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신서정시의 새 지평과 언어 인식
유한근
시는 갈대처럼 약해 보인다. 약해 보이기 때문에 그 만큼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러나 시인은 강하다. 시인정신으로 무장된 시인, 우리 시대의 마지막 보루가 시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칼보다 강하고 이성보다 강하다. 우리의 주변에 동경하던 시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품성을 발견하고 종종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는 우리 시대의 최고의 예술이다. 가장 고귀한 품위를 가져야 하고 가장 강한 메시지를 지녀야 한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시인과 시는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물이 된다.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서문학의 시를 일별하면서 우선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시와 시인의 소명에 관한 환기였다. 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시핵(詩核) 탐색 과정에서 오늘의 시를 반성했으면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신서정시의 지평을 가늠했으면 한다.
손자가 부르는 소리는
화장실 안을 박차고 나와서
거실 내 책 위에 올라앉아
책갈피를 접게 하고
다시 부르는 소리는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서게 한다.
비데 없는 변기위에 앉아
까만 눈동자에 힘을 가득 담은 것은
할아비의 늘어진 모습을 보며
나름의 책망을 하는 것이다.
작은 바가지에 물을 받아
오른 손 중지로 항문을 닦는데
눈에 들어오는 굵은 변 덩어리
참! 예쁘다.
-고정현의 시<굵은 똥도 예쁘다> 전문
위의 시<굵은 똥도 예쁘다>는 변을 닦아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는 꾸밈이 없다. 수사도 단순하다. 특별히 은유나 상징하고 있는 것도 있다.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하나의 짤막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은 시다. 굵은 변 덩어리를 “참 예쁘다”라고 표현한 부분만이 할아버지의 사랑을 표상하고 있는 부분일 뿐이다.
파도 향해 던진
한가닥 줄
그 줄을 덥썩 문채 파도는 출렁인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사내
쓸쓸함이 가려지지 않는다
사내 옆에 놓인 투망엔
지난 시간만 가득하다
사내는 또 한 번
멀리 줄을 던진다
-김준성의 시<낚시> 전문
김준성의 시 <낚시>는 낚시꾼의 쓸쓸함과 시간으로 가득 채운 투망을 그림으로서 ‘낚시’라는 행위의 인식과 낚시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그린 시이다. 격정을 제어하고 췌언도 일체 삼가고 그 상황을 묘사한 묘사시다. 그러나 이 시에는 제어된 정서와 서정 그리고 인간의 실존이 행간 속에 숨겨 있어, 그 그림이 잊어지지 않는 매력이 있다.
당신은 새벽맡
오셨다 쉬 가시고
놓고 가신 그 음성
신열로 사무치는데
행여 새벽 다시 오마면
아무 말 않고 계시다
당신만 짐짓 놓고 가셔요.
-방남기의 시 <감기기운> 전문
위의 방남기의 시<감기 기운>은 ‘감기’를 의인화한 시로 재미있다. 한국 전통의 기다림을 미학적 시의 모티프로 깔고 감기와의 재미있는 관계양식의 설정으로 정서와는 관계없는 하나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마냥 보고파 못견딜 때는
그냥 울어 버리세요
눈물 없이는
그 그리움 씻어 낼 수 없어요
잊어보려 해도
못 잊겠으면
그냥 울어 버리세요
눈물없이는 그 미련 씻어낼 수 없어요
차마 울기에 역겨워도
가슴에 든 서러움 씻어내라고
그래서
눈물이 있는 거랍니다.
-양종영의 시 <눈물> 전문
양종영의 시 <눈물>은 한국 시가의 제재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시이다. 이별과 그리움 그리고 슬픔과 눈물이라는 우리 시가의 제재와 주제를 이어받고 있는 서정시이다. 그러나 감칠맛은 덜하고 직설적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시에 도전적인 시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눈물‘이라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려 했던 점이 주목된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꽃 앞에 서면 꽃이 되고
불 앞에 서면 데워지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만하지 않고
자기를 낮추고 숨길 줄 아는 사람이다.
아름다움 마음을 가진 사람은
꿈을 가꾸고
사랑을 심어 나누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는 일 마다
향기가 나는 사람이다.
-이길옥의 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 전문
이길옥의 위의 시<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읽어지고 특별한 은유 구조나 상징 구조가 없는 시이다. 일별(一瞥)만 해도 이해될 수 있는 시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자연스러움에 순응하는 사람이며, 자만하지 않은 사람이며,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며, 향기 나는 사람이라는 잠언적 의미의 시인 셈이다.
최문길은 아래의 시 <억새풀>는 아름다운 사람을 다르게 인식한 시이다.
바람이
달콤하게
예리하게
나를 흔든다 해도
아름다운 사람
따스한 바람 되어
불어준다면
호호 백발
내 한몸 당신께
받치오리라.
-최문길의 시 <억새풀> 전문
이 시는 ‘책속의 소시집’으로 발표된 시 중에서 발췌한 시이다. 이 시는 ‘억새풀‘이라는 사물에 대한 언어 인식을 아름다운 사람 혹은 따스한 바람으로 인식하여 쓴 시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을 맞이하는 따스한 심상을 억새풀의 새 인식으로 비유한 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의 시 <억새풀2>는 이별의유혹에도 변함이 없는 사랑에 대한 굳센 의지를 표현하고 있어 ’억새풀‘이라는 사물, 그리고 그 언어에 대한 인식이 주목된다.
시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버겁다. 그가 구축한 정신 혹은 정서 공간을 탐색하는 일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시를 마주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나의 체험 안에서의 내적 탐색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평이라는 것이 시인에 대한 이해라는 절대 절명한 비평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밀한 내면세계를 만나기 위해 시작(詩作)을 열정으로 정진하는 시인의 경우, 자기를 탐색하여 삶의 본질과 인간의 본체를 해명하려하는 시인에게 있어 그 음밀하게 숨겨져 있는 세계를 탐색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탐색이 도로(徒勞)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서정시에 대한 탐색은 더욱 그러하다. 시는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하고 있지만 아름답고 고귀하고 강하다. 그래서 우리시대의 서정시인의 소명의식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서정시는 시인의 주관적 정서의 발현이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리고 시인의 소명의식을 읽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이를 탐색하는 일은 더욱 값지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신서정시의 문을 열기는 했지만 그것을 체계적으로 온축해 놓고는 있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신서정시에 대한 관심과 시인의 소명의식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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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근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1984)으로 등단.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교무처장, 학생처장 역임.
제2강 수필의 종류.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