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은 전주, 대구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장의 하나에 들 정도로 번성했다. 중부지방에서 나는 산물은 물론 삼남에서 나는 물건들이 등짐, 소바리, 말바리로 안성장으로 몰려들었고, 이곳을 거쳐야 한양에서도 제 값을 받았다. 농산물은 물론 가죽신, 한지 등의 공예품, 과일상, 포목상 등 육의전에 올릴 물건들이 안성장에서 우선 평가를 받아야 한양으로 갈 수 있었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적당한 상태를 ‘안성맞춤‘이라 한다. 이 말은 안성에서 만들어진 유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성 유기는 덮개나 받침, 그릇이 한치의 틈도 없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그 명성이 자자했다.
놋그릇 혹은 방짜유기로도 불리는 유기는 담금질과 열처리를 반복해서 망치로 두들겨 만든다. 망치로 두들겼다고는 하지만 어느 한 곳 찌그러진 곳이나 우는 곳 없이 매끈하다. 또 만든 유기는 물에 띄워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았는지를 가늠한다. 만약 기울었다 싶으면 다시 망치로 두들겨 그릇의 두께를 조절해 균형을 잡는다.
다른 곳에서도 유기가 만들어졌지만 안성에서 만든 유기는 몇 곱으로 비쌌다. 유기는 광약으로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특징이 있어 세월이 흘러도 태깔이 변함이 없다. 하여 안성 유기는 행세 깨나 하는 집안의 제수그릇이나 밥상머리를 도맡다시피 했다.
그 영화롭던 시절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경부선 철길이 평택으로 나면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백여 년 전 프랑스 선교사가 안성땅에 터를 잡으며 심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마스카와 거봉 포도, 늦봄 도로변에 불야성을 이루는 딸기밭으로 근근이 명색을 유지하고 있지만 옛날의 명성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서운산의 청룡사는 조선 말기 서민들의 애환을 신명난 놀이판으로 달래주던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청룡사에서 서운산을 오르는 호젓한 산길은 남사당패가 안성장날 놀이판을 벌이기 위해 걸어 넘던 고개이기도 하다.
청룡사는 조선시대 후기를 거치며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유명세란 것은 학식이 뛰어난 승려가 나왔다거나 속칭 기돗발이 잘 받는 수도도량으로서 이름을 떨친 것이 아니다. 조선 말기 서민의 삶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 남사당패가 있었지만 안성 남사당패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남사당패가 청룡사에 머물며 겨울이면 절의 허드렛일을 거드는 불목하니로 지내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경기도와 충청남북도를 오가며 놀이판을 벌였다.
새재사랑산악회에서는 12월 산행을 5일마다 열리는 안성 장날에 맞추어 장구경과 남사당의 채취를 느낄수 있는 서운산산행으로 정한 것입니다.
산성과 고찰이 많은곳으로 가족 나들이 훌륭한 곳 입니다.많이 신청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산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