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12권을 차례로 요약 정리하여 올립니다. 고병권님의 글이 워낙 깔끔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시리즈를 요약한다는게 오히려 작가의 글을 더 어지럽게 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서 후 정리라는 저의 작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우려를 무릅쓰고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11권 『노동자의 운명』
1. 노동자계급의 운명
○ 역사유물론자가 ‘운명’을 말하는 방식
『자본』은 노동자계급의 운명에 대한 이론적 해명
“노동자의 불운이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기하학적 성격이라는 것, 아버지의 불운과 아들의 불운이 독립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 노동자가 되지 못한 자의 불운은 노동자가된 자의 불운과 맞물려 있다는 것, 부자를 낳는 원리가 빈민을 낳는 원리이기도 하다는 것, 잉여가치를 낳는 사회가 잉여인간을 낳는 사회이기도 하다는 것 등”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노동자계급의 운명’
『자본』 I권 제23장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서는 “자본의 증대(성장)가 노동자계급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 세 가지 사실을 확인
첫째, 노동자계급의운명은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이 실현된것. 즉,노동자들의 불행이 법칙(법)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법칙의 실현이고, 불법이 아니라 합법이라는 것
둘째, 이 운명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것, 계급적인 것이라는 뜻. 개인으로서는 모르지만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을 피해서 살 수가 없음
셋째, 노동자계급의 운명은 자본의 증대, 축적에 따라 그것이 규정되는 자본 운동의 종속변수. 오늘 노동자는 내일도 노동력을 팔 것이며 그 자녀도 노동력을 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래에 실현될 예언이 아니라 현재 작동하는 사회적 배치의 확인
역사유물론자는 사회적배치를통해 사물의운명을 읽지만, 그 배치의 해체와 더불어 도래할 사물의 다른 운명도 읽음. 현재가 지시하는 (재생산으로서의) 미래와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읽고 그 가능성을 발굴하려 하는 것이 이들이 ‘운명’을 읽는 방식
○ 자본의 구성-가치구성, 기술적 구성, 유기적 구성
‘자본의 구성’이란 말 그대로 자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
자본가가 투자한 자본은 생산수단에 해당하는 부분(불변자본, c)과 노동력에 해당하는 부분(가변자본, v)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본의 구성이란 이 둘 사이의 비율
이 비율을 ‘가치’로 표시하면 생산수단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비율, 즉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 ‘자본의 구성’을 ‘소재’측면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양’으로 나타낼 수도 있음. 이경우 생산수단의양과 노동력의양 사이의 비율
자본의 구성을 전자의 방식으로 나타낸 것을 자본의 ‘가치구성’, 후자의 방식으로 나타낸 것을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라 부름.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자본의 가치구성이 기술적 구성을 나타낼 때, 즉 가치구성이 기술적 구성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여줄 때 그 가치구성을 ‘유기적 구성’이라 부름
자본의 구성도 가치로 나타내면 부문이나 업종을 넘어서 생산수단의 양을 비교하고 합산할 수 있는데, 가치의 양적 변화가 실물의 양적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전제가 필요. 이렇게 가치구성을 통해 기술적 구성을 표현할 때, 다시 말해 가치구성이 기술적 구성을 나타낸 것으로 간주될수있을때 그 가치구성을 유기적 구성이라 부름
○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말하는 이유
마르크스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집하는 것은 그만큼 기술적 구성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 자본가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에 돈을 얼마나 투자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실제 사용한 생산수단의 양과 노동력의 양이 얼마만큼인지, 그리고 이 둘 사이의 비율이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중요하다는 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자본관계(계급으로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맺는 관계)를 표현. 불변자본과 관계하는 가변자본의 양이란 단순한 투자액 크기만이 아닌, 생산수단에 결합하는 노동력의 양 또한 표현. 이는 자본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양
결국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생산수단의 양과 인간재료의 양적 비율, 다시 말해 자본의 착취 재료가 된 인간의 상대적 비율.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착취의 재료가 되고, 어떤 방식으로 이런 운명에 빠져드는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을 가치량(화폐액)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상이한 산업부문과 업종에서 생산수단의 양과 인간재료의 양을 합산할 수 있게 해주어,‘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살펴볼 수 있음
마르크스가 “앞으로의 논의에서는 사회적 자본[총자본]의 구성만을 문제로 삼겠다”라고 말한 것은 이 차원에서만 계급으로서 노동자의 운명을 말할 수 있기 때문
바로 이것을 가능케 한 개념적 장치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
2. 빈민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광산
○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다
자본이 성장한다는 것은 그 구성 성분인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특히 가치증식의 원천인 가변자본은 꼭늘어야함. 가변자본이 는다는것은 노동력의규모가 커진다는 뜻. 자본의 축적, 즉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려면 노동력의 확대재생산이 필요.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는 자본관계에 예속되는 노동인구가 계속 늘어야 함. 자본의 성장과 노동인구의 확장은 나란히 감. 요컨대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
마르크스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임금노동자’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으나, ‘프롤레타리아트’와 ‘임금노동자’ 사이에는 약간의 간극이 있으므로 ‘프롤레타리아트의증식’을 곧바로 ‘임금노동자의증식’과 동일시하기는 어려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동자로 전환되는지, 자본관계 안에 포섭되는지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운명의 전환이 임금노동자에게만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
사회적(공동체) 관계가 해체된 상황에서 생산수단을 잃은 채로 추방된 다수의 사람들, 자본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편입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해진 존재들이 노동력의 상품화, 곧 임금노동자 출현의 배경. 그런데 이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임금노동자의 외연이 같은 것은 아님. 임금노동자처럼 노동력의 판매자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일자리를 잃었거나 취업하지 못한, 혹은 취업으로부터 아예 배제된 사람들 역시 자본의 생산 및 재생산 과정에서 생산되고 재생산됨
이들 산업예비군 외에도 자본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담당하지만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는 가사노동자(주부 등)가 있고, 또 자본의 생산에 동원되고 자본의 생산에 맞게 변형되고 재생산되는 자연생태계가 있음. 이들은 모두 자본관계를 구성하고 자본의 재생산과정에서 함께 재생산되지만 그 가치를 부인당하는 존재들
○ 가난이 부를 생산한다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더 큰 노동력,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 그런데 노동력의 생산(재생산)이란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길이 없는 사람들의 생산(재생산).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 얼마나 많은 타인의 노동을 자기 명령 아래 둘 수 있느냐, 얼마나 많은 빈민을 ‘예속관계’ 아래 묶어둘 수 있느냐가 부를 축적하는 관건
○ 황금사슬에 묶였다고 노예가 아닌 것은 아니다
자본가로서 노동력을 구매하는 목적은 오로지 ‘가치의 증식’. 노동력은 생산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고, 자신의가치를 재생산하며, 추가자본의원천인 잉여가치를 생산할 때, 바로 그때 의미가 있음.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존재 이유 속에 이미 잉여가치의 생산 즉 착취가 들어 있는 것
자본축적이 노동자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임금이 많이 오르는 경우라 해도 “기껏해야 노동자가 수행해야 하는 불불노동의 양적 감소”를 의미할 뿐
어떤 경우에도 착취가 사라지는 수준까지 임금이 오르지는 않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
상품이 상품인 한에서 일어나는 폭력, 다시 말해 노동력이 상품으로 존재하고 노동자가 이 상품을 판매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 시대에서 합법적인 일.
법칙(법) 너머 ‘무언가’를 감지해야 함. 이것을 건드리지 못하면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 ‘견딜 수 없는’노예 생활과 ‘견딜 만한’노예 생활 사이를 오갈 뿐
사슬의 조이는 힘과 상관없이 사슬을 차고 있는 한에서, 설령 그 사슬이 황금으로 된 것이라 해도, 그 사람은 노예일 뿐
○ 자본축적에 따른 임금의 변동-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정당한(등가교환이라는 점에서) 임금 아래에는 임금이라는 것 자체를 가능케 한 부당한(착취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권력의 배치가 있음
논리적으로 자본축적이 진행되는 중에 노동가격이 상승하는 경우는 다음 두 가지
첫 번째로 노동가격의 상승이 자본축적의 진행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경우. 스미스에 따르면 “이윤이 감소한 경우에도 자본은 증가” “심지어 이전보다 더 급속하게 증가하기까지 한다”라고 말함. 또 “대자본의 경우 설령 이윤이 작더라도, 이윤이 큰 소자본보다 일반적으로 더 빨리 증대한다”라고 말함
스미스는,새로운 식민지나 새로운 사업 분야가 열릴 경우 자본가들은 해당 지역이나 분야에서 고용을 늘리고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후한 보수를 지급. 돈은 처음에 조금 버는것이 어렵지 일단 어느정도 벌고나면 “더 많이 버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이윤이 감소하는 와중에도, 새로운 식민지나 새로운 산업 분야에는 자본이 계속 몰려듦. 이렇게 투자가 늘어나면 노동도 그만큼 늘어나야 하기에 이윤이 줄어드는 중에도 한동안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것. 이윤이 떨어져도 투자가 몰리면서 자본축적은 가속화되고 임금까지 오르는 현상이 나타남
다른 측면에서, 임금 상승이 자본축적을 방해하는 경우. 노동가격이 상승하면서 자본축적이 완만해지고 이윤에 대한 자극이 크게 줄어드는 경우, 자본 투자가 줄어들어 자본이 빠져나가고, 노동력 부족 사태가 해소됨. 심지어는 노동력이 과잉인 상황이 초래되어 자연스레 노동가격이 떨어짐. 노동자들의 생존에 위험신호가 던져지면 상황에 따라서는 임금 상승이 시작되기 이전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정도로 떨어질 수 있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메커니즘은 자신이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장애물을 스스로 제거한다.”고 표현. 축적메커니즘 자체가 축적의 방해물을 알아서 제거한다는 것
첫 번째 임금 상승이 자본축적을 방해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경우의 임금 상승은 노동력(노동인구) 부족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노동력 부족이야말로 오히려 그 결과. 즉, 자본이 증가하면서 노동력 부족이 나타난 것. 두 번째 경우에도 노동력의 과잉이 자본을 줄어들게 만든 게 아니라, 자본이 줄어들면서 노동력이 과잉으로 나타난 것
전반적으로 보아, 임금수준이나 노동력의 양은 원인이라기보다 현상이고 결과. “축적 크기가 독립변수이고 임금의 크기가 종속변수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자본축적과 임금률의 관계는 추가자본이될 잉여가치와 이잉여가치가 자본이 되는데 필요한 추가노동의 관계. 즉, 잉여가치가 자본이 되려면 추가노동이 필요한데 자본이 될 잉여가치의 크기와 공급할수있는 추가노동의 크기에 따라 임금이 변동한다는 것
마르크스가 자본축적과 임금률의 문제를 “결국에는 동일한 노동인구의 불불노동과 지불노동 간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전체 노동인구 즉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에 제공한 불불노동(잉여가치)의 양이 급속히 늘어나, 지불노동(임금)을 추가해야만 그 불불노동을 자본화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임금이 오른다는 것. 그렇지만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보장”하는 수준, 자본의 축적을 보장하는 수준에서만 허용됨
이것이 “하나의 자연법칙으로 신비화된 자본주의적 축적의 법칙”. 자본주의적 축적은 본성상 자본관계의 재생산(확대재생산)을 위협할 정도로 노동착취도(잉여가치율)가 떨어지거나 노동가격이 오르는 것을 배제한다는 것
인간이 산출한 부, 즉 자본의 축적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규정된다는 것. “종교에서 인간은 자기 두뇌가 만들어낸 것에 지배받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것에 지배를 받는다.”
3. 자본구성의 변화와 노동자의 축출
○ 자본주의 체계의 일반적 토대가 자리를 잡고 나면
자본구성이 불변인 상태에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 사회 전체적으로 자본관계가 일반화되어가는 단계에 해당
그런데 대다수 인구가 자본관계에 포섭된 상황, 이미 다수의 사람이 자본증식을 위한 인간재료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변화, 즉 사물의 양(생산수단의 양)과 인간재료의 양(노동력의 양)의 구성이 달라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
○ 노동생산성의 증대와 기술적 구성의 변동
자본주의의 사회적토대가 구축된상황에서 자본축적이진행되면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발전이 축적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되는 지점에 진입하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옴
매뉴팩처에서는 유기적 분업을 통해, 기계제 대공업에서는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생산성을 크게 높였고, 노동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전자는 노동력의 상대적 부족 사태에 대응했고 후자는 노동력의 상대적 과잉 사태를 야기
노동생산성 증대는 노동량 대비 생산수단의 사용량 증대로 나타남. 뒤집어 말하면 생산수단의 양에 비해 노동량의 사용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남
이처럼 노동생산성의 증대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
)을 변화시켜, 생산수단의 양이 노동력의 양보다 상대적으로 커짐. 이 변화는 자본의 가치구성에도 반영되어, 가치구성에서 불변자본(c)의 비중이 가변자본(v)보다 커짐
“자본의 가변 부분에 대한 불변 부분의 점진적 증대 법칙은 상품가격에 대한 비교 분석을 통해 어디서나 확인된다. 동일한나라의 상이한 경제적 시기들을 비교하든 동일한시기의 상이한나라들을 비교하든 상관없이말이다.” 생산수단의가치를 나타내는 부분은 갈수록 커지는 반면 노동력의 가치를 나타내는 부분은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
그러나 자본의 가치구성에서 나타난 변화는 기술적 구성에서 나타난 변화를 충실히 보여주지 못함.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은 생산수단의 양과 노동력의 양, 즉 “자본의 소재적 성분들의 구성에서 나타난 변화를 대강만 보여줄 뿐”임
보통은 가치구성에서 나타난 변화의 폭이 기술적 구성의 경우보다 더 작음. 자본축적이 계속되면 자본의 규모 자체가 크기 때문에 가변자본의 절대적 크기는 늘어날 수 있으나, 노동에 대한 수요가 2배 늘어나는 동안 전체 자본은 그보다 몇 배나 늘어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함. 그만큼 자본의 고용 유발 효과는 떨어져, 예전만큼의 투자로는 절대 예전만큼의 고용을 창출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
○ 거대한 노동생산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것
노동생산성이 사회적 차원에서 증대하려면 어느 정도의 자본이 축적되어 있어야 함
노동의 사회적생산력을 높이는 또다른 방법은 ‘인간적한계’에 매일필요없이, 효과적인 노동수단, 기계장치나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생산과정을 크게 바꿀 수도 있음
자본규모가 커지면 노동생산력을 더 키울 수 있음. 자본축적이 자본주의 특유의 생산방식을 발전시키고, 또 이 생산방식이 다시 자본축적을 가속하는 것. 다시 말해 노동생산력의 증대는 기술적 구성의 고도화와 맞물려 누진적으로 상호 상승작용을 함
○ 자본의 ‘축적’과 ‘집적’ 그리고 자본의 ‘집중’
자본의 축적을 기술적 구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본가들의 수중에 더 많은 생산수단이 집적되고, 더 큰 ‘노동자부대’에 대한 지휘권이 생기는 것
개별자본의 경우 자본의 증대가 축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집중’. “자본가가 자본가를 수탈”, 한 자본이 다른 자본을 흡수함으로써 덩치를 키우는 것
축적이 계속 진행되면 어느 시점에 집중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 개별 자본들은 축적과정에서 두 가지 제약에 부딪힘. 우선, 개별 자본에 “사회적 생산수단이 집적되는 정도는, 다른 조건이 불변일 경우, 사회적 부의 증대 수준에 의해 제한”됨. 전체 부가 늘어나는 정도를 넘어서서 자신의 부를 늘릴 수는 없음. 다음으로, 개별 자본들이 서로를 제약. 시장이 포화 상태에 가까워지면 경쟁은 금세 적대로 돌변. 그런데 그럴수록 서로를 당기는 힘도 커짐. 서로 합치거나 먹어치우거나 해서 하나가 되는 것
집중을 통해 개별 자본은 축적의 두 가지 제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음. 사회적 부의 증대와 상관없이 덩치를 키울 수 있고, 다수의 개별 자본이 가하는 제약도 넘어설 수가 있음. “자본이 한 사람의 수중에서 크게 팽창했다는 것은 그것이 많은 사람의 수중에서 그만큼 소멸했다”라는 뜻
자본축적의 진행은 자본구성의 고도화 경향을 낳음. 그런데 자본의 덩치를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자본의 집중’. 아주 빠른 속도로 자본의 덩치를 키워주고, 그만큼 기술적 구성(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빨리, 크게 바꾸어놓음
○ ‘자본의 집중’을 가능케 하는 두 개의 지렛대
자본집중의 “가장 강력한 두 개의 지렛대”는 ‘경쟁’(Konkurrenz)과 ‘신용’(Kredit)
개별 자본가들의 경쟁은 상품가격을 둘러싸고 상품가치를 낮추는 자본가가 유리. 그러려면 노동생산성이높아야하는데, 노동생산성은 대체로 생산규모에 의존하며, 별도의 규제가 없는 한 경쟁의 결과는 “늘 다수의 소자본가가 몰락하는 것으로 끝”남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 은행, 주식, 채권 등의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힘”인 신용제도가 출현. “신용제도는 처음에는 축적의 겸손한 조수로 슬그머니 들어와, 사회의 표면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돈들을 보이지 않는 실을 통해 개별 자본가나 연합 자본가들의 손에 끌어당겨 주지만, 곧이어 경쟁의 전투에서 새로운 무서운 무기가 되며 결국에는 자본집중을 위한 거대한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전환된다.”
자본가가 돈을 당겨쓸 때 압도적으로 큰 부분이 개인의 돈이 아니라 은행이나 주식시장 등을 통해 끌어들인 돈이며, 신용제도 덕분에 자본은 덩치를 매우 빨리, 매우 큰 규모로 확대할 수 있음. 이런 상황에서 점점 철도나 도로, 항만 건설 같은 대형 사업의 필요성이 생기고, 그것을 실현할 과학 기술적 수단도 나타남. 필요(욕구)도 있고 기술도 있으니 자본만 있으면 되나, 문제는 규모가 너무 큰 사업들은 개별 자본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 이때 자본을 신속하게 대규모로 키우는 길이 바로 자본집중이며, 신용제도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수단
축적과 달리 집중은 사회적 자본을 ‘양적으로 재편성’하는 일이므로 사회적 부의 증대에 의존하지 않음. 다수의 수중에 있던 자본들을 소수의 수중으로 옮기는 것일 뿐. 집중은 “어떤 산업부문에서 투자된 모든 자본이 하나의 자본으로 융합될 때 최대치”
1910년 『금융자본』을 펴낸 루돌프힐퍼딩(R.Hilferding)은 서문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집중화의 진행”이라고 씀. 그는 이경향이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집중 이론을 확인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음. 가치법칙은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관철되지만 트러스트나 카르텔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체의 등장은 시장을 경쟁이 부재한 상황으로 몰고 가니까
힐퍼딩은 자본집중 내지 자본결합의 경향이 불가피한 역사적 과정이며,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모든 산업부문에서 이런 조건이 형성된다고 봄. “카르텔화에는 절대적 한계가 없다”. 카르텔화한 산업은 이윤율이 높지만 그렇지 않은 산업은 이윤율이 떨어지며 결국 카르텔에 합병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산업 전체를 지배하는 ‘총카르텔’이 형성될 것이며, 총카르텔이 구축되면 생산의 무정부성은 사라지고, 카르텔의 거물들 즉 대자본가들이 모여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봄
마르크스가 자본집중이라는 주제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집중을 통해 자본은 훨씬 빠른 속도로, 훨씬 큰 규모로 성장하며, 자본이 집중을 통해 훨씬 빠른 속도로, 훨씬 큰 규모로 성장한다면 그만큼 자본의 집중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을 빠른 속도로, 큰 규모로 바꾸어놓는다는 것
○ 자본의 축적에 따른 노동의 절약-임금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인구
자본집중이“합병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든…주식회사의 형성이라는 부드러운방식으로 이루어지든” 대규모화된 자본은 “총노동의 포괄적 조직화를 위한 출발점”. 개별적으로흩어져있던 생산과정을 “사회적으로 결합시키고 과학적으로 배치”
노동을 광범위하게, 효과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을 절약한다는 뜻
축적이 진행되면 추가자본은 최신의 ‘산업적 개량’이 반영된 생산수단, 이를테면 최신 기계를 도입하는 데 이용
자본은 나이 들지 않고, 예전에 축적된 자본도 새로운 생산수단을 이용하는 순간 추가자본만큼이나 젊은 심장을 가지고 운동.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태어나는” 것
새로 추가되는 자본은 ‘산업적 개량’ 때문에 노동자를 점점 더 적게 흡수. 이는 추가자본은 이전만큼의 고용 효과를 갖지 않는다는 뜻. 여기에 예전의 자본까지 새로운 자본으로 갱신. 예전 자본의 갱신으로 나타난 효과는 현재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까지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뜻. 전자가 추가로 고용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금 일하고 있는 사람이 나가야 한다는 뜻
○ 자본구성의 변동은 부르주아지의 운명도 재촉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기술적 구성을 가치구성으로 표현한 것), 자본의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는 법칙
이러한 경향을 상쇄하는 몇 가지 요인-노동착취도 증대, 노동력 가치 이하로의 임금 인하, 불변자본 요소들의 저렴화, 상대적 과잉인구, 대외무역, 주식자본의 증가 등
자본축적과 더불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자본에게 자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경향이 있다는 뜻
4.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법칙과 잉여노동자
○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론’
개별 자본가들은 경쟁적으로 눈앞의 이익을 쫓고, 눈앞의 이익이 크고 선명해 보일수록 전체에 대해서는 맹목이 됨. 운명은 함께 엮여 있는데, 눈앞의 이익을 두고는 서로가 경쟁자 내지 적대자. 자신들의 행동으로 사회가 어디로가게 되는지는 알지도못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음. 전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음. 자본주의의 법칙, 자본주의의 운명은 이런 맹목과 무책임 속에서 관철됨
자본주의 특유의 생산방식과 노동생산력의 발전은 자본구성을높여 자본축적 규모가 커질수록 자본구성도높아짐. 사실그사이 기술변혁이 일어나기때문에 축적의진행(사회적부의 증대, 총자본의성장)속도보다 자본구성(기술적구성)의 변화속도가 더빠름
노동생산력이 높아지면 동일 자본 대비 사용 노동량이 줄어 추가자본의 경우 기존 자본에 비해 가변자본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데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 기존 자본도 생산수단을 갱신하여 기술변혁의 효과를 누리게 되면 자본의 구성은 더 높아짐
총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가변자본(가변성분)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은 총자본의 증가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감소. 이 경우 가변자본의 상대적 크기 감소가 노동인구의 절대적 증가로‘보이는’시각적 기만이 생김. 사실은 자본이 상대적으로 과잉인 노동인구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겉보기에는 노동인구 자체가 너무 늘어서(노동자가 노동자를 너무 많이 낳아서) 자본이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임
필요 노동력을 흡수하고 불필요한 노동력을 내뱉기 위해서는 저수지의 물처럼 노동인구가 충분히 고여 있어야 빨아들이고 내뱉기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음. 이는 인구 대다수가 언제든 노동 가능한 집단 즉 노동인구로 편성되어 있어서 노동인구가 취업인구(임금노동자)규모보다 훨씬 커야 한다는 뜻. 이를 상대적 과잉인구라 부름
자본주의 사회는 한편으로는 구성이 급격히 고도화되면서 취업 상태에 있던 노동자를 축출하는 방식으로(노골적 추방), 다른 한편으로는 추가 노동력(신규 취업자)을 흡수하는 통로를 줄이는 방식으로(은밀한 추방) 과잉인구(과잉 노동인구)의 규모를 키움
전반적으로 자본의 축적과 더불어 점점 노동자들이 불필요한 존재, 잉여의 존재, 상대적 과잉인 존재로 나타나는 경향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론
“이것이 자본주의적생산양식에 고유한 인구법칙인데, 실제 모든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양식들은 자신의 특수하고 역사적으로만 유효한 인구법칙을 갖고있다. 추상적인구법칙이란 인간이 역사적으로 간섭하지 않는한에서 동식물에게나 존재하는것이다.”
○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론’인가 ‘빈민론’인가
맬서스(T. R. Malthus)는 자신의 인구론을 “모든 시대, 모든 국가를 통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라고 주장했는데, 강력한 억제작용이 가해지지 않는 한 인구는 본성상 생존 자원의 증가 속도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는 것
맬서스에 따르면 인구에 대한 예방적 억제책과 적극적 억제책이 있는데, 적극적 억제책이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 전쟁이나 빈곤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것. 문명화된 나라라면 예방적 억제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즉 사람들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 결혼을 최대한 미루게 하고, 성적 욕망을 부부 사이가 아닌 다른 곳에 발산하게 하거나(비도덕적 해법), 이성(理性)으로 이 욕망을 이겨내고(금욕) 가족부양 능력이 생길 때까지 결혼을 미루는 것 등. 바람직하고 도덕적인 해법은 물론 후자
19세기 초 사람들은 전대미문의 ‘부’와 ‘빈곤’을 함께 목격. 부와 함께 증대하는 ‘빈곤’은 당시 정치경제학자들의 최대 현안이었을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출현하게 된(그래서 ‘사회학’과 ‘사회주의’를 탄생시킨) 배경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빈민의 문제. 그에 따르면 인구 증가는 “하층계급을 빈곤의 구렁텅이에 내몰고 생활환경 개선을 어렵게 하는 주요 원인”. 부양능력도 없으면서 자식을 낳는 빈민들의 문제. 그는 상류계급은 인구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 이유를 “상류계급은 교육 및 신분과 결부된 자존심과 독립심으로 결혼에 대한 예방적 억제를 스스로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 인구법칙에 대한 빈민들의 무지와 무분별, 부도덕이 빈곤의 원인인 셈. “인구원리가 하층계급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행복과 불행은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교육해야 한다.”
○ 마르크스의 특별한 주석-너무나 반혁명적인 맬서스에 관하여
마르크스는 『인구론』을 가리켜 “이 소책자가 불러일으킨 대단한 열풍은 오로지 당파적 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고 봄.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구법칙’은 프랑스에서 18세기부터 발전했고, 혁명 즈음에는 당시 확산되던 진보주의 이념, 이를테면 “콩도르세(Condorcet)의 학설에 대한 해독제로서 효능”을 크게 인정받았음. 영국의 과두정부 역시 이 학설을 “인간 진보에 대한 모든 열망을 박멸하는 방책”으로 환영
맬서스는 『인구론』 집필 의도가 진보주의자, 평등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에 있음을 밝힘. 평등주의에대한 그의 비판은 두가지로 압축되는데 첫째, 평등제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생산 활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자극원(빈곤)을 없앰으로써 나태한 본성 속에 살게 하고 둘째, 아무리 좋은 사회라도 인구 증가를 막을 순 없음. 인구는 생존 자원의 한계 이상으로 증가하는데 평등주의는 이러한 증가(특히 빈민들의 경우)를 부추김
그에 따르면 빈곤의 참된 원인은 자연법칙인 인구법칙과 부양 능력이 없음에도 아이를 계속 낳는 빈민들에게 있음에도, 평등주의자들은 그 원인이 정부나 상류계급에 있다고 호도하고 선동. 맬서스가 보기에 필요한 것은 노동자와 빈민에 대한 훈계. 빈곤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 있다는 것, 사회나 정부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능력도 없이 아이들을 낳는 것은 사회에 부담을 지우는 일이며 그 자신도 가난 속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것, 신은 자연법칙을 통해 이성 있는 인간들에게 충분히 계시했으며(굶주림이나 질병을 통한 죽음), 신의 훈계를 따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질병을 노동자들이 스스로 초래하고 있다는 것 등을 일깨워야 한다고
맬서스는 빈민들의 공격 방향을 정부가 아닌 스스로를 향하도록 만듦. 빈민들에게 순응과절제를 가르치고,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자책이라도 가르치자는것. 설령 결혼에대한 빈민들의 태도를 바꾸지 못할지라도, 즉 빈민들이 아이를 낳는 것은 막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혁명에 나서는 것은 막을수 있다…이것이 『인구론』의 진정한 목적
○ ‘잉여노동자’ 곧 과잉 노동인구는 꼭 필요한 ‘산업예비군’
맬서스는 『인구론』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결혼에 신중하라더니, 뒤에 쓴 『정치경제학 원리』에서는 너무 많은 노동자가 결혼을 자제하면, 아이를 낳고 길러서 노동자로 공급하려면 16~18년은 걸리는데, 이걸로는 산업에서 발생한 당장의 수요를 충족할 수가 없으니까, 공업과 상업을 위주로 하는 나라에는 해롭다고 주장
언뜻 잉여노동자는 필요가 없어 공장에서 축출된 노동자들이거나 공장에서 흡수할 수 없어 취업을 못한 잉여의 존재로 보임. 그런데 이들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필연적 산물’일 뿐 아니라 축적을 위한 ‘지렛대’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실존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
“이 산업예비군은 마치 자본이 자기 비용을 들여 키워내기라도 한 것처럼 자본에 절대적으로 매여 있다.” 노동인구가 언제나 과잉상태로 존재하기때문에 인구 증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음. “자본의 변동하는 가치증식 욕구를 위하여 과잉인구는 실제 인구 증가의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착취할 수 있는 인간재료를 준비해둔다.”
애초에 한 세대 전의 출산 계획으로 한 세대 후의 노동력 수요에 대응한다는 건 말이 안 됨(『인구론』에서 맬서스는 빈곤의 책임을 노동자의 출산에 떠넘기면서, 출산을 통제해 노동가격을 높이라고 했는데요.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조언이었는지가 여기서 잘 드러남). 어떤 상품도 이런 식으로 수요를 맞출 수는 없음
○ 자본축적에 이바지하는 산업예비군의 세 가지 ‘조절’ 기능
산업예비군이 자본축적을 위해 수행하는 기능
첫째, 노동력의 수급 상황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장치. 자본축적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노동력의 공급도 언제든 해고 가능하고 언제든 채용 가능한 상태로 탄력적이고 유연해져야 함. 자본주의 산업의 주기성을 고려하면 이런 장치는 더욱 중요. 활황과 공황이 반복되는 이런 순환과정은 노동력을 보충해주기도 하고 흡수해주기도 하는 안정적 완충장치를 요구
둘째, 정규군의 노동강도를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 ‘너말고도 일할사람 많아!’효과. “노동자계급 중 한 부분을 과로하게 함으로써 다른 한 부분에게 ‘강요된 태만’이라는 형벌을 내리고 그 반대로도 하는 것[한 부분에 강요된 태만의 형벌을 내림으로써 다른 한 부분을 과로하게 하는 것]은 개별 자본가의 치부수단이자 […] 산업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 한쪽은 일감이 없어 굶어 죽게 만들고 다른 한쪽은 일이 넘쳐 과로로 죽게 만듦. 지금 여기가 자본주의사회라는 걸 잊는다면, 이건 틀림없이 미친 짓. 그런데 이 ‘미친 짓’이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
셋째, 임금조절장치로 기능. 임금의 ‘일반적’ 운동은 “노동자 인구의 절대 수의 변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정규군과 예비군으로 분할되는 비율에 따라 정해”짐(여기서 ‘일반적’이라고 한 것은 총자본과 총노동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말)
전반적으로 호황일 때는 자본의 팽창에 따라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산업예비군의 축소), 불황일 때는 자본의 수축에 따라 노동력의 공급이 과잉으로 나타남(산업예비군의 확대). 물론 이 주도권은 자본에 있음. 자본의 팽창과 수축에 달려 있음
그런데 정치경제학자들의 ‘아름다운 법칙’에서는 이것이 거꾸로 나타남. 이것은 노동자 인구의 증감이 임금을 어떻게 변동시키는지에 대한 흔히 접할 수 있는 설명. 그러나 임금이 올랐다고(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고) 갑자기 노동자들이 많은 아이를 낳고 이들을 속성으로 키워서 바로 납품하는 일은 일어날수 없음. 누구보다 이런 자연 인구를 늘리는 방식으로 노동력을 확보할 생각을 하는 자본가는 아무도 없음
농업자본가들은 당장 높은임금을 낮추면서 노동력부족을 해소할 수단으로 기계를 도입. 기계화되자 농업 노동자들은 자연적으로는 전혀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순유출이 있었음에도,사람은 사람을 낳지 않았지만 기계가 사람을 낳았기 때문에 넘쳐남
마르크스는 경제학자들의 ‘아름다운 법칙’은 “임금의 일반적 운동을 규제하는 법칙”, 다시 말해 “총노동력과 총자본 사이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칙”과 “노동자인구를 개별 생산영역에 분배하는 법칙”을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
노동력의 총공급과 총수요는 임금 운동의 일반적 규제 원칙.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노동자들이 자본 투자 상황에 따라 어떤 영역, 어떤 부문으로 몰려들고 떠나는 ‘특수한’ 운동을 ‘일반적’ 운동과 혼동
자본주의 시대의 인구법칙, 자본주의 시대의 과잉인구는 일자리에 비해 많은 인구, 즉 노동인구의 상대적 과잉으로 나타남. 고용되지 못한 채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빈민의 형상으로, 이러한 인구 현상을 낳은 것은 노동자의 번식력이 아니라 자본의 번식력. 자본축적이 가속화되고 이와 함께 자본구성이 변화하면서 대규모 잉여노동자들이 생겨난 것
이렇게 생겨난 잉여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산업예비군을 형성함으로써 자본축적을 돕는 매우 중요한 장치. 노동력의 수급을 조절하고, 노동강도와 임금수준을 조절하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상대적 과잉인구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이고 이들 과잉인구가 기능하는 방식
5. 자본의 왕국
○ 자본 왕국의 지배 법칙은 ‘방치를 통한 포획’
마르크스는 산업예비군을 축적장치, 착취장치로서만이 아니라 지배장치, 통제장치로도 봄. 불황기에는 “압박을 가하고”, 호황기에는 “권리 요구에 재갈을 물립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약에서 둘은 노동력의 판매자와 구매자로서 법적, 권리상으론 대등하지만, 이것은 이익이 걸려있는 자와 생존이 걸려있는 자의 거래. 실업자와 미취업자로 이루어진 노동력의 거대한 저수지가 해자처럼 이들을 둘러싸고있어서 자본가는 수문만 열면 언제든 추가 노동력을 들여올 수도 잉여노동력을 빼낼 수도 있음
산업예비군은 노동의 수요공급을 조절하는 장치인 동시에 이 법칙이 자본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치여서 자본의 착취욕만이 아니라 지배욕에도 부합
추방되어도 자본관계를 떠나 살 수 없음. ‘내부에서 가장 바깥’으로 밀려날 수는 있어도 외부로 나갈수는 없고, 내부로 들어갈수는 없다 해도 ‘외부에서 가장안쪽’으로 매달림. 이처럼 내부와 외부가 맞닿은 곳, 내부와 외부가 뒤섞인 곳이 ‘주변’
산업예비군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로, 자본관계를 떠나선 살수없는삶인데 자본관계를통해 아무런 보장도 받지못함. 관계 바깥에 두는(그래서 관계와 무관한)것이 아니라 ‘배제하는 형태로 포함하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형태로 관계 안에 두는 것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삶을 파괴할 온갖 위험에 노출된 채로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인간재료”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살기위해 필사적. 내치는데도 매달리고 내치기 때문에도 매달림. 주변이란 밀어내는 힘과, 그 힘에 반작용하듯 달라붙는 힘이 균형을 이룬 곳
법률상으로는 대등한 계약관계인 임금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해 ‘을’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곁에 ‘병’이 있기 때문. 임금노동자들은 언제든 계약 바깥의 존재 ‘병’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자본가와 대등한 ‘갑’이 될 수 없음
임금노동자들이 잉여노동자들에 대해 자기 안에 있는 ‘그들일 수 있음’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연대해서 잉여노동자들 삶의 불안정성과 위태로움을 줄일 방법을 찾는다면 이는 임금노동자들의 일자리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임금노동자들이 여물을 대가로 매번 노동을 착취당하는 역축 같은 자신들의 운명이, 굶주린 채로 공장 주변을 서성이는 잉여노동자들의 운명과 동일한 말뚝에 매여 있음을 깨닫는다면, 둘은 함께 해방을 꿈꾸는 동지가 될 수 있음
○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고 주사위는 위조되었다
자본이 축적되면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지만 이 과정에서 잉여노동자도 함께 생산되기 때문에(고용관계에서 풀려나는 노동자 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노동의 공급도 함께 늘어남. 자본의 축적 규모에 비해 노동에 대한 수요가 작은 것은 자본 자신이 공급한 노동 때문. 자본축적은 잉여노동자들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잉여노동자들이 다시 자본축적을 도움. 생산 메커니즘 자체가 노동자 공급을 늘려놓아서 자본가는 노동을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음. 이것은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자본이 노동의 수요와 공급 양쪽에 다 관여. 자본가와 노동자의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란 허구.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위조된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것. 주사위를 공정하게 한 번씩 던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
○ ‘자본’이라는 전제군주
물리적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 휘어지듯 부(가치)의 공간도 권력에 의해 휘어짐
노동의 수요공급법칙에 대해서도 자본가계급의 이익이 보장되는 곳에서 그 위치가 결정됨.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지점은 자본가계급의 이익이 보장되는 그곳
법칙은 노동의 수요량과 공급량만 고려할 뿐,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노동의 수요자인 자본은 노동의 수급을 조절하는 아주 효과적인 장치(산업예비군)를 가지고 있어 공급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음. 더 근본적으로는 계급 간 권력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음. 그러다 보니 법칙의 실현이 이익의 실현이 됨. 수요공급법칙이 자본의 이익 실현 법칙이 되는 것
“이런 토대 위에서 노동의 수요공급법칙 운동은 자본의 전제정을 완성한다.”자본주의는 자본을 위해 세팅된, 자본축적에 최적화된, 자본이 전제군주로서 통치하는 나라
자본의 전제정은 사회전체에 대한 것. 전제정이란 가정에서 노예를 다룰 때나 쓰는 방식을 나라의 통치에 사용하는 정치체제. 전제정에서 군주는 총자본의 인격적 표현인 총자본가. 이 전제군주에게는 아첨하는 신하들, 바로 정치경제학자들이 있음
노동자들이 전제정의비밀을 깨닫고 자본주의적 생산법칙이 자신의 계급에 초래하는 파멸적 결과를 분쇄하거나 약화하려고 하는 순간, “자본과 그의 아첨꾼인 정치경제학자들은 ‘영원한’그리고 이른바 ‘신성한’수요공급의 법칙을 침해했다고 고함을 지”름. 학문적으로는 ‘법칙의 교란’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법률의 위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법과 질서를 강조. 작업장에서는 규율을, 시장에서는 법칙을, 사회에서는 법률을 강조. 하지만 법(칙)의 준수에는 주권자인 자본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전제가 있음. 공황이 닥치면 시장의 신성한 법칙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공적자금을투입해서 채무도탕감해주고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통화량조절에도나섬. 이때는 자본가도, 정치경제학자도 시장의 자율에 맡겨두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음
‘자본의 전제정’은 ‘자본 독재’. 자본주의란 자본 주권, 자본 독재가 관철되는 곳
○ 자본권력 아래서 잉여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사람들이 내던져질 때 이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력자가 출현. 노동자들 일반이 자본주의에서 지닐 수밖에 없는 성격이고, 노동자들(상품으로서 노동력)의 탄생 배경
잉여노동자들은 자본관계 주변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이지만 자본관계 내부에 있는 노동자들보다 노동자에 대해 더 잘 말해줌. 잉여노동자들의 존재 양태는 노동자일반이 역사적 발생기에 보여준 것이기도 하고, 현재 끊임없이 양산되는 것이기도 하며,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다수의 노동자들이 미래에 처하게 될 자리이기도 함
잉여노동자들은 크게 세 형태를 취함. 유동적 형태, 잠재적 형태, 정체적 형태
유동적 형태로 존재하는 잉여노동자들은 고용 상태가 불안정하거나 실업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비정규직 내지 실업자들)
잠재적 형태의 잉여노동자들은 언제든 노동자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적 노동자들. 대표적 예가 농민,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농촌의 피폐화가 먼저. 노동력을 공급하고 그가치를 떨어뜨리기위해 국가가 농촌의 피폐화를 방조하거나 유도(이를테면 인위적 저곡가 정책). 이런 상황에서 농업의 기계화가 나타나면 노동인구의 배출이 가속화
세 번째 정체적 형태의 잉여노동자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온 사람들, 이들은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업장, 임금도 낮고 고용도 불안정하고 무엇보다 작업환경이 생명을 위협하는 곳들로 몰려듦. 자본의 처분에 가장 취약한 대상. 마르크스는 이들을 “개별적으로 허약해서 몰이사냥 대상이 되는 동물류”를 연상시킨다고
여기에서도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음. 대부분은 구호 대상. 이들도 자본관계와 무관하지 않음. 자본의 축적에 기여하지는 못하지만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상대적 과잉인구와 함께 생산되는 사람들. 산업예비군이 늘어나면 이들 빈민들도 늘어남.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들 빈민은 불가피한 낙면처럼 “공비(空費)처리”됨. 비용을 빈민들 “자신이나 노동자계급, 하층 중간계급에게 전가”.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이고 일반적인 법칙”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이고 일반적인 법칙’
○ 자본에 결박된 노동자계급의 운명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개별 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을, 생산력을 높이는 모든 수단이 생산자인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된다는 것을, 노동생산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부분인간’이 되고 ‘기계부품’이 된다는 것을, 노동생산력을 높이는 온갖 방법과 수단이 노동조건을 악화하고, 무엇보다 노동과정에서 자본의 ‘비열하고가증스러운 전제정’에 노동자들을 굴복시킨다는 것을, 그뿐 아니라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소중한 삶의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자본이라는 ‘저거노트 수레바퀴’ 밑으로 던져 넣는다는 것을, 자본축적이란 이 모든 일의 영원한 반복이며, 또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모든 방법, 노동자들을 큰 고통속으로 몰아넣은 그 모든 방법이 축적의 방법이라는 것, 또 자본축적과 더불어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격차가 커진다는 것도, 자본축적과 함께 잉여노동자들 즉 산업예비군 또한 늘어난다는 것을, 자본은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자본축적의 규모와 활력에 맞게 유지하며, 이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결국 우리는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노동자는 이 운명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으며, 자본이 박아놓은 말뚝에 꼼짝없이 매여 있는 역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음
○ 부의 축적과 빈곤의 축적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비참이 자본의 축적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 사회의 부가 줄어들면서 생긴 일이 아니라 사회의 부가 늘어나면서 생긴 일이라는 것
노동자계급은 빈곤과 과로에 시달리면서 이로 인한 정신적·심리적·지적·도덕적 병리 현상을 겪음. 자본주의적 부의 생산은 빈곤만 생산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질병을 생산하고, 무지를 생산하고, 폭력을 생산하고, 범죄를 생산한다는 것
이러한 비참은 생산물의 분배가 잘못되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노동력의 상품화로부터 시작해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 속에 들어 있는 것임.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본축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참이 필요
6.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이 지배하는 현실
○ 부의 축적이 곧 빈곤의 축적인 현실에 대한 증언
자본축적이 가속화될수록 상대적 과잉인구가 생산되고, 이는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고 빈민들을 양산. 이러한 원리를 영국의 사례로 검증
○ 자본가들을 위한 천년왕국은 도래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축적법칙을 절대적·일반적인 법칙이라고 한 것은 자본주의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않은채 발전했을때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경향이라는 의미
1846~1866년의 20년은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발전하고 자본축적이 별 제약 없이 이루어진 때. 특히 1846년은 “자유무역이라는 천년왕국”이 도래한 해. 곡물법이 폐지되고 면화등 원료의 수입관세 철폐, 자유무역이 입법의 원칙으로 선포
그 후 20년, 과연 모두에게 천년왕국이 도래했을까?
19C전반기동안 인구는 절대적으로는 많이 늘었지만 상대적 증가율(증가속도)는 계속 줄어든 반면 부의 증대 속도는 갈수록 빨라짐. 영국을 보면 1853~1864년 사이 인구는 12퍼센트가량 증대한 반면 이윤은 50퍼센트, 지대는 38퍼센트가량 증대. 게다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함께 일어나는 것도 확인되어,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고 해도 부의 증가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님
무역 담당 각료로 참여했고 1868년 총리가 된 윌리엄 글래드스턴(W. E. Gladstone)의 1843년 연설과 1863년의 연설. 1843년 연설에서는 상층계급의 부는 끊임없이 늘어나는데도 국민들(노동자계급)의 빈곤이 커지는 것에 우려를 표명. 1863년 연설에서 그는 과거 20년을 회고하며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almost incredible), “취해 쓰러질 정도로”(intoxicating) 부가 증대했다면서 이러한 부의 증가는 “전적으로 자산계급에만 한정”된 것임을 인정. 그는 지난 20년을 “부자는 더 부유해졌고 가난한 사람들은 덜 가난해졌습니다. 극단적 빈곤이 줄어들었는지 여부는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계급 간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다고, ‘극단적 빈곤’이 감소했다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함. 이는 그것이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났을 수 있음을 시사
요컨대 천년왕국이 도래했지만, 그것은 자본가들의 천년왕국이었던 것. 노동자들은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더 가난해졌고 극빈층은 전혀 줄지 않았음
○ 자본은 거대해졌으나 ‘극단의 빈곤층’은 줄지 않았다
자본의 천년왕국이 건설되는 사이 노동자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런던의 극빈자 수는 “산업 순환의 주기적 변화”를 따라가며, 특히 공황이 닥치면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1866년 공황이 닥쳤을 때 런던에서는 극빈층이 20퍼센트 가까이 증가함. 극빈층은 비록 임금관계 바깥에 있지만 이들의 증감이나 이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결코 자본관계 바깥에 있지 않음
○ 자본의 왕국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떻게 사는가
∘ 저임금노동자와 도시 빈민촌의 탄생
먼저 임금노동자들 중 상황이 가장 좋지 않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경우
1864년〈공중위생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의학적 관점에서 제시된 영양 상태의 최저 기준에 모두 미달. 굶주린다는 건 생존의 막다른 곳에 몰렸다는 것, 즉 ‘최후의 궁핍’에 빠졌다는 뜻. 먹을 게 부족한 노동자들은 어김없이 의복도, 연료도 부족
조사 책임자였던 의사 사이먼(Simon)은 “여기서 말하는 빈곤이 나태가 초래한 마땅한 빈곤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이 모든 사례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working populations)의 빈곤이다. 도시노동자들이 얼마 안 되는 음식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노동은 대부분 지나치게 장시간이다.”
도시 (재)개발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노동자들의 주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저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은 산업화에 따른 결과. 공장들이 도시에 세워지면 그 주변으로 노동자들의 주거 공간도 집중될 수밖에. 그럴수록 노동자들의 급조된 주거지들은 상황이 더 열악”해짐. 노동자들은 “지하실이나 다락까지” 파고들고, 그나마 “쓸 만한 주택들은 싸구려 여인숙처럼 개조”됨
영국의 노동자들이 오늘 머문 자리는 “내일이면 누더기를 걸친 아일랜드인이나 몰락한 잉글랜드 농업노동자들이 메뚜기 떼처럼 밀려듦”. 그런데도 이들 방은 식을 새가 없음. 낮에 일하는 사람과 밤에 일하는 사람이 교대로 잠을 자기 때문. 노동자들의 건강은 공장에서도 무너지지만 공장 바깥 주거 공간에서도 무너질 수밖에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계속 몰려듦. 일자리를 찾아서 농촌에서도, 아일랜드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옴.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경기와 더불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예비군’ 즉 ‘상대적 과잉인구’의 물결로 홍수가 난”것. 이 모든 일이 자본의 고도성장기에 일어난 일. 자본축적과 도시 빈민촌의 탄생은 깊이 관련이 있다는 것
그런데 저임금 노동자들은 공장만이 아니라 주거지에서도 착취를 당함. 집주인들은 좁은 방에 많은 노동자를 집어넣고 터무니없이 높은 집세를 받았음. 마치 광산에서 금이나 은을 캐내듯 집주인들은 조잡한 주택에서 돈을 캐냈음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시기가 되면 도시재개발, 소위 도시 환경 ‘개선’ 사업이 이루어짐. 불량 주택이 철거되고, 도로가 확장되고, 전차가 들어오고, 은행과 백화점이 들어서고, 이런 도시재개발은 부동산투기를 불러일으킴
마르크스는 도시재개발과 부동산투기가 노동자들의 주거에 미치는 영향을 다룸. 자본축적은 도시화를 낳고 부동산 가격을 올림. 집세가 오르면 가난한노동자들은 버틸 수가 없어서 집세가 싼 곳을 찾아 모여들어 도시 빈민촌이 형성됨. 그러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주거 환경은 크게 개선되는데, 정작 거기 살던 가난한 주민들은 쫓겨나 다시 집세가 더 싼 곳, 더 비좁고 더 불결한 곳으로 이주
이런 일은 사회적 부가 감소할 때가 아니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가 축적될 때, 자본이 고도로 성장하던 시기, 자유무역이 입법의 원칙이 되고, 자본이 큰 제약 없이 축적될 수 있었던 시기에 일어남
∘ 유랑노동자의 노예계약
일거리를 따라 여기저기 이동하는, 주로 건설 현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한조사관의 표현대로 노동자들은여기서 “주거라기보다는 야영을 하는 것처럼”보임
이들의 식사와 잠자리는 건설업자나 탄광업자(혹은 이들과 깊이 연관된 사람)들이 독점 공급하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높음. 식사와 잠자리만이 아니라 고용주들은 생활용품을 ‘현물급여’ 형태로 지급. 난방용 석탄은 물론이고 물까지 임금에서 제외
그런데 고용과 주거가 맞물려 있어서 여기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음. 해고되면 주택에 머물 수 없고, 주택을 거부하면 해고되기 쉬움. 삶이 통째로 예속되어 있는 것
한 조사관은 이들 노동자들이 계약에 ‘묶여 있는’(bound) 시간을 ‘예속’(bondage)의 시간이라고 부르면서 이 두 단어(bound, bondage)가 모두 농노제에서 유래한 것임을 환기. 농노의 삶이 영주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듯 유랑노동자의 삶도 고용주들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는 뜻
오늘날 이들 유랑노동자의 삶과 가장 비슷한 형태를 이주노동자들한테서 찾아볼 수 있는데, 상당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여전히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에 거주
∘ ‘노동귀족’이라는 고임금노동자의 위태로운 삶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하던 시기인 1866년에 금융공황이 닥침. 당시 조선 회사 노동자들은 다른 업종 노동자들보다 고용도 안정적이었고 임금도 높은 편. 그러나 조선업이 불황에 빠지자 이들의 삶은 바닥으로 추락
노동귀족은 위기가 닥치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거지로 전락. 소위 ‘노동귀족’이란 임금노동자들 중에 처지가 ‘조금’ 나은 사람들에 불과
○ 자본주의가 농업과 농민을 장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 영국 농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태
자본축적과 더불어 노동자들이 절대적 혹은 상대적으로 더 궁핍해진다는 것은 농업노동자의 경우에도 확인됨
아서영(A.Young)에 따르면 “큰 차지농업가는 거의 젠틀맨의 수준까지 올라갔는데 가난한 노동자는 거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음. 농업노동자의 “실질임금이 1737년과 1777년 사이에 4분의 1, 즉 25퍼센트나 하락”. 그런데 ‘거의 밑바닥’이라던 농업노동자의 처지는, “그 이후로는 다시 도달하지 못할 이상(Ideal)이 되었”음
마르크스는 농업노동자의 처지를 생산도구인 역축에 비유 “차지농업가가 사육하는 모든 동물 가운데 ‘말하는 도구’(instrumentum vocale)인 노동자는 이때부터 가장 학대받고 가장 나쁜 먹이를 먹으며, 가장 잔인하게 다루어지는 동물이 되었다.”
영국 농업에 특히 큰 충격을 준 것은 곡물법 폐지(1846). 수입 곡물을 높은 관세로 규제하던 곡물법이 폐지되자 농업 생산방식이 기계화되었고, 화학처리를 거쳐 생산된 광물성비료가 사용되었고, 대규모 배수시설이 만들어졌고, 집약적경작이 나타나는등 크게 바뀜. 가축 사육 방식도 축사 내에서 동물을 사육하고 사료작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등 크게 달라짐. 농업의 기계화와 새로운 농업 기술의 도입으로 경지면적도 늘고 생산량도 크게 늘었지만, 농업의 취업 노동자 수는 줄었음. 농업에서 자본축적 규모는 크게 증가했지만 농업인구는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크게 줄음
특히 지주들은 자신들의 땅에 거주하는 주민이 많을수록 더 많은 세금(구빈세)을 내야 하자 사유재산권을 행사하여 농업노동자들과 그들의 주택을 몰아냄. 타인에 대한 ‘추방’의 권리를 자기땅에서 일하는 농업노동자들에게 행사하여‘이방인’으로 다룬것
농업자본가가된 지주들은 거주는 못하게 하면서 노동만 뽑아쓰는,‘추방’과‘착취’를 병행하는 전략을 써, 땅 안에 있는 주택들을 모두 경작지로 바꾸어, 농업노동자들은 지주가 울타리를 두른 소위 ‘폐쇄촌’에서 쫓겨난 뒤 ‘개방촌’의 오두막집에 살았음
개방촌에는 이들을 노린 건축업자들이 대충 지은 열악한 주택들에 이들을 채워넣고 돈을 벌었음. 마르크스는 앞서 구빈원을 ‘빈곤의 감옥’이라고 불렀는데, 이 개방촌은 “잉글랜드 농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유배지’”라고 부름
∘ 농촌의 상대적 과잉인구
차지농장들이 집중되고, 경작지들이 목초지화되며, 기계가 도입되고, 경작지의 주택들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추방되면서 농촌에서도 ‘과잉인구’현상이 나타남. 생산에 필요한 농업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든 데다 거주 지역과 생계 수단이 부족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농촌의 인구가 많아 보이는 것. 소위 개방촌 마을이나 농촌 인근 도시에는 ‘인간 밀집’현상이 나타남. 일자리도 없고 주택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이러한 과잉인구현상은 인구의 자연증가가 아닌 농업에서 일어난 자본축적의 결과, 즉 농업의 기계화와 농토에서의 주민추방의 결과임. 농촌의 과잉인구 현상은 극빈 상태에 이른 주민들이 계속해서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곧바로 도시 빈민촌과 연결
도시 빈민촌 형성의 두 가지 원리. 그 하나는 산업화가 도시화를 낳는 것, 즉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농촌에서 끌어당기는 것. 또 하나는 농촌에서 인구를 밀어내는 것, 즉 농촌에서 잉여인구가 만들어지는 것. 전자가 도시가 인구를 끌어당기는 원리라면 후자는 농촌이 인구를 밀어내는 원리. 자본축적은 양쪽 모두에 영향을 미침
마이크데이비스(M.Davis)에 따르면 최근 전 지구적 규모로 나타나는 도시의 슬럼화에서는 후자가 더중요. 그에따르면 현재 “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힘은 채무와 경기침체로 인해 현저히 약화”.그런데도 도시화가 진행되는 이유는“시골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힘”이 강하게 작동하기때문. 이 ‘밀어내는’힘의 정체는 20세기후반 개발도상국의 채무위기로 정부의 농업지원이 끊기고 전면적 시장개방이 이루어진 탓
유엔헤비타트(UN-HABITAT)에서 2003년 펴낸 보고서 《슬럼의 도전》은 이렇게 결론. “도시는 더 이상 성장과 번영의 중심이 아니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 및 장사에 종사하는 잉여인간의 처리장이 되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미래 도시는 슬럼화된 도시,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일 가능성이 높음
19세기 잉글랜드, 노동인구의 상대적 과잉에도 불구하고 일손 부족이 나타난다는점
“농업노동자가 경작을 위한 평상시 수요로 보면 언제나 과잉 상태인데, 예외적이거나 일시적인 수요에 대해서는 언제나 과소 상태”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농촌의 여성과 청소년, 어린아이들(6~13세)로 구성된 인력 조직인‘작업단’(gangsystem)이 생김(오늘날농업인력회사쯤). 그‘보스’(gang-master)는 대개 “기업가 정신과 수완을 가진 불량배”로, 차지농업가와 도급계약으로 일을 맡음
노동자 가족으로서는 워낙 먹고살기 힘든 처지에 몰려 있기에, 게다가 안정적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노동인구가 상대적 과잉 상태니까), 저임금의 고강도 노동이지만 그나마 일감을 일정 기간 제공해주는 ‘작업단’에 들어갈 수밖에 없음
이 작업단은 산업예비군이 수행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함. 노동수요가 급증할 때 생겨날 수 있는 임금 인상을 막고, 농업노동의 가격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리는 역할
아이들은 불량배 보스를 따라 그렇게 과로의 현장으로 끌려가 불량배 보스를 따라 술과 섹스, 아편에 노출됨으로써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됨
노동인구의 과잉이 작업단이 생겨난 배경. 부를 축적하는 원리가 빈민을 축적하는 원리니까. 사실 두 극은 하나. 이것이 자본주의이자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
농촌의 ‘작업단’에 대한 ‘아동노동조사위원회’의 보고가 나오자 평소 지주계급에 비판적이었던 자유주의 계열의 언론들은 어떻게 ‘고상한 신사 숙녀와 국교회 목사들’이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묵인하고 있었느냐고 공격한 반면, 지주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문들은 “자식들을 그런 노예 상태로 팔아넘긴” 농민들의 타락에 초점
7. 자본의 죄와 자본가계급의 운명
○ 아일랜드에서 더 악화된 형태로 반복된 자본축적의 법칙
1846~1866년 아일랜드는 대기근 등으로 인구가 30퍼센트 이상 줄었는데도 상대적 과잉인구 현상이 나타났음. 또한 아일랜드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가 교차하는 사례
아일랜드의산업구조는 잉글랜드와의 관계속에서 잉글랜드에 곡물과양모,고기등을 공급하는 농업지역이됨. 이들은 잉글랜드 자본관계의 일부가되었지만 잉글랜드 노동자계급이 맺는 것과는 다른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들의 투쟁은 식민지 내지 주변부 민족의 해방 투쟁이 어떻게 자본주의 핵심 국가의 계급투쟁과 연관되는지를 보여줌
기계제와 더불어 ‘국제분업’구조, 즉 지구의 한 부분은 공업 생산 위주 지역이 되고 다른 한부분은 농업생산위주지역이되는, 국제적차원의 위계적 산업구조가 형성됨
중요한 지배계급은 지주들, 그것도 잉글랜드인 부재지주들. 인구가 줄고, 곡물생산이 줄었으며, 사육하는 가축의 수도 크게 줄었는데 지대와 차지농업가의 이윤은 계속 증대. 인구와 생산물의 절대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자본축적이 진행된 것
작은 농장들이 큰 농장에 합병되면서 집중의 효과, 경작지들이 목초지로 바뀌면서 총생산물에서 잉여생산물의 비중이 커짐. 생산성이 증대한 것. 잉글랜드의 육류와 양모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 농사짓는 것보다 소와 양을 키우는 것이 이득인 구조
“1846년의 아일랜드 기근 때문에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는데”도, “이 나라의 부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음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일은 아일랜드에서 훨씬 악화된 형태로 반복됨. 일자리나 주거지에 비해 사람들이 너무많아 보이는 상대적 과잉인구 현상이 인구가 크게 감소한 아일랜드에서도 나타난 것. 차이가있다면 ‘공업국’인 잉글랜드에서는 잉여노동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주로 공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산업예비군’으로 나타나지만 ‘농업국’인 아일랜드에서는 주로 농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농업예비군’으로 나타난다는 것뿐
총 인구가 무려 30퍼센트 이상 감소한 아일랜드에서 상대적 과잉인구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자본축적이 상대적 과잉인구를 낳는다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 인구법칙’ 즉, 자본주의에서는 부의 축적이 빈곤의 축적을 낳고 잉여노동자, 잉여인간의 축적을 낳는다는 것을 확인해줌
○ 혁명의 지렛대
아일랜드의 사례는 계급투쟁과 관련해서도 중요. 아일랜드인들의 투쟁은 영국의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 벌이는 투쟁과는 다름. 이들에게 지주와 자본가계급은 타민족인 영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이들에게는 계급투쟁이 민족해방투쟁으로 혹은 민족해방투쟁이 계급투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 영국 노동자계급이 식민지 아일랜드인들을 구원하는게아니라, 식민지아일랜드인들이 영국노동자계급을 구원한다는것
마르크스는 대체로 1850년대까지도 이어져오던 생각, 즉 ‘혁명의 지렛대가 놓일 곳은 영국’이라는 견해를 바꿈. 세계혁명의 지렛대를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둔 것
○ 페니언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페니언단은 아메리카에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을 기반으로 탄생한 독립운동 단체. 이들은 아메리카에서는 물론이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도 활발한 투쟁을 전개
마르크스는 페니언단의 투쟁이 과거 아일랜드인들의 투쟁과는 다르다고 생각
첫째, 페니언주의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출현. 엘리자베스나 크롬웰이 야만적으로 아일랜드인들을 몰아낸 것과 양과 소를 키우기 위해 아일랜드인들을 몰아내는 것의 차이, 다시 말해 과거의 추방과 자본주의적 추방의 차이
둘째, 과거 아일랜드의 저항운동은 귀족이나 중간계급, 가톨릭 성직자들이 이끌었으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페니언주의는 인민대중, 그것도 하층의 인민대중에 뿌리를 둠. 페니언주의가 민족운동의 성격과 함께 계급운동의 성격을 갖는다는 걸 보여줌. 독립투쟁의 주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
마르크스는 이 두 가지 요인이 아일랜드 독립투쟁을 과거와는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고 봄. 단순히 억압 민족에 대한 피억압 민족의 항거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와 추방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라는 것. 이것이 마르크스가 민족주의 운동인 페니언주의에서 ‘사회주의’ 냄새를 맡은 이유
마르크스가말한 노동자계급의 운명의 주인공들은 산업예비군,잉여노동자,식민지인. 모두가 자본관계의 내부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존재들. 자본관계에 귀속되어 있지만 내부에 존재하지는 않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어떤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존재
규정이 선명한곳은 중심이아니라 경계,한계,주변. 이것은‘규정’내지‘정의’를 뜻하는 라틴어‘definitio’가 ‘finis’즉 경계를 정하는일, 한계를긋는일이라는것과도 통함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주권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곳도 노동자계급의 경계, 한계에 있는 사람들. 이들 주변노동자들, 잉여노동자들의 처지가 개선될 수 없는 한, 이들이 자본축적을 가속화하는 원천이 될뿐아니라 노동자계급을 통제하는 효과적장치로 기능하는한 중심노동자 곧 정규직노동자의 처지도 근본적으로 나아질 수 없음
물론 자본관계의 주변에는 노동자들만 존재하는게 아님. 자본의 ‘이스트엔드’, 자본의 국경에는 추방된 채로 붙들려 있는(배제된 형태로 포함되어 있는) 더 많은 존재인 주부들이 있고, 원주민들이 있고, 동물들이 있고, 자연생태계가 있음. 가치체계 바깥으로 밀려난, 그러나 가치증식에 동원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로 착취당하는 존재들이 있음. 아일랜드인들과는 또 다른 형상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있음. 우리가 혁명의 지렛대를 어디까지 밀어 넣을 수 있는가, 이것에 따라 혁명을 통해 세계를 어디까지 이동시킬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임
○ 자본의 죄명은 ‘혈육 살해’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죽이고, 인간을 먹음. 그야말로 혈육 살해의 죄, 동족 살해의 죄, 식인의 죄
마르크스가 인용한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의 시구가 아주 적절한 표현. “가혹한 운명이 로마인들을 괴롭히도다, 혈육 살해의 죄악이 벌어졌으니.”
호타리우스는 로마가 스스로 멸망의 길로 미친듯 뛰어가고 있다고 지적, 늑대나 사자들도 다른종이아니라면 공격하지않는데 로마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으며, 로마는 혈육을살해한 그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나지못하게 되었다는 것
호라티우스가 말한 로마인들의 저주받은 운명은 마르크스가 말한 ‘늙은 바다의 여왕’(‘자본’(전제군주 자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의 운명과 닮았음. 정복자인 늙은 여왕은 힘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했지만 그럴수록 젊은 공화국의 출현을 예감하며 악몽에 시달림. 자본가계급은 이 저주받은 운명을 선고받았음. 칼을 든 채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음
부록노트
Ⅰ. ‘정직하고 머리 좋은’ 맨더빌
루이뒤몽(L.Dumont)은 경제학이 탄생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봄. 하나는 경제가 정치로부터 독립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 활동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 전자에 대하여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중요 정부의 임무는 개인의 사유재산 보호에 있다고 봄. 후자를 보여준 것이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
맨더빌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분”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생각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
그에따르면 탐욕과 사치, 시샘, 오만, 허풍은 부자들의 도덕. 사치는 부자들의 세계에만 허용되는 것이고, 생산과 전쟁에 종사할 이들은 어차피 “가장 천하고 가난하며 죽어라고 일만 하는 사람들”. 사치할 틈도 없고 그렇게 만들어도 안 된다고
그는 노동자의 임금은 최저 수준으로 지급해야 하며, 굶어죽지 않을 정도면 되고, 그래야 부자들이 부를 더 늘릴 수 있다고. 절대 저축을 가능케 하면 안 된다며, 마구간의 말을 필요 이상으로 먹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가능하면 일할 때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교육만 해야 하며, 교육을 많이 시키면 임금 올려달라고 목소리만 키우고, 오히려 학교를 보내지 않고 무지한채로두면 여러모로 부려먹기 좋고, 무지하면 고생을 고생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형편없어도, 임금이 매우 낮아도 만족하고, 다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니 부를 늘리는 데는 노동자들을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그는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빈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자는 ‘자선학교’설립 운동에 범죄는 무지한자가 아닌 많이 아는 자들이 저지른다며 반대. “나쁜짓을 저지른것은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가난하고 무지한 깡패가 아니라, 재산으로보나 교육으로보나 훌륭한 사람들로서 대개 셈을 잘하고 좋은 평판에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배고픔과 목마름, 헐벗음, 무지로 내몰아 돈을 벌었고, 온갖 악덕으로 무장한 영악한 범죄 집단이라고 말하는 셈. 맨더빌이 부르주아계급의 치부욕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그였는지, 부르주아계급의 위선에 대한 고발자였는지, 도덕적 억압에서 생겨난 부르주아계급의 신경증을 치료하려던 의사였는지는 불분명
II. 임금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트인가
◯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업인가
치안이란 지위와 기능에 따라 사람들을 배분하는 것. 치안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에 소속돼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대표적인 것이 직업. 그런데 프롤레타리아는 직업 항목에 해당하는 말이 아님
정치란 치안의 관점에 따른 배분을 문제 삼고 비판하고 거부하는 행동
1832년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A. Blanqui)에 대한 재판 중 직업을 묻는 검사에게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특정 집단, 이를테면 “사회학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한 집단”에 귀속시키는 것을 거부
자크랑시에르(J.Ranicière)에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분류되지않은 자들’, ‘계산되지 않는 자들’. “셈-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바깥으로 내쫓긴 자(outcast)”들의 이름. 프롤레타리아트는 인종,지역,국적,성별,직업등 사회학적으로 분류할수 있는 집단의 이름이아니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는 것은 정체성을얻는 과정이 아니라 정체성을잃는과정(탈정체화과정). ‘모든계급의 소멸인계급’이라는 점에서 탈계급화의과정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라고 함. 자본축적과 더불어 증식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자본관계 주변에 있는 존재들 또한 포함되어야 함
자본축적은 이들을 필요로 하고 축적과정에서 이들을 계속 생산함
◯ 마르크스의 용법
프롤레타리아트’어원은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 ‘프롤레타리우스’는 고대 로마 최저계급으로, ‘자식’(proles)을 낳는것말고 국가에 기여하는바가 없는 자들
근대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언급은 1830년대 모제스헤스(M.Hess)가 가난하고고통받으며노동하는, 그러면서도 모든것을 무너뜨릴수있는 계급으로 묘사
마르크스는 처음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철학적, 특히 소외 이론의 관점에서 봄.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양 없이 철학은 자기를 현실화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이 아닌 계급’, ‘계급이면서 또한 계급을 해체하는 계급’으로 그림. “시민사회의 계급이 아닌 시민사회의 계급”이라는 역설적인 표현.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적 소유’에 대립하면서 동시에 ‘사적 소유’를 해체하는 계급이라고 봄
◯ 『자본』에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노동자들 삶의 불안정성을 이야기하는 곳에서 등장
첫째,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사회적 실존, 특히 주변화된 사회적 실존을 나타낼 때 쓰임
둘째, 프롤레타리아트는 영속적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상태를 나타낼 때 쓰임
셋째,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들의 상태가 체제의 이행, 즉 자본주의적 축적이 그 물질적 조건을 예비하고 있는 이행을 나타낼 때 등장
요컨대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을 일관성 있게 사용.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삶, 폭력에 노출된 삶을 지칭할 때,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존재라는 측면을 부각할 때 이 말을 썼음
노동자가 단지 노동자이기만 한 곳, 노동자가 그저 가변자본으로 기능할 뿐인 곳에서는 노동자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르지 않았음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의 기능(function)이 아닌 기능부전(malfunction)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날 때, 더 나아가 자본관계를 해체할 수 있는 잠재성을 내비칠 때 우리는 이들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