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진주소씨 청소년 뿌리 수련회 교재에서 발췌
소격달(蘇格達) 장군(將軍)에 대하여 1) 증산산성(增山山城)과 고소산성(姑蘇山城) 정효부인(正孝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아들의 신분을 숨긴 까닭으로 왕봉규의 아들로 행세하는 강주도독(康州都督) 소송(蘇淞)의 유복자인 소격달(蘇格達)은 당시 화랑으로 지리산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무예를 닦았다. 후백제의 세력이 날로 기승을 부리고, 멀리는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때였으며, 신라의 국운(國運)은 나날이 기울어져만 갔다. 이때에 후백제를 접경(接境)으로 왜구를 근접해 두고 있는 강주(康州)는 자체적인 방어가 시급하였다. 이에 소격달은 지리산 줄기를 따라 내려가다가 악양(岳陽 :오늘날의 하동군 옥종면)에 이르러 그 산세를 보고 여기에다 산성을 쌓는다면 서쪽으로는 후백제를 방어하고 남쪽으로는 왜(倭)를 방어하여 능히 강주를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당시 도독(都督)인 차윤웅(車閏雄)에게 건의하게 된다. 이에 강주도독은 증산산성(增山山城)을 소격달로 하여금 축성토록 하여 일대의 백성들을 모아 산성을 축성하게 된다. 성을 쌓게 된 또 다른 동기는 소격달의 할머니인 송로부인(松路夫人) 최씨[능주(能州:지금의 공주)도독(都督) 소은(蘇恩)의 부인:대아찬(大阿飡) 최귀의 딸]가 평소에 하던 말이 있었다. “가문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소씨(蘇氏)의 구장군(九將軍)이 될 사람은 필히 지리산 아래에 산성을 쌓아 적을 대비하게 될 것이고 그로인해 장군(將軍)이 된다” 고 말하였다. “그곳이 어됩니까?”하면 “층층이 되어있는 산이니라” 하였다. 그 며느리인 정효부인 경주김씨(시중 김윤한의 딸)는 이 말을 격달에게 말하면서도 정작 격달이 소씨인 것은 숨기었다. 시어머니 최씨와 헤어진 지 오래되어 생사(生死)를 확인할 수 없는 가운데 남편을 죽인 소씨의 원수 왕봉규(王逢規)의 아내가 되고 소격달이 왕봉규의 아들이 된 것은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일이요, 이 불행은 소씨의 혈통(血統)을 보존하고 조상이 남긴 바 세업(世業)을 잇고 조상의 영광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굴욕(屈辱)의 삶을 감수하면서 소격달이 성장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킬 때를 눈물로 기다려왔다. 그러던 중 아들이 증산산성을 쌓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가문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예언이 실현되어 가는 것을 직감했다. 김씨는 기쁨에 앞서 가슴이 떨리며 두렵기까지 했다. 한편 소격달은 정녕 강주도독 소송(蘇淞)의 아들로써 소씨(蘇氏)이지만 본인은 왕봉규의 아들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머니 김씨가 말한 소씨 축성전설이 웬지 자신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성(城)을 쌓기로 결심을 한다. 소씨의 축성전설이 소격달의 잠재의식(潛在意識) 속에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증산산성이 거의 완공되어 갈 무렵인 서기 916년 8월에 후백제가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여 신라군을 궤멸시켰다. 이것을 본 소격달은 성 구축에 박차를 가하여 드디어 산성이 완성되었다. 이때가 916년 9월이다. 성의 길이는 350미터이고, 높이는 3.5~4.5미터나 되었으며, 폭은 6미터나 되었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 각각 문을 내었다. 지금은 산성터가 거의 멸실 되었지만 당시 무기를 만들던 풀무터가 남아있다. 이렇게 되자 왕봉규는 강주도독 차윤웅에게 소격달을 하동태수로 봉(封) 해줄 것과 장군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품의해 그대로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효부인은 이제는 모든 사실을 자식에게 밝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하동군 옥종면 산성을 둘러보게 된다. 이때 남편인 강주도독 소송(蘇淞)에 대한 사모의 정이 솟구쳤고, 이제는 죽어서 지하에 묻혀도 소씨가문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그 동안의 설움이 복받쳤다. “장하다 아들아! 이 에미는 강제로 혼인을 하였으나 이런 날이 오기를 손꼽아 고대하였다. 너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그 이전 조상님들 때부터 이미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느니라.”하며 자세하게 구세(九世) 구장군(九將軍) 얘기를 하였다. “너를 뱃속에 가졌을 때 왕봉규가 반란을 일으켜 너의 아버지를 죽이고 이 에미와 강제로 혼인을 하였으나 이미 잉태한 너에 대해서는 왕봉규와 너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해 왔다.” 정효부인은 숨을 거두면서 진주 구시목(九柿木)을 찾고 할머니를 찾으라며 숨을 거두었다. 후에 정효부인이 자결한 곳에서 대나무가 났는데, 그 대나무 잎은 여느 대나무와는 달리 반점이 있었으니 정효부인이 자결한 피의 흔적이라고 지금도 진양 일대에서는 전해지고 있다. 격달은 크게 격분하여 왕봉규를 죽이기로 결심하지만 왕봉규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당분간은 기회를 보며 왕봉규의 아들로 행세하였다. 어머니의 시신은 현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 욱숙곡에 장사를 치루고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할머니가 계신 곳을 알아보니 소씨들의 종가가 있는 진주 선학산 아래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종가집에는 구시목이란 감나무가 있고 이 감나무는 250년 동안에 아홉 번째로 큰 감이 열려있다는 사실과 친할머니인 송로부인 최씨도 살아계신 것을 알아냈다. 송로부인 최씨는 구시목에서 아홉 번째로 큰 감이 열렸을 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이상한 일이네.” “아들 죽은지가 27년이나 지났는데...” “자손도 없는데 감이 열리다니 또한 며느리도 지금은 왕봉규의 아내가 되었을 터인데 웬일일까?”하고 9세 9장군 전설을 생각하며 조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속이 메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전혀 가망이 없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음에 황당무계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는 터였다. 구시목에서 큰 감이 열릴 때마다 소씨직계로 대장군이 배출되었었으니... 지금 자손도 없는데 마지막 아홉 번째 가지에서 장군의 등극을 알려주는 큰 감이 열려 당연히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뜻밖에 건장한 젊은 청년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가 송로부인 최씨의 손자라고 하니 최씨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소격달장군은 그동안의 상황을 말씀드렸다. “소씨의 9장군이 될 사람은 지리산 아래 산성을 쌓아 적을 대비한 후에 장군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소씨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어머니가 들려주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격달아!”하며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감격의 상봉을 하였다. 신라 명문 소씨는 송로부인 최씨가 그의 며느리 정효부인 경주김씨에게 구시목 내력과 9세 9장군 축성 전설을 전하지 않았다면 격달장군이 당대에 명장일지라도 왕격달 장군으로 전하여졌을 것이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교훈을 깊이 새겨 아들로 하여금 축성케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고 그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자 떳떳이 자결하였으니 며느리의 목숨은 시어머니의 교훈 즉, 9세 9장군을 잇는데 있었으니 그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요, 우리 소씨 가문을 다시 소생시켜준 위대한 희생이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이 성을 고소산성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고(姑)는 시어머니인 송로부인 최씨를 뜻하고 소(蘇)는 소씨(蘇氏)를 의미하는 것이다. 2) 소격달장군(蘇格達將軍) 고려(高麗)에 귀부(歸附) 소씨 9세 장군의 출현은 마지막을 의미한다. 소씨의 한시대의 마지막임과 동시에 새시대의 시작이기도 하다. 918년 6월 왕건이 후고구려인 태봉(泰封)국을 대신하여 나라를 세우고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이에 태봉국주(泰封國主)이었던 궁예(弓裔)는 도망가다가 평강에서 피살되었다. 919년 1월에는 왕건(王建)이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10월에는 평양성을 축성하는 등 국권이 강해지자 후삼국 백성들의 민심이 점점 고려(高麗) 쪽으로 기울어졌다. 왕봉규 및 그 일당이 소씨의 원수인 것을 안 소격달장군은 후일을 대비하여 하동의 군사들을 강인하게 훈련시켰으며 고모부 최유문(崔有文)과 힘을 합쳐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그리하여 강주서부 일대를 점거하고 왕봉규 일당과 대치하였다. 이렇게 격달장군이 뜻을 세워 나가자 소씨 가문의 은덕을 입은 자와 아버지인 강주도독 소송장군(蘇淞將軍)과 같이 당시에 왕봉규 일당에게 화를 당한 유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또한 호족(豪族)인 원서(元瑞), 이중인(李重仁), 안유생(安有生), 박옥헌(朴玉憲), 김수봉(金秀奉)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차윤웅(車允雄) 일당과 대치하였으며 주변 고을의 태수(太守)들도 합류하였다. 남해태수 손평조(孫平朝), 고성태수 박명훤(朴命萱), 함안태수 윤선(胤宣), 거제태수 낙창(洛昌), 천령태수 배한내(裵韓乃)등 다섯 고을의 태수이다. 차윤웅과 왕봉규 세력은 후백제나 태봉국처럼 독립국으로 행세를 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경주일원만 남게 되었고 그 나머지 지역은 제각각 그 지역 장군으로 하여금 맡게 하여 각자도생(各自圖生)하였다. 920년 경명왕4년 1월에는 아찬(阿飡)공달을 고려에 보내어 공작선(孔雀扇:부채)과 지리산죽(智異山竹)을 선물하고 수호하여 줄 것을 부탁했다.(불가침 조약) 이때 하동태수인 소격달장군은 강주를 탈환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신라도 고려에 조공하며 아부를 하는 터라 이를 알아챈 차윤웅은 자칫하면 강주가 고립될 것이 불안하여 그의 아들 차일강(車一康)을 고려에 보내어 인질로 삼게 하고 고려에 항복한 후 소격달장군과 견훤의 후백제를 고려의 힘으로 견제하려 하였다. 그 해 9월에는 견훤이 신라의 대양(大良)과 구사(仇史)등 2개 고을을 빼앗았고 10월에는 견훤이 1만군사로 대야성을 치고 신라로 진군하니 신라는 아찬 김율(金律)을 고려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니 왕건은 구원병을 보내어 견훤을 물러가게 하였다. 925년에는 견훤이 강주관할하에 있는 거창등 20여개의 성들을 공략하였다. 차윤웅이 견훤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거창에 이르렀을 때에 이미 전세는 후백제의 승리로 굳어졌으며 차윤웅이 거창에서 견훤에게 밀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소격달장군은 최유문, 원서, 이중인, 안유생, 박옥헌, 김수봉등 여러 장수들 그리고 4고을 태수 및 군사들과 거창으로 진격하여 견훤 세력을 물리쳤다. 이때 거창태수인 한기열(韓基烈)은 견훤군을 물리친 군대가 차윤웅과 견원지간(犬猿之間)인 소격달장군의 군사임을 알고 대세도 이미 소장군에게 기울었음을 직감 소장군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거창태수 한기열은 한밤중에 몰래 거창성을 빠져나와 소장군 진지로 찾아가 거창성 차윤웅을 치기위해 성문을 열어줄 것 등을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소격달장군은 거창성을 무난하게 점령하고 차윤웅을 제거하였다. 이때 왕봉규는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가 강주로 돌아가 차윤웅을 대신하여 강주도독이 되었다. 격달장군이 거창성에 입성할 때 거창태수 한기열을 거창 백성들이 환영하였고 거창태수는 절세미인 딸을 소격달장군에게 소개하고 백년가약을 맺어주었다. 이 분이 화영부인(和英夫人) 한씨(韓氏)이다. 왕봉규는 강주도독이 된 후 고려와의 관계를 끊고 좌충우돌(左衝右突)하는 견훤 세력과 두려움의 상징이 되는 소장군 세력등에 눌려 중국과 직접 외교를 맺으려하였다. 이에 소장군은 926년 봄, 고모부 최유문과 관할지역 군사 1천명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부(歸附)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힘을 빌어 왕봉규 일당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이해에 소격달장군과 화영부인 한씨 사이에 아들을 낳았으며 이가 바로 소진흠(蘇振欽)이며 이는 후일 판관(判官)이 되었다. 아무튼 소격달장군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소씨집안은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신유보(辛酉譜)에는 소진흠의 출생년도가 950년 광종1년 경술년(庚戌年)으로 되어있다. 소격달장군이 891년에 출생하시었고 소진흠이 950년에 출생하고 소진흠의 큰아들은 류(瑬)요, 둘째 아들은 975년 을해년(乙亥年)에 출생한 이부상서(吏部尙書) 현(顯)이니 소진흠과 그의 손자인 소현(蘇顯)과의 차이가 불과 25년밖에 차이가 안나고 또한 소현(蘇顯)의 자(子) 소계령(蘇繼笭)이 1034년생이니 현종의 국구(國舅:장인- 딸은 회순왕후)이다. 그러므로 소진흠의 출생년도는 950년 경술년이 아니고 926년 병술년(丙戌年)의 오기로 봐야 연대가 맞다. 소격달장군이 고려에 귀부(歸附)한 해가 바로 소진흠을 낳은 해이기도 하다. 그 해가 926년이다. 3) 소씨의 새로운 시대 927년 고려태조(왕건) 10년 4월에 왕봉규는 임언(林彦)을 후당에 보내어 조공하니 후당 명종이 중흥전(中興殿)에 불러 하사품을 주었고 후양(後梁)과도 외교를 터서 권지강주사회화대장군(權知康州事懷化大將軍)으로 임명 받았다. 권지란 공인되지 않은 상태의 직위로 오늘날의 서리직과 같으니 왕봉규는 후량에 의해 강주도독 서리가 된 것이다. 명나라에서 왕건을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 한 것과 927년 8월에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金傅:경순왕)를 권지국사에 임명한 것 등은 모두 왕서리(王署理)를 의미하는 것이다. 왕봉규에 대해서도 그 종주국인 신라가 엄연히 현존하는 한 정식 임명을 할 수 없어 권지강주사회화대장군(權知康州事懷化大將軍)이라 한 것이다. 이 무렵 소격달장군은 왕건(王建)에게 강주일대를 정벌할 것을 요구하니 이에 왕건은 우선 주변고을인 남해를 공격하였다. 고려장군인 영창능(英昌能)은 이때 전이산(전야산), 노포, 평서산, 돌산 등 4경(卿)을 점령하였다. 한편 소격달장군과 최유문(격달 고모부)은 강주로 진격하여 왕봉규를 죽였다. 그 공로로 고려 태조가 최유문을 강주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송로부인 최씨가 진주종가에 이르러 보니 구시목(九柿木)이 죽어있었다. 이것을 보고 격달에게 말하기를 “소씨 상징 나무인 구시목이 죽은 걸 보니 신라의 운도 다 한 것 같구나...” “비록 소씨가 신라의 절대적인 명문이었으나 이제는 고려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후로는 고려에서 벼슬을 해라.”고 말하였다. 그 후 소격달은 공적을 인정받아 고려의 대장군이 된다. 그러나 928년 강주도독이자 고모부인 최유문이 마음이 변하여 고려를 배반하였다. 이에 진노한 왕건은 장군 김상(金相)으로 하여금 강주관할지역등을 공격하니 강주는 위태한 지경에 빠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928년 5월에 최유문이 원보(元甫), 진경(珍景)등을 시켜 고자군(古自郡)으로 군량을 운반하던 도중 300여명의 군사가 견훤군에 항복하니 결국 최유문은 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 강주는 다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인척 최유문의 배신으로 인하여 소격달장군은 왕건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공로도 인정받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격달장군은 할머니의 유훈대로 고려만 섬기기로 결심하고 재신임의 기회만을 기다렸으나 절망의 세월만 흘렀다. 928년 고려 태조 11년부터 태조 승하 후 왕권쟁탈로 인한 혼란기를 피하여 소격달장군은 진양(晉陽) 소촌(蘇村)으로 낙향하여 946년 정종1년 때까지 19년간을 정중동의 자세로 기다렸다. 이 기간동안은 고려건국과 후삼국의 통일 그리고 고려 명벌들이 새로이 형성되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나 신라의 명벌이던 진주소씨가 신라의 멸망과 함께 무너져버려 도약의 황금기를 얻기가 매우 어려웠다. 더구나 소격달장군이 고려에 큰 공을 세웠을지라도 인척인 고모부 최유문이 고려를 배신한 사건은 소씨가 고려에 진출하는데 큰 장애가 되었다. 이러던 소격달장군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934년 태조가 운주(雲州:지금의 홍성)를 공략하게 되었다. 후백제는 운주가 함락되면 동쪽에 근접한 능주(能州:지금의 공주)까지 위태해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므로 견훤은 총력을 다 해 고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고려는 워낙 저항이 심하여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병법에 뛰어난 소격달장군의 기지와 용맹으로 난공불락의 운주성이 드디어 함락되고 말았다. 이뿐이 아니라 주변 고을 웅진등 후백제의 30여개의 성들이 모두 투항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또한 그해에 발해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 군중을 이끌고 내려와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래서 고려는 후백제보다 월등한 군사력과 힘을 가지게 되었고 후백제는 나날이 쇠퇴하였다. 또한 신라는 거의 멸망 직전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격달장군은 태조 왕건의 재신임을 받게 되었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여러 아내를 취하여 아들이 10명에 이르렀고 이 중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계승토록 하였는데 이를 알아 챈 장남 신검(神劍)이 935년 3월 능환(能奐) 그리고 두아우 양검(良劍)과 용검(龍劍)등이 합세해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불자(金山佛字)에 가두고 금강을 죽이고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며 후백제 2대왕이 되었다. 그해 6월 견훤이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였다. 내분에 쌓인 후백제는 936년 왕건과 일선군(一善郡:선산)에서 크게 싸워 대패하니 왕건은 능환과 신검의 두 아우를 죽이고 후백제 유민들을 달래려고 신검에게 벼슬을 주었다. 이때 견훤이 병으로 죽었다. 이로써 후백제는 완전히 망하였다. 935년 12월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니 천년의 신라도 드디어 망하게 되어 고려는 3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신라는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되는 56대왕 992년만에 국권(國權)이 상실되었고 신라 태자는 개골산(皆骨山 : 金剛山)에 들어갔다고 하는 유명한 마의태자(麻衣太子) 이야기가 있다. 이에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자에게 벼슬과 후한 상을 내렸다. 이에 소격달 장군은 936년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봉하여졌다. 문종때 태부(太傅)에 추증(증직)되었으니 태부는 삼사(三師)라 하여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가 모두 같은 정일품직(正一品職)으로 중국의 古제도를 모방하여 설치하였다. 삼공(三公)과 함께 임금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으로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고 적임자가 없으면 공석으로 두었다. 벽상공신의 벽상(壁上)은 공신의 초상을 벽에 걸어 두고 그 공을 치하하는 것을 말하며 삼한공신(三韓功臣)이란 후삼국을 통일한 공신이란 뜻이다. 또한 이런 공신의 후손들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부르게 하였다. 4)왕규의 난에 의해 소촌 隱居(낙향) 태부공(太傅公:격달)은 박술희(朴述熙)와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18세에 궁예(弓裔)의 호위병으로 있다가 후에 태조를 섬기면서 수차에 걸쳐 공을 세워 대광(大匡)이 되었다. 혜종을 태자로 봉하는데 공이 컸으며 태조의 유명을 받아 혜종을 보좌하였다. 권신 왕규와 사이가 좋지 못하던 중 정종에게 의심 받아 강화로 귀양 갔다가 왕규에게 피살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 영향이 격달공에게 까지 미칠 것으로 예측되어 격달공은 945년 왕규의 난을 계기로 소촌으로 낙향 은거하기에 이른다. 왕규는 태조때의 대광이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들여 하나는 제15비(妃)로 하나는 제16비(妃)로 삼았다. 제16비(妃)가 아들을 낳으니 광주원군(廣州院君)이라 하였다. 945년 혜종2년에 왕규는 야심이 있어서 임금 혜종(惠宗)에게 무고하기를 임금의 동생 요(堯)와 소(昭)가 딴마음을 품고 있다고 이간질을 하였으나 임금은 왕규의 계략으로 알고 동생들을 더욱 사랑하였다고 한다. 점복(占卜)에 밝은 최지몽(崔知夢)이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역적이 일어나겠다하니 임금은 왕규가 자기 동생들을 해치려는 징조로 짐작하고 소(昭)와 자기의 맏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튼튼히 해 주었다. 왕규는 자기의 딸이 낳은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밤중에 임금이 깊이 잠든 틈을 이용해서 몰래 심복을 들여보내 죽이려고 하였으나 마침 임금은 잠을 깨어 한주먹으로 자객을 죽이고 심증이 가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하루는 임금이 편치 않아 신덕전(神德殿)에 있는데 최지몽이 아뢰기를 장차 변이 있을 터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하여 임금은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겼다. 왕규는 예정대로 벽을 뚫고 궁전으로 들어갔으나 임금은 이미 피한 후였다. 이번에도 혜종 임금은 불문에 붙였다. 그 해에 혜종이 승하하고 동생이 왕위에 오르니 정종이다. 왕규는 재빨리 정종의 명이라고 속여 충신 박술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정종은 예전부터 왕규의 동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혜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서경(평양)의 수비대장 왕식렴(王式廉 : 태종의 종제. 정종의 당숙)과 미리부터 연락해 두었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니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개성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하니 왕규는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갑관(甲串)에 귀양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죽여버리고 그의 심복 300여명을 처형하였다. 고려초에 이런 대격변이 있어 이런 전후의 사정을 잘 아는 격달공은 박술희 피살 직후 고향으로 낙향한 것이다. 947년에는 문중과 협력하여 동근보(東槿譜)를 발행하니 비록 왕규의 난으로 초야(草野)에 묻혔으나 오히려 소씨(蘇氏)의 내력을 후손들에게 상세히 알려주는 기록이 되었으니 우리 후손들은 선조님들이 얼마나 국가를 위하여, 가문을 위하여 열심히 명문의 씨족답게 훌륭히 살아 오셨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공의 휘는 격달(格達)이요 자(字)는 유달(有達)이며 호는 모은(慕隱)이고 관(官)은 고려국대장군(高麗國大將軍)이니 신라국(新羅國) 강주도독(康州都督) 소송(蘇淞)의 유복자(遺腹子)로 단기 3224년(서기 891년) 신해(辛亥) 4월 14일 탄생하였으며, 983년 6월 10일 격달공이 별세하시기 전까지 38년간을 초야에서 지내셨다. 공이 별세한 후인 1057년 문종11년(丁酉年)에 강평(康平)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이때 태부에 추증(追贈)되었다. 또한 1102년 숙종7년(壬午年)에 고소산성 유래에 의하여 산성아래에 낭열사(郞烈祠) 건립을 하사(下賜)하였다. 낭열사란 신라 화랑이시었던 태부공 소격달을 말하며 정효부인 경주김씨의 고소산성에서의 자결의 열(烈)을 말한다. 지금도 하동군 옥종면 고소산성아래 그 터가 남아있어 기왓장 조각이나 그릇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고 지금은 밭이 되어 옛 영화(榮華)만을 그리며 조금은 쓸쓸함을 느낀다. 또한 1111년 예종6년(辛卯年) 봄에 공의 낙향지인 소촌(소촌 : 현 경남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에 진주소씨 직계 9세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구인사(九印祠)를 건립토록 하사하였다. 지금도 그 유허지가 소문리에 있고 (現 진양고교자리) 구인사 앞에 설치하였던 하마비(下馬婢: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큰자나 작은자나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가 있었다. 하마비는 궁궐 앞에 세워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게 하는 비석인데 소씨문중에서도 구인사에 설치하였다 하니 구인사의 위용(偉容)은 가히 상상할 만하다. 그 비신(碑身)은 실전되었으나 귀부(龜趺) 입비좌대(立碑座臺)가 남아있으니 1미터 크기의 돌거북이다. 경공으로부터 47세손인 상원공파 후손 소현섭 일가가 정리한 씨족사 문헌에는 「공의 묘는 진양군 문산면 월화산 욱숙곡 선비(先妣) 경주 김씨묘 우(右)에 있어 子坐(正南向)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현재 우리 후손들은 공의 묘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므로 실전된 다른 선조님들과 함께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선영에 29위설단(29位設壇)으로 지단(之壇)을 조성하여 매년 3월에 시제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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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몇번을 다시 읽어보아도 좋은 자료입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격달 할아버님 출생년도 서기가 잘못된것 같습니다.그리고 891년생이면 938년 별세 하셨다면 47세에 돌아가셨다는건데 38년간 초야에 계셨다는것은 무슨뜻인가요? 그리고 938년은 계미년이 아니거든요. 할아버님께서 계미년에 돌아가셨다고 하셨으니 계미년은 923년아니면 983년이라야 맞습니다. 33세 아니면 93세에 돌아가셨다는 뜻이거든요. 983년 93세에 돌아가신걸 938년으로 오타가 났는지? 알려주세요~~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로 인해 잘못 기록되었었습니다. 족보와 씨족 문헌을 대조하여 다시 정정기록하였으니 이해 바랍니다. 격달공의 출몰연대는 891년 4월 14일에 출생하시어 983년 6월 10일에 타계하셨으니 수는 92세가 되겠습니다. 잠시 혼동을 드려 죄송합니다.
일가님! 여러가지 쓰다보면 오타가 날수도 당연히 있지요. 92세는 서양식 나이이고 한국식은 93세입니다. 983- 891= 92세가 되지만 우리 나라는 1세를 더하여 93세가 되는것입니다. 넘 복잡하게 따진것 같네요.참 오래 사셨네요~~
928년 최유문의 반란으로 19년간 자중했다고 하는 데 934년 운주성 공략을 했다는 것은 19년 기간 표기 오류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