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학의 허와 실
-시인 박팔양의 경우
우상렬 (중국 연변대학교)
주지하다시피 1937년 일제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으면서 허울 좋은 문화통치마저 집어던지고 무단적인 강압통치로 나아갔다. 이로부터 악명 높은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여 우리 말과 글을 금지했으며『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언론매체를 폐쇄했다. 이리하여 최남선, 이광수를 비롯한 문단거두들의 친일행각과 더불어 친일문학이 점점 판을 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문단에는 문인훼절문제가 일종 집단적인 경향으로 나타난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폭발은 이런 경향을 더욱 확산시켰다. 이로부터 1940년대부터 1945년 《8.15》광복 전까지를 “문학의 암흑기” 내지는 “문학의 공백기”라고 하는 것은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친일문학의 내적 논리를 보면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만큼 이것을 일괄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다양한 양상을 감안하여 변별적인 논리로 접근해야 될 줄로 안다. 주동적으로 친일부일로 나간 골수분자로부터 부화뇌동의 맞장구치기, 그리고 자체의 성격기질이나 실수,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붓을 긁적이기 등 다양한 양상을 상정해볼 수 있다. 이로부터 친일문학의 허와 실의 논리도 성립될 줄로 안다.
친일문학의 허와 실, 변별성을 따지기 위해서는 일단 한 작가의 친일행각을 포인트로 하되 그것을 전후좌우 종적인 차원과 횡적인 차원의 전반적인 창작상황 속에서 살펴보아야 될 줄로 안다. 이런 종횡의 좌표 속에서 다른 작가와의 비교시각을 통해 살펴볼 때 그 허허실실이 여실히 드러날 줄로 안다. 본고에서 논할 박팔양의 친일문학문제도 이런 종횡의 좌표와 비교시각 속에서 살펴보아야 될 줄로 안다.
(1)
박팔양은 국내에서 프로문학이 완전히 해산되고 순수문학의 폭도 점점 좁아져가는 상황 하에서 1937년 3월 만주 신경(현재의 장춘. 필자 주)으로 건너온다. 박팔양은 처음『滿蒙日報』에서 근무하다가『滿鮮日報』의 부장으로 임직하게 된다. 그 후로는 만주제국 협화회 중앙본부에서 광복 전까지 근무하게 된다. 일제에 의해 직접 조종되는 위만주국의 어용적 냄새가 많이 풍기는 신문『滿蒙日報』,『滿鮮日報』에 근무, 그것도 부장으로 임직하고 위만주국의 중요한 부서의 하나인 협화회 중앙본부에 근무했음을 감안할 때 그의 친일적 행각은 어쩌면 피면할 수 없는 내재성과 필연성을 띤 것인지도 모른다. 1940년 신경에서 낸 그의 시집『麗水詩抄』1)는 이것을 말해주는 한 보기가 되겠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보면 가볍고 부드러운 말로 사랑을 노래하고 자연을 찾았으되 예리한 사회적 문제를 비켜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를테면「여름 밤 하늘 위에」에서는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자연의 신비는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신비를 찾는 예술을 옹호하는 주장을 상식수준에서 하고 있다. 여기서는 1923-24년 사이 창작된 그의 초기 시들인「공장」,「나그네」,「거리로 나와 해를 겨누라」,「고향」등에서는 신경향파 경향을 볼 수 없다. 더욱이 계급적 자각 속에서 현실적 모순의 타개에 대한 지향을 나타낸「여명이전」, 현실을 한층 더 계급적인 모순 속에서 파악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미래지향적이며 낙관적인 시세계를 탐구해나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밤차」(1927),「데모」(1927), 부제를 각기 “새시대를 생각함”, “새로운 시대의 여인 같은 그곳의 여인을 노래함”이라고 붙이고 새 시대에 대한 갈망을 직접 표현한「새로운 도시」(1929),「여인」(1930), 이른 봄에 피는 진달래에 기탁하여 혁명의 선구자를 노래한「너무도 슬픈 사실(「진달래」, 1930)」, 때로는 사회에 대한 울분과 불만을, 그리고 때로는 고달픈 인생과 이러저러한 투쟁과 항거의 세계를 노래하면서도 줄곧 새 시대를 갈망하고 낙관하였으며 그를 위해 내달리는 선구자, 선각자의 모습과 그들의 이상을 구현한「봄」(1936),「승리의 봄」(1936) 등 일련의 카프시들을 볼 수 없다.
박팔양은 분명 일그러진다. 1942년 신경의 滿鮮學海社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면서 대형종합론문집『半島史話와 樂土滿洲』를 출판한다. 박팔양은 여기에 ‘序’를 쓴다. 그리고 자기의 신분소속을 ‘滿洲帝國協和會中央本部’라고 밝힌다. 이 ‘序’는 친일적 성향이 짙다. “때는 바야흐로 大東亞戰爭이 我所向無敵의 日本軍의 世紀的이고 異的인 大勝利中에 着着 그 成果를 걷우고 東方共榮의 聖域이 하로하로 凱歌속에 일우워지는 오늘 그 北邊의 守護城인 我滿鮮에 關한 이 文獻이 上자됨이 어찌 偶然이랴 한個의 宿命이요 必然이라할 壯 擧임에 틀림이없다./아아 滿洲人땅! 꿈에도 못닛는 우리 故鄕 우리 나라가 안인가?… ”여기서는 일본의 대동아전쟁과 ‘東方共榮’을 공공연하게 찬미하고 위만주국을 우리의 고향과 나라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역시 만주국 건국 10주년기념으로『滿洲詩人集』을 第一協和俱樂部文化部에서 기획하고 발행하는 마당에 박팔양은 “우리가 滿洲를 사랑하는 心情은 이땅이나라의 大氣를 呼吸하고 살아온 우리가 아니면 想像하기도 어려우리라 남이야 무어라 하거나 滿洲는우리를 길러준 어버이요 사랑하여 안어준안해이다.”고 서두를 뗀 “序”를 쓴다. 이 “序”에서는 滿洲 내지는 滿洲國에 대해 “어버이”, “안해”에 비기며 다함없는 정을 쏟아 붓고 있다. 그래서 친일적인 성향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런데 문제를 이렇게 단순하게 볼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첫째, 당시 공식간행물에 이른바 이런 “친일”적 색채를 풍기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생계의 차원에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미친 체 하면서 떡판에 넘어지는(醉翁之意不在酒)식으로 연막탄의 구실을 했을 수도 있다. 박팔양의 본심여하를 막론하고 그가 滿洲帝國協和會中央本部에 근무한 것 자체를 감안할 때, 사실 그는『半島史話와 樂土滿洲』의 ‘序’에서처럼 노골적인 친일성향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내심, 眞意는 별도로 따져보아야 할 줄로 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최삼룡의 논문「박팔양과 신경」2) 에서 ‘그리고《半島史話와 樂土滿洲》에서 서문을 쓴 사실만 따진다면 박팔양은 당연히 친일친만분자라고 간단히 결론지을수 있겠지만 그의 몇편의 글을 깊이 읽다보면 그를 간단하게 친일친만분자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것이다.“고 한 관점에 동감이다.
둘째, 滿洲가 당시 조선인들에게 주는 이미지를 고려해야 한다. 滿洲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滿洲國이라는 현실적인 껄끄러움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맥락 및 민족적 정서와 닿아있는 존재다. “이나라이 單調로운 퍼언한地平線 紅柿가치 새빨간 저녁해 모양새업는 우리部落의土城 머언 白楊나무숩 적은개울물 하나 하잘것업는 돌덩이흑덩이 하나하나에도 우리네 歷史와傳說과 限업는 愛情이 속속드리 숨여잇다… 그럼으로 이땅 이나라의 自然과 사람은 完全히 愛撫하는 우리 肉體의 한部分이다./ 長白靈峰의 품미를 의지하고 살은 우리요 黑龍長江의 울타리 안에서살은 우리가 아닌가? 松花江언덕 杏花村에 情드리고 살고 海蘭江白沙場에 넷이야기를 주으며 귀로 [오랑캐고개]의 傳說과 눈으로 [渤海古址 六宮의 남은자최 주추ㅅ돌도 늘근것](尹海榮氏)을듯고보고 살어온 우리다. /아아 滿洲땅! 꿈 에도 못닛는 우리故鄕 우리 나라가 안인가?” 이처럼 박팔양의『滿洲詩人集』“序”에서 전개한 내용을 보면 滿洲는 분명 “우리네 歷史와傳說과 限업는 愛情”이 깃든 곳으로 “長白靈峰”, “黑龍長江”, “松花江”, “海蘭江白沙”, “渤海古址 六宮”, 그 어느 하나 민족적 정서와 닿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것은 결국 현실적인 것만으로 볼 수 없는 “꿈 에도 못닛는 우리故鄕 우리 나라”로 안겨오는 원형이미지인 것이다. 이로부터『滿洲詩人集』을 “滿洲朝鮮人 辛酸한 한世紀 살림3)에 잇서서 可謂 最初의 花壇에핀꼬치요 또 生活文化의 結實”로 보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간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심리적 차원에서 당시 조선인에게 있어서 滿洲는 “남의 불에 게를 굽(借別人之酒杯澆自己愁)”는 매개물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셋째, 당시 만주에서 우리말 창작이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본토에서는 우리 말과 글이 말살되고 문학창작도 일본어로 강요된 상황 하에서 그래도 만주에서는 우리 말과 글이 통했고『滿鮮日報』의 조그만 문예란을 통해서나마 우리 글 문학창작이 명맥을 유지했으며『滿洲詩人集』같은 작품집들도 출간할 수 있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 벙어리가 말할 수 있는 감격에 값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단 그 말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사실 그 내용을 보더라도 최삼룡의 논문「박팔양과 신경」에서 지적한 대로 “박팔양이 직접 편찬한 이 시집의 태반의 시들은 동포들의 망국과 실향의 한을 눈물겹게 읊조린것이 태반이라는것도 알수 있다.’ 그것은 금상첨화 격이다. 그래서 1940년 4월에 있은 內鮮滿文化座談會에서 일본문인들이 조선인문인들에게 일본어로 창작할 것을 제의하자 조선인 참석자 가운데 박팔양이 이렇게 말한다.
그點은 어떨런지요 朝鮮서는 小說을 原體純諺文으로쓰는習慣이 잇습니다. 그런데 이번金史良이 朝光이란雜誌에 漢諺純文을 試驗하는모양인데 이때까지의눈으로 서러서그런지아주小說을對하는것갓지안아요 늬간서먹서먹하지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作者로 讀者에게 이런印象을주게하는것은自己로서 여간손해가아니여요. 文字의 形式을 달이하는대로 이먼差異가잇는바이나 生活의相異한言語로서그生活의在來로가졋든 微妙한 것을 讀者들에게傳하기에는여간어려운일이아니요. 이건結局飜譯文學이 얼마나어렵다는 一般論으로도證着되겟지요.4)
여기서 박팔양은 조선에서 소설은 원래부터 습관적으로 조선어로 한다는 것, 여기에 김사량의 한문과 조선어를 섞어서 창작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것이 눈에 설고 여간 서먹서먹하지 않다는 부당함을 역설했고 조선어와 문자형식을 달리한 언어로는 생활의 미묘함을 독자들에게 전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으로 이것을 번역문학의 어려움에 비겨 결국은 일본어창작의 부당함을 도리를 따져가며 대 바른 주장을 펴고 있다. 이것은 본 좌담회를「國民文學의建設! 滿洲國에서도考慮될가」와 같이『滿鮮日報』의 보도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당시 일제가 조선말과 글 말살정책을 펴며 조선문 작품창작을 만주에서조차 극력 금하고 일제의 ‘國民文學’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아예 언어 차원에서 불식하고 있는 셈이다. 박팔양의 민족심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박팔양의 민족심은 1924년 연희법전을 졸업하고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잘 드러난다.「박팔양의 시 문학」5)에 보면, 졸업 당시 박팔양은 학교 측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사법기관에로의 취직을 거절하고 만주이주 전까지 그 당시 경제난을 면할 수 없었던『동아일보』를 비롯하여『조선일보』,『조선중외일보』등 조선문 신문사에 보잘 것 없는 일개 기자로 전전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이것은「박팔양의 시 문학」의 말을 인용해보면 “물론 일방으로는 그가 일생을 문학을 통하여 인민에게 복무하려는 굳은 결의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권력을 등에 지고 세도를 부리는 직업에 대하여 극도의 증오를 느꼈기 때문이였다.” 1937년 만주에 건너가서도 그는 역시 조선문 신문사인『滿鮮日報』에 취직한다. 물론 후에 그는 만주국협화회중앙본부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滿鮮日報』의 조그마한 문예란이나마 조선문 작품 창작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시 외적으로는 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라는 위만주국의 공식적 신분을 가지고 있고 내적으로 조선인 문인들을 리드하는 위치에 있은 박팔양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은 줄로 안다. 사실 당시 이런 조선어 발표원지를 지켜나가는 것이 곧 민족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는 하나의 방편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1942년에 나온『滿洲詩人集』도 일단은 조선어로 창작되었다는 여기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물론 조선어로의 창작이 허용되었다 해서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도 민족적인 것을 자유자재로 고취할 수 있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일제의 혹심한 검열제도하에 민족의 정서를 자유롭게 토로, 표현할 수 없고 때론 국책색채도 보여주어야 하는 억지 춘향노릇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 하에서『滿洲詩人集』이 만주국건국 10주년기념으로 다분히 일제의 5족협화의 냄새를 풍기는 第一協和俱樂部文化部에서 기획하고 발행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당시 위망이 대단한 박팔양이 상기의 “序”를 쓴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두 번째와 세 번째 상황은 허울 좋은 五族協和라는 국책적 간판 속에서 표출될 수 있은 것이고 작품집 출간 같은 것은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계기로 하여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조선인 문인들은 어디까지나 족쇄를 차고 춤추는 무녀의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박팔양의『滿洲詩人集』‘序’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滿洲詩人集』마지막 편에 실린 박팔양의 두 수「季節의 幻想」과「사랑함」도 마찬가지다.「季節의 幻想」에 이른바 친일적 성향이 내비치는 두 구절 “나는 五色의 꿈과 무지개를 봅니다.”와 “이나라 男女同胞의 體溫과重量을 堪耐하기도 합니다”를 보면 첫 번째 구절이 분명 오족협화의 이상을 노래한듯하나 그것을 그 앞의 구절 “沈黙하며 것는 나의무거운 行進속에서”와 연계시켜서 볼 때 일종의 아이러니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구절도 “이나라 男女同胞의 體溫과重量”을 거론하면서도 그것은 일종 “堪耐하기”도 해야 하는 부담일 때 역시 아이러니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사랑함」이라는 시를 보자. 물론 “나의 일본-조선과 만주를 사랑하며”라는 구절만 보면 당시 시대적 상황 하에서 내선일체의 냄새가 풍기지만 전반 시적 경지에서 놓고 볼 때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일종 보편적이고 애니미즘적인 확장형 사랑에 바탕을 두고 물살처럼 퍼져나가는 “사랑함”의 한 형태로서, 나라와 국가에 대한 사랑의 상징메타포로 쓰인 시적 이미지로 볼 수 있음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한보 물러서서, 가령 이런 시들이 친일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하더라도 일본어로 창작을 하며 전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국책에 영합한 최남선과 이광수 유의 친일작품들처럼 그렇게 노골적이고 뻔뻔스럽지는 않다.
사실 박팔양의 경우를 보면 일제의 검열이 더욱 심해질 때는 아예 창작을 포기하고 만다. 당시 조선인평론가 고재기가「재만선계문학」이라는 글에서 당시 조선인시단을 소개한 부분을 잠간 보자. “다음 시단을 볼 때 여수, 박팔양, 백석, 유치환, 김조규 등은 모두 시집을 간행한 적 있는 중견시인들인데 현재 모두 거의 쓰지 않고 있다.”고 쓰면서 박팔양을 비롯한 중견시인들이 시창작을 그만두다시피 한 적막한 문단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만주의 전반 문단상황을 놓고 볼 때 일제의 고압통치가 전쟁의 패색이 짙어감에 따라 심해지자 민족적 양심을 가진 문인들은 이렇게 필을 꺾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찬(1910-1974), 이용악(1914-1971)의 경우와 잠간 대조해보도록 하자.
주지하다시피 이찬은 광복 전 1930년대 초기 옥고를 치르고 어려운 생활에 봉착한데다가 1930년대 말기 일제의 파쇼적 만행이 가혹해짐에 따라 이 시기에 출간한『대망』(1937),『분향』(1938)6),『망향』(1940)7) 등 시집에서 소시민적 현실주의와 감상적 낭만주의색채도 없지 않아 내비치지만「결빙기」,「국경의 밤」(1937),「눈내리는 보성의 밤」(1938)같은 시들에서 민족의 불행한 처지를 반영하고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뜨거운 지지와 공감을 반영하며 새 시대를 갈구하고 있어 돋보인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볼 때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에 발표된 이찬의 시는 별다른 문학사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범속한 것으로 전락하게 되고 급기야는 친일적인 경향을 띠게 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44년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하는 무렵에 일제의 학도병출정을 찬미한 전쟁고취시「送出陣學征」8)을 발표하여 결국 여지없는 시적 훼절을 하고 만다.
이용악의 경우를 보면, 그가 작품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은 사실 카프 중심의 리얼리즘 문학이 퇴조하고 모더니즘 문학이 주류를 형성해나간 시기였다. 그러나 그의 시의 본령은 세계관적 기초가 미약했던 모더니즘 성향의 작품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철한 현실인식이 강조된 리얼리즘적 경향의 작품들의 현저한 우위에 있다. 이를테면 그는「나를 만나거든」,「北쪽」등 일련의 시들에서 억압과 수탈이 극에 달했던 식민치하 조선민중의 적빈한 삶의 모습 및 떠나가고 팔려가는 식민지참상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1938년에 창작한「제비같은 少女야」, 「우리의 거리」,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낡은 집」은 일제의 토지 강탈과 경제 독점에 떠밀려 쫓겨 가는 간도이주민들의 집단적 비극의 설음과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제 말기『春秋』,『國民文學』등 친일적 성향이 짙은 잡지에 이따금 작품을 발표했었다. 현재 확인되는「죽음」,「길」.「불」,「눈 내리는 거리에서」등 친일시는 그를 변절문인의 대열에서 제외될 수 없게 한다. 이 점에 대해 시의 상징적 속성 등의 논의로 변호하는 입장을 취하는 논자들이 없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어불성설이다.「죽음」을 잠간 보도록 하자. 짐짓 도학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조성해가며 죽음을 끝내 한번은 만나야 하는 '황홀한 꿈'으로 미화, 예찬하고 있다. 이로부터 곧바로 “충성한 백성”이라면 나라의 큰 난을 당하여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을 뿐이라는 무서운 결론으로 비약한다.「죽음」은 결국 죽음까지도 불사한 멸사봉공의 희생을 예찬, 강요하는 파시즘의 윤리를 그대로 내뱉고 있다.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대한의 청년으로 하여금 일제 군국주의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기를 열렬히 부추긴 것에 다름이 아니다.
이찬과 이용악에 비길 때 박팔양은 명지하다. 침묵의 무기를 선택했다. 이것은 박팔양의 성격특점과 관계되는 듯하다. 박팔양은 내성적인 편으로 온화하고 점잖고 무거운 면이 있는 것 같다. “그 나무에 그 열매”라고 그의 카프 시들은 이 점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박팔양의 시는 주로 자연에 의탁하여 상징적이고 우회적인 예술적 기법을 많이 구사하여 시적 감칠맛이 난다. 이런 자연현상에 의탁하여 객관적 입장에서 노래하면서 될수록 자기를 노출시키지 않고 깊은 사색을 펼쳐가며 대상의 의미와 그것에 대한 시인의 느낌, 정서, 감정을 융합하여 나타낸다. 때문에 그의 시를 보면 서정세계가 높고 뜨겁다기보다 잔잔하면서도 절절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에 “나”보다도 “그” 또는 “그대”를 더 많이 등장시키고 정서적 교감을 하면서도 냉정한 이성을 바탕에 깔고 있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무산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반영한 그의 시가 외형적으로 잔잔하면서도 강열한서정의 열도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상 및 새 세계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고 선구자를 노래하였으되 다른 카프시인들처럼 들뜨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노래로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줄로 안다.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픈 꽃을/ 이른봄 산골짜기의 소문도 없이 피였다가/하루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시적 화자의 조심스럽고 차분한 억양이 살아나는「진달래」는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시를 주관의 대상화라 할 때 이것은 바로 그의 차분하고 조용한 내면적 성격의 대상화로 볼 수 있다.
그럼 박팔양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고 역시 프로시를 많이 쓴 박세영(1903-1989)을 잠간 보도록 하자. 박세영은 체험된 느낌을 직접적인 주정으로 격조높이 토로한다. 그는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 서정의 샘을 직설적으로 뿜어 올렸다. 그의 시에는 ‘에두름’이 없다. 투쟁 속에서 몸부림치는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의 내면세계가 그대로 개방된다. 그리고 시적 이미지 및 형상화를 잘 살린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 서정적 흐름은 도도하고 거침없다. 그의 대표작「산제비」는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산제비」는 산제비라는 시적 메타포를 잘 살렸으되 구소련 프로문학의 대부 고리끼의 산문시「해연」처럼 호쾌하고 거침없는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시작품을 통해본 박세영의 성격은 박팔양과 좋은 대조를 이룰 것 같다. 그리고 이찬의 전반 시를 보면 이찬은 워낙 감정적이고 그 기복이 심한 편인 것 같다. 그는 일제의 파쇼통치에 분개하고 저항하며 격앙된 감정정서를 보인다. 그러다가 투옥되고 앞날이 막막할 때는 쉽게 비관실망에 빠진다. 그래서 일제의 패망이 코앞에 바라보이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눈 먼 감정에 놀아나다가 전쟁고취의 친일시도 서슴없이 쓰게 된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었을 때 그 격정은 새롭게 폭발하며 광복의 환희, 민족적 감격이 뒤범벅이 된 채 체제와 수령에 추종한 시를 마구 쏟아낸다. 이찬은 어디까지나 감정의 기복이 심한 소용돌이(大起大落)속에서 헤맨 경향이 짙다. 그러나 박팔양은 광복이 되고 북한체제가 들어서는 마당에 있어서도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은 것 같다. 박팔양의 이런 이성이 밑받침된 드팀없는 자세, 점잖고 무거운 성격은 아부와 변덕스러움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리고 박팔양은 위인이 정직하고 인간관계를 원활히 잘 처리하며 사람 좋은 데가 있다. 안수길은『龍井 ․ 新京時代』에서 박팔양에 대해 십분 존경심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박팔양씨는 시인으로서 선미다분(禪味多分)하다고 정평이 있던 터라… 황보선생은 국장이라고 하나 말없이 무겁게 앉아 사설만 써 넘기고 퇴근해버리고 실제 국장의 일은 여수(박팔양의 호)가 하고 있었다.”, “‘만선일보’사원엔 ‘만몽일보’ 사원과 우리 간도일보‘ 식구와 서울서 온 사람들이 섞여 있었는데 편집국에서 아무 일도 없이 화합이 되어 나갔는데 그것은 황보 선생의 인격과 여수의 선미(禪味)때문일 것이었다.” 여기서 박팔양의 성격으로 “선미(禪味)”가 돋보이는데 이 禪은 “心府有成, 深入淺出”한 경지로서 코앞의 이해득실하고 멀며 달관의 경지로 나간다. 이런 경지에서 인간은 용속하지 않고 좀스럽지 않으며 여유롭고 유머가 있으며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박팔양의 시 문학」에서 박팔양의 인간됨됨이에 대해 ‘六十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도 때때로 우스개말로 사람들을 웃기면서 소년처럼 순진한 마음씨를 보여 주는 이 시인’이라고 개괄한 것은 좋은 주석으로 된다. 그때 신경에 오고가는 모든 객(客)들이 다른 사람은 찾지 않았어도 유독 박팔양만은 꼭 찾았다고 하니 그의 넉넉한 인격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바로 이런 인격으로 하여 박팔양이 광복을 맞아 귀국 차 신의주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안룡만, 김우철, 이원우 등 시인들이 그를 열정적으로 맞아주기도 했다. 박팔양의 이런 인격으로 놓고 볼 때 그의 작품에서 보게 되는 일부 친일색채는 그의 인간성에서 기인되는 본질적이고 상습적인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어려운 현실적 처지에서 호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박팔양의 시 문학」에 보면 박팔양이 바로 “일제 말기 一九三七년 놈들의 단말마적인 탄압으로 말미암아 굶주림과 헐벗음을 참지 모 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그리운 고국을 하직하고 멀리 동북 땅으로 류리의 길을 떠났던” 상황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사실 인격적으로 문제되는 사람이 滿洲帝國協和會中央本部에 근무했다고 할 때 그 친일부일은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박팔양의 친일적 색채는 그래도 이해받을 수 있는 한도 내의 것으로 사료된다.
(2)
1945년 8.15광복은 한민족에게 최대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일제의 파쇼적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런데 한민족은 광복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남북의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치달으면서 “단절과 반복”이라는 최근에 많이 거론되는 식민지문화담론의 한 양상이 그대로 적중하게 맞아 떨어지는 비극을 맞는다. 즉 북한은 수령중심의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로 나아가면서 새로운 독재와 파쇼의 형식을 띠게 된다.9) 1960년대 중반기부터 유일사상체계가 들어서면서 그것은 확고하게 굳어진다. 이로부터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식민지시대와 비슷한 양상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적어도 족쇄를 차고 춤춰야 하는 작가들의 처지는 완전히 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제시기 친일적 행각이나 성향을 나타낸 작가들의 행태를 살펴봄으로써 그 친일적 행각이나 성향의 허과 실을 간접적으로 얼마간 살펴볼 수 있을 줄로 안다. 이것은 자연과학 연구에서 같은 실험적 조건이나 환경에서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기본상식, 그리고 路遙知馬力, 日久見人心의 소박한 見心法에 기초한 관찰법임을 밝혀둔다. 그럼 아래에 일단 박팔양을 비롯한 이찬, 이용악, 백인준의 북한에서의 창작실태를 살펴보고 비교분석을 진행하는 가운데 광복 전 그들의 친일적 행각이나 성향의 허와 실을 되짚어 점검해보도록 하자.
광복은 조선문인들에게 자유롭게 창작할 자유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제시기 훼절 및 새로운 이념대립은 그 자유로움이 자유로움 그대로 통할 수 없었다.
박팔양을 비롯한 이찬, 이용악, 백인준은 광복 전 자의든 타의든 이래저래 친일이나 부일의 오점을 띠고 광복 후의 북한사회에 들어선다. 이로부터 친일청산을 확실하게 추진한 북한에서 적어도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이들은 자기의 오점을 탕감할 무엇을 보여줘야 했다. 이래서 대량 표출된 것이 체제시, 수령시라고 볼 때 크게 무리가 될 것은 없다. 해방공간(1945. 8.15-1950. 6.25)에 있어서 이들의 행태를 좀 보자. 해방공간은 북한체제가 들어서고 김일성이 수령으로 부상되는 가장 관건적인 단계이다. 그런 만큼 이 단계에서 이른바 분명한 태도표시는 앞으로의 작가적 생명을 결정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용악은 남쪽에 남아 있다가 6.26전쟁이 터지면서 북쪽에 합류한 만큼 그만 두고라도 먼저 이찬과 백인준의 행태를 좀 보도록 하자.
이찬은 광복 후 1945년 9월 잠시 상경하여 예맹파에 가입했다가 곧 월북하여 북한의 한설야, 이기영이 조직한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함남지부 위원으로 된다. 그러다가 1946년 3월 25일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 가입하고 서기장이 된다. 1946-47년에 걸쳐 이른바 “불멸의 혁명송가”로 불리는 헌시「김일성장군의 노래」(1946)를 비롯하여「김일성장군의 찬가」(1946),「헌가 김일성장군」(1946),「찬 김일성 장군」(1946),「더욱 굳게 뭉치리 장군님(그이의) 두리에」(1947),「3천만의 화창」 (1947),「우리의 수도를 아름답게 하는 건」(1947) 등 일련의 시에서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 “절세의 민족영웅”, “위대한 수령”으로 칭송하면서 그의 두리에 굳게 뭉쳐 싸우는 혁명투사로 될 것을 결의하고 있다.「비력의 증언」,「화원」,「그날 아침」등 시는 1946년 노동법령이 발표되자 그 역사적 의의 및 이 법령에 접한 노동자들의 기쁨과 감격, 창조적 열의를 격동적으로 노래하였다.「달과 딸과 어머니」(1947)에서는 교육령의 민주화를 노래하고 있다.「조국이여」,「흘러라 보통강 노래처럼, 그림처럼」(1948년) 등 시에서는 노동당에 대한 송가를 읊어내고 있다. 이외에도「새소식」(1946), 「8.15부터」(1946),「승리의 땅」,「록음」(1949) 등 많은 “행사시”나 “과업시”를 써낸다. 이런 “행사시”나 “과업시”는 당시 북한공산당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있은 김창만의 지시 하에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인 이기영의 직접적인 조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백인준(1919-1999)은 광복 전 친일문학행각은 보이지 않지만 동경의 입교대학에 다니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광복 전까지 일본군에서 복무하였다. 그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평양으로 들어가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부위원회에 가입한다. 1946년 8월『朝 ․ 蘇文化』창간호에 토지개혁을 노래한「씨를 뿌린다」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문학예술』,『문화전선』등에 이른바 사회주의리얼리즘 시와 평론을 연이어 발표하여 당국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1947년 1월 원산문예총에서 발간한 시집『응향』사건 때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서 ‘문죄’하러 내려갈 때 평론가로 선발되어 두각을 드러낸다. 그는 ‘문학예술은 인민에게 복무하여야 한다’ 는 간판을 내걸고 구상의「길」을 비롯한『응향』에 실린 시들에 대해 무자비하게 비판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조선의 마야코프스키’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 백인준은 시, 소설, 시나리오, 가사 여러 장르에 걸쳐 체제문학과 수령문학에 앞장선다.「김일성장군님을 우리의 태양이라 노래함」(1947),「그이를 우러러 태양이라 노래함은」(1947),「당은 나의 생명」등은 그 보기가 되겠다. 백인준은 1948년「나는 놈들을 미워한다」에서 미국과 이승만이 서로 결탁하여 정치적 기반을 구축함에 대해 항거의 목소리를 높인다. 1949년 백인준은 선택된 자로서 소련유학을 가게 된다. 유학을 갔다 온 후 그는 왕성한 창작활동과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북한의 문화예술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이상 보다시피 이찬과 백인준은 해방공간에 있어서 정세의 변화에 빠른 행보를 보이며 동시다발적으로 “행사시”나 “과업시”를 비롯한 체제시, 수령시를 톺아냈다. 이들은 바로 이런 요란스럽고 화사한 체제시, 수령시로 자기를 刷新했으며 북한문단에서 확실하게 자기의 입지를 굳혔다. 이찬과 백인준에 비길 때 해방공간에 있어서 박팔양은 조용하고 덤덤한 편이었다. 광복 후 박팔양은 남쪽에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으며 1945년 9월 17일 한설야, 이기영 등이 임화, 이용악 계열과 맞서면서 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자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박팔양은 1946년10)에 월북한다.「박팔양의 시 문학」11)의 결론부분에서 “그러나 박팔양이 쓴 부분적 작품들, 특히 해방 직후에 쓴 적지 않은 작품들이 우리에게 강한 정서적 조명을 주지 못 하고 우리의 기억의 용기 속에서 인차 사라지고 만다.”고 평가한 것을 보면 박팔양은 이 시기 적지 않은 작품을 썼으되 사상내용에 있어서 순정한 체제시, 수령시하고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 수 있다.12) 북한의 시평가 관행의 포인트가 사상내용에 있음을 감안할 때 이것은 빗나간 추측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해방공간에 있어서 박팔양이 이찬이나 백인준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체제시나 수령시를 쓰지 않아도 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풀이될 줄로 안다.
첫째, 1940-45년까지 한국 현대문학은 “암흑기” 혹은 “공백기”라 할 만큼 친일이나 부일적 성향을 조금도 띠지 않은 작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전반 문단적 상황이 그렇고 그런 것이다. 한국에서 작년 3.1절을 계기로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파 명단은 이것에 대한 한 주석으로 되겠다. 그러니 친일적 성향문제는 박팔양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물며 박팔양의 친일이 위에서 살펴본 대로 “호구지책”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라 할 때 아무리 좌적으로 나간다 하더라고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박팔양은 당시 만주조선인 문단에서 거물급 위치에 있은 인물로서 그에 대한 처리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박팔양의 인품은 위에서 잠간 살펴보았거니와 차치하고『滿鮮日報』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 몇 편을 통해 그의 위망을 알아보도록 하자. 1940년 9월 10일『滿鮮日報』학예판에는 “화제”라는 아주 일반적인 제목 밑에 박팔양이 창씨개명한 소식을 싣는다. “千마리 닭보담도 한마리 鶴이라고 大物巨物이 솔작다들었다니 어쨌든 大成功”. 한 사람의 창씨개명소식을 중앙급 신문에 싣는 사실 그자체가 그 사람의 위망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는데 여기서는 박팔양을 직접 鶴立鷄群의 “大物巨物”로 지칭하고 있다. 1940년 5월 24일 박팔양은 시집『麗水詩抄』를 간행한다. 바로 이 소식이『滿鮮日報』학예란에 게재될 뿐만 아니라 출간기념회를 가지게 되는데 그 발기인에는 당시 신경의 유명한 문인들이 거의 다 포함되었다. 그리고 1940년 11월 20일『滿鮮日報』예능판에는 박팔양이 건강문제로 병원에 입원한 것까지 실었는데 200자도 안 되는 그 소식에는 박팔양에 대한 편집자들의 존경심이 엿보인다.
셋째, 박팔양은 해방공간에 있어서 창작은 그리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평북도당 기관지인『바른말』신문사에서 편집국장의 중책을 맡았다. 1946년에는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6년 3월에는 당보인『정로』의 편집국장을 맡고 그 후에는『로동신문』의 부주필로 사업하였다. 1949년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에서 신문학을 강의하였다. 보다시피 해방공간에 있어서 박팔양은 이런 체제 “순응”적인 명분과 신분을 가지게 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똑 마치 위만주국 시기 그가『滿鮮日報』기자나 滿洲帝國協和會中央本部근무라는 타이틀이 일종 그의 보호색이 되었듯이.
현재 접할 수 있는 자료에 의하면 박팔양은 1967년에 숙청되었다가 1981년에 장시「헌시」를 써 바쳐 다시 재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창작이나 일반적 삶이 별로 새로운 기색이 없이 1988년에 타계하고 만다. 그럼 박팔양은 왜서 숙청되었고 그의 후반생 삶은 그렇게 스산하였는가? 그것은 북한이 일당독재 내지는 유일사상체계의 독단으로 나가면서 문학예술에서 카프전통을 부정할 때 카프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정평이 나 있는 그가 선불에 맞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의 나이 그때 60을 웃돌고 있었으니 이젠 쇠잔하고 별로 쓸모없는 “존재”이기도 한 것도 거기에 가세했으리라. 일종 殺一警百의 경고적인 메시지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13) 그런데 백인준 등 다른 작가의 경우와 비길 때 단지 이렇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석연치 못한 점이 있다. 그럴진대 박팔양은 체제시, 수령시를 줄기차고 극성스럽게 써내지 못한데 보다 중요한 원인이 있은 줄로 안다.
북한 현대문학에 있어서 최고의 계관작가 백인준의 경우를 좀 보도록 하자. 해방공간에 있어서의 문학적 창작은 위에서 살펴보았으니 차치하고 1950년대 이후부터의 문학창작을 잠간 살펴보도록 하자. 백인준은 6.25동란 때 후방에서 활약하며「그이를 모시고」(1950),「크나큰 그 이름 불러」(1952)와 같은 수령시를 창작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서정시「큰 손」(1960),「론죄하노라 력사의 무대우에서」(1960),「얼굴을 붉히라 아메리카여」,「벌거벗은 아메리카」등에서 ‘미제’에 대해 논죄하고 있다. 그러다가 1960년대 말기부터 김정일과 손을 맞춰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문학예술창작을 주도한다. 이 무렵 그는『김일성장군님은 우리의 태양』(1967)이라는 시를 창작하여 수령형상문학을 고양시킨다. 이 시에 대해 김정일은 “노래《김일성장군님은 우리의 태양》을 아주 잘 지었습니다. 노래《김일성장군님은 우리의 태양》은 최근에 창작된 노래들 가운데서 최고 걸작입니다.”고 평가했다.14) 이어서 백인준은 “김일성은 너무 위대해서 어느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형상화가 불가능하다”15)는 논조를 펴면서 수령형상을 전문으로 창작하는 창작단을 만들 것을 “상주”한다. 이로부터 김정일의 임명 하에 백인준은 일약 김일성일가의 연극이나 가극대본 및 영화시나리오창작을 전담하는 백두산창작단의 단장이 된다. 1976년에 가사「친해하는 지도자동지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에서는 김정일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를 “지도자”고 뭐고 하는 정치적 의미를 떠나 순수한 인간적 의미에서 56세의 중늙은이가 34세의 젊은이한테 지어 바친 것이라 할 때 좀 웃기는 얘기가 된다. 이 가사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만수무강을 축원한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 그는 김정일과 손을 잡고 가극혁명을 주도한 만능의 예술가로 활약한다. 이외에 백인준은 1977년에 김형권을 노래한「누리에 붙는 불」과 1978년에 김정숙을 형상한 영화문학「사령부를 멀리 떠나서」를 창작한다. 그리고 역시 1978년에 혁명영화『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의 주제가「장군님 따라 싸우는 길에」를 써낸다. 1980년대에 들어서 백인준은 영화『백두산』의 주제가로 창작된 가사「전사의 염원」(1980) 등 시작품을 계속 창작하는 외에 이른바 북한을 대표하는 영화 10부작『조선의 별』과 5부작『민족의 태양』16)창작에 관여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임을 더욱 확고하게 받게 된다.「고마움」(1992)17)은 김일성사망 얼마 전에 쓴 시로 마치 로마교황 앞의 신자마냥 김일성에 대해 포복요절하며 김일성이 세상을 펼치고 시대를 열며 꽃을 피우고 나뭇잎도 설레게 하며 하늘땅을 주었다고 최고의 찬사를 내비치고 있다. 그는 1999년 죽을 때까지 문학예술총동맹위원장 및 백두산창작단 단장이라는 보직에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백인준은 줄기차고 극성스럽게 체제에 순응하고 수령형상문학을 내세워 혁명문예체계를 정립한 북한문학예술계의 대부로 꼽힌다. 이로부터 그는 북한을 대표하는 시인이고 영화문학가이며 문화예술행정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이런 위상은 문화예술분야의 첫 노력영웅이며, 첫 김일성상을 받았다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박팔양은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종군작가로 활약하며「진격의 밤」등 영웅서사시를 창작하기도 하지만 그의 시창작의 전성기는 전후시기로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장편서사시『황해의 노래』(1957)를 비롯하여 1960년대 중반 숙청되기 전까지 일련의 체제시, 수령시를 써낸다. 예컨대「노래는 강산에 울려 퍼지네」(1956),「위대한 그분」,「눈보라 만리」(1961),「영광의 날」,「건설의 노래」,「승리의 기발」,「그대의 손일」,「보천보의 횃불」,「밀림의 력사」등은 그 보기가 되겠다. 그러나 백인준에 비길 때 양이나 질에 있어서 훨씬 떨어진다. 그리고 백인준처럼 줄기차고 극성스럽지 못하다. 백인준은 체제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수령시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해방공간에서부터 줄기차게 극성스럽게 써내려 왔다. 그는 김일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이은 김정일에 대해서도 축원과 찬양, 충성의 시를 써 받쳤던 것이다. 歲月不任人의 제한도 있겠지만 박팔양에게 있어서 김정일에 대한 찬양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박팔양은 일찍 생을 마감한 점에 제한을 받아 김정일에 대한 찬양은 하지 못하였지만「몸과 마음 다 바쳐 우리는 받들리」(1972),「비단폭포 쏟아지네」(1972), 「우리는 수령님만 따르렵니다.」(1973)등 수령시를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창작한 이찬이나 1950년대 초 남로당에 연루되어 선불을 맞은 노루처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역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김일성의 자애로움을 노래한「어느 한 농가에서」(1968), 노동당을 노래하는 서정시「우리 당의 행군로」(1970)18)를 창작한 이용악에 비해서도 그렇게 줄기차고 극성스럽지 못하다. 천성이 극성스럽지 못하고 순한 티를 많이 보인 박팔양은 “단절속의 반복” 의 논리 속에서 광복 후 북한이라는 새로운 독재 내재 파쇼 체제 하에서 이찬이나 백인준이 인생에 별로 굴곡이 없이 “천수”를 누릴 수 있었고 명실공히 계관 시인이나 작가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던 데 비해 인생은 굴곡적이고 스산한 편이었다. 바로 이 점, 박팔양의 극성스럽지 못하고 악하지 못하고 순한 티의 성격특점이 일제치하의 위만주국에서도 동일한 표현현태를 가지며 친일문학에서도 그렇고 그런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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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친일문학의 허와 실을 박팔양의 경우를 일례로 삼아 살펴보았다. 박팔양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노정시키고 확실한 허와 실의 내적 논리를 따지기 위해 주로 이찬, 이용악, 백인준의 경우를 종횡의 참조계로 내세웠다. 굳이 이 세 작가를 내세운 것은 이들이 박팔양과 비슷한 시기에 생활했고 비슷한 인생경력을 가진 것으로 사료되고 북한을 대표할 수 있는 전형적인 시인들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박팔양을 비롯한 이찬, 이용악의 친일성향 작품을 구체적으로 따져볼 때 박팔양은 생계유지형 눈가림파적 경향이 강하다. 상대적으로 높고 볼 때 이찬은 감정기복의 大起大落에 따른 기분파적 경향이 강하고 이용악은 애상적인 비관파적 경향이 강하다. 백인준은 광복 전 작품창작을 그리 하지 않았고 친일작품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단절속의 반복”의 논리속의 광복 후 북한사회에서의 박팔양의 창작특성을 살펴보기 위한 좋은 참조계로 백인준의 눈치보기식 발라맞추기파 창작경향을 살펴보았다.
박팔양에 대한 연구는 최삼룡의 논문「박팔양과 신경」19) 에 보면 “총적으로 박팔양의 시와 인생에 대한 전문연구론은 거의 공백인바 다만 론문으로 ‘박팔양과 시문학’(리정구, 《현대작가론》2,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년)과 ‘박팔양론’(윤재응,《解禁文學論》, 미리내, 1991년) 두 편밖에 없다. 이 논문과 몇 권의 문학사와 사전들에서 보이는 박팔양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공백과 견해의 차이 그리고 수두룩한 모순당착적인 견해는 실로 사람을 놀래울 정도이다.”, “그리고 박팔양의 문학연구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즉 박팔양의 신경에서의 생활과 문학에 대한 연구가 여직 공백상태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생존력사와 문화풍토를 거슬러봐도 박팔양의 인생과 문학연구에 도움이 되는 재료가 역부족이다.” 최삼룡의 이러한 박팔양 관련 연구 상황의 제시는 본고의 자료미비 및 무단적인 추측, 논리의 비약 등 부족 점을 얼마간이라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본고를 마치도록 한다.
2006. 5. 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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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한국문학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______:『한국근대시사』(상, 하), 학연사, 1999.
1) 博文書館.
2) 『문학과 예술』, 2006.1
3) 밀줄 필자가 친 것임.
4)『滿鮮日報』1940. 4.9
5) 리정구:『박팔양의 시문학』, 『현대작가론(2)』,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6) 漢城圖書(株)
7) 博文書館
8)『每日新報』, 1944.1.19
9) 이것은 구소련의 스딸린이 그 시초를 이루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우후죽순처럼 신생한 전반 사회주의권의 공통한 병폐였다. 이것은 1990년 좌우 사회주의권 몰락의 기본적인 정치적 원인으로 되었다. 이에 반해 남한은 물론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내걸고 체제를 갖추었으되 그것은 이승만의 독재, 그리고 이어지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가 대변하다시피 빛 좋은 개살구의 다른 한 비극을 맛보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는 1980년대 말에 이루어진다.
10) 1947년 10월 혹은 1948년 8월에 월북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박팔양의 시 문학」에서는 광복되자 동북으로부터 곧바로 북쪽으로 귀국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11) 리정구:『박팔양의 시문학』, 『현대작가론(2)』,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12) 필자는 현재 해방공간에 있어서 박팔양의 작품을「박팔양의 시 문학」에서 소개한「다시 맞는 영광의 날」한 편밖에 접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시는 조국으로의 귀환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다.
13) 고민병욱의『북한영화의 역사적 이해』(도서출판 역락 2005. 8 157폐지)에서는 1967년 5월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카프계열 영화인 박팔영, 박금철, 김도만, 안함광 등이 숙청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4)이수림:『혁명송가문학』, 문예출판사 1989. p.32-33
15)전영선:『북한을 움직이는 문학예술인들』90폐지, 도서출판 역락 2004.9
16)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보천보창작단 1988
17) 1992년에 나온 시집『인민의 태양』(문예출판사)에 실리다.
18) 어떤 데서는 1961년 작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19) 『문학과 예술』,20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