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여성성, 통합의 리얼리티에 의한 서정 미학의 완성
권혁모(시조시인, 한국문인협회 이사)
1
가을빛이 고운 어느 날 박병래 시인의 다감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미 출간한 시집 『그래 기적이야』와 『바람의 편지』에 이은 세 번째 시집 『대추를 두 개 품었다』를 펴낸다는 것이다.
필자의 고향인 안동에서 함께 문학 활동을 하는 동안의 다부진 모습에서, 그가 살아온 질곡의 시간을 조금은 읽어낼 수 있는 터였다. 박시인은 고향인 원주에서 서울로 갔고 다시 안동 권씨 집안의 작은 종부의 노릇을 하기까지, 수많은 세월의 모퉁이마다 시詩가 아닌 것이 없었음을 연역적으로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간 경주대학교의 사회교육원에서 문예 창작 수업을 하였고, 《문예사조》에서 「그리움은 강물처럼」으로 신인상을 수상하여 문단에 나왔다. 이어 경상북도 여성문학상과 《문예사조》의 문학상 시 부문 본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문인협회를 비롯하여 그가 활동하는 곳이 참 많다. 반백 년 역사를 이은 안동문인협회의 회장을 거뜬히 수행할 수 있는 문학적 에너지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박경리 선생의 원주가 그에게 겹쳐 보인다.
이번에 출간하는 시집 『대추 두 개를 품었다』는 모두 79편의 작품으로 이를 다섯 부의 갈래로 나누었다. 그의 작품의 큰 문은 먼저 삶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리움’이었으며 한없는 ‘기다림’이었다. 살다 간 흔적이 남긴 ‘추억’이라든가, 삶의 전부라 하여도 될 뜨거운 ‘기도’가 그의 시의 중원中原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페미니즘을 넘어 강한 여성성이 돋보인다. 그 여성성의 따듯함으로 하여 탄생과 사랑과 그리움… 이런 것들이 시의 소재가 되며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갈수록 합리성에 근거한 페미니즘으로 치닫고 있으며, 그래서 문학의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 문학의 첫 번째 갈래인 시에서도 단순한 정감의 발로가 아닌, 시인이 경험한 사유思惟를 고도의 언어 예술로 표현하고자 한다. 엘리엇T.S.Eliot이 “시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도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라고 하였다면, 결국 시는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감정’과 ‘개성’으로부터의 탈피에 방점이 찍힐 것이다.
이에 반하여 워어즈워드W.Wordworth는 “시는 넘치는 정감의 자유로운 분출”이라고 하였으니, 엘리엇보다 워어즈워드의 시적 한계가 훨씬 더 확장되고 있다. 즉 ‘감정’이라는 테제These를 두고 보았을 때 엘리엇과 워어즈워드의 안티테제Antithese는 뫼비우스 띠의 안과 밖을 형성하는 하나의 작은 부분이 되며, 결국 하나의 완전을 위한 진테제Synthese를 얻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현대시의 매력은 자칫 전자 쪽이라 할 수 있겠지만, 주체할 수 없는 정감을 독자와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후자 쪽이 박 시인의 작품 경향성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시가 추구하는 궁극은 시인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시적 상상력의 공유가 독자의 몫이라면 앞의 두 안티테제는 논지의 요소가 아닐 것이다.
2
파도가 때렸고
바람이 달랬다
구르고 싶지 않아도
너는 마냥
나를 갖고 놀며
몸살로 아프게 했다
점점이 박힌 옹이가
반질거리자
바람이 햇살과 화해하며
나를 안아 품었다
- 「몽돌」 전문
‘몽돌’은 바닷가 또는 계곡의 상류에서 볼 수 있는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한 돌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몽돌을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상이나 편안한 심리 상태로 본다면 좋은 의미일 수 있다.
박병래 시인의 「몽돌」은 이순을 넘은 여기까지 살아오며, 오늘이라는 존재의 물가에 내려놓았던 빛바랜 추억을 아름다운 몽돌의 형상화로 반전시켰다.
그동안 파도가 얼마나 때렸을까? 그리고 바람은 얼마나 달랬을까? “구르고 싶지 않아도 너는 마냥 / 나를 갖고 놀며 / 몸살로 아프게”라고 했으니, 여기서 ‘너’라고 하는 객관적 상관물과 ‘나’라고 하는 존재의 유형물은 둘이지만 둘이 아닌, 결국 하나로 만나고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화자話者인 ‘나’라고 하는 가시적 존재와 ‘너’라고 하는 미시적 존재를 다 불러놓고 결국은 ‘나’를 확인하게 하는 구조화가 돋보인다.
“점점이 박힌 옹이가” 반질거리는 시각적 이미지는 결국 화자의 자신으로 풍자諷刺 되었고, “바람이 햇살과 화해하며 / 나를 안아 품었다”는 인고의 세월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우회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가는 세월 붙잡지는 못했다
온기의 소중함도 잊은 지 오래다
서릿발 덮어쓰고
나그네 올려다볼 줄 더욱 몰랐다
흔들리는 마음 따라
빗질하던 사연 품은
강아지풀 한 포기
너 가는 길
나 또한 가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술 취한 듯 어지러운 세상
그리고 쓸쓸한 삶을.
- 「강아지풀」 전문
흔히 여름날 길가에서 만나는 강아지풀은 강아지 꼬리 모양의 연한 녹색 또는 자주색의 꽃이 피며 자란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어렸을 적 기다란 꽃을 따서 주먹 쥔 손 위에 올려두고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면 강아지처럼 이동한다. 볏과의 한해살이풀로 씨앗을 품는 자루가 있는데 이의 움직임을 화자의 삶에 중첩시키고 있다.
어린 시절 강아풀의 씨앗이 주먹 위에서 움직이듯 “가는 세월 붙잡지는 못했다”며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듯 황황히 가버린 세월은 ”온기의 소중함도 잊은 지 오래“였음을 고백하며 ‘삶이란 다 그런 것 아니었느냐?’ 이내 긍정 쪽으로 기운다.
서릿발을 덮어쓴 강아지풀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화자의 아픔이 묻어 있기도 하다. “흔들리는 마음”이었으며 “빗질하던 사연 품은” 것은 강아지풀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라는 풀이었기에 ‘너’라고 하는 길과 ‘나’라고 하는 길을 자연스러운 만남 쪽으로 연결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릿발 가슴에 담고 살아온 한 여인으로, 그리고 한 시인의 가슴으로 “술 취한 듯 어지러운 세상”과 “쓸쓸한 삶”의 의미를 어루만지고 있다.
가슴 적시며 휘파람을 분다
호수를 유영하다 하늘로 오른다
별 무리 잠든 밤 거울을 보다
놀라 뒤로 물러선다
누구인가 꽃도 잎도 아닌 저 여인은
속울음 감추고 돌아서는 가을 끝자락
- 「자화상」 전문
누가 자신의 모습을 이토록 그려낼 수 있을까? 자신의 모습을 연필로 스케치하고 묽게 갠 먹이나 수채를 그위에 한 겹 칠한 인물 담채화가 이토록 눈이 부실까? 박 시인의 「자화상」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때 가슴 적시며 휘파람을 불었고, 때로는 호수를 유영하다 하늘로 오르는 꿈 많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밤이면 자신의 자신조차 놀라는 모습이었다. “꽃도 잎도 아닌 저 여인”의 정체를 “누구인가”라고 물었지만, 앞에서 “별 무리 잠든 밤 거울을 보다”라고 하는 개연성으로 보아 바로 자신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 행의 “속울음 감추고 돌아서는 가을 끝자락”은 또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인가? 그렇지만 ‘속울음’을 진정시키고 돌아서는 가을 끝자락의 위대함에 고개 숙이게 한다. 「자화상」을 보는 인생 여정은 벌써 가을 끝자락에 닿아 애상에 젖는지 모른다. 여섯 행의 어느 부분도 가감 없이 완결된 서정시의 멋과 향을 만나게 한다.
여자는 여자였다
떠나신 흔적 지우려
반닫이 장을 여는 순간
곰팡이의 그림 한 폭이 나왔다
들여다보는 순간 곱다
얼굴들이 모여 든다
아까워 또 아까워
고이 모셔 놓았는지
아무도 몰랐던
당신의 무명 저고리는
당신의 가보였다
입은 걸 못 본 당신의 옷은
세월 속에
한 폭의 그림만 남겨 놓고
하르르 바람 따라 가버렸다
- 「무명저고리」 전문
「무명저고리」의 2인칭 ‘당신’은 화자의 어머니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신’이 1인칭인 ‘나’의 모습으로 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자의 입장에서 본 당신은 분명 “여자는 여자였다”로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를 풀어간다.
어머니가 남긴 옷장을 여는 순간의 곰팡이 냄새와 곱게 간직된 옷이 이승 끝자락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 아까워서 고이 간직해 둔 당신의 가보 무명저고리는, 옷이라는 가치를 넘어 어머니의 마음 세계의 화신으로 비추어 지고 있다.
아껴둔 옷이기에 곰팡이가 그린 한 폭 그림만 남겨두고 바람결로 가버린 당신, 어쩌면 화자도 이처럼 한 여자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묵시적인 동의를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혼자서 갇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섬
물소리 새소리
웃음소리도
분 자국 고운 얼굴도
팔랑거리는
연분홍 치맛단도
뜨거워진 마음도
서서히 꺼져가는
생의 갈림길 효도원 10호 병실
- 「병실에서」 전문
대상은 아마도 어머니였을지, 화자 역시 그 어머니 몸속에 갇혀 있다가 나왔다. 이 세상에 소풍(천상병의) 나와서 “분 자국 고운 얼굴”로, “연분홍 치맛단”으로 그리고 “뜨거워진 마음”으로 살다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섬”에 “혼자서 갇혀 있다”하였으니 그것이 삶의 순리인가 보다.
이제 마지막 목숨을 내려두고 갈 곳, “효도원 10호 병실”은 그대만이 가는 길이 아니라, 누구든 필시 들렸다 가는 길이기에 착잡하게 다가온다.
짧은 한 편이지만 함께 공유해야 하는 묘한 감정이 현대시의 난해성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즉 ‘눈으로 읽지 말고 손으로 읽어라’이기 전에 ‘가슴으로 읽기’를 바라고 있으며, 작품에 쓰인 시어의 서로 다른 이미지끼리 중첩과 산란으로 형성된 아포리즘Aphorism이 공감을 더하게 한다.
이른 새벽 영상 속에서 웃는 도윤이는
천사 같은 왕자님이다
“함미다. 도윤아!”를 부르며
새벽 먼동은
그렇게 창가에 스치며 문을 연다
보고 싶을 때 언제나 볼 수 있어도
궁금증은 끝이 없고
뽀얀 피부 커다란 눈망울 방긋 웃는 얼굴은
보상 안 되는 선물이었지
바람만치 가벼운 너를 유모차에 올려
그래 오늘을 밀고 간다
팔랑이는 나뭇잎이 신기한지
오물거리는 입 모양이
곱게 물든 단풍잎보다 더 예쁘다
어쩌랴 이 손자의 사랑을
- 「도윤이의 하루」 전문
살아온 날 이만한 즈음이면 누군들 손자 손녀 없을까만, “영상 속에서 웃는 도윤이는” 그대의 “천사 같은 왕자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손자이기에 시어詩語가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세사世事에 부대끼며 때로는 성난 모습이거나 찌푸린 상처를 안고 살아도, 사랑하는 내 아들딸의 또 아들딸을 만날 때면 모두 천사가 된지 않을까?
“눈망울 방긋 웃는 얼굴”, “바람만치 가벼운 너를 유모차에 올려” “오늘을 밀고 간다”에서, 도윤이를 유모차에 올려 오늘을 밀고 가는 화자의 행복이 부럽게 하고 있다. “팔랑이는 나뭇잎이 신기한지 / 오물거리는 입 모양이 / 곱게 물든 단풍잎보다 더 예쁘다”는 「도윤이의 하루」는 결국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진솔한 이야기였기에 예쁜 사랑의 메아리로 들려온다.
잘 익은 감을 따서 망태기에 담으며
이건 누구 줄까
경산에 있는 우주를 줄까
호명에 있는 도윤이를 줄까
치마폭에 던진 대추를 품어
사십 년을 기다려온 두 손주를 얻었다
코로나가 휩쓸고 간 산고의 고통을
혼자 겪어야 했고
혼자서 참는 소리
높이 떠 있는 벽을 타고 들려오듯
가슴만 둥둥거린다
영상 속 손주의
꼬물거리는 미소에 가슴이 먹먹하다
어쩜 이리도 닮았을까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은 있을까
웃음이 난다
저 깊게 팬 볼우물은 또 어쩌라.
- 「대추 두 개를 품었다」 전문
「대추 두 개를 품었다」는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이다. “잘 익은 감을 따서 / 망태기에 담으며 이건 누구 줄까”하고 화두를 꺼내는 마음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얼마나 행복하며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경산에 있는 우주”와 “호명에 있는 도윤이”는 사랑하는 두 딸의 ‘내리사랑’이기에 말이다.
이런 사랑의 시작은, 화자의 결혼식 날 폐백에서 받은 대추를 품어 온 사십 년 기다림의 인연으로 얻은 것이라 하였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무수한 사람들을 불가에서는 ‘인연’이라 한다. ‘겁’이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을 일컫는데, 2천 겁을 지나야 사람끼리 하루 동안 함께 지날 수 있으며, 억 겁의 세월이 지나야 평생을 함께 사는 인연을 만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화자가 우주와 도윤이를 만난 인연은 40년이 아니라, 억 겁의 세월부터 시작되어 온 것. 그래서 영상 속 손주들을 보면서 “어쩜 이리도 닮았을까 /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은 있을까”를 생각하며 신기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손주의 깊게 팬 볼우물”은 다함없는 귀여움이었기에 할머니는 어쩔 줄 모르니, 대추 두 개를 품은 인因과 연緣이 예사이지 않는 정감이게 한다.
한 움큼의
사랑을 쥐고 울던 날
꽃송이처럼 화사하게만
살아갈 줄 알았던 삶이
장작더미 불꽃처럼
정열을 토하며 피다가
고요히
사그라지는 재처럼
바람 따라 가버리는 것을
- 「불꽃처럼」 전문
「불꽃처럼」에서 보이는 ‘불꽃’이라는 관념은 참 다양하다. “한 움큼의 사랑”도 불꽃이었고, 기대했던 “삶”도, “정열”도, “사그라지는 재”도 모두 불꽃이라면, 이 세상 존재의 그 모든 ‘있음’이 다 불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자는 지금 “꽃송이처럼 화사하게만 / 살아갈 줄 알았던 삶이” 불꽃으로 피다가 사라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삶이라는 톱니바퀴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며 바람 따라 가버리는 것이라 한다.
불꽃끼리의 인과因果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동안, 찰나의 불꽃처럼 삶을 영위하는 모습이 허무하게 비추어지기도 한다. 순간이라는 점들이 모인 긴 세월의 불꽃, 행방을 모르는 삶의 질곡한 여정이 결국 ‘허무’라는 화두에 깊이 잠기게 한다.
서재를 정리하다
납작하게
생을 포로 말린 은행잎이
스스로를
달래며 걸어 나온다
책갈피에 끼워 놓은
그날을 잊어버린 채
숨 막히는 순간을 참았다
촘촘한 글밭 속에서
생을 말리며
숨어 지낸 몇 해
더 이상 간질거리는 것 참지 못해
빛을 보며 달려온
너를 바람과 함께 보냈다.
- 「추억을 꺼내어 본다」 전문
「추억을 꺼내어 본다」는 ‘은행잎’이라는 무생물을 생물로, 그리고 비정물非情物을 유정물有情物로 합성한 활유법을 통하여 자신의 추억을 반추해 내고 있다.
작품 들머리의 “생을 포로 말린 은행잎”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포脯는 포육脯肉의 준말로 고기를 얇게 떠서 양념하여 말린 것을 뜻한다. 화자는 여기서 ‘생生=포=은행잎’이라 하였으니, ‘생生’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포’와 ‘은행잎’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반전하여 ‘은행잎’의 외연外延을 확장하고 있다.
그 은행잎이 “스스로를 / 달래며 걸어 나온다”에서, 은행잎이라는 사물의 한 모퉁이나 특징을 통하여 전체(시인 자신의)를 대신하려는 대유법代喩法을 차용하였는데, 이는 다시 생명 불어넣기와 인격 이입移入으로 시적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작품의 첫 연에서 부터 은행잎은 화자의 분신이었기에, 화자는 그 속으로 치환되어 시적 긴장감을 더하게 한다.
둘째 연은 추억에 대한 보랏빛 기억의 망각이거나 아픔으로 첫 연에 대한 이유이다. 그리고 마지막 연은 환희의 대반전이다. 책갈피 속에 깊이 숨어 있다 눈앞에 다가선 은행잎의 환생을 다시 만나며, 추회追懷에 젖는 모습이 화자 일생의 풍경화이게 한다.
손끝보다 더 예민한 저 흙덩이
얼마나 품으며 다독여야
은은한 눈빛으로 내게 닿을까
보듬어 빚어내고
말을 하지 않아도
발걸음 소리 들으며
청아한 빛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을까
밟히고 뭉개진
찰진 몸뚱어리
뜨거움에, 뜨거움에 화를 녹이곤
헤매던 길 제쳐두고
엷은 미소로 다가선
화신의 천사 백자여.
- 「백자白瓷」 전문
백자를 앞에 두고 아름다운 완상玩賞에 사로잡혀 못내 부러워하는, 시인의 소소한 눈길이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백자’의 정체는 흙을 마음껏 주무르며 탄생되는 도공陶工의 혼이 담긴 분신인데 비하여, 박병래 시인의 백자는 자신이 창조한 또 하나의 분신이기에 곁에 두고 살아가려는 모습을 잔잔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 흙덩이 / 얼마나 품으며 다독여야 / 은은한 눈빛으로 내게 닿을까”하는 지고한 사랑의 기다림, 이 가시적인 관계 뒤에 숨은 본질은 결국 “당신”이라고 하는 모든 대상을 환기하려는 다짐이 아닐까. 그래서 늘 지고至高의 당신 앞에 서서 화禍를 녹이며, “엷은 미소(신라의 미소)”로 다가서는 은근의 미학을 조심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저녁 답에 마을길을 나선다
골목 끝에서
삐걱 소리를 내며 삼삼오오 모여든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의
왈츠가 끝난 노을 속
팔각정에 모여든 그들은
주머니 속 챙겨온 것들을 내려놓는다
이건 손주의 사랑 알사탕
이건 작은 며느리의 사랑 무지개떡
둘째가 막차로 보내온 맥주
자랑은 하늘에 닿았는데
마루 끝을 본다
소형차에서 폐차 위기를 맞은 것까지
나란히 줄을 서고
그것마저도 없는 돌미댁
두 개의 지팡이가
가을 풍경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 「할머니와 유모차 2」 전문
이 시대의 할머니들은 유모차 없이는 살 수 없다. 아기들이 사용하던 유모차는 그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할머니의 소중한 이동 수단으로 용도가 바뀐다. 그래 “삐걱 소릴 내며 삼삼오오 모여드는” 느티나무 그늘 팔각정, “주머니 속 챙겨온 것들을” 차례로 내려놓는 황혼의 모습, 이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고, 쓸쓸한 모습을 또 어디서 만나 볼 수 있으랴!
모인 할머니들의 삶도 황혼이었고 배경도 황혼이었으니 밀레의 <만종>이라도 되는 걸까? 알사탕과 무지게떡 그리고 맥주를 내려놓는 이들의 행복한 자랑 뒤에 가려져 있는 건 또 무엇이던가? 소형차에서부터 폐차 직전의 차들이 모여 있는, 그것마저도 없는 쓸쓸한 모습이 잔상殘像으로 남아있게 한다.
지팡이는 풍경화를 그리는 붓이라도 되는 듯, “두 개의 지팡이가 / 가을 풍경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라고 한다. 「할머니와 유모차 2」는 할머니들의 삶이라는 원관념을 위한 보조관념인 유모차가 묘하게 풍유諷諭되어 사유思惟의 범위를 확장하게 하고 있다.
그녀를 위한 빈자리
연보랏빛 감자밭이다
주름치마 걸쳐 입고
버선발로 반기더니
헤집고 들어서자 그녀의 꽃향기
옷깃에 흔적을 남긴다
옹이진 사연을 알까마는
예리한 칼날 몇 번을 도려내어
차디찬 땅속에 몸을 눕혔는데
불어오는 바람 소리
적막을 깨우는 한여름 날
천둥 번개 그리고 바람
흔들지 마라
나도 아기를 품고 있는 산모라는 걸.
- 「감자꽃이 피었네」 전문
덩이줄기 식물인 감자는 한여름에 흰색이거나 연한 보라색 꽃을 피운다. 감자의 덩이는 고구마처럼 뿌리줄기가 아니라 땅속줄기에 녹말을 저장한다. 이러한 감자의 속성을 여자의 숙명으로 드라마틱하게 이어가고 있다.
즉, 숙명적 여성성이라는 원관념을 위하여 보조관념인 덩이줄기를 지닌 감자의 다산성多産性을 가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주름치마를 걸쳐 입고 / 버선발로 반기더니”라는 감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정妖精의 유혹(?)인 듯, “그녀의 꽃향기 / 옷깃에 흔적을 남긴다”라고 하였다. 이만하면 박 시인의 사유思惟의 변신 능력은 자유자제이다. 마치 중국 청두의 유명한 변검술 공연이듯, 「감자꽃이 피었네」의 행간에서도 이를 보는 듯하다.
시에서 필요로 하는 메시지인 “천둥 번개 그리고 바람 / 흔들지 마라 / 나도 아기를 품고 있는 산모라는 걸”을 위한 감자꽃이기를 간곡히 주문하고 있다.
「감자꽃이 피었네」는 성 평등을 위한 페미니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산多産을 위하여 위대한 또는 연약한 여성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시인의 감성적 메시지를 감자꽃을 통하여 무리 없이 잘 전달하고 있다.
연보랏빛 꽃을 피우기 위한 빈자리가 감자밭이었다면, 지하철 안의 보랏빛 빈자리는 한 송이의 꽃을 보려함이 아닌가? 때로는 비좁은 지하철에서 비워 둔 소중한 빈자리, 서로 다른 착시현상으로 겹쳐 시적 메시지를 교감하게 한다.
3.
수자M.R.Souza의 상징주의 시관詩觀은 신비적이면서도 통합하는 리얼리티를 지닌 측면이 있다. 박병래 시인의 시집 『대추 두 개를 품다』의 주된 흐름은 ‘나’와 ‘너’ 혹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통합하는 리얼리티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박병래 시인은 현대시의 특성인 난해성의 충동에도 불구하고, 삶의 현장에서 자주 만나는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시를 쉽게 쓴다. 난해시라 하면 창작자의 오류에 의한 비문非文이거나, 혹은 독자 수준의 미흡에 의한 공감의 단절임에 비하여 『대추 두 개를 품다』의 시편은 이와 반대쪽이다.
적어도 그런 방향성과는 다른 내재율內在律을 시적 소재에 치환하여 접근하려고 한다. 서정성의 탄탄한 완성이거나 시적 긴장감의 측면에서는 다소의 빈자리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간으로 하여 시적 영혼의 깊이에 담길 에너지가 재충전될 수 있기에 미래에 발표될 시집이 기대된다.
박 시인의 특장特長은 시의 표현 방법이다. 사물에 생명 현상을 부여하거나, 혹은 사유의 대상 속으로 자신이 직접 들어가서 감정을 이입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따뜻한 여성성을 그의 시의 시편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또 다른 관점은, 삶의 현장의 소재를 마음껏 재구성retrimming 할 수 있기에 서정시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시는 창작되는 한 편의 운문 문학 형식인 ‘poem’이며, 이러한 문학 형식인 시가 갖추어지기 이전의 시적 정감을 ‘poetry’라고 한다. 전자는 현대가 요구하는 고도의 심상心象인 운문 문학의 일정한 수준을 요구하는 영역이라면, 후자는 언어 미학적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 poem 이전의 정감情感이다. 그런데 여기서, 온전한 poem이 갖는 강렬한 메시지보다 poetry가 전하는 서정이 더욱 의미 있고 따뜻하며 소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매를 펼치면 어두워지고, 땀을 뿌리면 비가 되는壯快成陰 揮汗成雨-(晏子春秋)” 그런 시, 언젠가는 박병래 시인에게서 만나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둔필로 작품을 오독誤讀하지는 않았는지 염려된다. 시집 『대추 두 개를 품다』의 상재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며두서없는 평필을 내린다.
고척우거高尺寓居에서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