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과 종신목회를 하겠다는 약속의 삶
박용만•박지원 가정
1. 나의 출생과 고향 2. 통일교회 입교 3. 참부모님과의 첫 만남 및 신앙생활 4. 축복과 공직 생활 5. 브라질 자르딘 수련 6. 송이버섯과 만 개의 얼굴 7. 이스라엘 방문 8. 서울 목회와 정치 경험 9. 서울 이문교회장 시절 10. 전북 정읍목회 생활 11. 기독교 목사 상대로 선교활동 12. 공로패와 천보가정 및 전도활동
주요 내용 : 원고작성자 박용만, 입교 과정, 참부모님과 독대 경험, 받은 큰 복, 국회의원 선거 출마, 중동 방문, 목회활동 보람 등
1. 나의 출생과 고향
나는 1951년 12월 4일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185번지에서 출생을 했다. 평화로운 6칸의 방을 갖춘 기와집과 그 주위로 전답이 많이 펼쳐져 있었다. 삼가봉이라는 산이 병풍처럼 뒤에서 우리 집을 감싸고 있었고, 집 앞에는 과수원와 감나무가 많았고, 뒤에는 밤나무가 많았다. 년중 과일이 많았고, 동절기에는 식량을 구하기 힘든 시골이지만 우리 가족은 밤과 감이 있어서 늘 입맛을 돋우었다. 그것들은 최고의 자연식 건강 간식이었다.
집 앞쪽 제방 너머에는 늘 맑은 냇물이 촐촐 초올초올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흘렀고, 뱀장어 붕어 미꾸라지 등의 물고기가 많이 서식을 해서 장마가 끝나면 고기를 많이 잡아먹었다. 참아버님께서 어린 시절에 고향 상사리의 시골 마을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뛰어놀면서 정겨운 추억을 많이 만드신 것처럼, 나도 아름답고 은은한 고향 추억이 많다. 참아버님의 시골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내 고향을 중첩시키곤 한다. 어린 내 마음에는 그런 고향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기가 좋았고, 내 마음의 고향으로 늘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님은 눈만 뜨면 전답에 매여 사셔야 하는 고된 삶이었다. 하루를 알리는 새들의 소리는 삶이 힘들지만 고달프다고 불평을 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는 대자연의 소리였다. 하루하루가 치열한 육체노동과의 전쟁이었다. 부친은 담배농사를 많이 해서 담배잎사귀 밑에 벌레가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농가에서 담배 작물 경작이 가능했다. 그런데 담배 잎에는 진드기 벌레가 많았다 해충제를 살포해도 쉽사리 제거되지 않았다. 부친께서 나더러 벌레를 잡으라고 하시면, 나는 벌레가 징그러워서 도망을 다녔다.
또 가을이 되면 논에 참새가 많이 몰려들어서 참새를 쫓아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훠이훠이 소리를 지르고, 깡통을 막대기로 쳐서 소리를 쾅쾅 내면서 논둑을 이리저리 다녀야 했다. 참새들도 약아서 내가 가까이 가면 조금 날아갔다가 잠시 후면 다시금 논으로 돌아왔다. 벼가 무르익는 한달 정도의 기간은 인간과 참새의 치열한 식량 확보 전쟁이었다. 가끔 옛날 그림을 보면 아이들이 참새를 쫓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고역이었다.
그리고 소를 데리고 주위의 산이나 들판으로 다니면서 풀을 먹여야 하였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소를 데리고 이리저리 다니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철이 들 든 어린 나는 참새를 물리치거나 소에게 풀을 뜯어 먹이는 것이 귀찮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2km 떨어진 동해 바닷가로 가서 놀러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의 고통을 모르는 철부지한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하시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렸다면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2. 통일교회 입교
1967년도 강릉 중앙고등학교를 입학하여 방을 얻어 정호인 친구와 자취생활을 하였다. 그라고 이동수 친구(전 일신석재 사장)의 소개로 통일교회를 알게 되었다. 1968년 3월 14일 2학년 때 통일원리 수련을 받고 학생부장의 강력한 요구로 입회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당시 이유선 목사님의 ‘타락론, 죄의 뿌리’를 감명 깊게 듣고서 입교를 하게 되었다. “인간 사회에 악이 있구나, 악을 척결해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구나. 어떻게 악을 물리칠 수 있지?”라는 것을 고심하기 시작한 때라서 죄에 대한 강의가 인상깊게 다가왔다.
주말이면 집을 가기보다 교회에 가서 친구들과 같이 지냈다. 진리를 공유하는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 자체가 행복했고, 그저 마음이 편안했다. 입교 이후로 첫 번째로 달라진 나의 모습이었다. 주말마다 집으로 쪼르륵 가던 내가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던 내가 교회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식구공동체의 심정적 분위기는 지금도 나에게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참부모님께서 통일산업을 만드시고, 산탄공기총을 만들어 전국으로 보급하셨다. 학생부장이 공기총을 임대해 주어서 고향 뒷산 삼가봉에 올라가 참새나 비둘기 등 다양한 새도 잡아 보았다. 참부모님 덕분에 일찍부터 사냥하는 즐거움을 체험하였다. 요즘도 사냥은 고급취미인데, 그 당시는 범인이 접근하기 힘든 취미였다. 나는 그때 벌써 고상한 취미를 경험했다.
3. 참부모님과의 첫 만남 및 신앙생활
1969년도 수택리에서 열린 전국 성화학생 총회에 참석하여서 참아버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교회에서 말씀을 통하여 상상 속에 뵙고 싶었던 참부모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하늘부모님의 실체로 오신 참부모님을 내 눈으로 보다니, 감격이 충만하였다. 예수님보다 더 잘 생기시고 건강해 보이시고 멋있어 보이셨다.
참아버님께서는 말씀을 하시다가 이렇게 강조하셨다. “너희들 직장생활을 하거나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공직자의 길을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나에게는 선포로 다가왔고, 내 운명을 바꾸는 좌우명이 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성14회 성화학생들에게 “1970년대를 이끄는 기수가 되어라.”는 지표를 하사하셨다. 총회를 마치고 돌아오니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그 이유는 토요일에 등교를 하지 않고 통일교회 집회를 갔다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요즘은 토요일에 학교에 안 가고 자율적인 체험학습을 하지만 그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수업이 있었다. 무단결석을 한 이유로 나는 교무실로 불려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드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교회의 학생부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으면 뜻길을 변함없이 가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혈서를 써서 맹세하라.”고 했다. 여학생들에게는 도루코 면도날을 나누어 주면서 손가락을 베고서 솟아나는 피로 혈서를 쓰게 했다. “남학생들은 이빨로 깨물어 증거를 남기라.”고 하여서 나는 “불변”이라고 혈서를 써서 제출했다. 혈서를 쓴 이후로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잦았다. 그만큼 나의 신앙 열정도 향상되었다. 청소년기에는 육신이 갑자기 훌쩍 크듯이, 내 영인체도 그 때에 쑤욱 자랐다. 신앙 성장에는 약속과 맹세가 중요한 몫을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던 모친은 이상하게 여겼다. 집보다 외출이 잦고 교회에 더 많이 머무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였다. 본래 모친께서는 불심(佛心)이 아주 깊었고 정성도 많이 드렸다. 그래서 모친은 충북 단양에 있는 천태종 불교 윤보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셨다. 모친은 내가 정도가 지나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나를 데리고 종정인 박상월 스님을 찾아갔다. “막내 아들이 통일교라는 교회에 미쳐있는데, 그 교단이 어떠한 곳인가요?”라고 질문하였다. 종정스님은 “문선명 선생님은 성인과 같은 분이니 아들이 가는 길을 도와주세요.”라고 하였다. 그 이후로 모친은 일생동안 나를 협조하셨다. 나중에 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받았고, 영육 축복을 받고, 영계로 입적을 하셨다. 가끔씩 몽시에 나타나셔서 나를 만나시곤 한다.
참부모님께서 전국 8도에 기동전도단을 결성하고 순회를 시키셨다. 나는 충남 1차 기동전도단에 편입되어 부름을 받았다. 약 3개월 동안 활동하던 중에 천안교회에서 점심시간에 갑작스럽게 복통이 와서 급히 병원에 실려 갔다. 급성 맹장이라는 진단을 받고 곧바로 수술을 했다.
모친은 연락을 받고 “통일교회에서 막내아들이 죽게 생겼구나.”하며 걱정을 많이 하면서 급하게 천안병원 입원실을 찾아오셨다. 김원종 당시 천안목사로부터 맹장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교회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배경을 듣고 조금이해를 하시게 되었다. 퇴원을 해서 더 이상 기동대 생활이 어려워 몸조리를 하다가 군입대 대기를 했다.
군 소집 영장이 나와 원주 38사단 훈련소에 입소를 했다. 훈련을 마치고 통신병으로 교육을 받고 자대에 배치 받기 직전이었다. 그 때에 중대장이 “군인 중에 혹시 친인척이 있으면 메모하라.”고 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최우근씨가 고종사촌 형입니다.”라고 기록을 했더니, 행정군관이 알아서 육군사관학교 통신병으로 배치를 해서 군인생활을 하게 되었다.
제대 말년인 1974년도에 1800가정 약혼이 청파동 전 본부교회에서 있었다. 유종관 전 강릉 목사님이 전화를 하여서 “1800가정 약혼식에 참석하라.”고 지시하셨다. 급히 청파동으로 갔다. 참아버님께서 남자 한줄, 여자 한줄을 세워 놓고 왔다갔다 하시면서 약혼을 주도 하셨다. 내 앞에 오셔서 어떤 여성을 가리키셨다. 그녀를 데리고 2층에 올라가서 면담을 해보니 강릉에서 미장원을 하고 있었고, 동성동본이었다. 그 당시는 동성동본의 결혼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라서 부부가 되기를 포기했다. 다시 1충으로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상이 없어서 포기를 하고 부대로 귀대하였다.
이런 배경이 내가 1800가정이 못 되고, 6000가정으로 밀린 동기가 되었다. 제대를 한 후 서울시 중구 명동에 일화인삼판매(주)가 설립이 되어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전국 일화대리점이 개설되어 충북 제천대리점을 맡게 되었다. 조금 경험이 생기자 나는 좀 더 크게 대리점 개척을 하고 싶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부모님 신세를 졌다. 내가 제대를 하고 귀가를 해보니 부모님은 경제활동을 위해 강릉고속터미널 뒤에 집을 사서 숙박업을 하고 계셨다. 나는 그 집을 담보로 하고서 일화대리점 사업을 하게 되었다. 충북 일대 마트를 돌며 일화물건을 판매하는데, 가격은 높고 신제품들이라 인지도가 확산되지 않아서 잘 팔리지 않았다. 고생만 많이 하고 실속이 없어서 사업을 접었다.
4. 축복과 공직 생활
6000가정으로서 1978년도 약혼을 하고 한일 축복을 받았다. 부인3년 임지생활이 시작되어 아내는 동원되었다. 나도 종신공직자 자원자 모집에 응했다. 수련을 받고서 1982년 12월 1일 충북 광혜원교회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A타입 교회를 책임지다 보니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내는 연장자로 조기 수료가 되어 나와 같이 목회를 하였다. 아내는 문화수준이 높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와서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다.
구식 하수도를 사용하고, 반지하에 연탄을 피우는 부엌 구조였다. 이에 적응하는 것이 원만치 않았다. 겨울아침이면 수도가 얼어 더운 물로 녹여서 물을 끌어올려서 사용하는 힘든 환경이었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식구집 심방을 갔다 오니 부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이 난 줄 알고 급하게 뛰어 들어가 보니 아내가 신문지로 연탄을 피우고 있었다. 기침을 콜록거리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첫아기 임신이 되고는 너무 추웠고, 아내는 배탈이 많았다. 임신한 몸으로 더욱 힘든 생활이었다.
충북 목회자 회의에 이요한 목사님이 오셔서 아내 간증을 시켰다. 아내는 일본에서 입교 이후에 출가를 해서 7년 동안 헌드레이징에 열정을 쏟았다. 도자기, 일화인삼, 도장 등을 팔고 다니며 합숙생활을 했다. 정성을 많이 들여서 230사이즈의 화병을 300만엔에 팔아서 《원리강론》 책을 시상품으로 받았다.
이목사님께서 아내를 위하여 목회를 잠시 뒤로 미루고, 기업에 잠시 취직하여 생활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알선해 주신 곳이 일신석재 이천공장이었다. 근무를 하면서 월급을 받는 재미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오붓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노조파업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직원들끼리 싸우고 때리고 밀치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장면이 연일 발생하였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동의를 얻고, 퇴사를 하였다. 환고향을 해서 스포츠 조선 지국장을 지냈다. 2년간 했는데 매출실적이 좋다고 평가를 받았고, 선물로 태국여행 티켓을 받아서 외여행을 다녀왔다. 나의 능력을 회사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에는 늘 ‘목회자!’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돈을 벌고 몸이 편해지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욕구 충족도 안 되었다. 특히 잠실운동장 지하에서 참부모님께서 우리 부부를 약혼해 주실 때에 내가 참부모님께 드린 말씀이 뇌리에 늘 맴돌았다. 나는 아내가 옆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건방지게 아뢰었다. “아버님, 저는 종신토록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하오니 한국여자와 짝을 맺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하는 것을 들으신 참어머님께서 “일본색시가 잘 내조를 할 거야!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함께 축복가정 부부의 인연을 맺기로 하였다. 그 이후로 내가 한 그 말이 나 스스로에게 늘 약속이 되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월급을 받아서 좀 편안하게 산다고 해서 내게 만족이 되지 않았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듯이, 나는 목회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러저리 살펴보았다.
나는 다시금 목회를 하기로 재차 결심을 하였다. 1998년 7월 1일에 강원도 양양교역장 임명을 받고 재차 본격적인 목회를 출발하였다. 활동 중에 한일가정 한 가정을 배출했고, 필리핀 현지에 가서 한필가정 두 가정을 축복시켰고, 기성가정을 많이 축복시켰다. 특히 권정자(전 서울동대문구 부녀회장)평화대사 지회장을 전도해서 그의 조카를 한일가정으로 축복을 시켰다. 이는 쾌거였다. 조카가정은 현재 대전에서 살고 있다.
5. 브라질 자르딘 수련
1998년 말에는 브라질 자르딘 40일 수련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셔서 36만 한일 한가정을 데리고 갔다. 미국까지 12시간 비행을 하고, 또 상파울로까지 12시간, 자르딘 까지 12시간 버스를 타고 섭리의 현장을 갔다. 참부모님 공관 앞 망고나무에 매일 앵무새가 찾아와 인사를 하는 무공해 자연의 현상을 맘껏 감상했다. 악어, 뱀, 타조, 각종 새들이 태초의 에덴동산 모습 그대로 살고 있었다. 에덴동산에 모인 축복가정들은 함께 천일국 행복체험을 하였다. 특히 만주오카라는 고구마는 심기만 하면 고구마가 알아서 주렁주렁 열렸다. 사람은 캐서 먹기만 하면 되는 환경이었다,
참부모님께서 국가 메시아들에게 세 가지 고기들을 합하여 160마리를 잡으라는 낚시 정성 목표를 정해주셨다. 3대 어종은 도라도, 빠꾸, 수루비였다. 나는 이 물고기들을 구경을 하며 생선 요리를 시음해 보기도 했다. 파라과이와 우루과이를 중심한 참부모님의 낚시정성 현장을 돌아보며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상상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계신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수련일정 중에 선배가정들이 성지 순례를 나가신 가운데 대강당에서 참부모님을 모시고 훈독회를 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맨 앞에 앉았다. 도중에 참아버님께서 가운데 통로를 왔다갔다 하시다가 내 앞에 멈추셨다. 나는 좋기도 하고 긴장이 되었다. 내 바로 앞에 참부모님께서 서셨으니 너무나 좋아서 감동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사건이 터질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바짝 얼은 상태가 되었다. 참아버님께서는 내 이마를 힘껏 딱 때리셨다. 그리고 “너의 생식기가 누구의 것이야?”라고 물으셨다. “ 제 아내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아내 이름은 뭐야?”라고 질문하셨다. 아내 이름은 일본명으로 畑本信子여서 “하신자입니다.”라고 답을 올렸다. “무슨 하 자(字)야?”라고 또 하명하시니 나는 “하나님 하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 하자가 어디 있어? 아래 하(下)자지.”라고 하셨다.
질문에 응답하면서 나는 “참부모님께서는 언제나 친부 이상으로 정감있게 말씀을 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정감이 샘솟았다. 다른 식구들과의 문답에서도 그러한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재림메시아 참부모님과 직접 문답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추억이 될 것이며 자랑과 영광이 될 것이다.
6. 송이버섯과 만 개의 얼굴
참부모님께서 2001년도 설악산 일성콘도에 오셨다. 김형태(브라질 개척자) 회장님이 “양양군수를 모시고 오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나는 어렵게 섭외를 해서 군수와 부군수를 초청하게 되었다. 그들은 참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다. 군수는 송이버섯, 부군수는 인진쑥을 갖고 왔다. 나는 그들을 일성콘도 로비에 대기시켰다. 한참 후에 참부모님께서 간부 회의를 마치고 로비방향으로 내려오셨다. 나는 그들이 선 자세로 경배를 드리도록 인도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참부모님께 소개해 드렸다.
참아버님께서는 “양양군수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왔구만!”라고 하셨다. 군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라고 하고 양양국제공항스카이 타운으로 안내하였다. 올라가 보니, 뒤에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그림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은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절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차 한잔을 나눈 후에 군수가 참부모님께서 투자해 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양양관광벨트 건설에 대한 브리핑을 성실하게 했다. 케이블카, 수렵장, 해양리조트, 골프장 등의 건설 계획을 설명했다.
참아버님께서는 브리핑을 들으신 후에 나를 부르시고 “군수와 의형제를 맺어라!”고 하셨다. 그러자 군수는 “박목사가 전해준 참부모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의형제와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양양 하조대와 사격장 골프장 예정지를 둘러보셨다. 중식 때가 되어 수행원 20여명의 점심을 군수님이 강원도 특유의 맛을 내는 막국수로 대접을 했다.
2002년 가을 단풍철에 참부모님께서 다시 일성콘도에 오셨다. 문씨가 경영하는 밤 한 말과 홍시와 떡을 준비해서 참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저녁 먹었나?”라고 친아버지처럼 물으시고, 티타임이 끝난 후에 간부들과 참어머님도 방에 들어가라 하시고 우리 부부만 독대를 해주셨다. “몇 남매를 두었느냐? 너의 이름이 뭐냐”라고 물으셨다. “용만(容萬)입니다.”라고 했더니, “네 이름은 만 개의 얼굴을 가졌구나! 너는 박씨 종족을 불러 모으고 싹쓸이 축복을 시켜서 종족메시아가 되어라.”고 축복을 해주셨다.
그리고 “너는 앞으로 국회의원을 할 이름을 가졌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내 자신을 아무리 보아도 정치에는 소질이 없고 또 실제경험도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저는 정치 쪽에는 생각한 바가 없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때가 되면 정치경험을 해 보게 될 거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그냥 지나가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예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8월 달에 루사 태풍을 맞아 성전에 물이 40cm 들어와 난리를 겪었다. 양양교회는 식구가 헌납을 해서 벽돌로 시작한 교회였고, 재단이나 협회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회를 수리하고 재건축하기 위해서는 교회식구들만의 경제적 협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재단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뜻이 없어 보였다. 당시는 재단의 모든 재원이 여수 프로젝트에 집중되는 시기라서 양양교회 재건축이 지원은 어렵다는 응답을 받았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내달라고 신청하였다. 그러나 “당분간 현재 위치를 지키라.”는 답신이 왔다.
7. 이스라엘 방문
2003년 12월에 이스라엘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3개의 세계종교 대표들이 모여서 십자가를 땅에 파묻고,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모시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예수님의 생존 당시에 왕관을 봉정하면서 즉위식을 했더라면 예수님과 하늘부모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2천년이 지나서 이제라도 참부모님의 지시로 인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게 되니까 나는 너무나 기뻤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 너무나 기쁘고 한을 푸시게 되어서 감격하셨을 것이고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2004년 1월 달에는 이스라엘 평화대행진에 모든 공직자가 참여하라고 지시가 왔다. 비행기를 타고서 머나먼 중동으로 날아갔다. 행사가 끝난 후에 우리들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핵심 사건이 깃든 역사적 현장을 체험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원리강의를 하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많이 언급하고 강조하였는데,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동료 목회자들과 같이 방문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출애굽사건을 이끈 지도자인 모세가 40일 금식을 하고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산을 등정했다. 이름은 호텔인데 허술한 여관과 같은 곳에 투숙했다. 그런 숙소가 있는 것만도 고마웠다. 배탈이 나서 염려가 되었으나, 다행히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낙타를 타고 시나이산 팔부능선까지 올라갔고, 거기서부터 걸어가야 하였다. 산 높이가 해발 2,285m여서 거리가 멀어 캄캄한 새벽에 출발해야 시나이산 정상에서 일출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새벽 불빛이 긴 줄을 잇고 있었다.
시나이산은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 이후부터 이스라엘이 관리하다가 1979년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이곳은 순례지이자 관광지로서 중요한 가치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으로 40일 금식을 2번씩이나 실행한 현장을 가보니 감동적인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산지대로써 퍼석퍼석한 돌멩이 산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풀 한포기 보기가 힘들었다. 그 곳에 살면 금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지형이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집트 노예생활을 하던 고센 땅을 떠나서 두 달 정도 광야를 걸어서 이곳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아무런 먹을거리가 없는 환경을 보고 모두 참담한 심경을 가졌을 것이다. 모세의 말을 믿고 따라왔는데, 환경의 열악한 상태를 보고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극복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바로 거기서, 모세가 두 번이나 40일 금식을 하고나서, 인류 역사를 바꾼 십계명이 탄생하였다. 이로부터 유대교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었다. 왜냐하면 종교의 정의를 ‘창시자, 경전, 의례, 신도’의 형식을 갖춘 공동체로 볼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비로소 말씀을 찾은 것이다. 십계명을 들고 40년간이나 황량한 사막지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고난의 행적이 가슴에 와 닿으면서 짠한 심정이 들었다. 물과 양식과 옷이 거의 없는 황량한 곳을 수십 년 동안 헤매야 하는 것인 실로 큰 고통이었다. 절대신앙 공동체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런 혹독한 시련을 거쳐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불평을 하지 않고 메시아 도래를 기다린 것은 실로 위대한 점이 아닐 수 없었다.
또 2,000년전 예수님의 행적지인 예루살렘을 돌아보았다. 이스라엘의 철저한 신앙 훈련 끝에 하늘부모님께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내셨다. 그러나 정말 아쉽고 억울하게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은 모시지 못했다. 4천년 동안 훈련한 보람이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예루살렘은 세계의 평화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와 반대가 된 까닭에 예루살렘은 갈등, 분열, 전쟁의 도시로 추락하고 말았다. 축복이 잘못되면 무서운 심판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교훈을 우리는 새겨서 반드시 한국을 평화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비무장지대를 평화구역, 평화생태지역으로 만들고, 유엔 사무국을 설치해야 한다. 참된 평화의 기운이 이곳에서부터 솟아나야 한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상대해 베드로를 전도하신 현장이나 골고다 십자가 처형 현장에 가보니 눈물이 절로 나왔다. 통곡의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통곡의 벽을 가보았다. 예수님을 불신한 이스라엘백성이 축복대신에 혹독한 심판을 받았던 것을 증명하는 곳이다. 하늘부모님께서는 로마군대를 시켜서 예루살렘성전을 파괴시키셨다. 로마 군대는 성의 북, 남, 동쪽의 벽을 다 부숴버렸다. 이어서 남아 있던 서쪽의 성벽을 남겼다. 다시는 이스라엘백성이 성전을 재건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서 성 파괴를 멈춘 것이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이전에 심판의 말씀을 하셨다. “성전의 돌들이 하나도 제 자리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태24:2) 그 예언대로 성전은 철저하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무리가 되었다.
고향을 찾아온 이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한맺힌 역사를 생각하면서 벽에서 통곡하며 기도를 했다. 그래서 자연히 ‘통곡의 벽’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을 찾으면서 미래에 반드시 독립국가를 찾아 세울 것을 다짐하였다. 그 꿈이 마침내 1948년에 실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스라엘백성은 연합국을 도와주었고, 승리의 댓가로서 이스라엘국가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천년 동안 거기서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 고향을 빼앗긴 것에 대해 목숨을 건 항거를 시작하였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날마다 분쟁과 갈등과 전쟁의 불씨를 안고 사는 문제의 도시가 되었다.
기독교인들도 찾아와서 눈물의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회고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절대로 잘 모실 것이다.”라고 결심을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2천년 전이나 동일하다. 정작 재림메시아로 강림하신 참부모님께서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먼저 필설로 다 못할 고난을 당하셨다. 무지와 불신의 짙은 그림자가 에덴동산의 아담과 해와로부터 시작하여 노아 시대와 모세 시대를 거쳐서 예수님 출현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탄이 쳐 놓은 먹구름이 지금도 기독교인들과 인류를 감싸고 있다. 우리 축복가정들은 그것을 밀어제쳐야 한다. 참진리를 드러내어야 하고, 참부모님을 만왕의 왕, 평화의 왕으로 높이 세워드려야 한다. 그리고 인류를 축복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목숨을 건 영적투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힘든 과정이지만, 이것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중단없는 전진, 그리고 승리를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이다.
8. 서울 목회와 정치 경험
중동 성지순례 이후로 귀국을 해서 다시 세 번째로 참부모님을 접하게 되었다. 평화대사들이 일성콘도에서 수련을 받고 있었다. 중식 때가 되어 속초시 장사동 횟집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박원근 전 강원교구장이 윤광호 속초교역장과 나를 동석케 해주셔서 참부모님과 겸상하면서 중식을 하게 되었다. 참부모님께서는 드시던 회를 건네주셔서 감동을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촬영도 해주셨다.
2004년 7월 24일, 6년 반 동안의 양양교회 목회를 끝내고 서울 동대문구 전농교회장으로 인사이동이 되었다. 정성을 드리는 기준을 세워가지고 한탄강 낚시를 2005년도 5월말에 갔다. 잉어를 세 마리 낚아서 당시 허양 교구장에게 전화를 보고했더니, 죽이지 말고 살려오라고 했다. 날씨가 더워서 풀잎으로 고기를 감아서 동대문교회로 가지고 갔더니 죽기 직전 단계에서 숨을 벌떡거렸다. 신내동 샘물을 받아와서 고무다라에 넣었더니 되살아났다.
참아버님께서 여수로 가셨다가 귀가시간에 한남동 공관에 들르셨다. 잉어를 가지고 가서 참부모님을 뵈었다. 허양교구장이 “박용만 교회장이 지난밤 철야를 통해 잉어를 낚았습니다.”라고 보고를 드렸다. 마침 국진님 사모님이 출산한지라 “산모에게 약을 해서 먹여라.”고 지시하셨다. 이로써 낚시로써 효도를 하는 기회가 되었다.
당시는 매일 교구별로 한남동 공관에 훈독회를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새벽훈독회가 끝날 시간에 남자 한사람 여자 한사람 선정을 해서 노래를 해보라고 하셨다, 허양교구장은 나를 지정해 노래를 시켰다. 나는 “남산에 올라”라는 노래를 불러올렸더니 어머님께 시키셔서 10만 원짜리 수표 3장을 봉투에 넣어 하사해 주셨다.
2007년 말에는 평화대사들과 세계선교활동을 가게 되었다. “자기가 추첨한 국가를 다녀오라.”고 명령하셔서 아프리카 에리트리아로 갔다. 낯설고 먼 나라로 가기 위해서 세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탔다. 도착해 보니 이슬람 종교장벽이 높아서 기성축복가정인 평화대사 집에서 비밀스럽게 성주식을 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다행히도 이미 일본선교사들이 활동을 잘 하여서 상당한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 시장을 만나서 평화메시지와 피스로드에 관한 설명도 하였다.
또한 이 나라는 6•25 한국 전쟁 참전국가였다. 전쟁의 고통을 함께한 국가라는 점에서 감회가 깊었고, 애정이 갔다.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영어학원이 있었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이 참전용사였다는 말을 듣고 만나러 갔다. 그를 만나보니 전쟁 흔적이라고 하면서 바지를 올리고 다리에 새겨진 선명한 총상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는 전쟁이 남긴 상흔을 반세기 동안 몸에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감탄하면서도 놀랐다. 자기 조국도 아닌 이름도 모르는 한국에 와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목숨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우리는 그를 크게 위로하고 감사했다. 그리고나서 아프리카의 산악지대를 몇 군데 돌면서 심각한 기아현장을 보았다. 배가 고파서 빼빼 마른 아프리카인들의 얼굴을 보면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도와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세계에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류를 식구로 대하는 마음자세가 안 되어 있기에 빈부의 차이가 크다. 참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식량의 평준화가 실현되어야 한다. 배고픔이 먼저 해결되어야 평화를 위한 대화가 가능하다. 빵이 필요한 자들에게는 빵을 주고 나서 함께 평화세계를 향한 대화를 하면서 실질적인 거보를 내디뎌야 한다. 참부모님께서 생선가루(파시 파우더)를 만들어서 기아의 고통에 허덕이는 자들을 살리고자 하셨던 식량평준화 프로젝트를 우리가 실현하여야 할 것이다.
참부모님께서도 “밥이 곧 하늘이다.”고 하셨다. 배고픈 자의 눈에는 온통 먹을 것만 들어온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세계평화가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조직적 체계적 지속적으로 다양한 양식을 저들에게 제공해 줄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고심을 해야 할 것이다.
2008년도에는 참아버님께서 나의 이름을 중심하고 축복을 주신대로 서울 동대문구 을구 평화통일가정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갔다. 가슴 아픈 정치체험을 했다. 갑구에는 박상선 교구장이 출마를 했다. 역시 결과는 미흡했다. 선거 운동 기간에 새벽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는 남다른 고행이었다. 그러나 참부모님이 추진하시는 섭리의 한 부분이기에 절대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어떤 권사는 탕약을 구입하고 끓여 와서 마시라고 하면서 격려와 용기를 주기도 했다. 많은 후보자들이 경제적 빚을 지면서 고군분투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참부모님께 우리 지도자들의 무능력을 드러내었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참부모님은 브라질에 계셨는데 선거결과 보고를 받으시고 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셨다고 하였다.
선거가 끝나고 관련자들을 천정궁으로 부르셔서 갔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심히 죄송하여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들 많이 빚졌구나. 그러나 너희들은 영계세계에서는 초대국회의원이다.”라고 하시면서 위로해 주시고, 우리들이 선거에 출마한 의미를 부여해 주셨다. 고생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여 무겁고 죄송한 마음의 짐이 있었는데, 한꺼번에 쑤욱 내려갔고, 보람을 느꼈다. 하나님의 뜻을 중심한 정치를 통해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상이 현실과는 너무 원거리에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지금부터라고 체계적으로 정치 자질이 있는 자녀를 천일국정치인으로 키워야 할 것이다.
9. 서울 이문교회장 시절
2006년, 참부모님께서 천정궁 입궁대관식 이후로 훈독회를 천정궁에서 실시하셨다. 각 교구별로 매일 순번을 정하여 차례로 동참하였다. 내가 속한 서울북부교구 중심식구가 참여하게 되었다. 마침 참아버님은 여수에 가셨고, 참어머님께서 주관하셨다. 훈독회 종료되고 각 가정별 대표들이 참어머님과 조식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6천가정 대표로 참여하였다. 참어머님과 같이 조식을 나누는 영광스런 시간을 가졌다. 말씀을 나누면서 감동을 받는 기회가 되었다.
2008년 7월 24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교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문교회는 1800가정 정관수 장로가 소유하는 빌딩 2층에 성전을 마련하고 있었다. 장로와 권사님들이 정감있게 잘 대해 주셨다. 나는 참아버님 자서전 보급에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기성 축복식을 예식장을 빌려 실시를 했다.
중심식구들과 같이 참부모님 헬기사건(2008.7.19.)이 발생한 천정궁 밑 경비실 뒷산 사고 현장을 답사해 보니 심각하였다. 그 처참한 현장을 보면, 생존자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헬기가 추락을 하면서 날개가 소나무를 치고 지나갔는데, 딱딱하고 질긴 가지들이 예리한 칼로 자른 듯이 잘려나갔다. 거기에 부딪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잘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헬기는 큰 바위 앞 나무에 멈추어 있었다. 조금만 더 날아가서 헬기가 바위에 부딪쳤다면 십중팔구 폭발했을 것이다. 당연히 생존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헬기는 휴지조각같이 구겨져 있었고, 천우신조로 안착을 잘 했고, 참부모님을 비롯한 승객 모두가 안전하게 구출되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끔직한 사고는 참부모님의 사탄의 마지막 발악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헬기 관련한 내용을 강의안으로 만들어 장소를 빌려서 평화대사를 비롯하여 여러 주민들에게 설명을 했다. 청강한 이들은 듣고 나서 감동을 받았다.
10. 전북 정읍목회 생활
2009년 6월 14일, 문국진 전 재단이사장님의 전국교회 교회 통폐합정책에 의거하여 전북 정읍교회장을 갔다. 그곳은 유종영 회장께서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닦아 놓은 기반이 단단했다. 나는 초종교지도자 교육, 산수원 애국회 동참, 평화대사 교육 등의 활동을 많이 했다. 자서전 430권 보급 완료를 했고, 예식장을 빌려 기성 축복식을 했고, 대식당 연회장을 빌려 남북통일을 위한 강의를 했다.
2011년 9월 12일에는 여수 거문도 해양 천정궁 봉헌식이 참부모님 모시고 거행되었다. 우리 부부도 여기에 동참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진행된 의식은 육지와 해양을 아울러 복귀섭리를 주도해 가시는 기적과 같은 장면이었다. 우리는 참석하여 앉아있기만 해도 힘들었는데, 이런 봉헌식이 있기까지 각종 어려운 난관들을 극복하며 주야로 진두지휘해 오신 참부모님은 얼마나 힘드실까를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송구스러웠고, 또 감사했다.
참부모님 말씀 중에 “축복가정은 경제적 자립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3대 교구를 거치면서 목회를 해야 한다.”는 언급이 있다. 나는 5개교구를 거치면서 목회를 하게 되었으니 말씀을 제대로 지킨 셈이었다. 각 지역교회마다 독특성이 있었다. 목회자이기에 이런 다양한 경험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감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강원도에서 목회를 할 때, 선배가정들이 정년을 하고 집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속초 주택은행에 주택청약부금을 개설해 8년째가 되던 2012년도였다. 정부가 무주택자 주택보급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LH 공사에서 분양을 받게 되었다. 하남시 미사강변도시 20층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 행운이 다가왔다. 그런데 분양가가 3억 5천만 원이나 되어 너무 부담이 되어서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녀들과 의논을 하니 “모처럼 찾아온 기회이니까 어떻게해서든지 집 마련을 하세요.”라고 하였다. 계약을 하고 2억 8천만원은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을 받았다. 다행히 분양을 받은 것이 위치가 좋고 역세권이라 가격이 많이 상승되었다. 새 집이지만 우리 가족이 입주하지 못하고 전세를 주었다. 마침내 올라간 전세가로 자금을 마련해서 은행 대출 빚을 갚았다. 개정된 부동산법에 따라 거주의무가 부담이 되어 정년을 앞두고 매매를 하여 가평으로 이사를 갈 계획을 세웠다.
11. 기독교 목사 상대로 선교활동
참부모님께서 2013년 6월 15일 목포를 금포로 축복하셨다. 나는 바로 그 목포로 인사이동이 되었다. 그동안 주로 A타입 교회 아니면 환경이 열악한 교회로 다니다가 목포교회를 가보니 지하1층에 지상 5층, 건평이 720평이나 되는 대형교회였다. 5층에 목회자 가정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120평이나 되었다. 그 동안 작은 사택 공간에서 살다가 큰 방에 오니까 궁궐 같았다.
전남교구본부에서 목포교회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목회정년 때까지 생애최대 공적을 세우겠다고 성지가 있는 유달산에 올라가 굳게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는 일흥조선과 마스터마린 조선회사가 있었다. 이 두 회사는 참부모님께서 육지와 바다세계를 사탄권에서 하늘편권으로 복귀하시기 위한 섭리의 현장이었다.
“바람과 파도에 뒤집히지 않는 배를 만들라.”고 축복하신 해양기업이 마스터 마린조선회사이다. 그곳을 심방하였다. 반갑게도 과거 양양교역장 후임자의 2세가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했고, 축도를 하고 발전을 기원해주었다.
두 번에 걸쳐 신안비치호텔에서 기성 독신 축복식을 했으며, 특히 목포시 희망전대회 때에는 1300여명이 모였다. 시장 사모와 부시장과 8명의 목포시 의회 의원이 참석을 해서 각 동의 모범가정들에게 시상을 했다. 이를 계기로 고위 공무원들과 친분이 두텁게 쌓아졌다. 대외 활동의 원활함을 위하여 공무원들과의 좋은 관계가 필수적임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우리 가정은 457가정을 축복 완료하여서 종족메시아 선포를 했다. 참부모님께서 설악산 일성콘도에서 “전 축복가정은 종족메시아가 되어라.”고 하신 약속을 지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내가 특별한 몽시를 보게 되었다.
참부모님 양위분이 고향집에 오셨고, 7칸 방과 마당에 벌떼같이 종족들이 모였다. 참부모님께서는 타락한 인류의 구원과 축복식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시고, 우리 부부에게 기도를 시키셨다. 내가 꿈속에서 기도를 심각하게 큰 소리로 했다.
2019년 11월 18일, 4박5일 일정으로 전남 목회자 부부가 캄보디아 서밋 및 축복식에 참여를 했다. 수상과 아프리카 최고지도자들이 참여를 했다. 훈센수상이 참어머님에 대하여 갖는 신뢰와 섭리의 밀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캄보디아도 한 때 공산주의가 점령하여서 많은 국민들이 살해당하는 비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앞으로는 참부모님의 뜻을 갖고서 행복하게 사는 천일국 국가가 되기를 기원하였다.
많은 여행객들이 줄을 잇는 앙코르와트를 방문하면서 수많은 세월을 견디어 온 그 흔적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어서 여행의 연장선으로써 이웃국가 베트남을 가보았다. 거기에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참여를 해서 큰 기적을 만든 생생한 현장이 있었다. 한국 지도자의 능력이 대단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재림메시아가 탄생하신 배경을 갖는 한국인은 세계 어디를 가든지 두각을 드러냄을 확인하였다. 해외에서 실적을 올리는 기업인들이 참부모님께서 창안하신 성약 사상으로 무장하여서 경제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다면, 경제 부흥 및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일석이조의 쾌거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2. 공로패와 천보가정 및 전도활동
2019년에는 19-563호 신종족메시아 430가정 축복완료를 했고, 2020년 10월 10일에는 천보식을 통해 참부모님으로부터 천보패(KR00298호)를 하사받았다. 목포시 신안비치호텔에서 인근에 있는 교회 천보가정들이 참여케 하여 합동으로 천보식을 주관하는 감동적인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사태에 세계 인류의 행동이 멈추어버렸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인간의 삶을 정지시켜버렸다. 그러나 전도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모바일 망을 통해 참부모님의 평화통일운동과 통일원리 말씀을 발송하기 시작했다. 그 수가 1700명을 넘고 있다.
일본인 선교사 두 사람은 미국에서 기성목사를 상대로 선교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추가 모집을 하여서 일본선교사 7명이 한 팀이 되었다. 이들은 168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에게 통일원리와 참부모님의 평화통일운동 영상물을 발송하고 있다. 통일사상과 통일원리 책값을 받고 보내주고 있다. 이들 중에서 27명이 보낸 동영상물을 시청하고 있으며, 시청한 목사들 중에는 “관련서적을 더 보내주세요.”라는 요청을 하는 이도 있다. 어떤 목사는 “보내 주신 영상을 잘 보고 있으니 언제라도 방문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또 어떤 목사는 “재림메시아 강림시에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데, 구름의 의미를 설명해 주세요.”라고 요청하였다.
인류 구원과 부활과 중생운동을 펼쳤던 참부모님의 두익사상이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하고 있다. 목포시 의회 의원21명에게도 매일 통일원리 영상을 보냈다. 두 번이나 시의원을 역임한 의정동우회장 유재길•김정복 부부와 김광용•조효심 일화대리점 가정을 축복가정으로 만들었다. 시의원들에게 매일 통일원리 영상을 보내고 있는데, 확인한 결과 날마다 18명이 통일원리 말씀을 시청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교회식구들에게 간증하면서 “이제 기독교인이 전도되는 시대가 도래하였으니 자존심을 내려놓고 용기를 가지고 기독교인과 종족과 지인들에게 통일원리 말씀을 전하세요. 참부모님의 위상과 축복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합니다!”라고 독려했다. 매일 자서전 보급활동과 통일원리 확산운동을 통해 교회기반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할 것을 식구들에게 당부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바다를 자주 접하여 낚시를 잘했다. 그런 경험을 살려서 여수에 갈치가 나올 때면 바다로 향했다. 낚시배를 타고 3시간 정도 나가서 칼치어군이 형성되는 곳에 도착하여 낚시에 몰입하였다. 선장이 밤새도록 서치라이트를 비추면 칼치, 삼치, 고등어 등이 몰려든다. 낚시를 던지기만 하면 물고기를 잡을 정도로 많다. 어느 날은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낚시를 해서 171마리의 고기를 낚아 와서 식구와 평화대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자 식구들은 한결같이 “우리 목사님은 참부모님의 해양섭리에 실천궁행하는 분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밤잠을 설치면서 고기를 잡은 피로가 사라졌다. “바다의 물고기를 잡아서 미래 인류의 식량위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 실현가능함을 확인하였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에는 매월 평화대사 협의회 교육 및 회의, 산수원 애국회 등산 및 문화탐방, 매주 목포시 경로훈독대학을 운영하여 통일원리와 승공교육 교양강좌를 했다. 이런 활동은 전도를 위한 기반이 되었다. 인간은 부단히 뭔가를 배우고 새로운 뭔가를 창조하여 기쁨을 누리는 존재이다. 교육을 시키고 받는 관계는 인간에게 날마다 필요하다. 인간은 배우는 존재이면서 또한 교육을 시키는 주체가 된다.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항상 교차된다. 배우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가르치면서 더 자극적인 기쁨을 얻는다. 목회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참부모님의 생애와 사상을 가르친 것은 영원한 자랑이고 실적이 될 것이다.
70세 정년 규정에 의하여 2021년 3월초에 정년 퇴임을 했다. 어디에 머물까를 고심하다가 장차 천일국의 수도가 될 천원단지 근방을 물색하였다. 마침 경기도 가평군 상면 축령로 70번길 179~27에 대지 200평에 건평 40평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찾아가 보니 미국교포가 계약을 했다가 계약해지가 된 단독주택이었다. 저렴하게 구입을 해서 3월 중순에 입주를 하게 되었다. 자녀는 1남 2녀로서 축복을 받아 수도권에서 살고 있다. 주말이면 삼대(三代) 가족이 모여서 함께 행복한 천일국 축복가정의 멋을 누린다. 보람으로 가득찬 목회를 하였고, 자녀들도 잘 되었고, 정년과 함께 주택도 구하게 되어서 진실로 하늘 앞에 감사와 영광을 날마다 올린다. 참부모님을 만난 이후로 달라진 내 인생의 노정은 더 할 수 없는 행복의 연속이었다.
6월 13일에는 정년퇴임 공로패를 참부모님으로부터 하사를 받았고, 특별 기념품으로 행운의 황금 열쇠 10돈을 받았다. 지금은 부부가 풍광이 좋은 전원주택에서 소확행(小確幸)의 행복을 체험하고 있다. 주말이나 휴가 때면 삼대가 참행복을 공유한다. 앞으로 건강관리를 잘하며, 여생을 천보가정 43가정 실세화 성공을 위해 전력투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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