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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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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하금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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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쇠내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쇠내, 아래새내, 하금천, 하금천리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용동리, 항강리, 중금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금리라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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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내 고려때 금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 하여 불렀다함. - 원하금 쇠내의 원 마을임. - 평촌(坪村) 평평한 들에 마을이 있어서 불렀다함. - 신대(新垈) 마을이 한구석에 새로 생겨 신대라고 함. - 고촌(高村) 지대가 높은곳에 있다하여 고촌 또는 높은땀이라 부름. - 용동(龍洞) 마을앞에 용소라고 부르는 웅덩이가 있는데 옛날에 여기에서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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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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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상금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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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 쇠내 위쪽이 되므로 웃쇠내, 웃새내 또는 상금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중금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금리라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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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금(上金) 웃쇠내, 웃새내, 상금천이라고 부른다. 쇠내 위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 간운이(看雲里) 구름과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유래 - 활골 마을 지형이 활모양 같다하여 부름. - 보내(洑內) 보안에 마을이 있다하여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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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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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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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산이 많은 그 사이에 흐르는 냇물과 들에 흐르는 냇물에 돌이 많아서 물이 돌속으로 흐르므로 냇물이 말라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건천(乾川)이라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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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직골 마을이 골짜기에 작은 내를 끼고 있다 해서 개직골이라 부름 - 신대 새터라고도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부름 - 암삼 마을 뒷산 봉우리에 있는 뛰엄 바위를 비롯하여 큰 바위 세 개가 있는 마을이라 암삼 또는 암삼리라고 부름 - 음지리 신대마을 아래 음달진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부름 - 일양이 아침에 햇빛이 일찍 들어온다 해서 일양리라고 부르다가 일양이라고도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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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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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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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제원역의 말을 먹이던 곳이므로 역들 또는 역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역평리라고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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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평(驛坪) 조선시대에 말을 먹이던 들에 마을이 있었으므로 역평이라고 부름 - 가오리(加五里) 역평에서 5리 더가면 있다는 마을 - 새터 최근에 새로 생겼다하여 부름 - 중역평(中驛坪) 역들 중앙에 마을이 있으므로 중역들, 중역평 이라고 부른다 - 계동(桂洞) 계수나무가 있다하여 지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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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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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대양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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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양지바른 곳이라 해서 양짓말, 양지촌 또는 대양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명고리, 두문동, 역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양리라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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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양 마을이 양지바른 곳에 자리해 있으므로 그리 부름 - 도룡동(道龍洞) 대양천을 끼고 있는 마을로 옛날에 용이 승천하였던 마을이라 하여부름 - 두문동(杜問洞) 대양천의 발원지 부근에 자리한 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부르게 됨. 옛 선비들이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모여 살던 이라 하여 그리 부르고 있다고도 함. 마을안에 불출암이 있어 「두문불출」이라는 용어에 걸맞음. - 명고동(鳴鼓洞) 마을 뒤에 있는 밭에서 장고소리가 난다하여 울구지 또는 명고동 이라고 부름 - 입석(立石) 마을에 들어서는 입구에 큰 바위 셋이 서 있어 부르게 됨 - 유곡(柳谷) 버드나무가 많은 곳에 들어섰으므로 버들곡 또는 유곡이라 부름 - 백암(白巖) 육백고지 밑에 있는 마을로 뱀이 많다 하여 뱀골 (배미골) 또는 마을 뒷산에 흰 바위가 있어 백암(白巖) 이라 불림 마을 뒤편으로 백암산 (600고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6.25전쟁 당시 금산군 최대의 격전지 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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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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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흑암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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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검은바위가 있으므로 검은바위 또는 흑암이 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혁 때에 성산리를 병합 흑암리라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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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흑암 마을 뒷산에 검은바위가 있으므로 흑암 또는 검은바위라고 부른다. - 성산(星山) 마을 안에 별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어 성산이라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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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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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구석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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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거북바위 또는 구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모티리, 고답리를 병합하여 구석리라 부름. 원래는 거북바위 마을이라 하여 구석리(龜石里)라고 쓰였으나, 일제시대 일인들이 구(龜)자가 쓰기가 어렵다하여 구(九)자로개명 되었다고 함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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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구석(元九石) 구석마을의 원 마을이라 원구석이라고 부름 - 모티 마을 뒤쪽으로 작은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 아래 작은 마을이 있으므로 모티 또는 뫼잘이 라고 부름 - 고답(高沓) 높은곳에 논이 있다하여 높은논이 또는 고답이라고 부름 - 광대정(光大亭) 옛날에 광대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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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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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매곡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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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매실나무가 많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으므로 통칭 매실 또는 매곡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풍전리, 호티리 일부를 병합하여 매곡리 라고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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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촌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어 부름 - 중촌 매곡리 가운데에 마을이 있으므로 중촌이라 부름 - 상촌 매실 위쪽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 해서 부름 - 탕건암 마을입구에 탕건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탕건암이라고 부름. - 풍전(豊田) 마을앞에 기름진 논이 있다하여 부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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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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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했다가 뒤에 승격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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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남이면 지역으로서 보석사 앞에 보석이 들어있다고 전해오는 보석바위가 있으므로 보석골 또는 석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심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동리라고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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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프내 마을에 깊은 내가 있으므로 지프내 또는 심천이라고 부름 - 석동 마을 지역에 보석바위가 있으므로 보석골 또는 석동이라고 부름 - 안골 지프내 서북쪽으로 산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을 안골 또는 내동이라고 부름 - 원석동 석동마을의 원 마을이므로 원석동이라고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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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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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때는 진내군의 영역 - 신라, 고려때는 진례군에 속함 - 고려 제25대 충렬왕 31년(1305)에 승격된 금주에 속함 - 조선초기 태종 13년(1413)에는 금산군에 속함 - 1914년 행정구역 개혁시 전라북도 금산군 남이면에 편입 -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남으로 편입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로 됨 |
명칭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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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에는 금산군 남이면의 지역으로서 벼랑이 있는 곳에 마을이있으므로 벼리실, 비리실, 성곡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성리, 하성리와 호티리, 심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성곡리라 부름 |
자연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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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성곡.비실 마을부근에 벼랑이 있으므로 벼리실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비리실, 비실, 성곡이라고 부름 - 개안이 들 안쪽으로 마을이 있으므로 개안이라고 부름 - 대문거리 옛날에 장자가 살았는데 큰 대문을 달고 살은 그 장자가 살던 마을이라 해서 부르게 됨 - 와말 옛날에 기와를 굽던 집이 있다하여 부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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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벽게수님 너무 놀랏소 어느새 그리많은공부를 대견하고 자랑스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