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치매) 병
남 상 기
2개월에 한 번 모임을 갖는 고교동기회의 모임을 갖는 날 친한 동기 한 명이 전화가 왔다. 거제전철역까지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간판이 보이지 않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모임을 갖는데 찾지 못한다고 하니 나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자세히 알려주고 20~30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했다.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나는 내심 이 친구가 알츠하이머가 온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그는 학창 시절 매우 영리한 친구였다. 독서도 좋아했다. 산을 좋아해서 나와 산행도 많이 한 사이라 친한 관계였다. 지금은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동기 중 이 몹쓸 병으로 작고했거나 고통받고 있는 친구가 생겨나고 있다.
인기배우 윤정희 씨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란 사실이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75)는 투병 중인 아내 윤정희 씨에 대한 ‘방치’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윤정희 씨의 성년 후견인後見人 자격을 놓고 백 씨 측과 윤 씨의 친정 동생들이 프랑스에서 법적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프랑스 법원은 결국 백 씨와 백 씨 딸 측에 손을 들어 주었다는 소식이다. 백건우 씨는 지난달 귀국하여 대전예술의 전당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오후 5시에 시작된 연주회는 독일 작곡가 슈만(1810~1856) 작품들로 채워졌다. 슈만은 자기 스승의 딸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졌다. 스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송까지 벌인 끝에 1840년 둘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 14년 뒤 슈만은 정신이상으로 라인강에 투신했고 결국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대 최고의 여성피아니스트였던 부인 클라라는 그 뒤에도 연주활동을 계속하면서 고독한 삶을 이어갔다. 백건우 씨는 마지막 곡 연주를 마친 뒤에도 한참이나 악보를 응시했다. 슈만부부의 비극적 운명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삶이 겹쳐지는 것 같은 감회의 순간을 느꼈을 것 같다. 이번 그의 연주는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한 윤정희 씨의 ‘알츠하이머 방치 논란’을 잠재우고 변함없는 사랑을 전하려는 음악을 통한 무언의 연주가 아닌가 싶다.
오래전에 일본 오사카大阪에 거주하고 있는 고종형님이 알츠하이머병을 얻어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고종 사이지만 형님과 나는 남달리 친했다. 사업(토건업)도 잘하시고 생활도 윤택했다. 골프 취미가 나와 같아 형님은 종종 부산으로 골프여행을 오셨고 나도 자주 오사카 명문 골프장에 가서 여러 번 같이 플레이를 했다. 머리도 명석했고 일본 역사에 정통했다. 골프실력은 공식핸디가 ‘HD-3’이었으니 프로에 가까웠다. 그런 형님이 오랜만에 방문한 나를 보자 반갑다고 현관에서 포옹까지 하며 나의 방문을 반겼다. 그런데 몇 분 후 2층에 올라갔다 오시더니 ‘부산 동생 아니냐, 동생이 언제 왔느냐?’ 하면서 다시 포옹했다. 그때만 해도 알츠하이머 초기였다. 집 안에 걸려 있는 거울을 전부 제거한 상태였다. 거울을 보면 갑자기 흥분하여 병이 발작한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그 후 2년이 지나 두 번째 병문안을 갔을 때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가족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오직 형수 한 사람만 알아보는 상태였다. 오사카 외각에 위치한 알츠하이머 전문병원에 입원해 침대에 수갑을 채워놓고 있는 상태였다. 일어나서 남을 해치는 상황이라 병원 측에서 수갑을 채웠다고 했다. 나이 65세에 사업 잘하고 명석하고 골프도 싱글인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알츠하이머란 병은 우리나라에서는 ‘치매癡呆’병으로 통한다. 옛날 시골에서는 ‘노망老忘’이라고도 했다. ‘치매’란 뜻은 ‘바보, 천치, 미치광이’란 뜻이다. 병 중에 가장 고약한 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인지력이 떨어져 부모 형제도 알아보지 못하고 친구 동료도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한평생을 같이 살아온 배우자도 알지 못하는 병이다. 남편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들딸을 오빠 언니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환자에게 ‘치매’라는 병명은 너무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표현의 병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상에 듣기 좋은 병명病名이 있을까마는 ‘치매’라는 병명은 비인격적인 최악의 병명인 것 같다. 석.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인기교수로 퇴직한 사람, 시인, 소설가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작가, 명판사, 명변호사, 명검찰로 명망이 높았던 법조계 인물들이 만년에 바보 천치라는 뜻의 ‘치매’라는 병으로 세상을 하직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치매癡呆’라는 병명이 환자에게 너무도 혹독하고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명칭이라 하여 십여 년 전에 이 병명을 없애고 ‘인지병認知病’으로 병명을 바꾸었다. 사물을 인지하지 못하는 병이라는 뜻이다. 일어사전에도 ‘치매’를 빼고 ‘인지병’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우리도 이 병명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알츠하이머병은 우리나라 65세 인구 800여만 명 중 10%에 해당하는 80여 만 명이 투병 중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3만 명이 이상이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일본에 이 치매병이 많은 원인 중 하나는 1989년 소화왕昭和王 사망 후 지금까지 30년 이상 불경기로 수많은 국민이 직장을 잃고 스트레스를 겪어온 것이 원인이라는 의학계의 통계자료다. 70~80대 고령층 뿐만 아니고 30~40대의 젊은 장년층에도 치매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스트레스 원인이 확실한 것 같기도 하다. 고교, 대학 동기들이 80을 넘기다 보니 드물기는 하지만 치매에 걸리는 친구가 발생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가야 할 저승길이지만 치매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애절한 소망을 모두들 가지고 있다. 이 병에 걸리면 투병하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큰 고통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치매의 가장 큰 특징은 병의 초기 때부터 방향 감각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매달 만나는 동기회 모임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기도 하고 평생을 살아온 집 현관문을 나선 후 행방불명된 사건이 간혹 매스콤에 오르기도 한다. 치매의 역사는 서양에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앞서 우리나라에서 이미 이 병이 만연해 있었던 것 같다. 고려 중엽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 시인의 “영망詠忘: 잊혀지는 것” 시를 읽어보면서 치매 걸린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인생인가를 새삼 느껴본다.
< 영망(詠忘, 잊혀지는 것)> -백운거사白雲居士이규보李奎報, 1168~1241-
세인계망아(世人皆忘我, 세상사람 모두가 나를 잊어버려)
사해일신고(四海一身孤, 천지에 한몸 고독하다)
기유세망아 (豈唯世忘我, 세상만이 나를 잊었겠나)
형제역망여 (兄弟亦忘予, 형제마저 나를 잊었다)
금일부망아 (今日婦忘我, 오늘은 부인이 나를 잊었으니)
명일오망오 (明日吾忘吾, 내일이면 내가 나를 잊을 차례다)
각후천지내 (却後天地內, 그 뒤로는 하늘과 땅 사이에)
료무친여소 (了無親與疎, 가까운 이도 먼 이도 완전히 없어진다)
병에는 넓게 보면 두 종류가 존재한다고 한다. 코로나, 독감, 사스, 메르스 같은 외부의 바이러스의 침범으로 발생하는 병이 있고 암, 혈압, 당뇨, 치매와 같은 인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병이 있다. 외부에서 침투하는 바이러스병은 예방주의나 예방접종으로 막을 수 있으나 인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병은 잘 알 수도 없고 초기에는 발견이 어렵다. 인체 내에 병의 인자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하며 몸이 쇠약해지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그 병의 인자를 극복하거나 제압할 수 있는 항체가 없거나 약해지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한다. 특히 치매인 경우는 평소 독서를 많이 하거나 많이 기억하거나 하여 뇌를 텅 비워놓지 말고 뇌에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득 채우면 예방할 수 있다고들 하고 있다. 직업으로서는 뇌 활동을 많이 하는 학자, 작가들이나 지식인들이 치매 걸리는 확률이 적다고 한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안 받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앞서 말한 동기생 이야기나 고종형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한 사람은 가정사(자식) 문제로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아온 경우이고 또 한 분은 노년에 사업 실패로 무척 큰 스트레스를 받아온 경우이다. 치매의 요인은 아직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원인분석을 해보면 스트레스 요인이 많다고 한다. 남은 인생은 아름답고 즐겁고 스트레스 안 받는 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세상사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는 것 같다. 성현들의 명언을 암송暗誦해 보면서 생각을 바꿔보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평소 나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지족가락 무탐즉우”(知足可樂 務貪則憂:만족할줄알면 가히즐겁고 탐욕에 힘쓰면 근심이 된다). “인무백세인 왕작천년계”(人無百歲人 枉作千年計: 사람이 백년도 못살면서 부질없이 천년살 궁리를 하고 있다) “황금백만량 불여일신건”(黃金百萬兩 不如一身健: 황금이 백만량 있어도 일신의 건강보다 못하다).
남 상 기
.부산대 법대졸.JAL이사.금정RC회장.총재지역대표
.로타리논술대상수상.로타리주보등 500여편 칼럼기고
.저서:남상기역사칼럼 1.2.3집.일상의 작은보람.
파도를 넘어서 등
왕관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에드워드 8세의 비극
남상기
1936년 1월 20일 영국왕 조지 5세(1865~1936)의 서거로 장남인 에드워드 8세(1894~1972,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큰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왕위를 계승한지 불과 11개월도 채 되기 전인 1936년 12월 11일 미국인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왕위를 버렸다. 당시 영국은 왕실의 법에 따라 국왕은 이혼녀와 결혼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심프슨 부인은 격에 맞지 않는 평민인 데다 한 번 이혼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재혼하여 유부녀 상태였다. 결국 에드워드와 결혼을 하려면 한 번 더 이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왕위는 영국 왕실의 왕위 서열에 따라 에드워드 8세의 동생인 조지 6세(에리자베스 2세 여왕 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워드는 즉위한 지 11개월 만인 1936년 12월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렇게 그의 심경을 라디오 연설에서 피력했다. “무거운 책임을 맡는 일도, 왕으로서 원하는 바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일도,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그의 연설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영국 왕실은 이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37년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영국 왕실에서는 한 사람도 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결혼은 세계인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켜 “세기의 사랑”으로 불리었다. 이혼녀와 사랑을 위하여 왕관을 버렸으니 세계인의 관심거리가 될 만도 했다. 에드워드 8세는 퇴위 후 ‘윈저 공작(Duke of Windsor)’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심프슨 부인은 어떤 작위도 받지 못했다.
왕실은 끝까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8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독일에 온정적이었고 히틀러를 높게 평가했다. ‘독일과 친선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왕위에서 물러난 뒤 심프슨 부인과 함께 1937년 독일에 가서 히틀러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영국 왕실은 윈저공이 나치와 가깝게 지내는 걸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2차 대전이 터지자, 영국 정부는 윈저공을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서인도제도의 바하마 총독으로 임명했다. 윈저공은 전후에도 여러 나라를 떠돌다 1972년 프랑스에서 타계했다. 그의 시신은 영국 왕실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심프슨 부인도 훗날 그의 곁에 묻혔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 영국의 언론들은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에 관해서는 일절 침묵했다. “세기의 사랑”이었으니 행복한 결혼생활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세계인들은 믿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심프슨이 금세 권태를 느껴 에드워드를 잔인할 정도로 멸시하고 구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crown’은 ‘왕관’ 또는 ‘왕위에 앉히다’라는 명사나 동사로 쓰인다. 그런데 ‘crowning’은 왕관, 왕위와 상관없는 ‘더없는’, ‘최악의’이라는 뜻의 형용사다. 외신들은 ‘더없는 굴욕(crowning humiliation)’이라는 표현으로 그의 가련했던 결혼 생활을 전했다. 심프슨의 전기(傳記)에 따르면 그녀는 날이 갈수록 그가 따분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왕위까지 버린 그와 차마 이혼을 하지는 못했다고도 했다. 그 대신 분풀이라도 하듯 엄청난 심적 고통을 가했다. 심프슨이 사랑했던 남자는 따로 있었다. 그 남자가 다른 여인과 결혼하자 무모하고 부적절한 연애에 자신을 내던졌다. 스무 살이나 어린, 그것도 별난 동성애자로 악명 높은 남자와 놀아났다. 저속하고 밉살스러운 여자로 바뀌어갔다.
“죽을 때까지 위대한 로맨스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문제는 에드워드에게도 있었다. 수동적이고 심약한 그는 스스로 비하하는 성적 도착을 즐겼다. 걸핏하면 눈물을 보여 심프슨의 가학적 성격을 자극했다. 식도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그는 심프슨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병실을 찾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1972년 간호사 품에 안겨 처량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78세였다. 그 뒤 심프슨은 치매에 걸려 고생하다가 1986년 90세로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끔찍한 선택을 해서 길을 잘못 들었고 평생 그 대가를 치르며 살아야 했던 불쌍한 전직 왕이었다. ‘세기의 사랑’이 ‘세기의 슬픔과 비극’으로 끝났다. 사랑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아름다운 종말’이 더 중요하다는 ‘사랑과 결혼의 교훈’을 후세에 남겨 주고 있다.
첫댓글 알처 하이머 (치매)병과 " 왕관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에드워드 8세의 비극"
두 편 감명깊게 읽고 갑니다.
늙지도 않은 사람들도 치매에 걸렸다고 하니, 나이 드신 분 보다 더욱더 슬픈 일이지요.
몹쓸 병은 온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저의 50년 지귀 오빠 같은 진구도 5년간 병원에 누워만 있고 코로 음식만 연명하고 있답니다.
마음 아프고 슬픈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병이란 예고가 없으니 걱정 스럽기만 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