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 ~ 1751. 1721년 10세에 학문 길에 들어섰고, 80의 나이에 죽을 때까지 학문 연구를 했다. 그 동안 성호학파의 학자와 토론하며 실학 사상의 영역을 넓혀갔다. 18세기에 살면서 사상적 고민을 하였던 학자이며 사상가이다. 서학 속에서 전통의 가치와 유교이념을 되살리되 이를 합리적 개선하려 했던 철저하고 전통성을 고집하던 조선학인이다. <순암선생분립, 동사강곡, 하학지남, 열로공기임관정묘, 잡동산이, 성호사설유선>등의 저서가 있다.
1879 ~ 1910. 한말의 교육가, 의병장, 의사. 1907년 국채보상운동 관서 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시작하였다. 그후 1909년 3월 2일 12명의 동지와 단지회를 결성하여 비밀결사를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이토, 이완용 제거를 결의하고 1909년 10월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암살하고 체포되어 1910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주기전 내가 죽거든 독립되기 전에는 한국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조선말기의 화가이다. 서양식 뎃생법으로 대상의 특색을 정확하게 다루었떤 기명절지화에도 능하였지만 그의 화풍을 대표한 것은 산수화이다. 1919년을 기준으로 전기, 후기로 나뉘어지는데 전기는 장승림의 화법을 후기에는 남북종이 융합된 절풍양식을 사용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산수도(1905), 성대수간도(1905), 성대수간도(1911)>등이 있다.
호는 도산이며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점진학교를 세웠으며 공립협회를 만들었다. 1907년 양기탁, 신채호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 1909년 미국으로 망명하여서는 1912년 <신한민보>를 창간 1919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4년에 난징에 동병학원을 설치 1928년에 독립당 조직 1932년 경찰에 체포 1937년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조선의 서예가, 세종의 셋째아들 이름은 용, 자는 청지, 호는 비태당, 낭건지사, 매죽권, 시호는 장조 28년(세종10)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좌부대언 청연의 딸과 결혼 30년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각하여 학문을 닦았고, 38년 함경도에 진을 신설하자 왕자들과 함께 야인들을 토벌했다.
고려후기의 문신, 학자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동행성 유학제도로 있을 때 충렬왕을 따라 원에 갔다가 주자 성리학을 배웠으며, 이를 처음으로 고려에 도입하였다. 원에서 공자의 영정과 서적을 사들이는 등 성리학 보급에 힘써 권부, 백이정과 같은 성리학자들을 양성하였다.
조선시대에 실시되었던 비정규 문과, 무과 시험의 하나=알성과 1414년에 처음 실시. 고시과목에는 목전, 철전, 유엽전, 편전, 기후, 과녁, 격구, 기창, 조총, 편추, 강서 등이 있다.
애국계몽운동은 근대교육, 산업개발, 국학연구, 언론활동, 독립군 기지 건설등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주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자연물과 동.식물에도 영혼이 있으며, 생각, 의식, 욕구 등이 있다고 믿는 원시신앙, 석기시대 미루어 나타난 원시 종교 형태로 오늘날에도 미개 민족에게서 이 신앙을 볼 수 있다.
고려. 조선 시대의 특별행정구역, 평안도 지방인 세계와 함경도 지방인 동계를 일컫는 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고려의 장군 1010년 현종 때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에 쳐들어와 홍화진을 포진하였다. 애전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호는 우강이며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함께 영어로된 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창간하여 그 주필로서 국민의 항일 사상을 일깨웠다.
신라 진성여왕 때의 지방 호족, 신라 하대에 오자 중앙의 잦은 왕위 쟁탈전으로 지방에 대한 수취가 심해졌다. 그러자 지방에서는 이에 항거하는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를 틈타 양길은 세력을 모아 891년에 북원에서 난을 일으켰다.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양명학의 사상체계는 두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그 의미가 새로이 인식되었다. 양명학에서는 알았다고 하여도 행하지 않으면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앎이 있다면 곧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지배 계급인 귀족을 가리키는 말. 문관은 동반, 무관은 서반, 동반 서반을 통틀어 양반이라 하였다. 양반 계급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형식상 철폐되었으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완전히 사라졌다.
박지원의 대표적인 한문소설로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냄으로써 자신의 실학정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조선시대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쳐 부르던 말. 두 관청 모두 언관. 서경의 기능을 가진 만큼 국가 정책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서예가. 자는 응빙. 호는 봉래. 조선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 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
1896(건양 1년) ~ 1934 독립운동가. 호는 벽해. 평안북도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북도 삭주군 소재 천마산을 근거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떤 천마산에 독립군에 입대하여 일제의 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
우리 나라 전근대시대 신분계층의 하나. 양인은 어의 상으로는 혈통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사람. 양선한 사람. 즉 자유민을 뜻한다. 또 양인은 국가가 일원적 인민지배를 위해 마련한 신분제인 양천제에서 천인에 대칭되는 신분범주로서, 천인이 아닌 자를 범칭하는 법제적 용어이다. 양인은 자유인이며 공민이므로, 국가는 원칙상 국역부담의 의무를 부과했고 대신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권리를 부과해 주었다.
[1] 고려시대 중앙교육기관인 국학에 설치한 학생 후생재단. 사학이 융성하면서 위축된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예종이 이전의 국자감을 국학으로 고치면서 일대 개혁을 단행.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를 신축함과 동시에 학교 교육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해 1119년(예종14)에 국학 안에 양현고를 설치. [2]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에게 제공되는 모든 경비와 석전제의 비용을 조달하는 관청.
1816(순조 16년) ~ 1886년(고종 25년) 조선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 무사정 종임의 아들이다. 이항로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 정족산성을 지키던 중 10월 3일 프랑스 해군대령 올리미에를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이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중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함종. 자는 견보. 호는 설곡, 설천. 묵매를 잘 그려서 이정의 묵죽, 황집중의 묵포도와 함께 삼절로 일컬어졌다. 현재 <월매도>(국립중앙박물관)와 <묵매> 등이 전한다.
고려시대 시정에 대한 논집과 상도에 벗어난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의 비위와 불법을 규찰, 탄핵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조선시대 초기의 문인. 본관은 함종. 호는 야족당, 예미. 저서로 조선조 패관문학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패관잡기>가 전한다. 시평, 시론에 뛰어나고 한때 이이를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의 하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국가정세가 어수선하고 국제적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위급해진 가운데 설치되었다. 후금에 대하여 강경책을 포함한 인조는 친정의 계획아래 개성으로 나아갈 것을 대비한 것이 어영군의 시초이다.
1848 ~ 1896 개화기의 정치가. 자는 성림, 호는 일재. 어릴적 부모님을 여의고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하면서 밤에 독서 하였다. 20세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으로 임명되고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국왕과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①장세혁파 ②지세제도 개혁 ③궁량전, 아문둔전 제도의 개혁 ④환곡제도 폐지 ⑤ 도량의 통일등이 있다.
1823 ~ 1871(고종8년) 조선후기의 무장, 본관은 함자. 1841(헌종7년) 무과에 급제, 공충도평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명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그는 광성진에 부임하여 장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諺文志<한글 및 한자음 관계 연구서> 1824(순조24년) 유희의 문통에 수록되었고, 한글 및 국어에 관한 언급과 함께 한자를 올바르게 표기하는 문제를 주요관심사로 나타내고 있으며 전반에 걸쳐 한자음이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이 되도록 힘썼다. 국어데 대한 예리한 관찰을 보여주고 있으며 토음 문자로서의 한글의 우수성과 한글 및 한자음의 관계가 자세히 기록된 연구서이다.
1948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가 일으킨 반란사건. 1948년 남한의 대한민국 건국을 막기 위한 북한의 대규모 공작으로 여수를 장악하였으나 토벌군에 의해 궁지에 몰리자 순천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민가를 불태운 후 상당수는 토벌군에 투항하였고, 도주하던 잔당들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呂運亨 독립운동가, 정치가. 1886년 경기도 양평 출생1910 봉제사 집안 혁신, 노복 풀어줌. 1918 상해 민단조직 광복운동에 터전 마련. 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역임. 1920 공산당 가입. 1929년 영국비난 일본서 3년간 복역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조선 중앙일보 폐간 1945 광복후 스스로 부주석 취임.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19세)의 권총 피살
閭田論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전제 개혁론(현실성이 없는 당대의 토지개혁론을 비판).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확정하여 경계로 삼아 농작과 군사조직 체재를 병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공동 농경으로 노력에 따라 수학을 배분하고 이로 인해 백성이 풍족해지고 농사기술의 진보를 기대할 수 있게된다는 공상적, 농민적 사회주의사상을 내포하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사사으이 총체적 결론이다.
與地志 중국의 지리지 30권. 남북조 시대의 학자 고야왕(519~581)이 편찬. 1091(고려 선종8년)인 것으로 보인다. 즉 이해 6월에 송(宋)나라에서 구하였던 서적가운데 <괄지지(括地志)>500권과 함께 들어있었다.
만주 동부지역에 거주하던 숙신, 읍루계 민족으로 청을 세운 만주족의 전신. 여직이라고도 한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물길, 수.당 시대의 말갈과 같은 계통이다. 여진은 10세기 이래 만주지역의 거란. 발해인 이외의 말갈제부, 특히 동북지역의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한 여러 계통의 토착종족에게 붙여진 명칭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민의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형태로 운영되는 수취체제의 하나. 크게 신역과 요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고려와 조선 전기에는 노동력을 직접 수취하는 형식을 취하다가 점차 변화하여 조선후기에는 대체로 쌀이나 포를 징수하는 현물납의 조세로 변화했다.
조선시대 통역관을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잡과의 하나. 역관과 의관만 기술관의 한 품인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잡과 가운데 의과와 함께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잡과 중에서 역과를 수위에 두었으나 후기에는 음양과가 수위였다.
백제시대 역법의 전문학자.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의 역법을 수용하였으며, 그 와 관련된 전문 관부와 학자도 양성.
140년 고려에서 처음 실시된 토지 분급 제도. 신라시대 때의 문무관 효전을 계승한 것이며, 고려시대 토지 분급 제도인 전시과의 선구가 되었다.
고려 말기의 문신 이제현이 지은 사화 잡록집.
고구려 평양 동사에서 만들어 세상에 유포시킨 연가 7년의 명을 가진 고구려시대의 금동불입상.
666년(보장왕25) 고구려말기의 재상 및 장군, 개금이라고도 하며,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라고 기록.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음 ,당나라에 대한 강경 정책을 폄.
불교적 성격을 띤 국가적 행사의 하나. 551년(진흥황12)에 팔관회의 개설과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 때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찬술한 조선시대의 사서로 전사본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어서, 특별히 정본이 없이 전해져 왔다. 내용은 조선 태조부터 현종까지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고사본말의 형식으로 엮은 원집과 그가 생존했던 시기인 숙종 당대의 사실을 고사본말로 엮은 속집, 그리고 역대의 관직을 위시하여 각종 전례, 문예, 천문, 지리, 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등 여러 편목으로 나누어 그 연혁을 기재하고 출처를 밝힌 별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국내외 업무 연락을 귀한 지하 비밀 행정 조직이다. 상해 임시 정부가 민주적 국민구가로서 국내외 국민간에 독립의지를 상통하고 구국사업의 완성을 기하며, 내외의 독립을 수립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다.
고려 대각국사의 묘지에 보이는 육학종 가운데 하나. 개성 흥왕사 대각국사 묘지에는, 당시의 불교 전공 분야로서 육학종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그 중에 열반종이 있다.
1897~1963 근대 소설가. 본관은 서원이며 본명은 상섭, 호는 제월 또는 횡보이다. 대한 제국 중추원 참의 의식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규환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식민지 사회를 투철히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사실적 문체인 내간체를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문학의 골격으로 삼았다. 저서로는 삼대, 무화과, 사랑과 죄, 이심, 모란꽃 필 때 등이 있다.
아악에서 쓰이는 북의 하나. 지신제사에 영토와 함께 헌가에서 사용된다.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상의 유파로서 영학파, 퇴계 학파, 남명 학파, 여헌 학파의 총칭이다. 영남 학파의 순정 철학이 한국 근대의 철학 사상사에 이룩해 놓은 업적은 높고 깊다고 하겠다.
개항 기에 최초로 청나라에 파견한 유학생의 인솔사행이다. 김윤식이 이를 담당하였는데, 영선사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부여되어 있었다. 무비자강책 실현을 위한 신무기에 관한 학습과 연미사에 관한 사전 교섭이었다.
고려시대 양반, 서리, 군인 등에게 지급하였던 지목의 하나로 본래 중국의 균전법 토지제도에서 규정된 특수한 용어로 구분정에 대칭 되는 지묵이다. 당나라 개원 역간의 영에 의하면, 일반인에 대한 급전은 정남 및 18세 이상의 중남에 대하여 구분전과 영업전은 서로 상호 보완하는 관계에서 농민들에 대한 국가적 급전 시찰의 내용을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에 시행된 전세 징수 법이다. 정식 명칭은 영정괴율 법으로 1635년(인조 13)에 제정되었다. 세종 때 제정된 공법은 전분 6등․ 연분 9등으로 나누어 총 54등급의 과세단위를 설정하여, 그 판정과 운영이 복잡하였고 전체적으로 세율이 높아 현실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15세기말부터 전세는 풍흉에 관계없이 최저 세율에 의하여 쌀 4-6두를 고정적으로 징수하는 것이 관례화 되었다.
조선 21대 왕으로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화경숙빈 최씨다. 비는 서종제의 딸 정성 황후이며, 계비는 심한구의 딸 정순 황후이다. 1699년 연임군에 봉하여지고 1721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는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키고, 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속대전, 무원록을 편찬하였고, 탕평책의 일환으로 탕평파를 육성하고, 군제 개혁과 경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고려시대의 화가 이령이 그린 실경산수화. 문헌상의 기록만 전할 뿐 실물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1124년(인종) 추일사 이자역을 따라 수행화원으로 북송에 갔다가 휘종의 요청에 의하여 그렸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서, 1659년의 기해 예송(서인 승리)과 1674년의 갑인 예송(동인 승리)이 대표적이다. 이 논쟁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을 정통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싸움이었다. 기해 예송에서는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갑인 예송에서는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조선 후기에 수도 및 그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다섯 군영이다. 임진 왜란이후 필요에 의하여 설치된 군영들로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수도를 직접 방어하는 중앙군영이며, 총융청, 수어청은 수도 외곽의 방어를 담당하였는데 이를 오군영이라 한다.
조선 시대의 중앙 군사 조직으로 의흥위, 용양위, 호분위, 층좌위를 말한다. 조선 대국 초에 고려의 중앙군 조직인 8위제 태조 이성계의 친병을 바탕으로 하는 의흥친좌위와 의흥 친군우위를 가설하여 10위의 중앙군 조직을 갖추었다.
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침략을 적극화하면서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의 체결을 발표하였다. 이에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도처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이때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다섯 집을 1통으로 하는 민가의 편제
다섯 가지 경서,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가르치는 전문 교수
1831(순조 31)~1879(고종 16) 조선왕조 19세기 중엽의 개화사상의 비조이며, 역관, 서화가, 금석 학자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원거, 호는 역매, 진재, 천죽재로 서울출신이다. 당상역관이며 지중추 부사인 응현의 아들이고,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세창의 아버지이다. 해주도지, 영환지략, 박울신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신서들을 일찍이 구입해 가지고 귀국하여 연구 1853~1859년경에 초조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863(철종 14)~? 한말의 의사로 호는 손암, 전라남도 강진 출신, 1905연초에 국권수호를 열강에 호소하기 위하여 나인영, 이기등과 함께 포츠머드 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미국에 가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해 6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거물들인 이토, 오쿠마, 모치즈키 등을 차례로 만나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회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역설한 뒤 동경에 머물며 일본 정계의 추미를 지켜보았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그 해 12월 을사오적의 처단을 계획 1906년 시도하였으나 실패, 그 뒤 나인영과 한께 만족종 교인 대종교를 창도, 민족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에 추서 되었다.
고려 시대의 서해도, 교주도,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조선 시대의 중앙군 편제인 의흥위,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
1916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이 중심이 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제 2공화정의 민주당 정권을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 혁명이다. 5․16혁명의 배경과 원인은 사회적 측면과 군내부적 측면의 두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헌종때 실학자 오주 이규경이 지은 책이다. 총 60권 60책 사본으로 내용은 우리 나라와 중국 및 외방의 고금 사물의 크고 작은 것과 아름답고 속된 것을 가리지않고 모든 것에 언급한 1,400여 항목에 달하는 백과 사전을 방불케하는 저술이다.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지방에 위치.
조선 말기에 김옥균, 박영호, 유길준 등이 민비를 배경으로 중국 청 나라의 비호를 받으면서 진보 세력인 개화 독립당과 대결한 보수 세력의 정치 집단을 말한다, 하지만 1894년 청일 전쟁으로 무너진다.
고려의 태조. 개성태생. 918년 왕위에 올라 943년 <훈요 십조>를 남기고 죽음
왕실과 호족세력, 그리고 호족출신의 외척이 서로 얽혀 일어난 정변. 왕권이 미약한 데에서 발생한 고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
고구려 말기 거문고의 대가. 552년(양원왕 8년) 중국의 진나라에서 들어온 칠현금을 고쳐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 곡을 지었다.
신라 때의 승려 혜초가 727년에 인도의 다섯 나라와 인근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돌아와 그 행적을 적은 기행문. (인도와 서역지방의 역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제 근구수왕 때의 학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진 국왕의 태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이때 한문학은 일본인에게 문학의 필요성과 유교의 충효 사상도 보급시켰다)
일본은 서양과 다름이 없으므로 문호를 개방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조선 말기에 위정 척사파들이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제기되 주장으로 최익현의 '오불가소' 속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확대된 영토를 9주로 나눈 신라가 중앙집권적 통치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군에 두었던 감찰임무를 가진 조직 기관.
성곽, 관아, 제방의 축조, 도로의 개수 등 토목공사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 1년중 일정기간 공안 노동에 종사해야 함. 경작하는 토지 8결마다 한사람씩 차출하며, 1년중 동원 일수는 6일 이내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임의로 징발되었다.
조선 세종 때 한글로 지은 최초의 노래. 모두 10원 5책 125장으로 되어있으며, 권제․정인지 등이 왕명을 받아 조선왕조 건국의 사적을 기린 노래이다.
신라 진흥왕 때 가야사람으로 신라에 가서 가야금을 만들어 보급한 음악가. <상가야>, <하가야>등 12곡을 만들었으며, 우리 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수원이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40세 전후 시절(영조 5~13)에 부국 안민을 이루기 위한 방안, 즉 사회 개혁안을 기술한 책이다.
조선 말기에 우편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일명 우정 총국이라 하는데 1882년 행정 조직의 직제를 개편하면서 통리아문을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으로 개칭하고 그 소속으로 정사를 설치하여 근대적 통신 제도가 설치되었다.
1875년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의 상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간의 포격사건이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근대화한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한 첫 조처로 정한론을 수립, 한반도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결과로 1877년 2월 26일 한일 수호 조규 체결을 성취시킬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백제 멸망 후 그 옛 땅에 설치한 당나라의 통치기관이다. 660년 7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을 통치하기 위해 5개의 도독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웅진 도독부에는 13개의 현이 예속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당나라의 계획에 그치고 백제 부흥군의 활동으로 통치는 형식에 그쳤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파고다 공원 자리에 있었던 사찰이다. 고려 때부터 흥복사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왔던 사찰로, 조선 태조 때 조계종의 본사가 되었으며, 세종이 불교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합한 뒤 이 절에 악학도감을 두었다. 옛 원각사지인 파고다 공원에는 현재 국보 제 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보물 제 3호인 원각사비가 남아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료 5가 파고다 공원내에 소재한 조선시대의 십층석탑이다. 높이 12m 국보 제 2호, 이 석탑은 전체를 대리석으로 건조하였고 형태가 특수하며 의장이 풍부하여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례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최우수작이라 하겠다. 이 석탑은 전체의 부재가 대리석인데 전면에 화려한 조각이 석재의 회백과 잘 어울려서 한층 더 아름답다.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의 구조 그리고 표면 전면에 조식된 불상의 조각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십층석탑과 유사하다.
조선 말기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위하여 받아들인 기부금으로 1865년(고종 2) 대원군은 경복궁 중수 계획을 수립하고 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에게 자진해서 돈을 기부하게 하였다. 징수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페를 유발하였기 때문에 '원납전(怨納錢)'이라는 별칭도 나왔다.
1916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박중빈이 일원상의 진리를 대각하고 창교한 종교이다.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교에 두고 있으나 외면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는 신앙대상의 상징이 다르며, 불교와의 역사적 교섭 관계가 전면 없다는 사실이다. 원불교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지니고 있는 특징은 첫째, 한국으로부터의 종교라는 점이다. 둘째, 자타력 병진의 신앙을 제창한 점이다.
1883년 민간에 의하여 함경남도 원사에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군대 학교이다. 개항 후 선작자들은 열강의 도정에 대처하여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지식의 인재를 양성하여야 한다고 보고, 교육이 가장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원산소학교 남산들의 같은 자리에 교사를 증축하고 크게 발전하다가 일제치하에서는 처음에 원산보통학교로, 나중에 원산제일 국민학교가 되어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신라 제 38대 왕. 재위 785-798. 성은 김 이름은 경신. 내물왕의 12세손.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과 더불어 지저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이 때에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하였다.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780년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선덕왕이 자식이 없어 죽자 태종무열왕의 6세 손인 김주원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 788년에는 독서삼품과를 설치함.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은사. 어릴 때부터 재명이 되었으며 일찍이 방원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바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에 올라가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주고 돌아가 아들 형을 기천 현감으로 임명하였는데 후세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라 하였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라 시대의 고승. 이름은 문아. 경주 모량 출신. 3세에 출가하여 15세에 당나라로 가서 유식학 연구의 개척자인 법상과 승변으로 부터 유식학을 배움. 원측은 당에 들어가 유식 불교의 깊은 뜻을 깨달아, 당의 수도에 있는 서명사에서 자기 학설을 강의하였는데, 그는 현장의 사상을 계승한 규기와 논쟁하면서 교리 이해의 우월성을 보여 주었다.
신라 시대의 원효(617-686)는 다른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좀더 높은 차원에서 서로 통합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정립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화쟁사상 또는 연융회통사상이다. 당시 왕실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불교를 대중화하여 일반 서민들의 생활 속에 확산시키는 데 크게 공한하였다. 불교의 대사상가인 원효를 아버지로 한 설총이 당시 유교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신라인들의 학문적 개방성과 조화 정신의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조선 시대의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간행한 책.
월정사에 있는 석탑. 높이 15m, 국보 48호. 고려 초기에 건립. 기단, 탑신, 옥개가 모두 팔각이며 9층임. 기단대석에는 연화 무늬가 새겨져 있음. 다각형 석탑의 대표적 작품임.
고대 조선의 북쪽에 있던 나라 위만이 왕검성에 도읍하여 세웠다. 한 나라와 약속을 맺고 이웃 임둔, 진번. 소음 등을 공략하여 한때 강성하였다.
바른 석을 지키고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이론에 바탕한 새로운 유교적 정치 윤리 사상이다. 위정 척사 사상의 바탕이 된 성리학은 한 대 이래의 훈고학적 유교를 이기설, 즉 의리와 심성을 중심으로 철학화한 형이상학적인 유교이다. 송대 이후 여진족의 무력적인 침공으로 한민족과 중화 문화가 위기에 봉착하다 주자는 한민족의 독립과 문화적 자존심을 확립하고자 중화 문화로서의 유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존왕양이의 춘추에의로 민족적 화이 의식을 근간으로 한 위정 척사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통일기에 이르러 불교의 영향으로 향가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위홍은 진성여왕 때 역대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이란 향가집을 편찬.
고려 32대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가 왕명으로 요동을 치러 가다가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사대 불가론을 주장하고 군사를 돌이켜 고려의 서울 개성으로 쳐들어와 왕을 내쫓고 최영을 유배시킨 사건. 그리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즉위시켜 조선 창건의 기반을 닦았음.
유교의 개량과 구신을 주장한 박은식의 논문. 909년 3월 <서북 학회 월보> 제 1권 제 10호에 거재되었다. 논문의 내용은 유교 계의 3대 문제와 유교를 개혁하여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유교 계의 제 1문제는 유교파의 정신이 전적으로 제왕편에 있고 인민 사회에 보급한 정신이 부족하였다는 점이다. 제 2문제는 공자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천하를 바꾸어 놓으려 한 주의는 강구하지 아니하고 동몽이 유학자를 찾아오기만을 기다림으로써 불교나 기독교처럼 전파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제 3문제는 한국의 유가에서는 간이직절한 법문을 내버려두고 지리한만한 공부만을 숭상하였다는 것이다. 유교 구신론은 민족적 실천 윤리의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삼국의 정치. 사회적 발전과 한학의 발달은 역사서의 편찬사업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이때에 고구려에서 편찬된 역사서가 유기이다. 후에 이문진이 유기를 간추려 신집을 편찬하였다.
1856(철종 7)~1914. 개화사상가, 정치가로 본관은 기계, 자는 성무, 호는 구당이다. 서울 출신이며 진사 진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경직등에게 한학을 배웠다. 1870년(고종 7)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 막영효, 서광범, 김윤식등 개화청년들과 실학 사상을 배우는 한편, 위원의 '해국도지'와 같은 서적을 토하여 해외 문물을 습득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서유견문, 구당시초, 대한문진, 노동 야학 독본 등이 있으며, 1971년에 유길준 전서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유길준 전서' 전 4권이 간행되었다.
1749(영조 25)~?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무화, 자는 혜보․혜풍, 호는 영재, 영암, 고운당이다. 진사관의 아들로 영조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정서로 들러가 활약이 컸으며, 그 뒤 제천, 포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 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도잡지, 영재집, 고운당필기, 양엽기, 사군지, 발해고, 이십질도회고시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