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②
* 단발령과 대한제국 출범 사이 시기의 역사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1895.4.17)을 체결하여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 간섭(1895.4.23)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며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10).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였다(을미개혁, 1895.10~1896.2).
을미개혁을 통해 건양’ 연호 사용, 단발령 실시, 친위대(서울).진위대(지방) 설치,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우편 사무 실시 등이 있었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어 유생 위정척사 세력들을 중심으로 항일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또한,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화 세력의 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자, 고종은 러시아 수병의 지원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아관 파천, 1896.2), 김홍집, 어윤중의 개화파 정부는 무너졌다(피살됨).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조치 등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1896.2) 이후 열강의 침탈이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며, 고종을 황제로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이에 고종은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왔다(1897.2).
환궁 후 고종은 연호를 광무라 고친 후 환구단을 쌓아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이라 선포하였다(1897.10).
① 인조는 이괄의 난(1623)과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1623, 수도 방위), 총융청(1624, 경기 북부 방비), 수어청(1626, 남한산성 방비) 등을 설치하였다.
③ 흥선 대원군 하야(1873) 후인 1875년 9월, 일본은 군함 운요호를 파견하여 강화도, 영종도을 포격하고 상륙하여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가 맞대응한 것을 빌미로 일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1)을 체결케 되었다.
④ 갑신정변 후 영국은 조러밀약설에 위협을 느끼고, 남해안의 거문도를 3년간 불법점령 하였다(1885~1887)
⑤ 통상요구를 거부당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186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