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시대의 이탈리아(1920-1945)
1. 1차대전의 결과
이탈리아는 1차대전으로 사망 60만명 부상 100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대전동안 100만명의 이탈리아군대가 전선에서 이탈하는 원하지 않는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또한 정쟁비용으로 10억달러의 미국차관을 통한 채무관계가 발생되었다. 1차대전 이전 3국동맹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외의 동맹체계를 맺고 있었지만 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하였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 전선이 교착되고 독일군의 공세가 불리하게 진행하자 1915년 4월 런던 비밀조약에 참가하여 단독강화를 포기하고 연합국측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전승국이 되었지만 '손상된 승리'를 하였을 뿐이다.
전쟁을 통하여 북부지역의 아디제(Adige)강 상류지역과 이스트리아 지방은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하였으만 , 파리강화회의에서 다눈치오 수상의 달마치아의 영토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퇴장해 버리는 외교적인 패배를 맞보았다. 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의 사회정세는 전쟁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고, 전시체제를 평시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1920년 밀라노(Milano), 토리노(Torino)등 주요도시의 경제활동은 노사분규와 높은 실업률로 거의 마비되었다. 수많은 공장은 폐쇄되고 실업자는 10%이상 40만명이상 증가하였다. 따라서 극심한 경제파탄은 파업, 약탈, 농민 폭동 등 사회혼란은 가중시켰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급진적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18년 6만명의 사회당원은 2년 후 2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사회당산하 노동총동맹은 24만명에서 115만명으로 비약적 발전하였다. 따라서 1919년 선거에서 사회당은 제1당으로 508석 가운데 156석을 차지하였고 코민테른에도 가입하였다. 당시 우익세력의 : 카톨릭인민당 은 101석은 차지하고 제 2당이 되었다.
2. 무솔리니(1883-1945)의 등장과 파시즘의 성장
북 이탈리아의 대장간의 아들로 태여나 로잔느대학에 입학후 급진적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사회당원이었지만 1914년 10월 사회당에서 탈당 이후( 전 사회당 기관지 Aventi 전진의 편집인: 주필) 1차대전 중립론자에서 참전주의자가 된다. 무솔리니는 이후 프랑스의 후원하에 인민지 발행인이 된다.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1919년 3월 퇴역군인과 극우주의자를 결속하여 100여명의 전투단을 창단 (퍄쑈단)하였다. 파쇼단은 라틴어 facio(묶음, 다발)에서 유래하여 로마시대 지배층의 도끼같은 막대기 fasces를 연상하여 결성되었다.
무솔리니는 남녀평등 보통선거, 상원폐지, 노동자의 대표권과 관리권, 군수업의 국유화, 종교단체의 제산몰수 등 과격한 사회주의적 요구하여 사회주의자를 포섭할 목적을 갖고 있엇다. 그의 전투단은 선전과 선동(데마고그)을 통한 선거전을 펼쳤지만 1919년 단 1석도 못 얻고 참패하였다. 당시 무솔리니는 5000표를 얻었지만 사회당 당선자는 압도적 18만표로 비교가 된다. 파시스트당의 성장은 전후 국내의 경제사회적 불안요인을 이용하여 노동자 총파업공세 때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반파시즘전선이 결성되고 대립하였다. 특히 좌우연합을 통해 사회당과 인민당의 불안정한 연합전선은 파시스트당을 공동위 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백색 볼쇄비키라 칭하였다.
반면 무솔리니는 지주와 자본가의 후원하에 1920년 흑색셔츠단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방화와 ,테러를 자행하였다. 반대파는 이러한 백색테러에 대한 대항으로 인민돌격대의 결성하므로써 악순환적으로 테러가 나타났다. 1921년 무솔리니는 국가 파시스트당이 결성하여 바티칸과 타협하에 군주정을 옹호하고 국수주의적 강령을 채택한다. 1920년 파시스트 당원은 3만명에서 1921년 32만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3. 무솔리니의 정권획득
1922년 지방선거를 통해 무솔리니는 북이태리의 경찰권을 장악한다. 그는 사회당의 내부적 분열을 틈타 1922년 10월 로마로의 5만명의 파시스트 진군을 시작하여 쿠테타에 성공하였다. 무능한 국왕 Victor Immanuel III세는 파시스트에게 조각권을 부여하여 제 1차 파시스트 내각이 결성된다. 반대급부로 파시스트정권은 국왕제의 형식적인 기능을 지속적으로 인정하였다. 당시 초기에는 파시스트는 3명만 내각에 참가하였다. 1923년 선거에서 파시스트당은 25%의 유효표를 획득하지만 교묘한 선거법 개정을 통해 75%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결국 1924년 총선거로 단독 내각구성에 성공하였다.
4. 파시즘체제의 확립
1924년이후 무솔리니는 사회, 인민당에 대한 테러 암살를 강화시키고 야당을 의회에서 몰아내게 하였다. 반대세력은 범국민적 반 무솔리니 전선을 결성하는 데 실패하였다. 무솔리니는 조직적인 탄압은 법률 개정을 통해 이뤄졌고 물론 언론, 출판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대규모의 미국차관, 국내의 관세, 과세를 강화하면서 재정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정책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파시스트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대자본가를 보호하고 육성시켰다. 실제로 실업자가 감소하는 경제정책의 성공으로 더욱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강화되었다. 파시스트 정부는 군부와 기업가을 보호하는 정책을 계속적으로 추진하였다.
1926년 예외법으로 파시스트 외에 모든 정당과 단체의 활동은 금지되고 경찰권 과 내무행정 분야는 모두 파시스트당원에 장악되었다. 이 때 크로체등 지식인은 망명하였다. 1928년 무솔리니는 모든분야에서 절대적 권력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결국 1929년 “전체주의적 조합국가의 결성”을 달성하여 100% 의회를 장악하였다. 한편 1929년 무솔리니정권은 교황청과 라테란(Laterano)협약을 맺고 카톨릭국가로써 교황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게 되고 로마 교황청은 바티칸 시국 (La Citta' del Vaticano)으로 독립하였다.
5. 무솔리니의 대외정책
무솔리니는 파시스트의 팽창정책의 일환으로 “대 로마제국의 건설”을 주창하여 히틀러의 '대 게르만 제국'의 전주자가 되었다. 그는 1923년 해군력 군축회담으로 미국이 주도한 워싱턴체제에 적극 가담하여 이탈리아를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고 국위를 선양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해군력은 프랑스와 동등한 위치를 보장받았다. (미국 5: 영국 5: 일본 3: 프랑스1.75: 이탈리아 1,75의 비율). 그러나 이탈리아는 베르사이유체제를 위협하는 정책을 강화하지는 못하였다. 1923년 코르푸섬이 이탈리아군에 점령되였지만, 그리스는 배상 요구를 주변강대국을 통하여 관철시키고자하였다.
그러나 1924년 유고와 로마조약를 통해 피움메 항을 병합하고, 알바니아를 공략하였다. 이 후 무솔리니는 베르사이유체제를 반대하는 불만국에 접근하는 편승적 외교를 통하여 현상유지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그는 1929년 이후 공황기를 틈타 침략주의적 정책전환를 시도하였는데 1933년 히틀러의 정권장악이후 베르사이유체제의 전복을 위한 나찌 독일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맥를 같이하였다. 1935년 히틀러가 군비확장과 징병제도의 실시를 공론화시키자, 무솔리니는 이태리의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스트레자 전선을 구축하여 나찌독일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이후 내부의 이해관계에 따른 마찰로 연합전선은 붕괴하였다. 당시 영국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위해 실질적인 독의 군비확장을 내심 환영하여 유화책으로 1935년 6월 영독 해군협정을 맺는다. 따라서 독일의 해군력도 영국에 비해 35% 인정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베르사이유체제의 붕괴를 예상케한 히틀러 외교의 대승리이기도 하였다. 이후 독일은 이탈리아가 이치오피아를 침략한 틈을 타고 비무장지역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입하여 로카르노조약을 파기시켰다. 사실상 무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략은 국제연맹의 위상을 크게 추락 시켰다. 그는 공황으로 인한 국내적 위기극복 방안으로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와 에치오피아 국경분쟁을 빌미로 전쟁을 도발하고 1936년 아디스아바바를 병합하였다. 독일의 재무잔선언을 틈타 시도한 무솔리니의 이러한 전략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국제연맹는 소극적인 자세로 단지 이탈리아에 경제적 제한조치 만을 결의하였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관대히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체제를 인정한 샘으로 국제연맹의 위상은 완전이 실추되었고 1937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후 독일의 오스트리아 통합론와 이태리의 발칸진출 (알바니아병합)에 상호이해는 전체주의 국가의 추축국의 결성으로 확인되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따라서 1936년 10월 로마-베를린의 추축이 형성되고, 11월에는 독일과 일본이 베를린에서 방공산주의 협정체결을 하였다. 여기에 1937년 11월에는 이탈리아가 가담하여 독이일 파시즘 3추축국 체제가 가동하여 코민테른 국가에 대항하고 자유 민주주의 노선을 반대하였다. 백림-로마 추축의 성립은 이디오피아 사태로 외교적 고립에 빠진 무솔리니가 독일에 접근하면서 가시화 되었다.
특히 1937년 7월 독오 영토보존협정은 히틀러의 이탈리아 회유책으로 오스트리아문제는 이탈리아의 이해가 걸린 중대사안으로 인식하여 병합을 포기하는 것처럼 발표되었다. 또한 스페인 내란으로 양국의 유대관계는 훨씬 더 강화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치아노외상의 벨히데스가아덴 회동으로 추축의 골격을 합의하였고, 무솔리니는 “로마와 백림을 연결하는 수직선은 분할선이아니라 추축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37년 9월 무솔리니의 베를린 방문과 1938년 5월 히틀러의 로마방문으로 파시스트들의 축제는 절정에 달하였다. 이러한 무드는 독일의 체코병합과 뮨헨협정에서 나타난 영불의 유화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6. 2차대전과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나찌독일이 폴란드, 스칸디나비아와 베네룩스 그리고 프랑스 점령에 성공하자 1940년 6월 10일 독일측에 가담하고 2차대전에 참전한다. 사실상 히틀러는 전략적으로 지중해전투의 중요한 교두보를 이탈리아군이 확보하여 연합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군대는 지중해와 발칸, 북아프리카, 스페인 남부등의 전투에서 점차적으로 패배하는 부진을 면치 못하였고, 그리스 전투에서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1941년 이후 히틀러는 이러한 전략상 차질을 차단키 위해 발칸과 아프리카전투에서 무솔리니의 임무를 대신할 독일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한편 전투에서 나타난 이탈리아군대의 연속적인 패배와 독일군에 의존하는 수모는 무솔리니의 위신추락으로 나타났다. 1943년 3월 이후 국내에서는 임금인상 및 종전을 요구하는 격려한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무력한 군대는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 아이젠하워의 시칠리아 상륙이후 미군의 로마진격이 개시되었다.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기독교주의자 ( 인민당에서 기독교 민주당으로 개칭)등에 의하여 전개되었고, 드들은 밀라노(Milano), 토리노Torino)등 주요도시를 해방시켰다. 이러한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동맹 (이후 1944년 로마협약으로 반파시트전선으로 개칭)은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강금하였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총사령관 P. Badoglio 바돌리오는 내각(1943-44)을 구성하고 9월 무조건 항복에 서명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가담하여 전투를 속개한다. 한편 이탈리아의 전설이탈은 히틀러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지시하여 아페닌 산맥 그란사소에 독일공수부대를 침투시켜 극적으로 성공시키고 북부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케하였다. 1943년 9월 본토에 연합국이 상륙하자 로마근교에서 독일군은 반격으로 맞섰지만 공군력의 열세로 퇴각하였다. 1944년 6월 반파시스트 국민해방위원회는 북부에서 소위 빨찌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위스로 탈출하려는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 1945년 봄 독일군은 항복하고, 1945년 4월 무솔리니는 코모호반에서 총살되고 그의 시신은 밀라노 광장에 방치되는 수난을 당한다. 파시스트(Fascista)에 의해서 비합법화된 인민당(기독교민주당의 전신 추후 이탈리아 현대사에 한 장을 열게 되었다.
2차대전이후의 이탈리아
2차대전의 참담한 결과로 1945년 이탈리아는 자생적으로 전후 복구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미.소 양극적인 세계체제의 일부로서만 소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경제적 파탄으로 견디기 어려운 국내적 혼란상태에 빠지고 과거 식민지의 해체과정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아픔을 겪어먀 만했다. 또한 이탈리아는 전체주의 파시스트의 비인간적 만행의 공포와 반성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했다. 따라서 전체주의와 독재를 막는 자유민주적 정치체계로의 전환을 연합국은 강요하였다.
1. 이탈리아의 공화정과 데 가시페리의 시대(1945-53)
대전을 통해 무솔리니에 대항한 반파시스트 전선의 주체세력들은 공산당, 사회당, 기독교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그중 이탈리아 공산당은 가장 조직력이 튼튼하였는데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통제와는 무관한 급진적 사회주의세력이었다. 그러나 1946년 6월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국민투표의 결과는 기민당 35%, 사회당 21%, 공산당 19%로 나타났다. 제헌의회는 왕정 제도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하여 기독교민주당의 데 가스페리(De Gasperi)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을 탄생시켰다. 따라서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1947년 연합국과의 평화조약을 체결하자, 이탈리아는 본토의 일부와 식민지를 상실하였다. 1947년 투르만독트린이 발표되자 연립정부의 좌우합작시대는 마감하게 되고, 가스페리 총리는 공산당과의 결별을 발표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슈망과 서독의 아데나워처럼) 유럽통합론자로써 마샬플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측의 경제통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탈리아 '민주 공화국' 헌법은 4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사실상 헌법심의에는 공산당도 참가한 국민통합적 헌법이었다.) 헌법은 파시스트 독재와 권위주의적 요인은 삭제하여 대통령의 권한이 역화된 의회중심주의를 반영하였다. 총선은 5년마다 실시하여 내각을 구성케하였고, 정당법과 정당후원제을 강화하고 비례대표제를 채택하였다. 한편 가스페리 기민당정권 (1945년 12월-1953년 8월)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개각이 있었지만 계속적으로 집권하였다.
2. 시장경제의 발전
이탈리아의 전후복구는 미국의 마샬플랜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성사되었다. 1947년 미국은 유럽정책을 케난의 봉쇄정책으로 추진하면서 공산주의방벽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도 싾은 셈이었다. 따라서 기민당은 공산당과 결별하였고, 가스페리는 총선에서 48%의 지지율을 확보하였고 좌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31%에 그쳤다. 가스페리총리의 친서방정책은 이후 이탈리아 공산당이 쇠퇴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편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고, 유럽통합을 지지하면서 자유주의원칙을 도입한 시장경제체제와 민영화정책을 활성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형식적으로 국유화된 산업부흥공사가 존재하였지만 민간기업에 의해 좌우되었다.)
기민정부는 식민지 상실로 인한 생산력은 기술과 자원개발을 통해 메꾸고 외자유치에도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매년 5%이상의 경제성장을 거듭할 수 있엇다. 따라서 1960년에는 서독을 능가하는 초고속 경제성장률 (6.6%)을 보였다. 그러나 1950-60년대 이탈리아의 경제사회적 불균형과 사회적 불안은 높은 실업률과 낮은 임금율, 만성적인 노동재의와 파업을 통해 잘 반영되었다. 특히 남부지역의 대조적인 후진성은 전체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시급한 산업기반의 현대화 작업이 요청되었다.
3.기민-사회 연립정부시대 (1963-1972)
1963년 기민당 정부의 인기는 계속적으로 하락하여 총선에서 38%선에 머룰고, 반대로 공산당의 지지율은 25%까지 상승하였다. 그러나 연립정부를 주도하기위해 다른 우파세력을 결집하는 것은 정책적인 차이로 어려움이 많았고, 수차례 그들과의 연립내각는 붕괴되었다. 1963년 7월 기민당총리 탐파니는 사회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시도하였다. 당시 사회당은 1958년이래 유럽공동체 가입을 문제로 공산당과 결별한 상태이며 총선에서 14%의 지지율을 보였다. 사회당과의 연립내각은 이탈리아 정국에 커다란 변화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63년 12월 기민당 Moro 모로정부(1963-1968)는 사회당의 주장하는 사회보장제등 개혁적성향의 정책이 반영하였다.
따라서 전기등 공공부분의 국유화가 이루어지고, 남북간의 불균형의 해소책도 마련되었지만, 유럽공동체의 농업정책은 남부의 농업문제로 적지 않은 연립정부내부의 마찰을 빚었다. 특히 정부의 1966년 제 2녹색계획( Green Plan)은 남부의 소농보다는 대농을 지원하는 방침을 고수하였다. 사실상 중도좌파 정부는 사회복지와 자유사장의 두 가지 원칙을 전부수용하기 어려웠다. 1968년 이후 학생소요와 노동파업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이탈리아는 자유무역주의를 따라 고도의 수출성장을 보이며 7대 공업국가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한편 1973년 오일쇼크는 이탈리아를 강습하여 1974년 -76년 급속한 Inflation과 리라화의 폭락을 유발하여 정치경제적 대혼란에 빠트린다. 한편 1970년대 사회당의 지지율이 10%미만으로 떨어지자, 기민당은 새로운 정치적 모색을 해야만 하였다.
4. 기민-공산 연립정부
전 기민당 총리 모로의 재등장(1974-76)은 이탈리아 정국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불안정한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공산당과 노동조합을 포용하였다. 그는 1978년 적군파 붉은 여단의 테러에 의해 희생당하였다. 후계자 안드레오티수상은 1976년 7월 총선에서 34%의 지지율을 획득한 공산당과 연립정부(기민당은 38% 의 득표율)를 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급진적 좌파를 달래기위해 통화팽창정책등을 시도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당시 유럽공산주의는 모스크바와는 등거리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마르크스의 혁명론에 부응하지 않고, 공산당은 나토탈퇴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과의 연립내각은 기민당 내부의 노선대결로 발전하여 1978년 안드레오티내각은 사퇴하였다.
5. 이탈리아의 발전
1970년대의 이탈리아는 정파간의 타협으로 정치적 불안정 요인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합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경제적위기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여 나갔다. 특히 만성적인 노동문제의 심각성도 완화되었다. 1970년대 말 기민당 정부가 자유무역주의의 고성장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공산당과의 협력체제는 종료되었다. 따라서 기민당은 보다 온건한 사회당과의 재결합을 추진하였다. 1980년대 초의 세계적인 불황은 이탈리아의 15%인플레이션과 실업율을 10%수준으로 끌어올려 놓았고, 정부는 긴축정책으로 돌아섰고, 적극적인 민영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스파돌리니 기민당내각(1981-82)은 5개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로 겨우 명맥을 잊고 있었다. 1983년 총선에서 기민당은 더욱 위축되고(33%), 공산당은 약진(30%)하였다. 지방선거에서는 오히려 공산당이 근소한 차로 승리하였다.1983년 8월 사회당의 크락시내각은 5개정당의 연립정부로 버텨나갔다. 크락시의 중산층을 겨냥한 사회개혁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전체적으로 1980년대 후반기 실업율과 인플레이션 비율은 크게 떨어져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고, 생활과 교육수준은 향상되었지만 특히 남북의 지역차이는 크게 해소 되지 않았다. 1987년에는 기민당이 34%로 제 1당을 차지하여 연립내각의 총리직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