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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은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 후 18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1863년 최제우를 체포, 대구에서 1864년 3월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한편,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이에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 ·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衍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 ·무장(茂長) ·금구(金構) ·부안(扶安) ·고창(高敞) ·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 ·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 ·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12개조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남양만에 상륙하였고, 일본도 텐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7월 26일경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 ·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 ·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 ·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 ·금구 ·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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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경주 지방 출신 잔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東學)은 ‘동양의 학문’ 혹은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을 비롯해 당시 들어 오던 서학(西學)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최제우가 창시한 이 동학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에 뜻을 두어 일부 지식인과 일반 농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동학의 교세가 날이 갈수록 커지자, 정부는 혹세무민의 이유를 들어 교주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에 동학의 교세 확장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후 동학 교도들은 1892년과 1893년에 두 차례의 집회를 열어 처형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 동학 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진행 - 반외세 운동으로의 확대
동학의 지도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교단의 지도자들이고, 하나는 농민 지도자들이다. 교단 지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시형과 손병희 등으로 포교의 자유 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농민 지도자의 대표는 전봉준, 황하일 등으로 교단 지도자와는 달리 사회 변혁에 뜻을 두었다.
이들 중 농민 지도자였던 전봉준, 황하일 등은 전라도 금구에 동학 교도 및 농민 1만 여명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또 보은에 모여있던 동학 교도들 역시 금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전국적 봉기를 꾀하였다. 특히 보은의 동학 교도들은 지도부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양이를 처부수고자 의병을 일으킴)’, ‘보국안민’의 명분을 내세워 그들을 설득하려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정부의 탄압과 교단 지도부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으나, 전봉준 등은 이에 굴하지 하고 기회를 노려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고부 봉기를 일으켰다.
전라도는 예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농민들은 항상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고부는 전라도에서도 으뜸가는 곡창 지대였다. 이러한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심해지자, 1894년 1월에 전봉준(1854년-1895년)과 수백 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로 나섰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고,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3월 11일 ~ 12일)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위 사건을 민란으로 규정하고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무장을 갖추고, 김개남, 손화중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봉기라고도 불리는 제1차 농민 전쟁이다.
농민군은 1894년 3월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이었고, 동학 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 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부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시작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기로 했다. 동학군은 이런 상황에 따라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