대로 돌아 왔다. 서울의 3대 건물을 다 보았으니 혼자 갔어도 수지맞는 나들이였다. 이튿날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거기가 신설동이었다.
네 번째 간 것은 60년 4·19 직후 고향 동창을 찾아 갈 때다. 친구는 삼청동 꼭대기에 살았다. 그의 안내로 그립고 그리웠던 창경원에 가서 사자도 보고, 호랑이도 보았다. 중부극장에서 ‘혁명아 사바다’라는 영화도 보았다.
다섯 번 째는 63년에 우리가 아주 살러 왔다. 영등포 문래동 영등포 초등학교 옆으로 이사 와 만화방을 차렸다. 안양천 건너는 집이 없었다. 구로공단은 시내에서 논-밭을 지나서 한참 가야 있었고, 영등포 역에 나와서 전차 타고 동대문 평화시장까지 가서 만화책을 사 왔다. 전차 삯이 2원50전, 버스 값이 5원, 마이크로 합승 값이 10원이었다. 청량리 지나면 집이 없고, 미아리 고개 넘어도 집이 없고, 무악재 넘어도 집이 없고 신촌쪽에는 제2 한강교가 막 개통되어서 망원동 쪽이 기지개를 켰다. 영등포 쪽 극장은 시장 옆에 연흥극장, 길 건너에 영보 극장, 역전과 시장통 사거리에 서울극장, 그 건너 남도 극장이 있었다. 시내에는 을지로 3가에 국도극장, 종로에 단성사, 31로에 수도극장, 퇴계로에 대한극장이 새로 문을 열었는데 제일 컸다.
65년에 을지로 2가에 31빌딩을 지었다. 출근하다 보면 골목에 땅을 파는데 물이 많이 나왔다. 그게 31빌딩 지하층이다. 그때 31층이면 서울에서 제일 높았다. 67년도에 중앙청 앞에 큰 건물을 지었는데 그게 정부종합청사다. 그 옆에 크고 탑같은 집을 지었는데 시민회관이다. 72년도 밤에 공연 중 불이 나서 70여 명이 죽고 그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 세종문화회관이다. 다시는 불이 나지 말라고 튼튼하게 돌로 지었다.
그때는 서울의 구청이 9개 있었다. 중구, 종로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성북구, 성동구, 영등포구였다. 강 남쪽은 전부 영등포구였다. 70년대 들어 25개 구로 늘었다. 인구는 55년도에 150만이었다. 우리가 서울 올라 올 때는 400만이었다. 98년에 1000만이 넘었다가 지금은 980만이다. 그 대신 수도권으로 흩어져 2300만이 살아 대한민국 인구 거의 반이 산다.
전차는 기우뚱 기우뚱 하면서 큰 길 가운데로 달려 자동차가 많아지자 빨리 달리는데 방해가 되어 67년도에 없어졌다. 그때 '마포 종점'이라는 은방울 자매가 부른 노래가 나왔다. 마포에 전차 종점이 있었는데 폐전차가 섰는 것을 어떤 여자가 밤마다 와서 붙잡고 울었다. 그 옆에 대중 음식점이 있었는데 거기에 연예인이 많이 왔다. 그 중 작사가가 매일 밤 와서 우는 여자를 보고 왜 우느냐고 주인에게 물었더니 약혼한 사람이 미국 유학 가서 죽어서 같이 전차 타고 다니던 생각을 하면서 운다고 했다. 그는 연필과 공책을 꺼내 들고 밖에 나와 눈에 보이는대로 적어서 곡을 붙여 불후의 명곡 마포 종점이 탄생되었다. 대중교통은 시내버스밖에 없어 출퇴근 때는 사람이 많아 여학생은 가방을 손님 사이에서 빼내지 못하여 못 내리기도 했다. 시내버스 안내양이 승객에게 요금을 받았다. 앞에 조그만 가방을 차고 거기에 돈을 넣었다. 안내양은 시골 처녀여서 버스 종점에 기숙사가 있어 거기서 먹고 자고 월급도 받았다. 손님을 잔뜩 태우고는 배로 밀어 넣고 문을 닫으면서 ‘오라이’하면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가 한쪽으로 기우뚱하면 손님이 한쪽으로 쏠려 안정이 되었다. 나는 그때 봉천동에서 광화문으로 출퇴근했는데 고개를 넘어 숭실대학교 앞 버스 종점까지 걸어 와서 탔다. 지하철은 1호선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9.5㎞)가 74년 8월15일 개통되었다. 그때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시승하고 날아 가는 기분으로 장충동 국립극장에 가서 8·15 광복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60년대 후반에 마포대교가 놓이면서 여의도에 국회와 방송국 등 굵직굵직한 건물이 들어서더니 드디어 63빌딩이 건립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남산에 올라가는 케이블카도 있었다. 서울 타워가 개통되기 전이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청과물시장은 염천교 밑에 있었다. 조금 커지자 용산역 건너로 갔다 그 자리에 전자 상가가 들어서면서 가락동으로 갔다. 가락동 청과물 시장은 가 보지 못했다.
70년대 초 한강에 한남대교가 놓이면서 뽕나무나 심던 잠실이 개발되어 서울의 알짬인 명동을 제치고 주인 행세를 하였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들어 버스 안내양 제도가 없어지고 토큰 제도가 생겼다가 카드 제도가 활성화되자 토큰이 없어졌다.
이것이 50년대에서 오늘날까지 내가 겪은 서울의 간단한 변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