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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후신의 대쾌도 | | |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학산여중)이 청소년을 위해 집필 중인 '(가제)청소년을 위한 동학농민혁명이야기'의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조광환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옮겨 싣습니다.
조선후기 양반중심의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한 단면을 풍속화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지요. 18세기 조선 화가 김후신(金厚臣: 생몰연대 미상)의 〈대쾌도(大快圖)그림〉를 보면 만취하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인물의 표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는데, 형색으로 보아 양반으로 보이지만 양반도 술에 취하면 모든 체면과 허식을 다 버리고 이렇게 엉망이 된다는 것을 풍자한 듯합니다.
또 다른 그림은 김득신(1754-1822)의〈양반과 상민〉,〈반상도〉,〈노상알현도〉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진 풍속화입니다.
원래 옛날 그림에는 제목이란게 없답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화가가 그림을 그려놓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럼 지금 불려지는 제목은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요?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편의상 임의로 붙인 이름입니다.
주로 그림의 내용이나 그림에 덧붙여진 싯구를 따서 이름을 붙이죠. 그러니까 아주 유명한 작품이 아니라면 이름이 여러 개일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그림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양반과 상민〉이라는 제목으로 소장돼 있기에 그쪽 이름을 따라 편의상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의 세태를 반영한 풍속화 중에서도 가장 신분계급의 격차에서 오는 실상을 길에서 우연히 마주 친 양반과 상민(평민) 부부의 모습을 통해 한 눈에 보여주고 있지요. 그림은 거만한 표정으로 나귀 위에 앉아 있는 양반의 모습과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남편과 두 손을 모으고 막 절을 하고 난 후(또는 하기 전)인 부인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서민보다 계급이 낮은 천민 신분인 견마잡이의 비웃는 듯한 표정과 서민부부의 과장된 동작이나 표정에서 익살을 느낄 수 있고, 나귀 탄 양반 뒤에는 갓 쓴 것으로 보아 중인 신분으로 보이는 지금의 비서 격에 해당되는 이의 표정과 절하는 남편을 비웃는 듯 내려다보는 듯한 나귀의 표정에서도 그 해학성을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풍속화가 김홍도의 〈벼타작〉은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농민이 부농으로 성장하여 일정량의 양곡을 국가에 바치고 국가로부터 공명첩을 사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밝고 건강한 표정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에서 비록 계급 사회 속에서 소작농으로 일하고 있지만 신성한 노동의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또한 볏단을 내려치며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건강한 모습을 엿볼 수 있죠.
한편 일꾼들이야 일을 하던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감독관인 양반의 모습은 무기력하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양반의 의관은 갖추었으나 삐뚤어진 갓, 흐트러진 자세, 제멋대로 벗어 던진 고무신, 술병 등과 함께 한 잔 걸친 게슴츠레한 눈으로 일꾼들이 타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자세에서 도무지 사대부의 품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듯 〈벼타작〉은 단순한 당시의 풍속장면을 묘사한 것만이 아니라, 불공평한 신분계층에 대한 비판과 세태풍자를 가미한 것이랍니다.
그런데 김홍도의 위 그림을 보면 웬일입니까? 자리 짜는 남자는 당시 양반들이 주로 쓰던 사방관이란 모자를 쓰고 도포를 입은 모양으로 보아 양반으로 추측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일반 서민들이나 했던 돗자리로 보이는 것을 짜고 있습니다.
남자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도 머리는 당시 여유 있는 양반가 부녀자들의 가채(가발)를 쓰고 있고 치마도 품이 넓은 양반 부녀자들의 치마를 입고 있으나, 하는 일은 농민 아녀자들이 하는 물레질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부부가 하는 일로 보아서는 농민의 집과 같은데 뒷면에 있는 부부의 아들로 보이는 아이는 글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따라서 이 그림은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몰락한 양반인 잔반이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돗자리를 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스스로 살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농사기술이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부농이 된 서민이 옷차림은 양반의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일은 원래 자신의 일인 서민의 일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요.
위에서 보듯이 김득신의 비슷한 그림이 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당시 일반화된 몰락양반의 생활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김득신이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아울러 당시 사회 신분제도의 급격한 변화의 한 단면을 짐작해볼 수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신분제 동요의 원인으로는 세도정치 하에서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나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노비와 농민 등이 이모작, 이앙법, 견종법 등의 농업 기술 발달로 인한 생산력의 향상과 상공업 발달 등으로 재산을 모은 부농들이 역의 부담을 모면하기 위하여 납속책(국가 재정의 궁핍을 메우기 위해 실시한 정책의 하나로서, 쌀이나 돈을 바칠 경우 그에게 적합한 상이나 관직을 주거나, 역(役)·형벌을 면제해주든지, 또는 신분을 상승시켜 주던 제도), 공명첩( 납속의 대가로 받는 명예 관직 임명장)을 구매하거나, 족보를 돈으로 사거나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답니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신분 변동이 활발해져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