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대마도(쓰시마섬) 기행기 [기자 : 서용선] |
꿋꿋한 자존위에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야
새벽안개를 가르며 달려온 선창가엔 대마도 여행객들로 북새통이다. 대마도(씨시마섬) 부산에서 49.5km인 대마도는 배로 1시간30분 정도의 거리다. 본토 후쿠오카와는 138km 떨어져 있다 하니 일본인보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행정구역상 나가사키 현에 속해 있는 쓰시마는 두 개의 섬이라는 두시마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면적은 거제도의 2배, 제주도의 3/5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본섬 외에 107개의 작은 섬들로 되어있다. 사람이 사는 곳은 5곳뿐이고 섬의 길이는 82km, 폭은 18km이다.
대마도 유명산(아리아끼)정상 해발558m은 일본이 우리나라 정벌을 위해 거제도 옥녀봉, 부산영도 고갈산, 일본 미케다 정상, 4점을 기점으로 측량을 시작한 곳이다. 89%가 산지로 이루어진 대마도 유명산(아리아끼)은 삼나무(히노끼나무)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어 등산객들에게 건강에 유익한 피톤치드를 많이 공급한다. 무슨 일이든 세밀하고 꼼꼼히 체크한다는 일본 세관의 짐 검사는 상당히 까다롭고 세심했다. 지문채취와 얼굴 카메라 촬영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장소는 비좁고 불편하다.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 대기소라서 신경을 덜 쓰는 것인가? 하는 불쾌감이 약간 들었다.
2박3일의 여정을 잡은 우리는 먼저 유명산을 등반하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삼나무(히노끼나무)가 쫙쫙 하늘로 뻗어 등산로마다 피톤치드의 바다인양 맑은 공기가 폐부깊이 상쾌하다. 정상의 쾌재는 우리의 핸드폰이 터진다는 흥미로움까지 가져다준다. 산속 깊은 곳까지 일일이 사람이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니 일본인의 끈기와 집념이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삼나무 숲을 보고 우리 민족들을 징용으로 끌고 가 대대적인 식목행사를 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을 상징하는 포근함을 안고 있다는 유명산 자락엔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기념비가 서 있어 아픈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게 한다.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는 대마도 도주(마지막도지사)와 정략적으로 결혼하게 되고 망향의 그리움과 이방인의 고독은 급기야 정신(우울증)병에 시달리게까지 한다. 남편은 우울증인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다시 하니 덕혜옹주의 딸은 유서를 써 놓고 산속으로 살아져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 비운의 옹주를 위해 대마도에서 숯을 구우며 살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결혼기념비를 세워 주었다하니 한 서린 우리 조상들의 수난사가 눈앞에 선하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세웠다는 고려문 옆엔 '통신사기념탑비'가 서 있어 잠시의 위로가 된다. 세종때 이종무가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르고 1419년 배227척을 거느려 '쓰시마'를 정벌하였지만, 산지로 이루어진 대마도에서 식량조달이 어려워 퇴진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일본인이 땅을 가져가게 되었으니 아쉽고 원통한 생각이 든다. 백제가 멸하고 신라에 흡수되지 못한 백제의 귀족들은 일본(나라현)에 스며들게 된다. 자연스럽게 일본은 백제의 우수한 문화를 어부지리로 얻게 되니 17,18C에는 일본 도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고 나가사기항과 대마도는 서양과 중국과의 무역이 허락된다. 최근에는 예리한 칼날까지 도자기로 만들 정도로 도자기 기술이 발전하여 우리나라보다 그 기술이 앞설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기술은 그들이 앞섰다 해도 도자기의 원조는 우리나라이니 결코 그들에게 근기와 전통을 간직한 혼이 깃든 정신문화만은 빼앗겼다고 생각지 않는다. 정신의 향기는 총, 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또한 대마도에서 생산되는 해수진주는 년 간100억을 벌어들인다 하니 흔히 말하는 경제애니멀(경제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은 비즈니스 성공을 위해서라면 화가 나도 끝까지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은 초기에 포르투칼과 무역을 했는데 포르투칼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려하자 (막부)쇼군들이 자신들의 권력이 흔들릴까봐(자신들보다 하느님을 섬기게 되니까) 포르투칼과의 교역을 중지하고 기독교보다는 무역만을 원하는 네덜란드와 교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 결과 지금도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거리가 있다. 중국과 교역한 나가사키에는 유일한 공자묘가 있으며 '짬뽕'의 원조도 해산물이 풍부한 '나가사키'현이라 한다. 전라, 경상, 양자강(명)에서 해적질을 해서 먹고 살곤 하는 대마도에 조선은 년200석씩 세경을 내려주었다 하니 그때부터 퍼주기 문화가 있었나 보다. 세경을 내려주던 것은 임진왜란때 교역이 끊기게 되고 임진왜란후 200년 동안 12번의 조선통신사가 오고가게 된다. 임진란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10만 명중 1만 명 정도만 고향으로 귀향하게 된다. 나머지 9만 명은 유럽 등지로 노예가 되어 팔려갔다 하니 우리민족이 한의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쟁, 정유재란에 실패한 도요토미는 더 이상 조선에서 힘 빼지 말고 철수하라는 유언을 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철수하면서 자신들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잘라 도요토미에게 보고하게 되니 임진란 후 조선에는 귀와 코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 후 도요토미 신사가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라는 의미로 귀무덤 옆에 만들어졌다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본과 우리의 교역의 순서를 익히며 서산사로 향한다. 대마도를 반드시 거쳐 가게 되는 조선통신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서산사를 카메라에 담으니 감회가 새롭다. 통신사들의 대마도 도주의 수행을 받으며 동경(에도)까지 올라가게 된 것은 쇼군(실권자)이 있기에 먼 거리를 마다하지 못하고 올라갔다 하니 자존심 상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서 조총 2대를 선물로 받은 조선통신사 황윤길은 선조에게 보고하기를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으니 우리도 군사력을 키워 준비하자고 했고 김성일은 전쟁은 없다 라고 보고하게 된다. 선조는 김성희 말을 듣게 되어 임진란을 겪게 되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실권자들의 예리하고 똑똑한 판단력이 아쉽다. 추모비가 지금도 의연하게 일본 땅에 서 있는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로 유배갔으나 적군의 음식은 절대 사절한다는 강직함으로 돌아가시게 된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최익현 선생의 시신을 충남 보은에 모시게 되고 3일간 노제까지 지냈다 한다. 또한 대마도는 원래 1개의 섬이었으나 러일전쟁 시 군사작전상 2개의 섬으로 나누어 러시아 함대를 유인 격파한다. 지금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지도를 바꾸면서까지 치밀한 준비를 한 그들의 철저성을 생각하며 배울점과 버려야할 점들을 간추리는 중, 일본 도주(도지사)들의 신사를 견학하지 않겠느냐 는 가이드의 조심스런 제안이 들어왔다.
일본 도주들이라면 우리민족을 탄압한 제1인자들이 아닌가? 한국 가이드로서의 안일한 태도가 기분을 거슬렸다. 물론 현시대가 다문화시대요, 다민족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시대로 우리만을 옹호하는 민족주의 시대는 아니지만 한국인 가이드로서의 애국교육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섭섭해지기까지 했다. 다양성을 가지라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존 위에 열린 마음으로 장점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지 옛날의 치욕을 모두 잊고 부화뇌동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이드의 제안을 거절하며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태만과 게으름, 안일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본 대마도의 섬들을 돌아보면서 집집마다 작은 공간을 이용하여 꽃과 화분을 내놓은 깨끗한 거리와 작은 티코 차들을 많이 타는 합리적인 일본인들의 사고를 느끼며 배울 점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는 선창가 도시도 흔한 횟집 등 호객 행위를 하는 곳은 볼 수가 없다. 비릿한 생선 냄새도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해변을 바라보며 해수탕을 즐길 수 있는 일본, 할머니들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 일본인들의 친절함이 가히 감탄스럽다. 친구들은 맑고 깨끗한 해변을 거닐며 괜히 선진국이 아니라는 말을 너나없이 공감한다. 한국의 부산이 보이는 전망대에 올라 기념촬영을 하며 개인의 특성과 자유를 존중하고 하나가 되어가는 지구촌 사람들 중 21C를 살아가는 성숙한 세대의 주역은 각자의 마음먹기 달렸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는 진정한 자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꿋꿋한 자존위에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가져야겠다. |
첫댓글 부지런하십니다. 위 글 중 "김성희"는 "김성일"로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성일로 정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