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恐龍을 다녀와서
교사 구본황
세 번 설악산을 다녀온 기쁨
올해는 봄철을 제외하고, 설악산을 계절마다 가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물론 존경하는 ‘등산 대장님’ 任景裕 선생님의 수고가 뒷받침이 되었기에 가능하였으나, 50대 후반의 몸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힘든 등반길이 기다리고 있는 설악산을, 10시간 넘나들며 걷고 또 걸어 새로운 삶의 체험을 빚어내었으니, 값진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월 30일의 겨울 서북능선, 천불동 계곡 山行에서는 사슴 뿔 같기도 하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같기도 한 雪花를 세찬 눈보라 속에 목도리를 풀어 머리와 얼굴을 감싸면서 살펴보기도 하고, 눈 덮인 ‘봅슬레이(bobsleigh)' 코스 같이 아찔한 낭떠러지 길을 엉금엉금 기어 5구비나 내려왔으니 어찌 쉽게 그 추억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아무도 없는 겨울 천불동 계곡을 내려오며 바라본 ‘희다 못해 푸른’ 얼음 폭포의 淸楚한 모습이나, ‘咆哮하는 獅子’같은 검붉은 바위 암벽에 우뚝 버티고 솟은 소나무의 孤高한 자태는 모두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6월 5일~6일의 초여름 봉정암 능선, 수렴동 계곡 山行에서는, 수렴동 계곡을 오르면서 흘린 땀을 말끔히 씻어주는 듯,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 아래 자리 잡은 파르스름한 沼의 물빛이, 등반 길 좌우에 끊임없이 펼쳐져 있어서, 童話의 세계를 걸어가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어린 시절 4km 산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통학하면서, 산골짜기 개울 가 돌멩이를 헤치며 가재를 잡고, 고무신 배를 띄우던 추억이 저절로 떠오르곤 하였다.
희디 흰 泡沫을 지우며 감돌아가는 맑은 물빛 속에 어린 날의 영혼이 뛰놀고 있지는 않을까 걸음이 멈추어지곤 하였다.
“공룡능선을 등반해야 산악인이 되는 것이야!”
9월 25일~26일의 가을 恐龍稜線 등반에는 임경유 · 김창연 · 최유진 · 김성미 (이상 송파공고), 구본황 · 기우현 (이상 당곡고) 선생님 등 6분이 참석하였는데, 김창연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즐겨 찾는 50대 후반의 유쾌한 산사나이이고, 최유진 · 김성미 선생님도 30대의 여선생님으로 만능 운동선수이며 산을 좋아하는 분들이라고 대장님이 자랑하시곤 하였었다.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으나, 그 즐거움만큼 힘든 산행이 파도같이 이어져서, <山嶽人이 되는 登龍門>이라고 불리는 공룡 등반은 12시간이상 걸리는 여정이라, 원활한 등산과 귀경을 위하여 우리 산악회는 무박 2일의 일정을 잡고 공룡을 찾곤 하였다.
2003년 7월 여름 산행 때에는, 9시에 제일 연장자인 한영수 선생님 댁이 있는 은마 APT 앞에 모여 출발하였고, 2007년 9월 가을 산행 때에도, 대장님 댁 근처인 선릉역에서 10시 반에 모여 출발하였었다.
이번에는 대장님께서 기 선생님을 선릉역에서 모시고 10시 10분에 일원역 4거리로 오신다고 하였는데, 그 동안 등산 훈련이 부족한 것이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올해 들어 산악회원들의 참여도가 눈에 띄게 저조하여, 2월 이후에는 대장님, 기 선생님과 셋이 하는 단출한 산행이 되곤 하였고 (간혹 김석, 권용태 선생님이 같이 참석하셨다), 8월 29일 북한산 등반 이후에는 그 마저도 이어지지 못하고 보니, 그 동안의 게으름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9월 23일(수요일) 중간고사 시험 감독 후 수행평가 입력을 마치고 나서, 얼른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집으로 내달려왔다.
sunglasses를 쓰고, 산뜻하게 반바지 반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서니, 20년은 젊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흐뭇하였다.
거침없이 대모산의 자연학습장 길을 가로질러 구룡산에 도착하여, 구슬땀을 흘리는 아주머니들을 속으로 비웃으며 성큼성큼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니, 산악회원들 집이 자그마하게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모두들 저 작은 공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다시 비호같이 내려온 다음 이번에는 대모산 정상으로 치달아 올라가서, 헬기장에서 맨손 체조를 하며 심호흡을 하였다.
가족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곤 하였던 잠실야구장이 손바닥 보다 작게 펼쳐져 있고, 일요일 마다 탁구회원들이 찐 감자로 배를 달래며 밤늦게까지 땀을 흘리는 밀알학교도 손톱 만하게 발밑에 놓여있는데, 하얀 구름은 드넓은 푸른 하늘을 가로질러 서로 손을 잡고 마냥 웃고 있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 두 번의 짧은 산행으로 등산 훈련을 마무리하니, 나름대로 자신감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등산가는 날은 모기와 전쟁하는 날
25일(금요일)에는 시험이 끝나는 대로 아이들을 다 보내고, 皮革刀(껌 떼는 칼)와 얼룩 세척제, 걸레를 들고 땀을 흘리면서 교실 바닥의 껌과 얼룩을 제거하니, 나름대로 후련하였다.
남학생 반이고, 몰래 흡연하는 녀석들이 있는지 시커먼 껌 자국과 얼룩이 보기 싫게 바닥을 더럽히곤 하는데,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 혼자 청소를 하면 뿌듯함이 느껴진다.
왕남초등학교에서 저녁 시간에야 퇴근한 아내가, 도시락 2개를 정성껏 준비해주어서 고마웠다.
나도 얼른 배낭을 꾸렸는데, 야간 산행에 대비하여 랜턴을 점검하였고, 큰 산 여행에서 필수적인 우의를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챙겨 넣었다.
6월 13일~14일 초여름 설악산 · 속초 여행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權金城에 올라갔을 때, 뜻밖에 빗줄기가 쏟아져서 여행객들이 당황하였는데, 우리 부부는 우산을 쓰고 여유 있게 둘러본 장면이 언뜻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등반에서도 우의를 가져간 것은 만루 홈런을 친 격이 되었는데, 특히 동해안 지역은 북동기류가 들어오곤 하니, 날씨 예보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깐 눈을 붙이려 하였으나, 끊임없는 모기의 공습으로 잠을 설치게 되니 아쉬웠다.
10시가 가까워오니 저절로 긴장이 되어, 벌떡 일어나 등산 장비를 주섬주섬 챙겨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약속보다 일찍 기 선생님의 전화가 울리는 것이었다.
벌써 일원터널을 통과하였다는 연락이어서, 허둥지둥 일원역 4거리로 달려 나가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赤兎馬의 둥그런 불빛이 번쩍번쩍 반가운 인사를 하여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번 등산의 주인공들을 만나볼까요?”
반소매 차림의 <여름 사나이> 대장님은, 길 안내 잡이 자리인 옆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였으나, 송파 팀끼리 같이 자리 잡고 가는 것이, 그쪽 선생님들에게 편할 것 같아 뒷자리로 옮기려 하니, 최유진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동그란 얼굴의 미녀 선생님이신데, 기 선생님은 나와 같은 일원동에 사는 한 동네 주민이라며 익살스러운 소개를 하면서, 일원동이 무척 크다고 하여 웃음이 나왔다.
일원동은 법정동 명칭인데, 일원동에 속하는 행정동은 불과 4개로, 기 선생님이 사시는 봉천동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기 때문이다.
대장님은 지하철 공사를 하는 광평대로를 달리는 것이 부담이 가는 듯, 삼성병원 골목을 돌아 양재대로로 빠져나가셨다.
적토마가 명일동 굽은다리역에 가까워오자, 대장님은 그곳에서 모실 김성미 선생님 칭찬을 입이 닳도록 하시는 것이었다.
진로상담부에 계시는 상담 선생님인데, 수업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아이들이 몰려들어와, 1달에 400여명을 상담하고 계시는 보배 선생님이라, 담임선생님보다 학생 속사정을 훨씬 잘 꿰고 계신다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다.
최 선생님과 막역한 사이인 듯한데, 계란형 외모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기고 있어서 저절로 호감이 느껴졌다.
대장님은 따님이 사는 명일동을 적토마가 지나고, 따님 또래의 여선생님들을 모시게 되니, 자전거를 타고 따님 집을 다니며 외손주들을 돌보아주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붉은 신호등이 켜져 있는데도, 사람 사이로 빠져나가는 차가 있어서 욕을 해주었더니, 운전자가 차를 세우고 나와 대들었다고 한다.
대장님이 큰 소리로,
“당신이 사람들 생명을 위협할 권한이 있는 거야? 당신 차에 타고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가 무엇을 배우겠어?”
라고 따지니,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정의감이 강한 선생님의 인품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올림픽대로를 달리다 보니, 얼마 전에 개통된 산뜻한 경춘고속도로가 나타났다.
한번 저 길을 신나게 달려 강원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1달도 안되어 아내와 그 길로 부부 여행을 떠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니, 세상사는 알다가도 모를 신비한 秘密이 숨어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남시의 한적한 도로가에, 카메라와 스틱을 든 김창연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 선생님은 도로 주변의 평안함에 마음에 끌린 듯, 느닷없이 김 선생님께 전원주택에 사시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김창연 선생님이 대장님 옆 자리에 앉아 길잡이 역할을 맡게 되니, 자연스럽게 가운데 자리는 두 여선생님이 나란히 앉아 정담을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맨 뒤에는 기 선생님과 내가 11인승 그랜드 카니발의 널찍한 공간을 마음껏 차지할 수 있어서, 편안함이 저절로 느껴졌다.
김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등반하느라 이 길을 많이 다닌 듯, 강원도 가는 도로에 대하여 대장님과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11시 경 양평읍을 통과하였다.
“최 선생님, 모자를 두고 오면 어떡합니까?”
뒷자리에 앉으니 저절로 긴장이 풀어졌다.
다만 내가 앉은 오른 쪽 자리는, 머리 받침대가 없어 쉬기에는 불편한 구조라, 몸을 이리저리 기대어 최대한도로 편한 자세를 찾다보니, 어느새 졸음이 몰려와서 정신없이 꿈나라로 빠져 들어갔다.
졸린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키니, 어느새 적토마는 44번 국도를 2시간이나 달려, 강원도 인제군 한계리에 있는 내설악 휴게소에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려하고 있었다.
밖에 나와 보니 새벽 산골의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파고드는데, 나는 파란 색 점퍼와 긴 소매의 티를 껴입어서 견딜 만 하였지만, 반소매 차림인 대장님과 기 선생님은 꽤 추웠을 것이다.
서울을 출발하기 전 든든하게 배를 채워놓았는데, 대장님은 앞으로의 험한 마등령 등반길을 무난히 주파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식사하길 권유하였다.
나는 배설이 빠른 편이라 내키지 않았으나, 다른 일행들이 모두 동의하여 3만원의 회비를 내가 관리하기로 하고(처음에는 대장님의 고집으로 2만원을 받음), 된장찌개 3인분과 황태해장국 3인분을 주문하니, 종업원들이 재빨리 상을 치워주고, 날듯이 음식을 배달하는 것이었다.
지난 1월 산행 때에는 주인 부부가 돈을 관리하기에만 신경을 쓸 뿐이어서, 모든 음식 서빙은 손님들이 self-service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대접을 받고 보니, 그 사이의 변화가 왠지 낯설기까지 하였다.
설악제가 다음 주이서인지, 축제의 혼잡을 피해 모여든 등산객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대장님은 <이 집 주인이 재벌이 되겠다.>하고 껄껄 웃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부산함 속에서 그만, 최 선생님은 모자를 식탁 위에 놓고 떠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관동별곡을 남긴 정철은 이 길을 가느라 얼마나 고생하였을
까?”
설악동이 목표지점인 우리 일행은, 한계령으로 향하는 44번 국도를 버리고 46번 국도로 갈아타니, 다른 팀은 모두 한계령 길로 향한 듯 고요하기만 하여, 적토마는 가을 강원도 길을 저 홀로 씽씽 달려 나갔다.
어느새 남교리에 도착하니, 대장님이 우리산악회가 십이선녀탕을 찾았던 추억을 말씀하셔서 한동안 대화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용대리를 지나가니, 김 선생님이 가족과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들려주시는데, 6월 산행 길에 랜턴을 들고 어둠 속을 쏜살같이 내닫던 정경이, 슬그머니 눈앞에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군 생활의 추억이 숨겨져 있는 진부령으로 향하는 46번 국도를 작별하고, 새로 단장한 56번 지방도로 진입하니, 오히려 더욱 넓고 쾌적한 느낌이 들었다.
태백산맥을 구불구불 넘던, 해발 825m에 이르는 고개 아래 뚫은 미시령 터널에 들어서니, 무척 길게 느껴지는지, 여 선생님들이 1km도 넘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미시령 터널의 길이는 6.132km),
“차가 다니지 않던 그 옛날에 關東別曲을 남긴 정철은 얼마나 고생을 하였 을까?”
라고 기 선생님이 말씀하였다.
적토마가 동해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지나 우회전하여 설악동으로 향하는데, 불빛에 척산온천이란 간판이 눈앞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6월 아내와 다녀왔던 설악산 여행의 즐거운 기억이 저절로 떠올라왔다.
목우재 터널을 지나 쌍천 옆을 달려 설악동에 가까워 오는데, 갑자기 최 선생님이 모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이미 지나온 여정이 길어 적토마의 고삐를 잡고 발길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 최 선생님이 전화로 내설악휴게소에 알아보니, 주인이 상 위에서 주워 카운터에 놓았는데, 다른 등산객이 가져가 버렸다고 하지 않는가!
모두들 안타까워하는데, 워낙 시골 장터처럼 붐비는 오늘 같은 날에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등산 예절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차엔 애기 둘이 타고 있어요.”
한밤중인 2시 40분경에 설악동 매표소에 도착하였다.
한적한 여름 날 찾아왔으면 무사통과하였을 터인데(아내와의 6월 여행 때는 오후 6시 이후에는 자유롭게 통과하였다.), 단풍철이라 대장님의 예측대로 매표소 직원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1인당 2500원씩 <칼같이>징수하려 하는 것이었다.
대장님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 차엔 노인 한분이 타고 계시고(졸지에 대장님이 경로우대 노인이 되었 다.), 애기(학생) 둘이 타고 있으니(여선생님들이 갑자기 초중고생이 되었 다.), 만원만 받으시지요.”
라고 애교있게(?) 말씀하시니, 나이 지긋한 직원아저씨가 웃으면서 허락해주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설악관광호텔 앞에 적토마를 주차시키고 밖으로 나오니, 여선생님들이 준비해온 간식꾸러미를 일행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2003년 처음으로 공룡을 등반할 때, 양재순 선생님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꾸러미를 건네주시던 모습이, 언뜻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刹那 같은 소중한 因緣을 그냥 세월의 강물 속에 흘려보내지 말고, 마음 속의 밭에 정성껏 가꾸어서, 항상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함박꽃으로 키워내자.>
라고 글을 쓰는 지금도 다짐해본다.
그런데 한밤중 식사 후 등반은 항상 배가 거북한 것이 문제이다.
여선생님들도 부담이 된 듯, 속 시원한 산행을 위해서 화장실을 다녀오시다 보니, 3시쯤에야 깜깜한 설악동을 출발할 수 있었다.
모두들 랜턴을 들고,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선수들처럼 호기심 반 긴장 반 발걸음을 내딛었는데, 산악회원들이 쏟아지듯 밀려와서, 시야에서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주 살펴보아야 하였다.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열을 지어 몰려가는 산악회원들을 보니, 모두를 헤드라이트 랜턴을 착용하고 있어서, 深海에 떼지어가는 夜光물고기가 연상되어지는 데, 등산복에 <캠프>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캠프魚群이 떼지어가는 장관을 대하는 眼福을 누리게 된 셈이다.
“마등령 오르는 것은 언제나 힘들단 말이야!”
대장님은 악어가 엎드려 있는 꼴인 공룡을 수월하게 등반하기 위해서는, 머리에 해당하는 마등령을 한밤중에 먼저 등반하고 나서, 땀이 흐르는 낮에는 공룡능선을 꼬리 쪽으로 내려가면서 주파하여야 한다며, 김 선생님과 여선생님들께 오늘 일정을 설명해주시는 것이었다.
기 선생님과 내가 선두에 서고, 송파공고 팀이 여 선생님들을 호위하며 뒤를 따랐는데, 3km를 걸어 3시 40분쯤 비선대 휴게소를 지나쳤다.
쇠다리를 건너 삼거리(천불동 계곡 코스, 마등령 코스, 설악동 코스가 나뉘는 곳)를 지나면 3.5km 여정의 가파른 마등령 고갯길을 오르게 된다.
슥슥슥 지나치며 앞장서 가곤했던 산악회원들도, 3시간이 넘게 걸리는 된비알을 오르다 보니 지쳐서, 여기저기에 낙오병들이 속출하고 가쁜 숨들을 내뱉곤 하는 것이었다.
또한 피곤에 지친 각 산악 팀이 줄지어 오르다 쉬다를 반복하다 보니, 분실 사고가 일어났는지, <내 스틱을 누가 가져갔어? 앞으로 10시간을 어떻게 버티란 말이야!>라고 고래고래 외치는 고함 소리도 들렸다.
산악회원들이 이 정도이니 여선생님들의 고충이야 두말 할 나위가 있겠는가?
특히 등산 경험이 별로 없는 가장 젊은 최 선생님이 힘들어하셨다.
김창연 선생님이 미리 준비해온 압박붕대와 스틱을 빌려주셨지만, 평소 착용해보지 않아서 오히려 부담스럽다며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원효대사의 수양처로 유명한 金剛窟을 들르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최 선생님의 배낭을 대장님이 메고 천천히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워낙 힘든 구간이어서인지 도로 내려오는 팀들도 눈에 띄었다.
최 선생님이 뱃속이 불편한 듯 볼일을 보는 동안, 가까이는 김성미 선생님, 멀찍이는 남은 일행들이 보초를 섰는데, 한 차례 野營(?) 후에는 최 선생님의 발길이 한결 가벼워졌으니, 심야시간 등반의 成敗가 뱃속 사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바위 사이로 난 돌길을 오를 때, 엉덩이를 붙일만한 좁은 공간만 있으면 휴식을 취하면서 여 선생님들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갑자기 머리 위쪽 껌껌한 바위 너머에서 <여기가 멋진 전망대이니 쉬고 가시오.>하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용기를 내어 일행들을 모시고 바위 뒤로 돌아가니, 동해 쪽으로 속초시내의 불빛이 반기고 있고, 설악동에서 공룡을 향하는 랜턴의 불빛이, 움직이는 가로등처럼 몰려오고 있어서 壯觀이었다.
쏟아지는 눈송이처럼 빛나는 별빛 속에 어린 날의 눈망울이……
대장님은 쏟아지는 눈송이처럼 빛나는 겨울 별자리를 가리키며, 여선생님들에게 설명해주시는 것이었다.
시골 하늘이라서 플레이아데스(pleiades)가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것이, 가슴을 벅차게 하였다.
이 성단은 맨눈으로 보면 6~7개의 작은 별이 작은 국자 모양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실제는 지구에서 400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散開星團이다.
우리 은하에는 신생별이 모여 있는 플레이아데스 같은 산개성단이 2만개나 있다고 하니, 우주의 광대함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는데, 플레이아데스 안에만 500~3000개의 별들이 숨어 있다고 한다.
깜깜한 시골 밤중에 아이들과 동네 마당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놀던 어린 시절, 머리 위에서 미소 지으며 지켜봐주었던 반가운 별들인데, 제우스의 형벌을 받아 평생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巨人 아틀라스의 7자매라는, 그리스 신화를 품에 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옛 추억에 잠겼다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오른 쪽 무릎 위 관절 부위에서,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시큰거리는 痛症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한동안 오른 다리를 움직이기도 힘겨울 정도로 강렬하였는데, 공룡 등반 후에도 운동하면서 가끔씩 찾아오니, 이제는 몸 관리가 소중한 나이가 된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공룡능선은 해리포터 영화의 가장 멋진 주인공
서로 격려해주며 오르다보니, 어느덧 아침 6시가 되어 黎明이 밝아오는 것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랜턴을 끄고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니, 온갖 단풍이 우리 주위를 곱게 둘러싸고 있었다.
빨강 색 단풍나무, 노란 색 싸리나무, 자주 색 철쭉나무, 황갈 색 상수리나무
가 힘겹게 오른 우리 일행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감기 기운을 이겨내며 선두 그룹에 낀, 김성미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김창연 선생님은 앞뒤로 이동하며, 설악산의 멋진 정경과 우리 일행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대장님은 손가락처럼 솟구친 세존봉(해발 1025m)을 향하여, <저 봉우리가 안 보이는 곳까지 오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룡능선이 보인다.>라고 설명하시면서, <구 선생이 배낭을 메어주면 최 선생님을 업고 거기까지 올라가겠다.>라고 말씀하셔서,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났다.
6시 반쯤 마치 신선 세계로 향하는 관문인양 우뚝 버티고 서 있는 金剛門을 넘어서니, 안개구름에 가린 나한봉과 마등령이 나란히 마주보고 손을 흔들고 있어서, 저절로 발길이 멈추어졌다.
그러나 자꾸 안개구름이 짙어져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10분을 더 걸으니 예전에 보지 못하였던 展望臺가 눈길을 붙잡았다.
일행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기 선생님과 얼른 전망대에 오르니, 지난 날 공룡을 처음 親見하며 느꼈던 벅찬 흥분이 다시금 물씬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발아래에는 여명을 헤치고 세존봉이 늠름하게 우뚝 솟아 있는데, 머리 위에는 살짝 비킨 안개구름을 배경 삼아, 공룡능선이 <해리포터 映畵의 가장 장엄한 무대 위에 선 주인공>처럼, 회색빛 도포를 갈아입고 빙긋이 웃으며, 우리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갈 길을 잊고 한없이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오늘의 主人公을 마지막 뵙는 순간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등령에서의 아침 식사
아침 시간인 오전 7시 20분에 마침내 마등령 고개에 올라섰다.
3시간 10분의 예상 시간에 30분이 지체된 셈이나, 오늘 산행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코스에, 생애 처음 도전한 여선생님들로서는 선전하였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발고도 1327m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일행의 눈길을 끄는데, 이곳은 4거리이어서인지 마치 시골 장터처럼 각종 산악회원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설악동, 서쪽으로는 오세암, 북쪽으로는 제한구역인 저항령, 남쪽으로는 공룡능선으로 갈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인파를 헤치고 공룡능선 방향으로 내려와서, 예전 공룡 등반 때마다 식사를 했던 공터에 도착하니, 다른 두 팀이 벌써 맛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2007년 2차 등반 때 우리산악회를 반겨주었던 고목 등걸이 사라진 것이 섭섭하였으나, 각자 편한 자리를 잡고 배낭을 풀었다.
두 여선생님은 김밥을, 대장님은 유부초밥을, 기 선생님은 햇반을, 김창연 선생님은 도시락과 함께 떡을 내놓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각종 반찬을 즐겁게 나누워 먹다보니, 灰色 遮日을 친 듯한 안개구름 속에서, 등산 점퍼를 걸치지 않은 두 여선생님들이 추위에 떨고 계시지 않는가!
이구동성으로 여선생님들께 옷을 껴입으실 것을 권해드리자, 두 여선생님은 재빨리 안개 장막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오늘 안개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다시는 恐龍을 밟지 않겠다.”
식사를 마치고 8시 쯤 나한봉(해발 1276m)을 향해 발길을 내딛는데, 길은 정비되어 지난 등반 때처럼 돌너덜을 통과하는 힘든 수고는 덜 수 있었으나,워낙 짙은 구름 속을 통과하니, 外雪嶽의 장엄한 바위 봉우리들과 內雪嶽의 수려한 계곡을 감싼 능선들을 하나도 내려다볼 수 없어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대장님은 온갖 고생을 겪은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오늘 안개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다시는 恐龍을 밟지 않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으나, 2003년 1차 등반 때처럼 동해 쪽에서 계속 海霧가 밀려와서 不吉한 예감이 들었다.(해무가 밀려오면 구름이 더 짙어지고, 결국 비가 내렸다.)
하릴없이 <巨人 아틀라스의 거대한 팔뚝> 같은 筋肉美를 뽐내는 장엄한 바위 덩어리들만 감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공룡능선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천 도드람 산악회원들과의 만남
나한봉을 지나 다시 오르막 고개 마루에 숨차게 올라가보니 다리에 쥐가 나서 落伍된 이천 도드람 산악회원들이 있었다.
<도드람>은 이천시에 있는 유명한 바위산 이름이다.
높이는 349m 밖에 안 되지만 아기자기한 바위 등반코스가 일품이며, 절벽 위에 있는 석이버섯을 따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진 孝子를 산돼지가 구해주었다는 아름다운 傳說이 있는 산이다.
대장님은 동료 회원에게 발을 꼭 붙잡게 하고 비전의 마사지 기술을 발휘하여 치료해주었는데, 50대 후반~60대 초반의 이분들과 우리 일행이 이 후에도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동행하곤 하였다.
10시 경 가장 긴 오르막을 산악회원들과 뒤섞여서 열을 지어 오르는데, 성질이 급한 여자 회원이 다른 여자 회원을 향해, <아주머니, 비켜나주세요. 다른 사람들이 지체되잖아요.>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다음 주에 登攀大會가 열리는 설악제가 있어서, 일반 등산인들 등산이 統制되기 때문인지, 엄청나게 많은 산악인들이 이번 주말에 몰려와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되니, 이 아름다운 등산로를 걸으면서도 산악회원들조차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화대가 눈앞에 있는데……
선두에 서서 넓은 공터가 있는 오르막 꼭대기에 발을 내딛으니,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天花臺의 絶景을 감상할 수 있는, 1275峰 중턱이었다.
마등령에서 2.1km 구간을 2시간 40분 만에 걸어, 정상 속도에 비추어 겨우 20분 지체한 셈이니, 꿋꿋이 버티어준 여선생님들의 놀라운 의지력에,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아래로 이어진 천화대의 봉우리들은 아득히 천불동 계곡 끝자락 비선대까지 이어지는데, 하나하나가 奇奇妙妙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아름다운 천화대의 봉우리들을 오르는 <천화대 릿지 코스>가 개발되어 있으나, 일반인의 등산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어서, 설악산 국립공원으로부터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며, 암봉을 오르는 등산 장비를 갖춘 전문 클라이머가 아니면 절대 가서는 안 되는 구간이다.
그러나 조심조심 1275봉에 오르면 천화대의 연봉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룡능선 맞은편에 있는 神仙臺의 멋진 정경도 가슴에 담을 수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공룡능선 등정의 白眉가 아닐 수 없다.
2003년 1차 등반 때에는 대장님을 따라 올라가서 안개 속에 출몰하는 암봉들을 보며 대자연의 奧妙함을 뼛속 깊이 새길 수 있었으나, 2007년 2차 등반 때에는 바로 이 공터에서 다람쥐의 재롱을 보다가 그만 등정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냥 내려가 버려서,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방이 온통 짙은 회색 장막으로 가려져 있으니, 우리 일행은 茫然自失한 채 고된 등반의 피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천 도드람 산악회원이 건네주는 호두를 씹으며, <장터에 雲集한 군중 같이 북적이는> 등산객들을 바라보니, 젊은 산악회원 하나가 주저앉아 있고 인솔 대원인 듯한 사람이 무전기로 관리공단과 교신하고 있었다.
사연을 들으니 산행 중 위에서 돌이 굴러 내려와 다리를 다쳤다는 것이다.
등산인파가 밀려드는 오늘 같은 날은, 事故의 危險이 더 높아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쉽게 지나친 신선대야!
천화대로 향하는 내리막길에는, 안전사고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2007년 2차 등반 때 인부들이 박았던 쇠말뚝과 쇠줄만 놓여있을 뿐, 물줄기는 찾아볼 수 없어서, 가을 가뭄이 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화대능선을 올라서도 안개 장막에 가려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능선에 오르지 않고, 계속 내리막길을 따라 하릴없이 신선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님은 1275봉에서의 아쉬움을 달래고 싶으신 듯, 1 ․ 2차 등반 때처럼 우리산악회원들을 神仙臺 봉우리까지 데려가기 위해, 옛 등산로로 올라가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잡목이 길을 막는 옛길은 어느 등산객도 가지 않을뿐더러, <登山禁止區域> 표지목이 너무도 선명히 발걸음을 막고 있어서, 앞장서서 대장님께 간청하여 발길을 돌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秀麗한 신선대의 선녀, 仙人들과 인사를 나누지도 못하고 우회하며 지나치니,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데, 10시 40분쯤부터는 드디어 海霧가 비구름으로 바뀌어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서둘러 K2 등산우의를 꺼내 입으며, 일행들에게 착용할 것을 권유하였다.
해무가 동해에서 밀려오면 계속 비가 왔던 1차 등반 때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빗속 행군 길의 여러 장면들
멈칫거리던 일행들도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니, 하나 둘 배낭을 여는 것이었다.
기 선생님은 나와 같은 등산우의를 꺼냈으나, 송파 팀들은 비닐우의를 집어 드는데, 김성미 선생님은 감기 기운을 막기 위해 수건으로 목을 감싸고 있어서, <우의를 입으면 더워지니 수건을 푸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정작 큰 산 산행 때 우의준비를 강조하곤 하였던 대장님은 우의를 준비하지 않아서, 반소매 티셔츠만 입은 채 6시간 동안 비를 흠뻑 맞으셨으니, 어떠한 사람이라도 앞길을 完全히 對備할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줄을 지어 빗길을 行軍하듯 산악회원들과 뒤섞여서 전진하는데, <청주4050산악회>는 남녀가 뒤섞여 있고, 사랑 표시가 두드러진 것이 40~50대 부부들 모임인 것 같았다.
등에는 닉네임을 새겼는데, <산적 두목> ․ <산 속의 공주>등 재미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2003년 1차 등반 때는 喜雲閣 대피소 위 고개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빗줄기가 쏟아졌었는데, 오늘은 2시간이나 일찍 우천 등반을 하게 되니, 대장님은 은근히 점심 식사를 걱정하셨다.
1275봉으로부터 3km를 역시 정상 속도로 3시간을 걸어 1시 경 희운각 입구 갈림길에 도착하였는데, 비가 계속 내려 신선대에서부터는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발걸음이 빨라진 덕분일 것이다.
빗줄기 속에서 힘든 행군 길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을 여선생님들이 안쓰러워졌다.
어느 산악회는 간편한 간식을 준비해온 듯, 우의를 입은 회원들이 빙 둘러서서 우의 속으로 음식을 주고받으며, <번개 식사>를 하기도 하였으나, 엄청난 등산 인파에 비하여, <빗줄기를 피하며 쪼그려 앉을만한> 공간은 턱도 없이 부족하여, 대부분 패잔병 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님은 이제는 발걸음조차 제대로 떼기가 힘겨워 보이는 여선생님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드리고 싶은지, 나와 기 선생님에게 식사 장소를 찾아내기를 독촉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키 큰 활엽수가 <어찌할 수 없다.>는 듯 팔을 벌리고 서 있고,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무심하게 뒹굴고 있는, 천불동계곡 어느 구석에도, 움츠린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 선생님이 비명을 지르며 枯木같이 쓰러졌다.
넘어지며 심하게 쥐가 나서 무척 고통스럽다며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대장님은 나에게 기 선생님의 다리를 꽉 잡도록 한 다음, 다시 秘傳의 마사지 기술을 발휘하여 치료하면서, 자신도 이번에 두 번이나 쥐가 나서 고생을 하였다고 고백하여 깜짝 놀랐다.
수없이 공룡을 다녀온 達人도 이러하니, <공룡의 길>이 얼마나 힘든 旅程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리 아래에서나 식사할까요?”
희운각 갈림길에서 내려오며 계곡을 바라보니, 2시간 넘어 빗줄기가 쏟아졌는데도, 천불동 계곡의 자랑인 천당폭포, 양폭포의 물줄기는 빈약하기만 하여, 비록 3차 등반이 실망스러웠으나, 이 빗줄기가 설악산의 온갖 生命을 살리는 甘露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갈림길에서 2km 거리인 양폭 대피소에 2시 반경 역시 정상 속도로 도착하였는데, 예상했던 대로 <송곳을 꽂을 만한> 빈터만 있으면 사람들로 가득 차서, 우리 일행은 쓸쓸히 발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씁쓸한 마음에,
“다리 아래에서나 식사할까요?”
라고 농담을 던지니, 김창연 선생님이 웃으시는 것이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는 뗏목을 엮어놓은 듯 사방에 빈 공간이 나 있어서, 오가는 사람의 등산화 흙덩이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위에서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니, 식사 장소로는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지친 여 선생님들은 화장실을 찾았는데, 이곳도 만원이라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이어지는 행군 길에서 대장님은 에너지 보충이 절실하다고 느꼈는지, 비에 젖은 배낭을 열고 점심 식사용으로 남겨둔 유부초밥을 꺼내어, 일행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빗속을 걸으며 초밥을 먹으니, 軍 시절 강원도 산길을 밤낮없이 행군하던 추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대피소를 떠나서도 빗줄기가 이어져서, 제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편히 쉬지도 못하면서 2시간 넘어 걷게 되니, 비교적 꿋꿋이 견디었던 김성미 선생님도 탈진 상태에 이르러 안타깝기만 하였다.
계곡의 岩壁美를 대장님이 아무리 설명하셔도, 여선생님들 귀에는 건성으로 들리는 듯하였다.
동동주를 건네는 따스한 손길 속에 설악의 향기가……
그런데 양폭 대피소에서 3.5km 거리를 2시간 10분 만에 정상 속도로 걸어, 한밤중에 지나쳤던 비선대 휴게소가 눈에 들어오는 삼거리 갈림길에 이르자, 지금까지의 우천 산행이 <개구쟁이의 심술궂은 장난>이었던 것처럼, 거짓말같이 날씨가 개지 않는가!
대장님이 아쉬운 듯 혀를 차며,
“자식을 위하는 길이라면 다시 공룡을 한 바퀴 돌 수 있겠는데,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가지 못할 것 같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오랜 동안 막내아들을 위하여 獻身해온 대장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일행들은 서둘러 거추장스러운 우의를 벗고, 휴게소로 나는 듯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돌이켜보면 설악동에서 마등령까지 6.5km를 4시간 20분에, 공룡능선 5.1km를 5시간 40분에, 천불동 계곡 8.5km를 4시간 20분에 차례로 뛰어 넘어, 산악인이 되는 공룡능선 코스를 마침내 일행 모두가 完登한 것인데, 정상 속도와 비교해 보면 겨우 20분이 지체된 셈이다.
20.1km의 가시밭길을 14시간 20분 만에 무사히 걸어, <山嶽人 試驗>을 통과한 보람을, 동동주를 권하는 따스한 손길과 웃음꽃에 가득 담아 나누다 보니, 어느덧 雪嶽의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 2009년 10월 31일 적음 )
첫댓글 표현이 사실적이면서도 비유가 멋지게 표현되었군요. 저는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바로 쓰는 편인데 한 달 뒤의 글인데도 기억이 정확하여 놀랍습니다. 산행기 말고도 많은 글을 써서 보여 주세요.
선생님과 함께 공룡을 걸었던 기억이 이제는 다시 즐거운 추억이 되었군요. 선생님의 격려 덕택으로 이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우리산악회의 지난 여행기와 산행기도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공룡을 제가 직접 탄 것처럼 생생합니다. 우중산행을 비옷도 없이 6시간 동안 하신 대장님은 군대생활을 어디서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다 내려와 비 그친 건 산의 심술이 아니라 축복이랍니다. 님들은 홍수비를 멈추게 하여 공룡을 물속에서 구한 전사들이구요, 하하...
선생님과 멋지게 공룡 등정을 하고파집니다. 대장님은 군대 생활도 하지 않은 분인데, 철인같은 의지력과 체력을 갖추고 있으셔서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가지 않으면 물 폭탄을 맞곤 하니, 다음에는 꼭 선생님과 함께 가서 전사의 옷을 벗고 제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