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 go 동영상을 보고 떠오르는 것으로 작문을 작성하시오.
* 지금도 작성하고 있는 분들은 늦더라도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평가 대상 글에 포함하겠습니다.
올린 글은 미리 읽고 토요일(28일) 줌 강의에 참여해주세요.
28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시작합니다. 15분 전부터 접속 가능합니다.
# 1.
버스가 급정거하며 승객들이 앞으로 쏠린다. 승객들이 넘어지거나 서로를 모르고 치는 등, 다소 억울한 상황이 일어난다. 뉴턴은 이 현상을 ‘관성’이라고 불렀다. 관성이란 변화를 거부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멈춰있는 물체는 계속 멈춰있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물체는 관성의 상태를 유지한다. 뉴턴은 이를 ‘관성의 법칙’으로 정리했고, 만유인력의 법칙과 함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로 묶어 발표했다.
뉴턴이 자연의 법으로 밝혔듯이, 변화를 거부하는 관성은 만물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늘 가던 미용실의 닫았을 때 느끼는 불안감, 늘 먹던 단골 메뉴 맛이 달라졌을 때의 상심, 늘 같은 자리에 있었던 리모컨이 없을 때의 분노. 모두 우리의 본능적인 관성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관성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관성보다 더 강력한 힘의 개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힘에는 똑같은 반작용이 있는 법. 세상을 내 맘대로 바꾸기보다 관성에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탈이 없다고 느끼는 이유다.
‘대하무성’, ‘이 또한 지나가리라’ 등의 격언에서 볼 수 있듯, 관성의 법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적인 삶의 자세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타당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관성의 영명인 ‘inertia’의 어원은 ‘게으르다, 쉬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iners’다. 멈춰있는 관성이든, 움직이는 관성이든, 그 본질은 변화에 대한 저항, 즉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을 거스르는 수고스러운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은 진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이런 게으름이 악을 낳는다고 했다. 우리는 특별히 악하게 태어나거나 어쩔 수 없이 악해져 가는 것이 아니다. 관성을 깨뜨리지 않는 게으른 일련의 선택들로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악해져 가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관성에 충실했던 개인들이 빚은 악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홀로코스트의 실무 총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있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실체를 알게 됐을 때 모든 기쁨을 잃고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관성에 저항하기보다 따르는 게으름을 선택했다. 그 결과 그는 500만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은 군인으로서 지시받은 업무를 다한 선량한 시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가 그 시대의 극악한 범죄자 중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inertia, 게으름이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자연법칙을 따라야 한다. E=mc2.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공식이다. 여기서 E는 에너지, m은 질량이다. 작은 질량도 엄청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음을 밝힌 공식이다. 다만, 한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바로 c, 빛의 속도다. 내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빛의 속도로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히고 행동할 때 미약한 질량 덩어리에서 엄청난 에너지로 전환 될 수 있게 된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세상과 부딪히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관성을 거스르는 생각과 행동은 상상 이상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 2.
[세입자 강제퇴거 명도소송청구]
- 원고: 지구
- 피고: 인간들
[청구취지]
1. 피고는 원고의 토지에서 즉시 퇴거한다.
2. 소송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
[청구원인]
1. 피고는 원고의 토지를 수 억만 년 간 무단 점유했다.
2. 피고는 원고의 재산을 훼손하고 멋대로 개발하여 재산상의 이득을 취했다.
3. 피고의 기만적, 위선적 행위는 원고에게 정신적 피해를 입혔다.
2020년 12월 31일
더 이상 못 참겠다! 오늘 유튜브에 그 동영상만 안 올라왔어도 이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다. 공이 굴러가다 도미노를 치고, 돌고 돌아 어찌어찌하다 물감을 뿌려댄다. 자기들끼리 환호하고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다. 재수 없는 인간들. 협동? 사람들과의 연대? 웃기고 있네. 고작 3분짜리 영상하나 만들겠다고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만들어 내다니. 저기 저 우산, 풍선, 페인트, 깡통이며 어떻게 했을지 뻔하다. 또 나보고 다 먹으라는 거지. 지겹다. 지겨워.
그래 맞다! 생각해보니 쟤들은 태초부터 별로였다. 다른 동물들은 적당히 배만 채우고 살다 가는데 인간들은 욕심이 많아 꼭 탈이 난다. 배가 불러도 저장을 하고 그것도 성에 안 차 자식한테 까지 물려준다. 지능이 좀 발달하니깐 과학이라는 거악을 배워 온갖 발명품을 만들어낸다. 나침반, 선박, 자동차... 자동차 매연에 기침이 좀 나지만 뭐 여기까지는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우라늄을 이용해 핵을 만들어 냈을 때는 등골이 서늘해졌었다.
눈치도 엄청나게 없다! 그동안 폭우, 폭염, 폭설에다 메뚜기들에게 부탁해 하늘을 점거하라고까지 했다. 며칠간은 ‘지구야 미안해’ ‘Save for Earth' 구호를 외쳤지만 일주일도 못 가 잊혀졌다. 일부 환경운동가들이 일회용품 사용금지, 석탄연료 사용금지 캠페인을 열었을 때는 고마운 마음에 인간을 다시 사랑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유튜브의 그 영상을 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간들이 여기 계속 붙어있는 이상 내 몸은 정화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쟤들은 암세포다. 수 억만 년 간 쟤들을 믿은 내가 바보다. 제발 떠나가라 인간들아.
# 3.
밝은 달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달은 캄캄한 서울의 거리를 비추고 있었고,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0000병원 19층. 준영은 총을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죽으면 평온하게 죽을 수 있을텐데. 죽음을 고민하는 그의 눈 앞 문 밖에는 좀비들이 어떡해서든 문을 열어보겠다고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살 방도가 없었다. 과연 해가 뜨기 전까지 저 문이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좀비가 돼서 서울을 배회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준영은 괴로웠다. 그만하자. 지쳤다. 준영의 검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호흡기 질환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죽음과 동시에 그들은 영혼을 잃은듯 짐승의 소리를 내었고 사람을 잡아 먹기 시작했다. 준영은 군인으로 그런 사람들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가족들을 후방으로 보내고 그는 최전선에 남아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막았다. 그의 그런 경험이 서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백신 연구팀을 찾아가 완성된 백신을 구해오는 팀을 이끄는 역할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서울에 들어온 준영은 황폐화된 서울이 낯설었다. 가족들과 함께 가던 신촌 로데오는 황폐화된지 오래고, 곳곳에 썩은 내가 진동했다. 후… 자살인가? 준영 눈 앞에 머리가 으깨진 시체 두 구가 보였다. 아이와 여성. 좀비가 이미 두 시체를 좀 파먹은 듯 속이 보였다. 준영은 서둘러 팀을 이끌어 백신 연구소가 있는 0000병원으로 향했다.
연구소에 도착한 준영은 마음이 급했다. 해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이 좀 안 남았다. 왠지 모르게 꾸물거리는 연구원들을 재촉해본다. 다들 알겠다고 하면서 급하게 어디론가 향한다. 쾅. 큰 폭팔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렸다. 준영은 연구소장 방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준영은 서둘러 백신을 챙겨서 나가야 했다. 연구소장 방을 찾은 준영은 노크도 없이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방안, 준영은 급하게 백신과 책상 위의 서류를 챙겨 나갔다.
휙. 무언가가 건너편 복도를 지나갔다. 준영은 불길함을 느끼며 서둘러 팀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팀원이 모여있는 로비로 가자 이미 좀비들의 습격을 받은 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바닥, 벽,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붉었다. 준영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팀장님 도망가세요. 비명을 지르던 팀원이 외쳤다. 준영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아 탈출하기 시작했다. 긴급상황 발생, 좀비들이 습격했다. 0000병원. 지원바란다! 준영은 달리면서 구조 요청을 하고 계단실로 향했다.
계단을 오른다. 분명 계단을 오르기 시작할 때는 본인 혼자였는데, 오르면서 보니 아래서 점점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최대한 높은 곳으로 가야했다. 19층에 도착한 준영은 더 올라가면 숨을 시간을 벌기 힘들 것 같아서 일단 19층 내부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준영은 서둘러 병실 하나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보이는 가구들을 문 앞에 배치했다. 배치가 끝나자마자 계단실 문이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치지직, 박준영 팀장 박준영 팀장. 무전이 울렸다. 쿵. 그르렁. 문 앞에서 이제 소리가 들린다. 준영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내일 팔 백 마이크로부로 헬기 도착 예정이니 늦지 않게 대기 바람. 이상. 쾅쾅쾅. 좀비들이 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준영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달은 사라진지 오래다. 세상은 너무 어두웠다.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너무 힘들고, 지쳤다. 권총으로 죽으나, 떨어져 죽으나 죽기는 매 한 가지였다. 좀비로 변하지만 않으면 됐다. 다만 총으로 죽으면 좀 더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가족을 떠올렸다. 부디 행복하길. 준영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검지 손가락에 힘이 점점 들어가기 시작했다.
준영은 갑자기 억울함을 느꼈다. 죽기에는 자신의 삶이 너무 아까웠다. 한 순간도 대충 산 적 없었다. 학생일 때는 학생으로, 군인이 되고 나서는 군인으로, 아들로, 남편과 아빠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명령으로 이 곳에 와서 이런 상황을 마주했지만, 그가 왜 좀비로 죽느냐, 총으로 죽느냐는 고민을 해야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죽지 않을거야. 살아서 반드시 가족을 보겠어. 시계를 확인했다. 2시간. 2시간만 지나면 아침이 온다. 그러면 이 일 역시 지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어느덧 하늘이 짙은 파랑색이 됐다. 준영은 파랑을 보며 희망을 느꼈다. 점점 하늘이 노란색으로 물들면서 멀리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동시에 점점 문 밖 그르렁 소리가 줄어들었다. 준영은 조심스래 문을 열어 밖을 확인한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옥상에 올라서자 해가 멀리서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렇게 아침이 왔다.
# 4.
휴대전화 후면 카메라로 찍은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과하게 발달한 화소들이 선명하게 보여주는 자신의 치부까지 사랑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자신의 본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제로 사진 속의 모습은 카메라의 왜곡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뿌옇게 나오더라도 적나라하지는 않은 과거의 카메라가 그립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의 이미지와 영상을 보정하고, 편집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원본을 알아보기조차 힘든 편집본들이 난무하게 됐다. 이런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편집과 무보정이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했다. 온라인 공간에 #무편집, #무보정의 해시태그를 달고 올라오는 사진과 영상들이 수 천 개에 달한다. 만들어진 이미지, 가짜 현실에 대한 증가하는 거부감이 반영된 결과다. 영화나 드라마에도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법이 자주 이용된다. 편집점 없이 긴 시간을 한 컷으로 촬영하는 롱테이크 기법이 그것이다. 배우들의 연기와 조명, 음향 등 프레임에 담기는 모든 것이 하나의 긴 호흡으로 보여지면서, 관객들은 극대화된 몰입감과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 장면을 위해 투입되었을 노력까지 포함돼 상당한 예술적 성취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무편집, 무보정 속의 장면들도 결국은 현실 그대로를 비추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여기엔 편집과 보정 없이도 완벽한 한 컷을 찍기 위한 극한의 연출과 설정이 가해진다. 이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편집되지 않은 현실 그대로에 대한 추구에는 몰이해가 동반된다. 이러한 몰이해가 우리 사회 전반까지 영역을 넓히며 알 권리에 대한 치우친 요구를 유발하고 있다.
이는 언론의 보도 윤리와 연결되어 문제적 상황을 만들었다. 대중은 무편집의 정보 전달을 요구하고, 일부 언론은 그에 응답하는 보도 행태를 보였다. 언론의 자의적 편집이 가해진 편파적 보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범죄 행위, 자살 등에 대한 보도에서 적나라한 현실 그대로를 편집 없이 속속들이 알리는 것은 공공의 윤리를 저해한다. 피해자의 인격권과 독자 모두를 보호하지 못하는, 기본 보도 윤리를 지키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전달되는 정보에 적절한 편집이 가해지는 것이 정당화된다. 이는 정확하고 편향적이지 않은 보도를 하는 것에 우선하는 문제다.
우리의 현실은 영화도, 드라마도, SNS에 업로드 되는 파편적인 이미지들도 아니다. 때문에 현실이 무편집으로 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때, 의도치 않게 고통받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정보에 대한 무분별한 무편집의 추구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 5.
1. 2014년, 광화문에서 세월호 집회가 있었다.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함께 단식에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진상규명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2.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했다. 한 명 한 명 연달아 가며 바통을 이어나갔다. 국민들에게 투표로 도와달라고 읍소했다. 이 법은 거악이며,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그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 국민의 인권이 휴지장이 되어선 안 된다고. 눈물을 흘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헌법도 꺼내 읽었다. 폐지안도 발의해봤지만,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참 어렵게 돌고 돌아왔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6년이 넘었고,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지 4년이 더 됐다. 그 동안 정권은 탄핵되어 교체된 지 3년이 지났고, 민주당은 거대 여당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세월호 진상규명도 이루어지고, 테러방지법도 없어질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 이 쉬운 일을 이렇게 어렵게 돌아왔구나 느꼈을 수도 있다. 아마 지지자들은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드디어 나온다며 기뻐했을 것이다. 겉보기엔 참으로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바뀐 건 없었다.
‘최소한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들’을 풍자하기 위해 만든 골드버그 장치가 있다. ‘밥 먹을 때 입가에 묻은 걸 닦아주는 자동 냅킨 기계’, ‘자동 등 긁기 기계’처럼 쉽고 단순한 작업을 아주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데 그 핵심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복잡한 과정이 끝나야, 아주 작은 결과가 나온다. 지금 한국 정치권을 바라보면 골드버그 장치가 생각난다. 쉽게 할 수 있던 일을 복잡하게 꼬아가고 있다. 오히려 어렵게 얻어낸 것은 쉽게 생각한다.
지금까지 오는 데 복잡했지만, 4.15 총선 이후 골드버그 장치를 해체할 수 있었다. 과정이 쉬워질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을 기록해놓은 대통령 기록물을 보려면 국회의원 2/3 동의가 필요하다. 지금도 가능하다. 테러방지법 수정, 폐지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오히려 당시 테러방지법에 반대했던 법무부장관은 휴대폰 비밀번호를 공개하게 하는 법안을 제안한다. 또 여당은 감염병 예방을 망치는 사람들까지 테러방지법에 포함하자고 주장한다. 꼬일 대로 꼬여가고 있다. 이젠 더 복잡해졌고, 그 복잡한 과정을 풀어봤자 나오는 결과는 미진할 수밖에 없다.
계속 이렇게 복잡해질수록, 앞으로 정치권은 스스로 등도 못 긁고, 입가도 못 닦는 이들이 되어버린다. 쉬운 일 하기 위해 이렇게나 어렵고 복잡하게 돌고 돌아왔을까. 그리고 아직도 골드버그 장치는 멈추지 않았다.
2020년 11월 청와대 앞,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우중충한 날씨다. 48일간 단식 투쟁하던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 씨가 병원으로 이송됐다. 단식 전, 김성묵 씨는 말했다. 더 이상 말로만 해주겠다는 건 필요 없다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 달라고. 당신도 이렇게 단식하지 않았느냐고. 앞으로 5개월만 있으면 참사 책임자들의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대통령이 말한 “잊지 않겠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잊혀져간다.
# 6.
내가 사는 호수마을은 정적인 곳이다. 모두가 마치 정해진 대로 최소한으로 움직여 자유분방함은 찾아볼 수 없다. 동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기시하고 모두 마을 안에만 머무른다. 햇빛도 잘 들지 않아 항상 어둡다. 옆 동네에서 우리 동네를 ‘고인 물’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모두가 순응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어렸을 적부터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했다. 멈춰 있지 말고 끝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마을 밖으로 나가려 할 때마다 엄마는 나를 크게 혼내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만히 있을 운명이야. 그러니까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젠가 저 멀리 바다마을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본 적이 있다. 모두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마을 전체에 활기가 넘쳤다. 광활한 마을을 가득 채운 역동적인 모습은 나를 흥분시켰다. 정해지지 않은 자유분방한 움직임이었다. “운명은 개척하는 자의 것이다” 바다 마을의 입구 표지판에는 이런 글귀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이 좁은 곳에서 가만히 멈춰 있는 게 내 운명이라고? 아니야. 나는 저렇게 광활한 곳에서 끝없이 움직이는 삶을 살 거야”. 이 ‘운명’이라는 짜여진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기대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날 밤 나는 몰래 마을을 나와 한참을 달려 바다마을에 도착했다.
“바다마을에 온 것을 환영해요!” 옆을 둘러보니 모두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자유였다. 운명을 거슬렀다는 짜릿함이 온몸을 감쌌다. 잠 잘 틈도 없이 나는 여기서 밤새 신나게 이리저리 오가며 춤을 췄다. “그래, 운명 같은 건 없어. 나는 지금 도미노 속 같은 호수마을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 곳에 있잖아.” 며칠 뒤 햇빛이 뜨겁게 나를 내리쬈다. 온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행복하다는 뜻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다마을에 더 있고 싶었지만 끝없이 흘러가는 구름도 나쁘지 않았다.
같이 구름으로 온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저 멀리 호수마을이 보이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에이 설마. 저기에 떨어지지는 않겠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런데 옆의 친구들이 하나씩 호수마을로 떨어졌다. “안 돼! 여기는 안 돼!” 절박하게 외쳤다. 구름마을 사람들은 내 절규를 듣고도 호수마을을 향해 나를 밀었다. 좌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떨어지는 그 순간이 마치 영겁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결국 그저 거대한 도미노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조각 하나가 도미노를 벗어나면 설계자는 그 조각을 다시 도미노 행렬에 가져다 놓는다. 거대한 설계자가 나를 다시 여기에 가져다 놓았다.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떨어지면서 저 멀리 바다마을 표지판이 보인다. 이전과 달리 낙서가 돼있었다. “운명은 개척하는 자를 벌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발견한 엄마가 울면서 달려온다. “이 놈아! 어디 갔었어!” “죄송해요 엄마. 저 이제 다시는 안 나갈 거에요.” 터덜터덜 다시 호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다시는 이 곳을 벗어날 수 없겠지. 나를 지배하는 거대한 도미노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 7.
우울증은 실제로 존재하는 병일까? 이것을 놓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미국 유명 심리치료사인 에릭 메이젤은 <가짜 우울>이라는 책에서 우울증이라는 병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울을 병리화한 나머지 불행을 느낄 자유 마저도 빼앗겼다고 말이다. 불행의 병리화는 더 큰 불행을 만드니 우울증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그 대신 의미를 만들어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생활이 멈춰버리는 나에게 우울증은 너무나 실재하는 병이다. 복약한지 1년이 넘어가서, 이제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어 함부로 단약을 시도했다. 2주 간은 어지럼증만 있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앉아서 울기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내 모든 과거와 모든 선택을 죽을만큼 후회하면서 말이다. 그 상태를 며칠간 버티다가 항복하고 병원에 가서 다시 약을 받았다. 약을 아침저녁으로 챙겨먹은지 이틀만에 눈을 뜰 때 여전히 불행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며 눈물도 나지 않고 씻고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이만한 격언이 없다. 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골드버그 장치는 우울증 환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상처 입은 자리에 연고 바르듯이, 우울증은 상담과 약으로 해결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그 둘은 몹시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일상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고, 머리를 감고, 밥을 챙겨먹고, 동네를 산책하고, 가족들과 연락하고 그런 것들. 쓸데 없어 보이지만 가장 확실하게 우울증에서 나아가는 방법이다. 실제로 우울하다고 상담을 받으러 가면 의사가 꼭 물어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잠은 얼마나 자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관념론자였던 나는 생각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니까 “머리에 힘만 주면” 몸은 저절로 따라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눈을 뜨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저 생각만 했을 뿐 어떤 일도 세상에 일어나지 않은 채다. 뭐라도 해야한다. 너무 거창하지 않아도 좋아. 자동차 장난감을 굴리고, 물통을 엎고, 고장난 가전을 부수고 그런 쓸데없는 행동이라도 좋다. 결국 내 등을 긁어주는데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바보같은 기계장치를 설계하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꽤나 활력이 생긴다.
내가 환경에 대해 걱정한다고 갑자기 바다가 깨끗해지지 않는다. 내가 그리워한다고 떠나간 연인이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후회한다고 학점이 저절로 앞자리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누워서 괴로워만 한다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뭘 해도 좋다. 어떤 쓸데없고 바보같은 짓을 해도 좋다. 일어나서 공을 굴려보자. You know you can’t keep letting it get you down. 너도 알다시피 넌 금방 일어설 거야.
# 8.
아이폰을 켜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오늘은 누가 트렌디한 곳을 다녀왔나, 얼마나 예쁜 옷을 입었나 구경 해야지. 쓱쓱 대충 넘겨보며 나보다 못난 애들의 게시물을 비웃으며 안도한다. 그래도 화면을 두 번 터치해 좋아요를 눌러준다. 그러던 중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가슴이 텅 비고 그 구멍으로 한기가 들어온다. 혜인이와 수진이는 나 빼고 둘이 한남동 카페를 다녀왔다. 저번에는 내가 서울 자취방에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넘겼다. 하지만 방학이라 모두 본가 동네로 모인 지금은 아니다. 서러움을 감추고자 분노가 치민다. 못된 년들, 나만 왕따 시키다니.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기껏 같이 놀아줬더니, 이제 와서 나를 버렸다…
아무리 욕을 해도 서운함은 커져만 간다. 울적해진 마음을 돌리려 노트북을 켠다. 오늘 마감인 과제나 끝내야지. 타닥타닥 에세이를 쓰다 보니 차츰차츰 내 흥분도 가라앉는 것 같다. 드디어 끝! 뿌듯한 마음으로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갑자기 노트북 화면에 뜨는 ‘시스템이 종료되었습니다’. 아뿔싸. 엔터를 누른다는 것이 전원을 눌렀다. 다물어 지지 않는 입과 자동으로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른 손. 노트북이 켜지자 마자 쓰던 문서창을 연다. 날아갔다. 망할 노트북 진짜 밉다. 최신형 주제에 자동저장도 안 되냐고, 쾅! 한 대 쳤다. 열렸던 입이 꾹 닫히고 눈은 감긴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하여튼 성격은 드러워 가지고”
“네가 참아, 재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니?”
분명 방에는 나 혼자인데… 무서움에 온 몸이 굳었지만 소리의 근원을 찾고자 눈알은 바삐 돌아간다. “아니 자기가 잘못한 주제에, 왜 나를 때려!”
“안타깝지. 인생은 도미노 라는 걸 모르는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타이른다.
“얘 10살 때 자기가 실수로 쳐 놓고 엉엉 울면서 날 던졌던 거 기억나지? 본인이 넘어뜨리려는 의도가 없었더라도 자기 힘으로, 자기 손으로 친 것이라면, 책임은 도미노가 아닌 자신한테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할 텐데. 아직도 정신은 7살이야, 덜컸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눈이 번쩍 뜨인다. 방은 어둡고 몸은 편안하다. 벌써 저녁이 되었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멍한 정신을 차려 보니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혜인이와 수진이. 그 둘이 나를 빼고 놀았다. 하지만 그때 난 한번이라도 서운하다고 했던 적이 있던가? 말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운 건 나다. 내가 센 척한다고 표현하지 않은 힘이 도미노가 되어 우리 관계를 무너뜨렸나 보다. 오늘은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겠다. 도미노를 툭 친 사람은 바로 나다. 모든 일의 주체는 나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폰을 찾으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위의 노트북과 도미노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 것만 같다.
# 9.
‘스무 살이면 대학생이겠네요’
‘스물 셋이면 군대 늦게 가는 편이네요’
‘스물 다섯이면 취업 일찍 한 편이네요’
마치 타임어택 어드벤처 게임처럼, 우리는 나이에 맞춰 특정 마일스톤을 통과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마치 그래야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 할 수 있다는 듯이. 또는 마치 그 나이에 걸맞은 ‘우리의 이상적 모습’이란 게 존재한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삼수생이었던 내 동기 ‘석’ 형은 늘 조급해 보였다. ‘난 1학기 끝나고 입대할거야, 이미 늦었거든’. 대학생활의 황금기라는 새내기시절을 반년으로 쪼개버리고, 그는 정말 군대로 사라졌다. 그것도 가장 복무기간이 짧다는 육군으로. 그러나 전역 후에도 그의 조급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복학 직후 1학년 2학기부터 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모처의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그제서야 그의 표정엔 안도감이 묻어났다.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 아홉이었다.
우리들이 ‘형’이라 부르는 것 조차 그에겐 폭력적인 상황이었을까. 고교 친구들은 벌써 졸업했다는데, 두 살이나 어린 우리가 형, 형, 하고 부르는 소리는 뒷덜미에 가해지는 채찍처럼 아팠을까. 물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석형은 20대를 한 순간도 즐긴 적이 없었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석형은 ‘20대 스테이지’ 출발점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해버려서, 만회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인생’이라 부르는 이 게임에는 ‘저장하지 않고 새로 시작하기’ 버튼이 없으므로.
내가 골드버그 장치를 처음 보게 된 건, 오래 전 ‘혼다 어코드’ 광고에서였다. 경사면에서 너트가 구르며 시작되는 이 영상은, 끝내 2톤에 가까운 거대한 승용차를 움직이면서 끝이 난다. ‘15초의 싸움’이라 칭하는 광고판에서, 소비자들의 시선을 2분이나 묶어둔 이 광고는 그 해 광고대상을 휩쓸었다.
‘골드버그 장치’를 처음 마주한 나는 곧바로 ‘도미노’를 떠올렸다. 실수 없이 끝까지 가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니까. 다만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그건 ‘과정을 대하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과정에서, 골드버그 장치는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위치에너지를 이용했다가, 원심력을 이용했다가, 때로는 풍력까지 이용하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모든 과정을 의외성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운다. 골드버그 장치는 ‘과정 자체가 곧 목적’인 셈이다. 도미노가 오직 ‘최종 성공’만을 목적으로 두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인생’이라는 게임은 도미노보다는 골드버그를 닮았구나.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우쭐했다.
지난주 석형을 만났다. 그리곤 10년간 삼켜온 말을 했다.
“형, 우리의 삶은 목표 지향적인 도미노 같은 게 아니야, 과정자체를 즐겨야 하는 골드버그 장치 같은 거야”.
이에 석형은 대답했다. “실패하면 거기서 끝인 건 똑같잖아”.
“아니지, 과정 자체에도 의미가 있으니 그 실패조차도 의미가 있는 거지”
술잔으로 거듭 목만 축일 뿐 석형은 더 이상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형, 뉴스 봤어? 우리 또래들이 벌써 집을 산대. 그리고 이제 우리가 모은 돈으론 집을 살 수 없게 되어버렸대. 우리 엿된 거 아니야?”
# 10.
[대충 ‘라라랜드 짱’이란 이야기]
‘사실의 수호자’처럼 보이지만 ‘위선자’다. 롱테이크는 교묘하게, 여전히 사실을 만들어낸다. 관객의 무의식을 슬금슬금 하지만 치밀하게 조종한다. <올드보이> 장도리 액션을 생각해보자. 3분이 넘는 긴 호흡의 장면은 때리고 맞는 사실감을 그대로 전하며 진짜 싸움을 목격하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얼핏 모든 것을 보여주는 척 생색이지만 감독은 배치와 포커스로 결국 보여주고 싶은 걸 보여준다. 저돌적으로 전진하며 격투하는 장면 초반 주인공은 항상 중심에 위치한다. 관객들은 무의식적으로 화면 중심에 있는 사람이 공격 주도권을 잡고 이긴다는 느낌을 받는다. 패대기를 맞고 다시 일어선 뒤에는 거의 화면 오른쪽에 치우친다. 주인공이 한발 물러서 싸우고 있음을 관객에게 은연중에 전달하는 것이다. 조작술은 더욱 은밀해지고 있다. 화면의 암전, 시야를 가리는 피사체 등장 같은 정교한 편집기술로 롱테이크‘처럼’ 느껴지게 한다. <버드맨>은 영화 전체를 하나의 롱테이크처럼 만들었지만 사실 쇼트가 60개가 넘는다.
<라라랜드>는 롱테이크의 사실성에 도발을 건다. <라라랜드>에서 롱테이크는 환상적 세계로 넘어가는 일종의 알림이다. 영화가 처음으로 비춘 현실의 장면은 꽉 막힌 도로 위다. 필자가 겪어봐서 아는데, LA의 트래픽잼은 악몽 그 자체다. 차 오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교통체증 같은 지루한 일상은 꿈같은 비현실적 순간으로 바뀐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차에서 뛰어나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장장 4분의 롱테이크는 환상 그 자체다. 영화 내내 롱테이크와 음악이 나오는 순간만큼은 주인공들은 답답한 현실을 넘어 꿈의 시간을 산다. 마지막에 이르러 환상성은 극으로 치닫는다. 알다시피 세바스찬과 미아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간다. 우연한 재회에서 세바스찬의 연주로 만약이란 가정의 롱테이크가 펼쳐진다. 달과 같은 환상적 공간에서 그려지는 둘의 해피엔딩은 상상의 스토리를 더욱 슬프고 아름답게 한다.
상상은 역시 세바스찬의 연주가 끝나며 사라진다. <라라랜드>는 음악을 통해 꿈의 공간 라라랜드로 초대하지만 결국 누구도 라라랜드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꿈의 상실을 가장 꿈같은 연출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했다. 영화는 그렇게 잔인한 현실을 담았지만 동시에 모든 게 이뤄질 수 있다는 마법 같은 환상으로 위로한다. 그래서 <라라랜드>는 현실에 대한 비관도 꿈에 대한 낙관도 아니다. 환상적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결국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환상적 기억만큼은 계속 남아 조금은 모진 현실을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그렇게 관객은 음악과 환상이 다시 시작될 순간을 꿈꾸며 일상을 견뎌낸다.
예술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없다. 예술은 객관의 구속이 없으므로 자유롭다. 예술이 그리는 건 현실의 모방이나 반영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롱테이크는 오랜 시간 사실주의 영화에서 애용됐다. 영화가 타자의 삶을 형상화하는데 선택한 윤리의 태도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만의 마법을 간직해야 한다. <라라랜드>는 사실성을 대변하는 롱테이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화려한 환상을 그렸지만 동시에 뚜렷이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위로하고 있다. 알프렛트 턴넨은 예술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도리어 마음에 있는 그대로 본다고 말했다. 예술이란 이런 게 아닌가. 그것이 삶에 머무는 순간에 오롯이 맞이하는 카타르시스. <라라랜드> 마지막 장면에 연주가 끝나고 마주한 세바스찬과 미아의 눈동자처럼.
# 11.
안녕? 나는 ‘나은이’의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일을 하는 기쁨이라고 해. 밝음과 긍정의 의미를 가진 노란색 옷을 입고 있지. 나은이가 태어날 때, 처음으로 세상에 눈을 뜨게 되고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만들어졌어. 그 후로 우리 본부에는 점점 식구가 늘어났어. 나은이를 해로운 것으로부터 지켜주는 초록 ‘까칠이’, 나은이의 우울한 감정을 담당하는 파랑 ‘슬픔이’, 그리고 화가 나면 참지 않는 빨강 ‘버럭이’까지 우리 모두는 바쁘게 감정의 구슬을 만들어내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
아니,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지… 실은 요즘 들어 나은이에게 큰 심경의 변화가 생겼어. 나은이네 부모님은 나은이가 다니던 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문을 닫게 되었어. 돈이 없어 살던 집도 팔아 급하게 할머니댁에 얹혀 살게 되었나봐. 그 바람에 한창 사춘기라 예민할 시기에 나은이가 친구들과 생이별을 하고 다른 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지뭐야. 문제는 여기부터야. 나은이가 부쩍 화가 많이 늘고 점점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줄어들어서 내가 할 일이 없어졌어. 어제는 아빠가 나은이를 위해서 끝까지 팔지 않았던 피아노까지 쾅 내리치더라니까. 이제 우리 감정 컨트롤 본부에 끝없이 굴러들어와 쌓여가는 불평, 부정의 구슬들을 등에 엎고 ‘버럭이’만 의기양양해지는 모습이야. 거기에 까칠이, 슬픔이까지 가세해서 여기에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엄마가 나은이가 제일 좋아하던 치즈볼을 사와도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땡깡만 부리는 철부지 아이가 되었어. 이를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도 슬픔과 좌절의 구슬로 채워지고 있지.
나는 ‘기쁨이’. 나은이가 세상에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엄마와 아빠의 사랑으로 나도 이곳, 감정 콘트롤 본부에 보내졌어. 나은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졌던 첫 감정이 바로 나 ‘기쁨’이라구! 그래서 그런지 이제 더 이상 나은이와 나은이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님까지 슬픔과 좌절로 불행해지는 것은 두고 못 보겠어. 친구들아, 어떻게 하면 나은이의 마음이 다시 행복과 기쁨의 구슬로 가득 찰 수 있는지 조언을 해주겠니?
# 12.
1.
“더, 더. 더 버텨. 찡그리지 말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들. 온몸을 지탱하고 있는 외발 다리들이 떨리기 시작한다. 천장을 향해 힘껏 솟아 있는 반대편 다리도 슬슬 힘이 풀린다. 그럴수록 상체를 더 꼿꼿이 세운다. 바를 잡은 한 쪽 손과 발끝을 잡고 있는 손끝까지, 온몸에 들어간 힘의 흐름이 느껴진다. 선생님은 항상 기본을 중시하셨다. 올곧은 자세와 유연성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세영이 다리 더 펴. 지현이 대충하지 말고 똑바로. 다음, 사이드밸런스.”
유연성과 균형감이 좋지 않은 몇몇 아이들은 구슬땀을 흘렸다. 누구나 나폴 거리는 몸짓과 유연한 춤사위를 꿈꾸며 리듬체조를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언젠가 선생님은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줬다. 작은 힘이 쌓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도미노 효과.’ 도미노는 하나가 쓰러질 때 본래 가진 에너지의 1.5배의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도미노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 처음 쓰러진 5cm 블록이 마지막의 1m 블록을 넘어뜨릴 수 있는 큰 힘을 가진다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노력을 쌓아간다면 그 노력에 힘이 붙고 붙어서 크게 성장하는 날이 올 거야. 오직 꾸준한 게 최고지. 우리 몸의 근육도, 리듬체조의 실력도 꾸준히 쌓이다보면 잠재적인 에너지가 축적돼. 꾸준한 사람만이 가장 마지막이자 가장 큰 블록까지 넘어트릴 수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잘 가고 있어도 너무 힘들고 지칠 때가 올 수도 있어. 그런 날이 오면, 그 때마다 이 주문을 외쳐보렴. ‘이 또한 지나가리라.’
2.
수업이 끝났다. 세영은 습관처럼 텅 빈 유리방에 혼자 남았다. 항상 남아서 연습하곤 했지만 타고난 친구들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였던 지현이는 벌써 전국 꿈나무 리듬체조 대회에서 상을 두 번이나 타고 국제 대회를 준비 중이다. 노력이 야속하다 생각했다. 선생님의 도미노 효과를 믿었고 세영은 늘 꾸준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당연하게도 바로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언제 나오는지도 알 수 없다. 꾸준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영은 선생님의 말씀이 와 닿았다. 온몸에 땀이 번지고 발끝이 아려왔다. 하지만 또 놓치고 말았다. 세영은 나머지 곤봉을 집어던지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눈을 꼭 감고 주문을 외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3.
수업이 끝났다. 지현은 수업 내내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오늘은 방송국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매스컴을 타고 난 후 스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리듬체조를 위해 태어난 아이처럼 체조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지현은 여러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리듬체조의 불모지에서 태어난 ‘신동’이라고 불렸다. 그래서인지 지현에게 너무나도 쉬운 기본을 다지는 시간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지현은 주문을 외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4.
딸랑-.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온다.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그녀가 다가온다.
“늦어서 미안해. 내가 살게.”
배시시 웃어 보이는 그녀에게서 여유가 느껴진다. 왠지 승자의 미소. 자격지심일까. 그녀는 간단히 안부를 묻고 가쁜 호흡으로 하지만 천천히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회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종합 5위에 올랐을 땐 어떤 심정이었는지 등등. 누구에게나 꿈의 무대인 올림픽. 매달권은 아니었지만, 리듬체조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처음으로 거둔 엄청난 성적이었다.
“마지막에 곤봉을 놓칠 줄 알았는데, 눈을 딱 떠보니까 내 손에 쏙 들어와 있더라고.”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입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저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13.
1.
나는 알에서 태어난 사내이자, 빛의 아이다. 나는 빛을 받다못해 빛에 파묻혀 있었다. 빛은 따스하게 알을 감쌌고, 나는 그 빛을 무럭무럭 먹고 깨어났다. 껍질을 뚫고 태어났을 때 내가 처음 본 것은 황금빛과 푸른빛, 온통 빛으로 물든 세상이었다, 나는 둘 중 하나의 빛을 선택해야 했다. 나를 이끈 건 푸른 빛이었다. 방금 태어나 어리고 연약한 나의 눈에 지평선의 경계는 흐릿해서, 어디서부터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구분할 순 없었다. 그러나 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황금빛 가루들을 털고 푸른빛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2.
그렇게 나는 물에서 살게 되었다. 내 몸은 단단하기도 또 부드럽기도 하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우아하게 헤엄치며, 해초와 해파리를 먹고 산다. 그것들은 물살을 가로지를 힘이 없다. 그저 어딘가에 붙어 있거나 물살따라 흘러갈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를 향해 몸을 바치게 된다. 떠밀리는 대로 사는 그런 나약한 존재와 달리, 나는 고귀한 태생에 맞게 운명을 개척하는 삶을 산다.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고, 물살을 헤치고 나아간다.
3.
물 속이 고요하듯 그 안에서 나의 시간도 고요히 흐른다. 나는 물에서 꽤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아직도 나에겐 오랜 시간이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헤엄치는 속도에 맞춰, 시간의 속도도 서두르지 않고 지나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느때와 같이 저기 보이는 해파리에게 다가간다.
4.
아직은 시간이 오래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때가 온 것 같다. 조금 이른 나의 끝은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었다. 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해초나 해파리처럼 내 운명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제 황금빛으로 돌아가 마지막을 맞아야겠다.
5.
“ㅇㅇ해변에 멸종위기종 붉은바다거북이 쓸려와 발견되었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40년 된 거대 붉은바다거북은 움직이지 못한 채 겨우 숨만 붙어있던 상태였습니다. 해파리로 오인해 삼킨 비닐봉지가 기도를 막았고, 오래 굶은 것으로 보입니다. 발견 즉시 목에 걸린 비닐봉지를 제거해주었지만, 이미 건강이 좋지않아 금방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온도 환경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바다거북 특성 상 1%의 개체만이 남아있는 수컷 성체였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인간이 버린 해양쓰레기에 고통받는 바다생물들의 죽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류도 결국 지구온난화에 운명이 달린 작은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14.
#1
“오른쪽으로 118m 이동 후 왼쪽으로 133m 이동하면 목적지 도착입니다” 우리는 성수대교와 강변북로를 잇는 도로 위 육교에 서 있었다. 차들이 쌩쌩 내달리는 도로 근처에 사고희생자 위령비가 있다니. 게다가 매서운 바람과 함께 비까지 내리고 있어 길을 찾기 쉽지 않았다. 매연을 마시며 1시간 정도를 헤맨 끝에 도로 옆 작은 터널을 찾아 위령비 입구에 진입할 수 있었다. 입구엔 비에 젖은 노란 플래카드 한 개가 걸려있었다. "세상이 다 잊어도... 엄마는 잊지 않으마"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그 날도 비가 내렸다. 32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친 큰 사고였다. 등교 시간과 겹쳐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하지만 그날의 사고를 까맣게 잊은 듯 위령비는 외딴섬처럼 홀로 떨어져 있었다. 현장 근처에서 만난 시민 10명에게 위령비 위치를 물었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근처에 그런 게 있어요?"
#2
명순씨는 2년 전부터 영상 제작에 푹 빠져있다. 빠듯한 살림이지만 구청에서 여는 클래스에 참여해 열심히 배우고 있다. 숙제도 한 번도 밀리지 않은 그야말로 모범생이다. 그가 나이 오십 줄에 영상 제작을 배우는 이유는 단 하나. 먼저 간 딸의 못 다 이룬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서다. 딸은 PD가 되어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영상에 담고 싶어 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 안산시 공모전에 출품할 UCC를 촬영한다고 동분서주하던 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배를 타고 제주도로 떠난 딸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잊어가는데... 저만 제 아이를 못 놓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참 유별나죠?”. 명순씨는 사람들이 점차 잊어가는 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3
참사가 이어질 때마다 우리는 늘 다짐한다. 잊지 않겠다고. 기억하고 고쳐나가겠다고. 그러는 동안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대구 지하철에서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세월호가 침몰했다. 비슷한 참사가 마치 도미노처럼 일정한 주기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요원하다."저희가 겪었던 아픔을 아이들이 똑같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원고 희생 학생 어머니 문연옥 씨가 바라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동안 사회적 재난을 수없이 목격했다. 잊지 않겠다는 공허한 다짐도 이제는 멈춰야 한다.
# 15.
집 열쇠가 없으면 옆집 문을 두드렸다.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옆집에서 자연스레 티비를 보고 과일을 먹었다. 음식을 많이 한 날에는 이웃을 불렀다. 지하철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는 아이를 발견하면 불쑥 안아 달래기도 했다. 옆집 딸은 곧 있으면 공무원 시험을 본다더라, 앞집 아들은 여자친구가 생겼다더라. 동네 사람끼리 모르는 소식이 없었다. 그때 당시에는 당연했던 삶의 모습이었고 지금은 ‘정 많은 사회’였다고 불리며 회자된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각박해진 세상을 탓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고. 나 때는 나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서로를 돕고 나누며 살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참 까탈스럽고 자기만 생각해서 세상이 복잡하기 그지없다고.
그 시절의 정은 공동체주의의 산물이었다. 개인이 없고 단체가 있는 사회에서는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곧 남들의 세상이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타인의 감정이었다.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한테 맛있는 음식을 남에게도 나눠줬고, 나한테 유용했던 방법을 남에게도 실천했으며 내가 괜찮은 일이라면 남들도 괜찮아한다고 여겼다. 공동체라는 촛불 아래 어두운 곳에 복잡하고 다양한 개개인의 감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개인주의라는 횃불이 그 아래를 비추자 사람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원래부터 복잡했던 세상이 드러난 것이다. 횃불을 든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혼자 앉아있는 사람이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기 아이를 불쑥 만지거나 먹을 것을 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깨닫고 본인과 타인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은 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존중하려 할 뿐이다. 오지랖이 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며 “나 때는”을 외치는 사람들은 사실 “너는 왜 나와 다르냐”는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복잡한 세상이지만 그 속은 아주 단순하다. 나와 남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 표현 방법이 달라졌을 뿐 ‘정 많던 사회’든 ‘정 없는 사회’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다. 복잡하고 거창해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 피곤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정 없고 복잡한 세상’도 살아갈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