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둑론을 읽는다
성선경
다시 바둑론을 읽는다. 내 문학적 한 고비가 되었던, 어쩌면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돌아가고 싶기도 한 나의 고향 한 자락. 내가 바둑론을 쓴 것은 1987년 여름이었다. 군(軍)에 갔던 아우가 휴가를 나와 갈 곳 없는 실업자 같이 막막해 하던 대학생인 나를 찾아왔다. 피 끓는 젊음과 길기만한 여름의 시간은 넘쳐났지만 빈 지갑의 자취생이던 나는 아우의 고된 군(軍) 생활을 위로할 그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아우에게는 짧디 짧은 휴가였지만 나에게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하는 긴 시간, 그러나 빈 바람만 가득 찬 지갑, 이 부끄러운 현실을 메우기 위해 하루 왼종일 군 시절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을 두었다. 삼박사일, 아우는 검은 돌과 흰 돌 바둑만 두다 총총히 귀대를 하였다. 나는 보이지 않는 포충망에 걸린 곤충같이 비참해졌다. 아아 분단된 나의 조국이여. 나의 아우여. 나는 그날 밤을 새워 바둑론을 썼다. 그리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당선 후 나는 인터뷰에서 바둑이라는 나누어진 세계를 가지고 어떻게 상생(相生)의 세계를 노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때 어떤 보이지 않는 금 같은 것을 느꼈다. 아 금이라. 나는 내 고향을 떠올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 청학동이다. 지리산 청학동과 동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혼동을 하듯 내가 생각하기에도 한 이상향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내 고향 청학동이란 곳의 행정상 주소는 고암면 억만리에 속해 있지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창녕읍과 고암면의 경계에 있다. 그래서 한 마을이면서도 행정상의 절반은 창녕읍에 속해있고 절반은 고암면에 속해있다. 이 가운데서도 우리 집은 더욱 기가 막히게 안채는 고암면에 사랑채는 창녕읍에 속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을 고암면과 창녕읍을 들락거리게 되어있다. 할아버지의 진지상으로 예로 들자면 고암면에서 창녕읍으로 진지상을 내어갔다가 창녕읍에서 고암면으로 진지상을 물리는 식이다. 옛날의 행정구역은 산(山)이나 내(川)를 중심으로 나뉘어졌고 아마 우리 집 마당 가운데로 내(川)가 흘렀으리라. 그러다가 큰 홍수나 자연적인 물의 흐름이 바뀌면서 내(川)가 우리 집 앞 남쪽으로 20여 미터나 물러나 버렸고 그 후 그 땅 위에 우리 집이 지어졌으리라. 그러나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행정구역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 지금의 우스운 꼴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삼십여 호에 불과한 조그만 부락이 아직도 윗집 아랫집이 행정구역이 서로 다르고 보니 여러 가지 재미난 일들도 많았다. 우리 또래의 절반은 창녕읍 명덕초등학교 졸업생이고 절반은 고암면 고암초등학교 졸업생이다. 그래서 꼬맹이들이 마을 뒷산에서 모여 공을 찰 때에도 창녕읍팀과 고암면팀으로 나뉘어 한 판 시합을 벌이기도 하고 어른들이 윷놀이를 할 때도 적당히 편을 가르기가 무엇하면 창녕읍팀과 고암면팀으로 나뉘어 윷판을 벌렸다. 그러나 자라면서 우리는 그게 무슨 대순가 별 불편함 없이 지냈다. 함께 명절을 쇠고 세배를 다녔으며 함께 먹고 함께 뒹굴었다. 농사일이 급하면 서로 품앗이를 하고, 마을에 큰 일이 나면 모두 모여서 의논을 하고, 호미나 낫, 농기구 필요하면 내 집 인양 스스럼없이 들락거리곤 했다. 여름날 천렵이라도 하면 매운탕이나 추어탕도 담을 넘겨 나누어 먹었다. 행정상으로는 지금 분단의 남북처럼 나뉘어져 있었으나 우리에게 금 같은 것은 없었다. 마치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한 물줄기로 만나듯. 그럼 왜 바둑론이었는가? 바둑은 요임금이 창시하여 그 아들 단주에게 전수한 것이다. 요임금은 그 아들 단주를 불초(不肖)하다 하여 천하를 맡기지 않고 그 두 딸과 천하를 순(舜)에게 전하여 주었고, 그의 원과 한을 잊게 하기 위해 바둑을 창시하여 전한 것이다. 이로서 인류 역사 역린(逆鱗)에 의한 원한의 뿌리는 단주에게서 시발되었고 바둑은 역린에 의한 인류 한의 시발이라 할 바로 그 단주의 한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둑은 바로 이 세상의 상극 기운의 상징이며 그 모든 역린에 의한 원과 한의 근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 잘못 흘러온 역사의 시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남북분단도 잘못된 역사, 역린의 역사라 할 것이다. 그럼 왜 통일론이었는가? 남북의 통일은 단순히 남북의 물리적 합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천의 상극문화를 개벽하여 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큰길이다. 선천의 개벽은 남북의 상씨름으로 시작되나니 이는 오선위기도수(증산도 도전 5편 415장)라.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세인 한반도는 선천 상극문화의 표본이요 그 결정판이다. 이렇게 잘못 흘러온 인류의 역사는 남북의 통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어 다시 바른 흐름으로 제 길을 찾게 되니 이것이 상극문화의 마침이요 후천 상생문화의 시작이다. 여기에 우리의 남북통일이 갖는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둑론을 쓴지도 벌써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한 칸 한 칸씩 메워 한 판의 잘 어우러진 모자이크를 만드는 세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오히려 흩어진 조각그림처럼 점점 더 아귀가 어긋나고 있다. 사회는 더욱 다각화되고 갈등의 골은 더욱 심화되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서로를 찌르며 날카로움을 과시하고 있다. 마지막 상극의 극을 달리는 듯 이런 현상들은 더욱 심화 되고 있다. 이런 때에 오늘의 뉴스는 신선하다. 이제 상생으로 가는가? 이제는 상생으로 가는 것인가? 새봄이 오는가? 나는 다시 바둑론을 읽는다.
바둑론
우리가 스스름없이 우리라고 부를 때 바둑을 두자, 아우여 돌싸움을 하자 생나무 자라는 소리 쩡쩡한 남녘의 아랫도리 그 어디쯤에서 청동(靑銅)빛 말씀이 내리던 백두(白頭)의 천지(天池) 그곳까지 날줄과 씨줄의 모눈을 메우며 우리들의 날들이 오로지 나아가야 할 길 닦음을 해 보자. 때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과 산수문제처럼 부대껴야 할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면서 내가 온 봄날의 잡꽃을 피우며 단발령, 추자령 숨가쁘게 치올라갈 때 너는 또 대둔산, 멸악(滅惡)을 넘어 잘 익은 가을의 단풍잎 물들이기로 그렇게 내려오라.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같은 돌싸움을 붙여 보자, 고싸움을 해 보자. 세상의 비어 있는 자리를 서로 메우며 한 상 가득 고봉밥을 마주할 수 있다면 꼬이고 꼬여서 만두속 같은 세상도 또 한 판 훌륭한 그림그리기 아니냐. 흑이다 백이다 온 들에 모눈을 메우며 삼천리 화려강산 모자이크를 그려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취(宿醉) 같은 것 시원히 아침의 해장을 하지 않으면 언제 저 넉넉한 태평양 대서양 우리의 집 한 번 만들어 보겠느냐. 우리가 우리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때 스스로 셈하여 볼 내일도 있는 것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같은 돌싸움을 붙여 보자, 고싸움을 해 보자.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성선경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바둑론」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까마중이 머루알처럼 까맣게 익어갈 때』, 『파랑은 어디서 왔나』,『석간신문을 읽는 명태 씨』,『봄, 풋가지行』,『진경산수』,『모란으로 가는 길』,『몽유도원을 사다』,『서른 살의 박봉 씨』, 『옛사랑을 읽다』,『널뛰는 직녀에게』가 있으며 시선집 『돌아갈 수 없는 숲』. 시작에세이 『뿔 달린 낙타를 타고』. 산문집 『물칸나를 생각함』. 동요집 『똥뫼산에 사는 여우』(작곡 서영수) 가 있다. 고산문학대상, 경남문학상, 마산시문화상, 등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