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저명한 사회 사상가인 니클라스 루만은 모든 사회 시스템들을 ‘의사소통 시스템(Communicative system)’들로 보았다. 루만은 사회 시스템의 분화를 의사소통 코드의 분화로 인식했다. 즉 각 사회 시스템들은 독특한 의사소통의 코드들을 가진다. 예를 들면 정치는 권력, 경제는 돈, 종교는 신앙, 학문은 진리라는 코드들을 매개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회 시스템들이다. 사회 시스템들은 상징코드들을 통해 자신을 다른 시스템들과 구별하므로 상징코드는 일종의 ‘눈(Eye)’의 기능을 한다. 상징코드는 사회 시스템들의 ‘관찰’을 위한 매체다. 상징코드들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규제하여 선택하게 함으로써 정보처리(Information processing)를 돕는다. 기독교 신앙이란 독특한 상징코드 안에서 이 시대의 청년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읽어보고자 한다.
오늘의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를 흔히들 통칭해서 포스트모던 사회(Post-modern society)로 부른다. 현대후기 사회는 한 마디로 다양한 거대 담론들이 동시에 지배하는 시대이다. 사상적으로는, 근대이전과 근대, 그리고 현대이후의 사회 가치철학과 공존하는 사회이다. 신중심적(theocentric), 인간중심적(anthrocentric), 그리고 자연중심적(ecocentric) 사회 가치 철학들이 동시에 각각의 상대적 가치를 지니며 공존하는 사회이다.
사회적으로는, 세계화와 정보화가 가속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이다. 세계화는 철저히 범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 가고 있다. 지구촌의 모든 앞마당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장터가 되어가고 있는 시대이다. 인간은 모두 ‘호모 에코노믹스'(Homo economics)로 전락되고 말았다. 율리히 백(Ulrich Beck)의 주장처럼, 이런 종류의 세계화(Globalization)의 물결 속에서 세계는 소위 80대20 사회로 양분되었다. 낙오자 80%와 승자 20%가 그것이다. 무한 경쟁 속에서 승자만이 살아남는 ‘승자전취사회’가 오늘 우리 사회가 되었다. 낙오자 80%를 위로하기 위해서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다. 엄마의 젖꼭지 역할을 하는 ‘titty'는 세 가지의 S로 요약되는 정책이다. 그것은 바로 Sex, Screen, Sports 문화정책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누구보다도 민감히 티티테인먼트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피터 드래커(Peter Drucker)의 예언처럼 산업사회를 넘어서 이미 지식 정보사회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누가 가장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양질의 정보를 손에 쥐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 공동체의 운명, 심지어 국가의 운명까지 결정짓는 세상이 되었다. 담론의 다원화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담론의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정보화가 미묘한 긴장 속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학문의 세계를 예로 들어 보자. 한편으로는 학제들의 극도의 전문화, 세분화, 다원화가 추진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학제들 간의 대화와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학제 간의 만남을 추진하는 다학제 패러다임이 전개되고 있다. SNS(Social Network Services)의 힘이 새로운 권력의 수단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의 20대 젊은이들은 어느 세대보다도 그 권력의 수단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포스트모던 사회의 사상적, 사회적 삶의 상황 속에서 이 땅의 청년들은 심각한 자기 정체성(Self-identity)과 사회 상관성(Social-relevance)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그들 생활의 90%이상을 보내고 있는 대학 캠퍼스를 들어가 보자. 물고기를 잡고자 하면 물고기가 많이 있는 곳으로 가야하듯이, 이 땅의 젊은이들을 다음 세대의 영적리더로 세우고자 한다면 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학 캠퍼스다. 필자는 지난 6년간 연세대학에서 교목과 교수로 젊은이들을 가르쳐 왔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오늘 이 땅의 지역 교회들이 한국의 대학 캠퍼스를 치열한 선교의 장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몇몇 선교단체와 이단 혹은 사이비 단체들만이 선교의 장으로 인식하고 사역하고 있다. 과연 이런 단체들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자기 정체성과 사회 상관성의 문제를 영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결여된 영성은 건강한 기독교 영성일 수 없다.
교육과 노동과 자아의 관점에서 젊은이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정체성과 상관성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에버레트 라이머(Everett Reimer)는 그의 명저, 『학교는 죽었다(School is Dead) 』에서 경쟁의 가치에만 집중하는 학교 교육의 죽음을 선언한바 있다. 취업률이 대학의 수준을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학은 이미 진리를 연구하는 상아탑이기를 포기하였고, 그 자리에 스펙의 신화가 자리하게 되었다. 범지구적 자본주의 영향아래 전개되는 세계화의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국제적 수준의 스펙을 쌓게 하는 것이 대학과 학생들의 교육목적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대학의 낭만은 사라진지 오래다. 스펙을 위한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평균 3% 이내의 젊은이들만이 국제적 수준의 스펙을 갖게 되는 현 사회 상황에서 나머지 90%가 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은 낙오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찍이 칼막스(Karl Marx)가 그의 명저 『경제학적-철학적 초고』에서 예언했듯이, 이 땅의 젊은이들은 ‘소외된 노동’의 당사자들로 전락돼버렸다. 청년실업은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말았다. 청년실업률 그 자체보다도 ‘소외된 노동자의 현실로 몰아가는 청년 취업’이 문제인 것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노동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전혀 실현할 수 없는 노동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단순히 노동에 대한 화폐적 가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가치가 노동하는 노동자 자신에게 실제로 얼마만큼의 가치를 갖는가를 통칭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졸업이 희망이 아니라 두려운 현실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교육과 노동의 사회 생태계적 환경 속에서 과연 이 땅의 젊은이들의 자아가 건강할 수 있겠는가? 실존주의적 분석철학자인 롤로 메이(Rollo May)는 그의 명저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Man's Search For Himself)』에서 현대인의 내면적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 날카롭게 지적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파괴되어 가고 있다. 다양한 가치 공존의 사회 속에서 언제나 대학 젊은이들은 선택과 집중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와 지식정보사회의 핵심 가치인, 경쟁과 속도와 스펙과 여론의 가치에 함몰되어 그들의 마음의 정원은 심각히 훼파되어 가고 있다. 언제나 진로에 대한 불안과 자신의 삶에 대한 공허감이 발목을 잡고 있다. 이로 인해서 한번도 나는 나로서 정직하게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과 상관성의 문제는 둘이 아니라 사실 하나이다. 나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자리에서 세상과의 관계성도 건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또 다른 희망의 문을 여는 기회이다. 이때야 말로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할 때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삶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진리에 목말라하고 있다. 바로 이때가 기독교적 가치를 이 시대의 대안적 가치로 역사화하고 사회화할 때이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내일의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