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의 땅이름
<권역 땅이름>- 이학주 조사 포함
땅이름에 얽힌 이야기
동해시 지명지에는 묵호지역의 지명을 조사해서 정리했다. 그 가운데 묵호 발한동 일대를 중심으로 그 인근까지의 지명을 정리해 본다. 묵호의 지명 가운데 까막바위와 사뭇재 등은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동해시의 명소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본 권역이 아니라서 생략한다. 물론 이 지명은 조사자의 취향과 제보자 및 지식척도에 따른 것이므로 다소 빠지거나 내용이 다를 수 있다.
거리묵호
발한동의 시가지 중심지역을 일컫는다. 묵호역 못 미쳐 있는 굴다리로부터 강원은행이 위치한 발한삼거리 일대까지의 거리를 가리키는데, 운행과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1931년 묵호항이 축항되고, 19326년부터 삼척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 수송을 위해 무연탄을 집산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게구석
발한동과 묵호진동 경계에서 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또는 그곳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킨다. 항구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게가 서식하여 게를 잡았다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게구석약수
게구석에 있는 약수. 이 약수가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관사로
묵호역 사거리에서 사뭇재까지의 1.2km 길이의 포장도로를 가리킨다. 이 도로의 중심에 위치한 발한동의 관사촌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관사로라 한다.
관사촌(官舍村)/ 관사터
묵호초등학교 동남쪽 언덕에 있는 마을. 밤나무골의 아래쪽이 되는데, 일제강점기 때 삼척개발주식회사의 관사가 있던 마을이다.
금송야지등
창호초등학교에서 게구석 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금송야지의 발음 시에는 콧소리가 들어가 금소야지로 난다.
논꼴
묵호진동의 북쪽 아달동과의 경계 지점 못미쳐 서쪽의 산중턱에 있는 곳 또는 그 일대의 마을을 가리킨다. 예전에 산중턱에 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당재봉/ 오학산(五鶴山)
창호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해발 159m의 산으로서 사뭇재의 정상이 된다. 사뭇재에 서낭당이 있었던 데에서 일명 당재라고도 했고 이 산봉우리를 당재봉으로 불렀다.
도래/ 도래끝
어달과 묵호진동의 경계 지점에 있는 바닷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마을을 일컫기도 한다. 동쪽 해변 오솔길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등배산/ 동메산
묵호진동 마을 전체의 동쪽 즉, 논골 입구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또째비골/ 도깨비골
묵호진동의 북쪽 까막바위 못 미처 등대가 있는 산쪽으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골짜기. 옛날 이곳이 으슥하여 도깨비가 자주 나왔던 데에서 붙은 이름이다. 묵호항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이 골짜기가 보인다.
망재
게구석골 옆의 고개를 가리킨다. 물이 들어왔을 때엔 이곳 밑이 절벽이어서 망재절벽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고기를 후리기 위한 방법으로 후리 어망을 앞바다에 놓고 고기떼가 몰려오는 것을 보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엔 풍어제를 지낸 서낭당이 있었다.
묵호/ 먹호/ 안묵호/ 안먹호
묵호의 지리적 범주는 묵호읍이 모두 포함된다. 이 가운데 만우동과 망상동 일대를 제외한 부곡동, 발한동, 묵호진동, 어달동, 대진동, 동호동이 포함된다. 이 중 묵호진동은 묵호 중에서 안쪽에 있는 지역이라 해서 안묵호라 한다. 묵호를 사람들은 먹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묵호뒷장
산지골 입구와 논골 입구 사이에 위치하여 예전에 물건을 사고파는 저자 거리의 역할을 하던 자리로서 어판장 뒤쪽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이었으며, 부식물을 파는 가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
논골은 묵호항과 인접해 있는 자연부락으로 1941년 8월 11일 묵호항이 개항되고 1963년 6월 8일 캄캄한 자다의 불빛 묵호등대가 세워졌다. 당시 풍어로 호황이던 묵호가 어획량이 급감함으로써 지역경기는 점점 침체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좋았던 시절의 묵호를 회상하며 추억을 간직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왔다.
동해문화원은 논골 마을의 생활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어르신문화프로그램’ 공모사업에 응모, 선정되어 2010년부터 계속사업으로 추진하여 왔으며 2016년 5월 13일 전국 문화원장 청와대 초청간담회에서 어촌자원 활용 우수사례로 발표했다.
특히 동해시에서는 2015년 관광명소사업을 시행한 결과 논골담길이 감성관광지로 주목을 받게 되자 중국, 일본, 동남아를 비롯한 국내․외 관광객들이 급증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묵호역
거리묵호의 굴다리 쪽 사거리에서 해안도로가 난 남쪽 언덕에 위치한 철도역. 1965년 5월에 인근의 구역(舊驛)에서 이전해 왔다.
묵호항
묵호진동과 발한동 동쪽에 걸쳐 있는 무역항. 예전에는 어항이었으나 1931년에 축항을 하고, 1936년부터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내면서부터 크게 팽창하여 1941년 8월에 묵호항으로 개항하였으며 1964년에 무역항이 되었다. 축항 이전에는 해안이 가파른 절벽에 바닷물이 이어져 있어 험한 산등성이를 넘거나 배를 이용해 다니던 곳이었다. 해안을 매립하여 축항한 것이 묵호항인데, 이와 달리 현재의 동해항인 북평항은 파헤쳐서 만든 일명 준설항이라는 점이 대비된다.
발한삼거리
거리묵호에서 강원은행 건물을 사이에 두고 안묵호 쪽으로 나가는 길과 사뭇재 쪽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발한천(發翰川)
느릅재 쪽의 큰바란이에서 발원하여 묵호 시가지를 지나 묵호항으로 흘러가는 하천인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복개되었다.
붉은언덕/ 붉은언데기
묵호역에서 옛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오르면 묵호중학교 입구에 이르는데, 그 언덕 일대를 가리킨다. 옛날 이 언덕 일대가 붉은 진흙땅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비석거리
붉은언덕의 중심지역으로 이곳에 비석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이 비석은 고려 충혜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삼척 심씨의 시조인 진주군 심동로(眞珠君 沈東老)의 신도비다.
산짓골
논꼴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 또는 그곳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옛날 이곳에 제당이 있어 산제를 지낸 데에서 유래한다. 산짓골에는 예전에 당집이 많았으며, 지금도 그때 사용하던 정수(井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숯골
관사촌의 끄트머리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슬기나무재
당재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로서 창호초등학교 쪽의 고개를 가리킨다.
쓱밭등/ 쑥밭골
논골 위쪽에 있는데, 창호초등학교 앞에서 바다쪽으로 위치한 곳으로 쑥이 많이 자생하던 장소를 일컫는다. 쑥밭등이 옳은 명칭이나 이곳 일대를 가리키거나 인근의 집들을 통칭하여 쑥밭골로 호칭하기도 한다.
중앙시장
발한삼거리 뒤쪽에 위치한 시장을 가리킨다. 발한동과 묵호 일대의 제일 큰 상설시장이다.
해맞이길
망상동사무소의 북쪽 7번 국도에서부터 오학산을 돌아 창호초등학교 아래쪽을 지나 묵호 등대가 있는 곳까지의 2.9km 길이의 새로 포장한 도로를 말한다. 새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새 희망과 소원성취를 비는 해맞이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해맞이길이라 이름지었다. 이 도로를 일명 신산복도로(新山伏道路)라 하고 산 너머 반대방향에 있는 도로를 구(舊)산복도로라고도 한다.
후리터
묵호항 부두일대를 가리켜 후리 어업을 하던 곳이라 후리터라 하였다.
<기존자료들>
발한(發翰)동
발한은 본래 강릉군 망상면 지역으로 ‘바란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웃한 동호리를 합하고, 거리묵호·골말·붉은 언덕·새마을·사문골·양지말·지리골 마을을 통합하여 발한리라고 하였다. 발한은 마을이 남향받이 언덕이어서 ‘남쪽을 바라본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바란이’라 하다가 그 후 음차(音借)하여 발한리라 했다고 한다.
조선조 숙종 때 이곳에 청주 한(韓)씨가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한 씨들의 성을 따서 發韓(발한, 나라이름 한)이라 했으나 지명에 성씨를 붙이면 좋지 않다고 하여 발한(發翰, 날개 한)으로 고쳤다는 설도 있다. 한편, 글 하는 선비들이 늘어남에 따라 유림(儒林)에서 發翰里(발한리)로 높여 불렀다는 설도 있다.
발한은 묵호읍의 중심지여서 많은 관공서가 모여 있고, 지역이 넓고 사람들이 밀집해 살기 때문에 14리까지 있었다. 그러다 1980년 동해시로 승격될 때 1리·4리·7~8리는 발한동으로, 2리·6리·9~10리는 향로동으로, 5리·13~14리는 동호동으로, 11~12리는 사문동으로 되었다.
묵호진동(墨湖津洞)
묵호진동은 먹호 또는 묵호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게구석, 산짓골, 논골을 합쳐 묵호진리라 했다. 묵호진동은 본래 외딴 어촌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묵호항이 개발되면서부터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동해시가 발족할 당시의 묵호진동 인구는 14,000여 명이었다. 그 후 어획고의 감소 등으로 인해 인구가 오히려 줄어들다가 최근에 다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2000년 3월 현재는 1,853가구에 인구 5,103명이다. 주민 중에는 외지에서 온 사람이 더 많아 항구 마을로서의 특성을 보여준다.
마을은 동쪽은 동해바다이다. 서쪽은 사문동, 남쪽은 발한동, 북쪽은 묵호항 방파제에서 묵호항 등대가 있는 산줄기를 경계로 하여 어달동과 접해 있다.
묵호(墨湖)는 오리진(梧里津)이라는 한자 표기로 미루어 보건대 원래 속지명이 ‘오리’였던 듯하다. 오리(梧里)는 한자의 원 의미와 상관없이 우리말 단어 ‘오리’를 음차하여 적은 것이다. 오리진은 그 후에 오이진(梧耳津)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까마귀의 머리와 바닷물이 모두 검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이제현의 시에 있듯이 한묵(翰墨)이란 학문과 선비를 지칭하는 뜻이기에 이 지방 선비들은 발한(發翰)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묵호(墨湖)라 칭하여 왔다. 이것이 조선조 순종 융희(隆熙)4년(1910)에 묵호로 지명이 확정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묵호를 지금도 흔히 ‘먹호’라고부르고 있다. 안묵호 대신 안먹호라고 부른다. 이 ‘먹호’라는 명칭은 이미 100년 전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조선지지자료에서 한자 지명 묵호진(墨湖津)에 대한 우리말 이름을 ‘먹호진’으로 분명히 적었다. 따라서 ‘먹호’라는 명칭은 한자 지명 묵호(墨湖)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묵(墨)을 그 음으로 읽지 않고 훈으로 새겨 ‘먹’으로 읽은 데서 연유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먹호’는 ‘먹+湖’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므로 본래부터의 명칭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좋은 단서가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묵호라는 지명을 처음 정해 준 사람은 조선조 순조 때 이유응 부사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동해시 지명지, 95쪽)
▶ 마을과 터
묵호(墨湖)/ 먹호/ 안묵호/ 안먹호
묵호라고 할 때는 일반적으로 부곡동에서부터 발한동과 묵호진동, 그리고 어달동과 대진동을 합하여 지칭한다. 즉, 예전의 묵호읍에서부터 발한동과 묵호진동, 그리고 어달동과 대진동을 합하여 지칭한다. 즉 예전의 묵호읍에 속했던 지역 중에서 만우동 일대와 망상동 일대를 제외한 지역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이에 따라 현재의 묵호진동만을 가리키기 위한 명칭으로 주로 사용되는 것이 안묵호이다. 안묵호라 할 때는 묵호 중에서 안쪽에 있는 동네를 가리킨다는 의미가 된다. 안묵호라 하면 화진산업(예전의 묵호수산)을 기점으로 하여 그 안쪽 동네를 일컫게 된다.
요즘엔 묵호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으나 예전에는 먹호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였다.
구묵호
묵호진동의 원래 마을을 지칭할 때 사용되곤 하나 지금은 대체로 안묵호로 대신하고 있다.
게구석
발한동과 묵호진동 경계에서 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또는 그곳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킨다. 항구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게가 서식하여 게를 잡았다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산짓골
논꼴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 또는 그곳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옛날 이곳에 제당이 있어 산제를 지낸 데에서 유래한다. 산짓골에는 예전에 당집이 많았으며, 지금도 그때 사용하던 정수(井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논꼴
묵호진동의 북쪽 아달동과의 경계 지점 못미쳐 서쪽의 산중턱에 있는 곳 또는 그 일대의 마을을 가리킨다. 예전에 산중턱에 논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도래/ 도래끝
어달과 묵호진동의 경계 지점에 있는 바닷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이곳에 있는 마을을 일컫기도 한다. 동쪽 해변 오솔길이 돌아가는 곳이라는 데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묵호뒷장
산지골 입구와 논골 입구 사이에 위치하여 예전에 물건을 사고파는 저자 거리의 역할을 하던 자리로서 어판장 뒤쪽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장이 아니라 상설시장이었으며, 부식물을 파는 가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산천
게구석골
발한동과 묵호진동 경계에서 서쪽에 위치한 골짜기. 항구가 조성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게가 서식하여 게를 잡았다는 데에 연유한 이름이다.
망재
게구석골 옆의 고개를 가리킨다. 물이 들어왔을 때엔 이곳 밑이 절벽이어서 망재절벽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고기를 후리기 위한 방법으로 후리 어망을 앞바다에 놓고 고기떼가 몰려 오는 것을 보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엔 풍어제를 지낸 서낭당이 있었다.
게구석약수
게구석에 있는 약수. 이 약수가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한다.
등배산/ 동메산
묵호진동 마을 전체의 동쪽 즉, 논골 입구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또째비골/ 도깨비골
묵호진동의 북쪽 까막바위 못 미처 등대가 있는 산쪽으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골짜기. 옛날 이곳이 으슥하여 도깨비가 자주 나왔던 데에서 붙은 이름이다. 묵호항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이 골짜기가 보인다.
쓱밭등/ 쑥밭골
논골 위쪽에 있는데, 창호초등학교 앞에서 바다쪽으로 위치한 곳으로 쑥이 많이 자생하던 장소를 일컫는다. 쑥밭등이 옳은 명칭이나 이곳 일대를 가리키거나 인근의 집들을 통칭하여 쑥밭골로 호칭하기도 한다.
당재봉/ 오학산(五鶴山)
창호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해발 159m의 산으로서 사뭇재의 정상이 된다. 사뭇재에 서낭당이 있었던 데에서 일명 당재라고도 했고 이 산봉우리를 당재봉으로 불렀다.
슬기나무재
당재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로서 창호초등학교 쪽의 고개를 가리킨다.
금송야지등
창호초등학교에서 게구석 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금송야지의 발음 시에는 콧소리가 들어가 금소야지로 난다.
까막바위
어달동과의 경계 지점의 바닷가에 서 있는 유난히 검고 큰 바위. 바위 명칭은 까마귀가 이 바위에 새끼를 쳤다는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서울의 남대문에서 정동(正東)에 위치한 곳에 있다 하여, 이 바위의 서쪽에 표시석을 세웠다.
예전에 고깃배들이 이 바위를 기준으로 하면서 항해를 했다. 이 바위 주변에 고기가 많아서 갈매기와 까마귀들이 많이 몰려와 까악까악하며 울었다고 한다. 이 바위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인품이 온후하고 덕망이 있고 어려운 사람은 물론 지나는 걸인까지 돕는 의로운 호장(戶長)이 살고 있었다. 당시엔 수시로 왜구가 침몰하여 재물을 빼앗고 백성을 학살하며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폐해가 심했다. 호장은 앞장을 서서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왜적은 마음껏 재물을 노략질하고 호장의 몸을 묶어 배에 싣고 갔다. 호장은 분통이 터져 “이놈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잡혀가느니 차라리 죽어 귀신이 되어 네놈들이 다시는 이곳에 침범치 못하게 하겠다.”라고 외치며 스스로 물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천둥 번개가 치는가 하면 사나운 파도가 일어 왜구가 탄 배들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요행히 난파되지 않은 배 한 척이 달아나자 난데없이 거대한 문어 한 마리가 나타나 그 배를 내리쳐서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왜구들이 모두 죽었다. 왜구의 배들이 침몰하자 하늘이 맑게 개고 파도는 잔잔해지면서 한 떼의 까마귀가 몰려들어 왜구들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 그런데 이 문어는 어진 호장이 죽어서 원수를 갚으려고 변신을 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왜구는 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였다고 한다. 이 까박바위 밑에는 큰 굴이 두 개 있는데 이 굴속에 호장의 영혼이 살면서 마을을 지켜준다고 전한다. 어느 날 마을 사람이 까막바위 밑에 있는 굴 속에 들어갔더니 큰 문어가 있어 잡으려 하자 갑자기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날아와 마구 울어대기에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이 까막바위 밑을 지나가면 문어에게 잡혀 먹힌다고 전한다.
▶ 인조물
묵호항
묵호진동과 발한동 동쪽에 걸쳐 있는 무역항. 예전에는 어항이었으나 1931년에 축항을 하고, 1936년부터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내면서부터 크게 팽창하여 1941년 8월에 묵호항으로 개항하였으며 1964년에 무역항이 되었다. 축항 이전에는 해안이 가파른 절벽에 바닷물이 이어져 있어 험한 산등성이를 넘거나 배를 이용해 다니던 곳이었다. 해안을 매립하여 축항한 것이 묵호항인데, 이와 달리 현재의 동해항인 북평항은 파헤쳐서 만든 일명 준설항이라는 점이 대비된다.
해맞이길
망상동사무소의 북쪽 7번 국도에서부터 오학산을 돌아 창호초등학교 아래쪽을 지나 묵호 등대가 있는 곳까지의 2.9km 길이의 새로 포장한 도로를 말한다. 새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새 희망과 소원성취를 비는 해맞이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해맞이길이라 이름지었다. 이 도로를 일명 신산복도로(新山伏道路)라 하고 산 너머 반대방향에 있는 도로를 구(舊)산복도로라고도 한다.
묵호등대마을 논골담길
논골은 묵호항과 인접해 있는 자연부락으로 1941년 8월 11일 묵호항이 개항되고 1963년 6월 8일 캄캄한 자다의 불빛 묵호등대가 세워졌다. 당시 풍어로 호황이던 묵호가 어획량이 급감함으로써 지역경기는 점점 침체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좋았던 시절의 묵호를 회상하며 추억을 간직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왔다.
동해문화원은 논골 마을의 생활문화를 전승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어르신문화프로그램’ 공모사업에 응모, 선정되어 2010년부터 계속사업으로 추진하여 왔으며 2016년 5월 13일 전국 문화원장 청와대 초청간담회에서 어촌자원 활용 우수사례로 발표했다.
특히 동해시에서는 2015년 관광명소사업을 시행한 결과 논골담길이 감성관광지로 주목을 받게 되자 중국, 일본, 동남아를 비롯한 국내․외 관광객들이 급증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동해시 지명지)
◆ 발한․부곡 일대
▶발한동(發翰洞)
발한동은 예전 묵호읍의 (생략)
관사촌(官舍村)/ 관사터
묵호초등학교 동남쪽 언덕에 있는 마을. 밤나무골의 아래쪽이 되는데, 일제강점기 때 삼척개발주식회사의 관사가 있던 마을이다.
막사
관사터 동쪽으로 옛날 이곳에 해군부대 막사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거리묵호
발한동의 시가지 중심지역을 일컫는다. 묵호역 못 미쳐 있는 굴다리로부터 강원은행이 위치한 발한삼거리 일대까지의 거리를 가리키는데, 운행과 상가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1931년 묵호항이 축항되고, 19326년부터 삼척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 수송을 위해 무연탄을 집산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숯골
관사촌의 끄트머리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발한천(發翰川)
느릅재 쪽의 큰바란이에서 발원하여 묵호 시가지를 지나 묵호항으로 흘러가는 하천인데 지금은 거의 대부분 복개되었다.
발한삼거리
거리묵호에서 강원은행 건물을 사이에 두고 안묵호 쪽으로 나가는 길과 사뭇재 쪽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
중앙시장
발한삼거리 뒤쪽에 위치한 시장을 가리킨다. 발한동과 묵호 일대의 제일 큰 상설시장이다.
관사로
묵호역 사거리에서 사뭇재까지의 1.2km 길이의 포장도로를 가리킨다. 이 도로의 중심에 위치한 발한동의 관사촌을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관사로라 한다.
사뭇재/ 사문재
동해고속도로와 망상동사무소가 위치한 위쪽의 7번 국도가 만나는 곳을 가리킨다. 예전 묵호읍의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을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하는 고개이다. 이 재를 기준으로 남쪽 지역을 남강(南岡, 남쪽 산등성이)이라 하고 북쪽 지역을 북강(北岡, 북쪽 산등성이)이라 하였다.
현재의 만우동과 동호동을 넘나드는 느릅재는 관로(官路)라서 큰 길이었고, 사뭇재는 숲이 우거진 좁은 길이었다. 또한 초구동의 사뭇골 중턱에 호랑바위가 있어 이곳의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기도 하여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신작로가 나면서부터 통행이 많아졌다.
사뭇재는 그 숲속으로 상여만 울러메고 다녔다고 하여 죽은 사람들이 다니는 문이라는 뚯에서 사문(死門)재라 이름붙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이곳이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죽어넘는 고개라는 데에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이 재를 예전에 흉한재라고 해서 혼인을 하거나 이사를 할 때에는 넘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士門 또는 士問이라는 한자로 바뀐 것은 약천 남구만 선생을 찾는 선비들이 이곳을 넘어왔다는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참의공 김종호 공이 정해준 것이라고도 한다. 士文이라는 표기도 꽤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본다. 1914년의 조선지지자료에도 한자로는 士文峙로 적고 한글로 ‘사문ᄌᆡ’라는 이름을 적어 놓았다.
당재봉/ 오학산(五鶴山)
창호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해발 159m의 산으로서 사뭇재의 정상이 된다. 발한동 중의 사문동과 경계가 되는 산봉우리다. 사뭇재에 서낭당이 있었던 데에서 일명 당재라고도 했고 이 산봉우리를 당재봉으로 불렀다.
동문산/ 동모봉(童母峰)
당재봉 아래쪽에 위치한 산봉우리. 이 산의 정상에 창호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봉우리의 생김새가 여인이 어린 아이를 밴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일명 동모봉(童母峰)으로 부른다. 이 산을 경계로 하여 발한동과 사문동이 갈린다.
사뭇골
사뭇재의 바로 북쪽 지점에서 남동 방향으로 길게 난 골짜기.
귀명골
현재 용호사가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귀명골의 ‘귀명’은 한자 鬼鳴에 해당되는데, 귀신이 우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연유한 듯하다. 이곳에 발한동 공동묘지가 있다.
비석거리
붉은언덕의 중심지역으로 이곳에 비석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이 비석은 고려 충혜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삼척 심씨의 시조인 진주군 심동로(眞珠君 沈東老)의 신도비다.
붉은언덕/ 붉은언데기
묵호역에서 옛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오르면 묵호중학교 입구에 이르는데, 그 언덕 일대를 가리킨다. 옛날 이 언덕 일대가 붉은 진흙땅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후리터
묵호항 부두일대를 가리켜 후리 어업을 하던 곳이라 후리터라 하였다.
묵호역
거리묵호의 굴다리 쪽 사거리에서 해안도로가 난 남쪽 언덕에 위치한 철도역. 1965년 5월에 인근의 구역(舊驛)에서 이전해 왔다.
▶묵호항(墨湖港)
1) 묵호항의 개요
세계를 향한 동해시 최초의 관문인 묵호항은 1941년 8월 11일 개항하였다. 우너래 이곳은 작은 어항이었으나 19327년 일본인 內藤熊喜가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며 무연탄 출하 중심 항만으로 개발한 것이다. 묵호는 까만 새가 많이 모여 든다고 해서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오이진(烏耳津)이라 하였다가 까마귀가 흉조라 하여 까마귀 오(烏)자 대신에 오동나무 오(梧)자로 바꾸어 쓰기도 했다. 그 후 조선 순조 때 이 마을에 큰 해일이 일어나 이를 구제하기 위해 파견 나온 이유응(李儒膺) 부사(1860년 철종11년~1861년 철종12년, 강릉부사)는 마을이름이 속지명과 한자 이름이 두 가지인 것을 알고 “이곳은 물도 검고 바다도 검푸르며 물새도 검으니 먹 묵(墨)자를 써서 묵호라 하면 좋겠다.”고 하여 묵호(墨湖)라는 새 이름이 지어졌으며 덕분에 묵호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삼척․태백에서 생산된 석탄을 배로 실어 나르다보니 바닷물은 먹물처럼 검게 되어 묵호(墨湖)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항만은 지역사회가 근대산업으로 발전하는 곳임을 알게 하는 중요한 사회간접자본이나 일제의 자원수탈을 위한 도구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슬픔 역사의 아픈 상처가 아로새겨진 곳이다.
묵호항은 동해항이 건설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동해안의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오늘날은 동해항을 보조하여 시멘트, 석회석, 철광석을 주로 취급하고, 울릉도 관광항로의 기항점으로 해양관광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2007년 9월에 해양수산부가 지정한 전국 재개발 대상 10개 항만에 포함되어 관광위락기능을 갖춘 친환경 항만으로 개발되고 있다. 2015년 5월 27일 현대시설을 갖춘 냉동냉장시설(60억 5천만 원), 수산물유통센터(73억 5천만 원), 공동할복장 개축(8억 원)등 시설을 투자하여 고품격 수산물 소비시장으로 변화를 꾀하여 수산물 유통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한다.
2) 묵호항의 연혁
1941년 개항 이후 1962년~1963년 중앙부두가 건설되었으며, 1964년~1965년 제1부두, 1967~1971년 제3부두, 1972~1973년 제4부두가 건설되었다. 1976년~1978년 묵호항 건설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제1부두를 개축하였고, 2003~2006년에는 해경전용부두를 건설하였다.
3) 묵호항의 현황
묵호항은 1종항이며 항만면적은 4,692㎡로 육상 362㎡, 해상 4,332㎡로 구분된다. 야적장 29.00㎡가 있다. 조위는 39cm이며, 항계는 어달동 조도동방 북위 37°33′12″ 동경 129°7′25″로부터 진방위 90°로 1,350m 지점과 북위 37°32′, 동경 129°7′2″에서 진방위 90″로 1,900m 지점을 각각 연결한 선내의 해면이다. 부두길이는 1,915m, 방파제는 1,170m이다. 항내 수심 6.5~9m, 연간 하역능력은 540만 7,999톤이며 동시접안능력은 6척으로 1만 톤급은 2척이다. 방사제와 물양장은 각각 320m, 971m이며 안벽 길이는 888m, 호안(護岸)은 238m이며 285m의 기교(機橋) 2기가 설치되어 있다.
4) 수송화물
묵호항의 수송실적 추이는 동해항 개항 이전인 1979년에는 4,841천 톤을 수송하는 실적을 기록하였으나 1990년에는 324만 톤, 2011년에는 313만 3,000톤, 2014년은 170만 5,000톤, 2017년 현재는 화물 212만 3,000톤을 수송하였다.
1990년 수송화물의 구성비를 보면 무연탄과 시멘트가 각각 46%(149만 8,000톤), 37%(118만 1,000톤)로 전체 화물 중 8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10년이 지난 2017년에는 석회석 49%(50만 톤)로 전환되었다.
5) 선박입출
1990년의 선박입출항은 2,563척으로 외항선 58척, 내항선 2,505척이었다. 재적 어선수는 305척(최대집결 어선수 372척)이며, 어획량 10,544톤/년, 어획고 144만 3,400만 원에 달하였다. 2014년 현재 묵호항을 입출입하는 정기 여객선은 씨스타1호, 2호 두 척이며 총 톤수는 3,516천 톤, 승선인원 1,047명, 수송 여객은 143,068천 명이다.(동해학, 201~3쪽)
▶ 묵호시장
1910년대와 1960년대 4일 9일
1998년 시장현황: 동해프라자 226점포 1987년 11월 24일, 동해농산물시장 묵호농협장 34점포 1984년 12월 18일, 묵호중앙시장 380점포 1943년경, 삼성프라자 141점포 1993년 1월 2일
2016년 시장현황: 동쪽바다재래시장 동해중앙상인회 1943년경 2006년 6월 12일 인정시장 등록 200점포, 묵호시장 묵호동상인번영회 1970년경 45점포
▶ 묵호중앙시장과 안묵호시장
묵호시장과 안묵호 시장은 상가 건물형 시장으로, 기본적으로 상가 형태의 점포가 있으며, 상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아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어 상인들과 소비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여기서 묵호시장은 일명 발한동 중앙시장이고, 안묵호시장은 묵호동에 속한 시장으로 인식되었다. 예전에는 매월 4일과 9일 시장 안과 도로 변에서 오일장이 열려 옥계를 비롯하여 금진, 인근의 동호동, 망상동, 묵호 등에서 다양한 농수산물이 공급되어 활기를 띠었으나, 옥계장과 함께 북평장에 흡수되었다. 원래 북평장에 비해 묵호장이 더 컸으나, 북평장이 점차 발전하고, 묵호항에서의 어획고가 줄어들면서 약화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에 오일장으로써의 묵호장이 없어지게 되었다.
상설시장 또한 동해시의 중심권이 천곡으로 이전하고, 수산물 어획 역시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고, 거주 인구 또한 많이 줄어서 많이 위축된 상태이다.
묵호시장과 안묵호시장 내에는 묵호항에서 공급되는 싱싱한 해산물을 기반으로 한 각종 식당들이 있으며, 건어물, 농산물, 축산물, 잡화, 이미용실 등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포들이 있다. 이와 함께 점집, 보살집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였던 상인들은 ‘되거리 장사’를 많이 하였다. 즉 곡물의 경우 강릉이나 양양에 가서 곡물을 구입한 후 포장 단위를 바꾸어 판매하였고, 북평장에서 마늘, 고추, 콩, 팥 등을 사와서 묵호장에서 판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생선은 말려서 이를 다시 판매하는 형태의 장사를 하여 이익을 극대화 하였다.
현재 별도의 개인 점포가 없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생산한 채소나 어류를 점포 옆 길가 등에 펼쳐놓고 판매한다.(동해학, 262쪽)
▶묵호등대와 논골담길(동해학 272~280쪽, 생략)
▶ 부사 이유응 영세불망비(府使 李儒膺 永世不忘碑)
이유응 부사는 철종 11년(1860) 5월 광주판관으로 있다가 당시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한 때 이곳에 재화가 들어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자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침식을 잊고 노력하였다.
이듬해 철종 12년(1861) 3월 29일 물러나 4월 제천 주포(周浦)에서 병환으로 사망하자 그의 높은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해 辛酉年(1861) 7월 이곳 주민들이 “一心願借 山事勤勞(일심원차 산사근로)”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비석의 전면에는 “府使李公儒膺永世不忘碑(부사이공유응영세불망비)”라새겼다. 일설로 이 부사가 오이진(烏耳津)이라는 이곳 지명을 묵호(墨湖)로 바꾸었다고 한다. 증수 임영지 先生案에 의하면 “경신년(1860)에 왔다가 다음해 해유(解由)를 한 후 본집으로 가서 별세했다. 청백리를 상징하는 비를 세웠다.”(李儒膺庚申來辛酉由行本宅別世淸白立碑)고하였다. 동해시 발한동 240-1번지 발한동주민센터 앞에 비석이 있다.(동해시 누정․서원․비각지, 175~6쪽)
▶ 발한동 민요
주문진 꽁지갈보가 곰방대를 물구야
배돗대 밑으루만야 살살기어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루 나를 넹겨주게(두타산의 민속, 86쪽)
▶ 묵호동 민요
가래소리
노젖는소리
고기벗기는소리
그물당기는소리
에여하 에혀으허 으허하
끌어당겨라 으허하
당겨보자 으여하 끌어라 당겨라
으여하 으여하 댕겨라
이산 저산 흙산이 진다 으여하
묵은 사례에 고기가 서린다 어혀 으허
이여허 이요하 댕견자 보자
으여하 으여하 으려허(두타산의 민속, 127쪽)
뱃노래
신세타령
▶발한동 서낭제
동문산 서낭당(동해시 서낭제, 218~221쪽)
(이 내용은 동해시 묵호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작성하였다.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의 사업으로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