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바로 뒤편에 있는 해발 140m의 야산 정상부에 축성된 석성(石城)으로서 반양리 395번지의 반양초등학교 옆에서 시작되는 좁은 계곡을 따라 오르면 남문지에 이른다. 성에 오르면 남쪽으로는 신송리산성이, 동남쪽으로는 연암산성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웅소성리산성과 직접 연결된다. 산성은 야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되었는데, 야산이 삼각형에 가까워 산성의 평면 역시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룬다.
둘레는 약 650m에 이르고, 높이는 성벽이 거의 무너져 내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잔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곳을 토대로 추정하면 약 4m이다. 성벽이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아래쪽이 낭떠러지를 이루어 방어에 매우 유리하게 축조되었다. 성문은 남벽과 북서쪽 성벽에서 확인되는데, 성벽이 완전히 붕괴되어 구조나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성안에 건물지로 여겨지는 평탄면들이 매우 많은 편이며, 개배편(蓋杯片) 등의 토기조각들과 삼국시대에 제작된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다.
배방 산성 (충남 아산시)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 신흥리 소재 성재산에 있는, 길이 약 1,500m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산성이다. 대부분 무너져 돌무더기만 보이나 성의 남쪽에 남아 있는 길이 15m 정도의 석축에서 그 당시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사용한 석재는 길이 약 12m, 두께 50㎝ 정도의 자연석으로 앞면만 다듬어 성벽을 쌓았다. 적심돌의 단면을 보면 토사를 섞지 않은 석재와 잡석을 이용하여 너비 3∼4m에 약 40단을 모두 길이로 쌓기로 하였다. 성벽은 하단보다 상단에서 약간 안쪽으로 기울도록 쌓았는데 높이는 5∼6m 정도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배방산성의 둘레가 3,3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2개의 우물과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에도 건물 터로 추정되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축성 시기는 성내에 백제시대 토기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배방산성 [排方山城] (두산백과)
백령 산성 (충남 금산군)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와 건천리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
둘레 약 2,645m. 충청남도 기념물 제83호. 이 성에 대해서는 길이 4,000m로 기록되어 있을 뿐, 연혁 및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김정호(金正浩)에 의해 1834년(순조 34) 간행된 《청구도 靑邱圖》에는 ‘백자령(栢子嶺)’이라 하였다가 1861년(철종 12)에 간행된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에는 백자령 대신 ‘탄현(炭峴)’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백제말까지 신라의 영토였던 김천∼무주, 논산∼부여를 잇는 가장 가까운 길로서, 험한 고갯길에 축조한 산성이기 때문에 백제의 요충지(要衝地) 구실을 하였다.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침공하자, 충신 흥수(興首)가 백마강과 탄현을 지킬 것을 의자왕에게 건의였으나 간신들에 의해 묵살되었고, 결국 그해 8월 사비성(泗沘城)으로 향하던 신라군에 의해 함락된 곳이 이곳 탄현이다. 이것은 현재 동쪽 부분(무주쪽)은 석축과 옹벽(甕壁)이 원형을 알 수 없게 무너져 적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지만 서쪽 부분(논산쪽)은 석축과 옹벽이 원형을 많이 유지하고 있음을 보아도 그 사실이 입증된다. 그리고 산성 내에는 백제기와편과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백제의 성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산백령성 [錦山栢嶺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산 산성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의 백월산(白月山) 정상에 있다. 축성 형태는 토축(土築)과 석축(石築)이 혼합된 토석혼축(土石混築) 산성으로 현재 대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다.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성곽 부근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마한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그 규모가 둘레 9,700척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풍현성(海豊縣城)과 함께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패권을 다툰 격전지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성 백산산성 [洪城白山山城] (두산백과)
백화 산성 (충남 태안군)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1287년(고려 충렬왕 13)에 축조된 것으로 백화산(白華山:284m) 중턱에 위치한 석성(石城)이다. 태안군 내 성곽 중에서 제일 먼저 축성된 성이고, 소성현(蘇城縣) 때 태안 읍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 지형에 쌓아 외적의 접근이 어려운 요새 역할을 하였다.
성은 원래 둘레 619m, 높이 3.3m이었으나 현재 태을암(太乙庵)의 동쪽 약 100여 m 지점에 있는 성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성내에는 2개의 우물이 있었고,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있어 동쪽으로는 서산(西山)의 북주산(北主山), 남쪽으로는 부석면(浮石面)의 도비산(島飛山)과 연락을 취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화산성 [白華山城] (두산백과)
부소 산성 (충남 부여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사적 제5호.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둘레는 2,200m이고, 지정 면적은 98만3900㎡이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고,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木柵址)와 수혈식(竪穴式)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에서 4층의 토층단면이 확인되었다. 1982년부터 부소산성 일대를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부소산성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土築)으로 축조하였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의 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하였는데, 토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북반부는 A층 위에 퇴적되었고, 남반부는 A층과 같이 아래서부터 쌓아올렸는데, 이는 A층을 고쳐쌓기 위해 B층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생토층으로부터 B층까지의 높이는 3.2m이다.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C층은 황갈색사질토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 3∼6㎝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6합식(合式) 5단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는 103㎝로 이 층에서도 B층과 같이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크기가 50×50㎝, 70×60㎝ 되는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은 위의 두 산성이 연결되어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안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門柱)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부소산성 [扶餘扶蘇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상리 산성 (충남 당진군)
충청남도 당진시 문화체육과 041-350-3581~4 |
석성 산성 (부여군)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89호. 지정면적 755,633㎡, 둘레 약 1,600m. 현재 문지(門址)·수구문(水口門)·우물터·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 이 성의 이름은 석성현(石城縣)이라는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백제의 국도인 사비(泗沘) 남쪽의 관문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테뫼형[山頂形 : 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과 포곡형(包谷形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성) 산성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그중 테뫼형은 높이 160m의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동북에 인접한 높이 160m의 또하나의 봉우리를 감싸안은 뒤 동남향한 산상의 경사면을 따라서 석축의 성벽을 둘렀다.
그러나 현재 이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돌덩어리가 5m 정도 너비로 산 중턱의 경사면을 돌아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테뫼형 산성의 둘레는 약 580m이며 성내에는 남쪽 모퉁이에 우물터 한 곳이 있다.
포곡형 산성은 테뫼형 산성의 동남쪽 산 아래에 있는 두 개의 깊은 골짜기를 감싸안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이 두 골짜기는 동남쪽을 향하여 기다랗게 병행되었으므로, 그 중앙과 좌우 양편에 각각 높은 산등성이가 형성되었다.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이 좌우의 산등성이까지의 넓은 면적을 포함한 뒤 그 바깥쪽으로 훨씬 내려가서 가파른 산 중턱을 타고 축조되었다.
축성방법은 자연할석을 이용하였으며 외면을 돌로 쌓았고 안쪽은 내탁(內托 : 흙이나 돌을 넣고 단단히 다짐)을 하였는데, 내호(內壕)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구는 성벽이 통과하는 계곡의 입구에 시설되었음이 분명하지만 현재는 파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른쪽의 수구에 해당되는 부분은 좌우로 성벽과 연결되도록 돌덩어리를 3∼4m의 높이로 쌓아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석축부를 기초로 하고 그 위에 통수구(通水口)가 마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포곡형 산성의 중앙에 있는 산등의 앞쪽 끝부분에는 능선과 병행하여 약 50m의 길이에 걸쳐 약 1m의 너비로 성벽과 같은 것을 축조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안의 중앙 능선상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쪽 산등성이의 앞쪽 끝부분에 동문지(東門址)로 추측되는 곳이 남아 있으며 그 너비는 약 4m이다.
이 테뫼형 산성과 포곡형 산성의 선후 관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테뫼형의 산성 아래에 있는 두 골짜기를 감싸안기 위하여 포곡형 산성이 뒷날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테뫼형 산성은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먼저 축조된 지방산성에 불과한 데 비하여, 포곡형 산성은 국도 사비의 방위를 위하여 확장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산성은 연산(連山)의 황산성(黃山城), 노성(魯城)의 노성산성(魯城山城) 및 금강 건너의 성흥산성(聖興山城), 배후에 있는 금성산성(錦城山城)과 연결되는 백제의 수도 사비의 최후 방비성으로 여겨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석성산성 [扶餘石城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산성은 테뫼형[山頂形 : 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과 포곡형(包谷形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성) 산성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그중 테뫼형은 높이 160m의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동북에 인접한 높이 160m의 또하나의 봉우리를 감싸안은 뒤 동남향한 산상의 경사면을 따라서 석축의 성벽을 둘렀다.
그러나 현재 이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돌덩어리가 5m 정도 너비로 산 중턱의 경사면을 돌아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테뫼형 산성의 둘레는 약 580m이며 성내에는 남쪽 모퉁이에 우물터 한 곳이 있다.
포곡형 산성은 테뫼형 산성의 동남쪽 산 아래에 있는 두 개의 깊은 골짜기를 감싸안기 위하여 축조되었다. 이 두 골짜기는 동남쪽을 향하여 기다랗게 병행되었으므로, 그 중앙과 좌우 양편에 각각 높은 산등성이가 형성되었다.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이 좌우의 산등성이까지의 넓은 면적을 포함한 뒤 그 바깥쪽으로 훨씬 내려가서 가파른 산 중턱을 타고 축조되었다.
축성방법은 자연할석을 이용하였으며 외면을 돌로 쌓았고 안쪽은 내탁(內托 : 흙이나 돌을 넣고 단단히 다짐)을 하였는데, 내호(內壕)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구는 성벽이 통과하는 계곡의 입구에 시설되었음이 분명하지만 현재는 파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른쪽의 수구에 해당되는 부분은 좌우로 성벽과 연결되도록 돌덩어리를 3∼4m의 높이로 쌓아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석축부를 기초로 하고 그 위에 통수구(通水口)가 마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포곡형 산성의 중앙에 있는 산등의 앞쪽 끝부분에는 능선과 병행하여 약 50m의 길이에 걸쳐 약 1m의 너비로 성벽과 같은 것을 축조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안의 중앙 능선상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 오른쪽 산등성이의 앞쪽 끝부분에 동문지(東門址)로 추측되는 곳이 남아 있으며 그 너비는 약 4m이다.
이 테뫼형 산성과 포곡형 산성의 선후 관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테뫼형의 산성 아래에 있는 두 골짜기를 감싸안기 위하여 포곡형 산성이 뒷날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테뫼형 산성은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먼저 축조된 지방산성에 불과한 데 비하여, 포곡형 산성은 국도 사비의 방위를 위하여 확장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그 시기는 대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 산성은 연산(連山)의 황산성(黃山城), 노성(魯城)의 노성산성(魯城山城) 및 금강 건너의 성흥산성(聖興山城), 배후에 있는 금성산성(錦城山城)과 연결되는 백제의 수도 사비의 최후 방비성으로 여겨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석성산성 [扶餘石城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성 산성 (홍성군)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에 있는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남쪽의 성벽은 역단층(逆斷層)의 자연암벽(自然岩壁)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동쪽과 북쪽, 서쪽은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산성리 야산 정상부 남쪽 사면을 둘러싸고 있으며, 총 둘레는 약 1800m이다. 현재 성곽의 대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 일어난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의 본거지였던 주류성(周留城)의 주성(主城)으로, 《일본서기》 천지기(天智紀) 2년에 기록된 ‘석성(石城):シヤクサシ’을 석성산성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성 석성산성 [洪城石城山城] (두산백과)
성거 산성 (천안시)
성거산성(聖居山城)은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에 있다. 성거읍사무소에서 입장 방면인 천흥 저수지의 남쪽 상류로 가면 만일사가 있고, 그 배산에 동북쪽으로 성거산이 있다. 성거산성은 성거산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성거산성은 성거산[해발 579m] 정상부에 둘러쌓는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50m이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성이었으나 뒤에 돌로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성거산성을 백제 시기에 쌓은 위례성의 익성(翼城)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혹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목천현과 직산현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다고 전하기도 하여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다.
2013년 현재 성거산성에는 군사 통신 기지 등이 설치되면서 당시 성곽이 많이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거산성 [聖居山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성흥 산성 (부여군)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사적 제4호. 둘레 600m, 지정면적 12만916㎡. 현재 테뫼형 산성으로 남·서·북문지와 군창지, 우물터 세 군데 및 토축보루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501년(동성왕 23) 8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축조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加林郡)이었으므로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한다.
성의 형태는 테뫼형이고 성벽 높이는 대개 3∼4m이며, 축조방식은 일부는 석축, 일부는 토축으로 되어 있다. 일부는 안으로 흙을 다져 내탁(內托)을 하고 외면은 석축을 하였으므로, 흙을 파낸 곳은 자연히 호(壕)를 형성하고 있다.
서쪽 성벽의 석축 부분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그 기초 부분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벽보다 약 1.5m 정도 앞의 부분까지 넓혀서 기초를 만들었고 토축 부분은 산의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식으로 축조하고 있다.
주문인 남문의 문지 너비는 4m이며, 초석이 남아 있다. 이 남문지 앞에 있는 토성산(土城山)에 둘레 약 200m의 토축보루가 있는데 이 토축보루에는 부속된 소보루(小堡壘)가 또 있다. 이와 같은 대·소 성의 배치는 백제산성의 독특한 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상위관직인 위사좌평으로 성주(城主)를 삼았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하여준다.
또한,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곽 가운데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것이라는 점과 옛 지명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에서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 장군 유금필(庾黔弼)이 견훤(甄萱)과 대적하다가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 성안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성흥산성 [扶餘聖興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성 산성 (천안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화성2길 테뫼식산성으로, 돌로 쌓았다. 이곳에 대해서 1942년에 간행된 《조선보물유적조사자료》에는 “성남면 화성리, 세성산의 남쪽 경사면 산꼭대기에 석루의 자취가 남아 있지만 훼손되어 옛 모습을 알 수 없다. 삼한시대의 농성(籠城)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화유적총람》(상)에는 “세성산의 남쪽 경사면 산꼭대기에 있고 석루가 있다. ”, 《전국유적목록》에는 “세성산의 남쪽 경사진 산꼭대기에 있으며, 석루(石壘)라 불렀다.”, 《대록지(大麓誌)》에는 “이 산성은 농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발 180m의 세성산에 자연석으로 축조하였으며, 내성과 그 남쪽에 외성이 있다. 내성은 둘레가 350m, 높이가 3m로 매우 가파르고, 너비 2.8m의 동문 터가 있다. 북쪽 벽은 험하고 가파른 산꼭대기의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고, 남쪽 기슭의 평평한 지형을 에워싸면서 남쪽 벽과 연결된다.
건물터로 추정되는 성 안 남쪽의 평평한 곳에서 백제시대의 격자무늬 및 민무늬토기 조각, 쇠뿔모양 손잡이 토기가, 외성에서는 삼국시대의 연질적갈색토기 및 경질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동학농민운동 관련 기록에 따르면 1894년 9월 농민군이 세성산에 집결하여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죽산부사 이두황(李斗璜:1858~1916)이 이끄는 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안 세성산성 [天安細城山城] (두산백과)
안흥 산성 (태안군)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안흥성길 안흥산성이 폐성이 되면서 절도 소실되었지만 근래에 옛절터에 작은 절을 지어 태국사라 명하였다. 태국사에서 바닷쪽을 향해 보면 안흥포구가 넓게 내려다보인다. 작은 절 한 채가 바닷바람과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네이버 지식백과] 태국사(태안)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1655년(조선 효종 6) 축조된 안흥산성(安興山城) 내에 위치한다. 이 산성은 당시 서해안 경비와 해운을 관장하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이 절이 병사들의 주둔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구나 외적이 침입했을 때, 이 절의 주지가 수막대장(守幕大將)의 지시를 받아 수군이 있는 18개 읍의 승군을 지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권한은 첨절제사(僉節制使)의 권한과 같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국사 [泰國寺] (두산백과)
엄정산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진산면 엄정리, 금성면 화림리
시 대 백제
금산군 진산면 엄정리 승지골 정상에 있는 산성으로 성밖재에서 50m 올라가면 둘레가 약 300m 가량되는 성터가 있다.
동쪽과 남쪽은 석성이고 북쪽과 서쪽은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토성으로 축성하였다.
엄정산성은 금산방향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만악리의 만악산성, 다복리의 장수산성, 부암리의 국사봉보루, 그리고 진산산성과 연계되어 있는 산성이다.
연기 이성 (충남 연기군)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해제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시도기념물 제4호 이성 (李城)으로 지정되었다. 성이 축조된 이성산의 높이는 해발고도 229m로 산의 정상부를 감싸면서 테뫼 형식으로 축성된 석축산성이다. 성은 붕괴되고 석축만 발견되어 원래 성의 높이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남아 있는 모습으로 보아 성의 둘레는 510m 정도이다. 이 성의 경계가 되는 화방리(華芳里)의 이름을 따서 화방리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으로 이루어졌으며 북단에는 성 안에 호(壕)의 형태가 남아 있는데 그 너비는 4~5m, 깊이는 1m 정도이다. 서남쪽 성벽에는 문지(門址)가 남아 있으나 자세하지 않다. 성 안에서는 기와편이 많이 수습되었는데 지금 성의 형태와 기와편으로 보아 백제 때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고려 초기 사람인 이도(李棹)가 살았으며, 성의 둘레가 1,184척이고 성 안에 우물이 있었다고 기록하였으나 13세기 무렵에 성은 이미 폐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전의이씨(全義李氏) 시조인 이도가 성을 쌓고 살던 곳이라 하여 이성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연기 금이성(燕岐金伊城)과 함께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기 이성 [燕岐李城] (두산백과)
예산 산성 (충남 예산군)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산성리 성 둘레가 655m이며 성벽의 높이가 2.4m 정도인 토성으로 무한산(無限山)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은 대흥임존성(大興任存城)과 함께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의 주요 거점으로, 당시의 유적과 유물은 찾아볼 수 없고 백제 이후의 토기류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산군은 백제 때 오산현(烏山縣)이었으므로 옛 기록에는 이 산성을 오산성(烏山城)이라고 하였다. 예산읍의 서북쪽에 있는 넓은 평야에 솟아 있는 낮은 야산에 흙으로 쌓은 성터이다. 산성 아래로는 무한천(無限川)이 흐르고 성에서 서쪽으로 중국 당(唐)나라 군사를 유도해서 싸운 들판이 보인다.
이 성은 신라 때 김유신(金庾信)의 둘째아들 원술랑(元述郞)이 쌓았다고도 하며, 백제부흥군이 당나라 군사를 맞아 싸웠던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이로써 이곳은 백제 때의 유서깊은 성터로 여겨진다. 산성은 과수원과 농경지로 변하고 토성자리는 방공호로도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산산성 [禮山山城] (두산백과)
외성 산성 (충남 논산시)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외성리 논산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국도변 산등성이에 있다. 면적은 4,161㎡로 해발 118m 지점의 산봉우리에 둘러져 있다. 성의 둘레는 400m, 높이는 1.5m이며, 성벽의 윗부분은 폭이 0.7m로 테뫼형 산성이며 흙과 석재로 축성되었다.
문이 있었던 자리는 확실하지 않으나 외성리 마을 쪽으로 올라오는 길목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토기류가 발견되어 축성 연대는 백제시대로 추측된다. 외성이라는 이름에서 황산성의 외성으로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으며, 황산성 남서 방향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성산성 [外城山城] (두산백과)
우산 산성 (충남 청양군)
14.우산성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81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산4-1외
시 대 백제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우성산에 있는 산성으로, 산꼭대기를 빙둘러 자연지형을 이용한 동쪽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
성의 둘레는 약 965m이고, 잘 남아 있는 곳의 성벽은 높이 7m, 폭 6m 가량 된다. 남벽과 동벽이 만나는 곳,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부분은 다른 곳보다 높은데 아마도 전투시 장수가 올라서 지휘하던 장대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동남쪽 모서리와 동북쪽 모서리는 성벽의 바깥으로 사각형 모양의 성벽을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이 있었던 것 같다. 성문은 남·서, 남, 북쪽에서 확인되는데 북문이 있던 자리가 잘 남아있으며, 성벽에서 약 2m 정도 안쪽으로 들여서 문을 만든 것 같다. 성 안에서는 몇 개의 건물터와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우물 2개가 있다고 한다.
성에서 보이는 유물은 백제 토기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와조각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백제 때 쌓아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주 산성 (충남 운주군)
세종시로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해발고도 460m의 운주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길이 3,210m에 이르는 외성과 안쪽에 내성이 있는 규모가 큰 산성이며 고산산성이라고도 한다.
성벽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축성되었는데, 북벽과 동벽은 운주산 정상에서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따라 이어졌으며 남벽은 산 봉우리를 에워싸면서 축조되었고, 서벽은 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을 가로지르면서 축성되었다. 따라서 북쪽은 해발고도가 높고 서남쪽이 낮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 남문, 북문에서 문지(門址)가 확인되는데 붕괴되어 자세한 형상을 알 수 없다. 성 안에는 성문과 건물터, 우물터 등이 남아 있는데, 정상부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제단으로 보이는 원형 대지가 있다. 또 성 안에서는 백제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편과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고대 산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주산성 [雲住山城] (두산백과)
은산당 산성 (충남 부여군)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낮은 산자락에 자리한 테뫼식 산성이다. 백제부흥운동군과 관련된 은산별신제의 전설이 전해 오는 이 산성은 은산 별신당(別神堂)의 뒷산인 해발 60m의 낮은 산봉을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둘레 약 250m인 외성은 성벽이 대부분 이미 개간되어 거의 평지화되어 있고 둘레 약 180m의 내성은 토축 형태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북쪽에서는 내호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데, 그 너비가 5∼6m 정도이다.
경사가 심한 서쪽 산 중턱은 아래로는 '은산천'이라는 자그마한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서남 기슭 암벽 아래에는 별신당의 작은 당우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산 당산성 [恩山堂山城] (두산백과)
임존 산성 (충남 예산군)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봉수산과 그 주위의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어 봉수산성이라고도 한다. 성문 ·수구문(水口門) ·건물터 ·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북동쪽의 성벽 높이는 4.2m, 서쪽 성벽 높이는 2.6m이며, 석루(石壘)의 상부너비는 1.6m이다. 산의 주봉에는 약간 넓은 평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백제 때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출토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건물터로 여겨진다. 이 산성은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는 한산면(韓山面)의 건지산성(乾芝山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은 유인궤(劉仁軌) 등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의 공격과 내부분열로 이 성을 빼앗김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존산성 [任存山城] (두산백과)
장곡 산성 (충남 홍성군)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둘레 1,352.6m에 달한다. 성내에서 방대한 건물터와 주춧돌, 기와조각,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옛 백제 부흥의 거점지로 주목되는 예산군 대흥면의 임존성(任存城)과는 12.6㎞, 공주 34.5㎞, 부여 27㎞, 아산만 어귀에서 44㎞ 떨어진 곳으로, 장곡산성·학성산성·태봉산성·소구니산성이 띠를 이루듯이 모여 있다.
일대를 지표조사한 결과 사시(沙尸)·사시량(沙尸良) 등의 글자가 적힌 기와조각들과 백제시대 토기, 청동제 방울 등이 발견되었고, 장곡산성을 거점으로 직경 1㎞ 이내에서 철광지와 6곳의 야철지가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백제 사시량현(沙尸良縣)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되며, 지리적 위치로 보아서는 백제 부흥군의 웅거지였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된다.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충남 서천군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芝山城)이라는 설과 충남 청양군 정산(定山)이라는 설,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우금산성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었는데, 최근 한 향토사학자가 조선시대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가 쓴 《대동지지(大東地志)》를 근거로 들어 현재의 홍성군 장곡면 주변이 주류성이라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성 장곡산성 [洪城長谷山城] (두산백과)
금산 장수산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복수면 곡남리
시 대 백제
진산면 만악리와 복수면 곡남리 경계지점으로 산정상에 있는 테뫼산성으로 둘레가 약 300m이다.복수에서는 성재 또는 곡남산성이라 부른다.
이 산성에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옛날 배내미에 힘이 센 남매를 둔 어머니가 있었다.남매가 그대로 크면 안될것 같아서 두 사람이 내기를 하여 지는 쪽이 죽기로 했다.그래서 아들은 무쇠신을 신고 서울에 다녀오고 딸은 성을 쌓기로 했다.석달 열흘이 지났다.딸은 석문의 문턱만 놓으면 되었다.아들이 질것같아 그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딸이 좋아하는 뜨거운 팥죽을 쑤어서 먹였다.그 순간 아들이 돌아왔다.그리하여 아들은 살고 딸은 죽게 되었는데 딸의 시체는 성문 문턱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그뒤로부터 사람들이 문턱을 밟고 지나면 팥죽이 웬수다라는 소리가 들린다고한다.
성벽 남쪽은 암벽과 낭떠러지를 활용하여 성을 쌓았으며 북쪽은 돌로 성을 쌓았으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된 상태이다.
장암진 산성 (충남 서천군)
자료 미확보
증산성 (부여군)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성 둘레 500∼600m, 높이 약 2∼3m. 부여에서 북쪽으로 금강을 건너 약 4km 떨어진 산 위에 '시루테'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성으로, 성 북쪽에 북문지(北門址)가 있다. 문지 너비는 4.3m이다.
성의 동벽은 붕괴가 심하여 남아 있는 부분이 없고, 성문은 북문 외에 동남방과 서쪽에 자리가 남아 있으며, 수구문(水口門)도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무너져 알 수가 없다. 성 남벽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자연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성이라 수법이 정교하지 못하다. 성내 동쪽에 우물터가 있으며, 백제 수도를 수호하기 위한 북방의 외곽성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시대에 건립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증산성 [扶餘 甑山城] (두산백과)
금산 진산산성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
시 대 백제
진산산성은 금산군 진산면 읍내리에서 서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표고 306m에 산정상에 백제시대에 축성되어 있는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두개의 산봉우리와 계곡부를 감싸안고 있는 포곡식으로 축조되었는데 규모는 705m에 이른다.
진산산성의 성벽은 하나의 산봉우리를 둘러싸며 축성된 테뫼식 산성과는 달리 두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의 선상부를 중심으로 축성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이 협축식의 형태를 하고 있다.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어 있으나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포석만이 성곽을 지키고 있다.
종합적인 정비대책을 수립하여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배우는 교육자료로 활용되도록 적극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청마 산성 (충남 부여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성은 성주(城周) 약 3km의 흙과 돌을 섞어 만든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현재 서쪽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데 높이 약 4∼5m, 폭이 약 3∼4m 정도이며, 동쪽 성벽도 이와 비슷한데 많이 무너졌다. 다른 성들과 같이 내부의 흙을 파서 축성한 관계로 내부는 자연적으로 호(壕)가 되었다. 이 산성 역시 백제 수도의 동방방위를 목적으로 축조된 외곽산성(外廓山城)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청마산성 [扶餘 靑馬山城] (두산백과)
청산 산성 (충남 부여군)
자료 미확보
태봉 산성 (충남 부여군)
둘레는 약 430m 정도이다. 성벽은 해발 75m의 등고선과 대략 일치한다.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성벽의 서쪽 부분은 성 내부에 조성된 체육공원의 진입로 때문에 일부 잘렸다. 그 잘린 면에 약간의 할석이 보이며 성벽의 기단 부분만 돌로 되어 있고, 다른 곳은 모두 흙으로 되어 있어 그 내부와 윗부분은 흙으로 쌓은 성벽으로 추측된다.
성의 주변에서 삼국시대의 흑갈색계 민무늬토기[無文土器] 조각과 적갈색 연질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었고,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 조각과 기왓조각 등 여러 시대에 걸친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예전에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시대의 토기가 많이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이곳이 본격적으로 성으로서의 기능을 한 시기는 백제시대 이후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산등성이 부분에서는 돌로 된 돌쩌귀 1기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곳은 1376년(고려 우왕 2) 최영(崔塋)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홍산대첩(鴻山大捷)의 현장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산 태봉산성 [鴻山胎峰山城] (두산백과)
학성산성
ㅇㅇ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둘레 1,352.6m에 달한다. 성내에서 방대한 건물터와 주춧돌, 기와조각,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옛 백제 부흥의 거점지로 주목되는 예산군 대흥면의 임존성(任存城)과는 12.6㎞, 공주 34.5㎞, 부여 27㎞, 아산만 어귀에서 44㎞ 떨어진 곳으로, 장곡산성·학성산성·태봉산성·소구니산성이 띠를 이루듯이 모여 있다.
일대를 지표조사한 결과 사시(沙尸)·사시량(沙尸良) 등의 글자가 적힌 기와조각들과 백제시대 토기, 청동제 방울 등이 발견되었고, 장곡산성을 거점으로 직경 1㎞ 이내에서 철광지와 6곳의 야철지가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백제 사시량현(沙尸良縣)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되며, 지리적 위치로 보아서는 백제 부흥군의 웅거지였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된다.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충남 서천군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芝山城)이라는 설과 충남 청양군 정산(定山)이라는 설,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우금산성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었는데, 최근 한 향토사학자가 조선시대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가 쓴 《대동지지(大東地志)》를 근거로 들어 현재의 홍성군 장곡면 주변이 주류성이라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성 장곡산성 [洪城長谷山城] (두산백과)
홍주 산성 (충남 홍성군)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2012년에 남문인 홍화문을 복원하였다.
이 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황산 산성 (충남 논산시)
자료 미확보
황화 산성 (충남 논산시)
충청남도 논산시 등화동에 있는 산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92호. 지정면적 56,702㎡, 둘레 756m. 평균높이 2m. 외성까지 모두 3,564m에 달한다. 성벽의 기초부분에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판축(版築)한 포곡식(包谷式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방식) 토성이다.
문터는 북·동·남쪽에 있고, 동문터는 수구를 이루며 너비 4m의 단절부이다. 성 안에는 5개소의 건물터가 있고, 백제의 그릇이나 기왓조각이 많이 발견되는데, 연꽃무늬 수막새기와도 출토되었다.
또 ‘葛那城丁巳瓦(갈나성정사와)’·‘笠乃(입내)’ 등의 명문이 찍힌 기와도 발견되었다. 6세기 중엽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북쪽 끝에 60m의 거리를 두고 지름 10m쯤의 둥그런 모양의 봉화대터가 남아 있다.
전설에는 백제의자왕이 성의 높은 곳에 있는 바위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다고도 한다. 이 성을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시진산석성(市津山石城)이라 기록한 듯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논산황화산성 [論山皇華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흑성 산성 (충남 천안시)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촌리 |
천안시의 동쪽 약 8㎞ 지점의 가파른 흑성산 꼭대기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천안의 옛 산성 중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성의 둘레가 약 2,290자[尺], 높이가 6자이며, 그 안에 샘이 두 곳 있는데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둘레 약 570m이나 산성의 대부분이 훼손되어 원형을 찾기 힘들다. 그 중심부에는 미군(美軍) 시설과 KBS 등의 송신소가 위치하고 있다. 흑성산의 본래 이름은 검은성인데 일제강점기 때 '검다'는 뜻을 그대로 옮겨서 '흑성산'으로 바꾸었다. 풍수지리설로 보면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이 되는 이곳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의 명당 길지(吉地)로서,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며, 또 매우 아늑하여 예로부터 피난처로 알려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