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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羅州) - 영산강 문화의 뿌리, 생명의 땅 나주
나주는 마한문화의 중심지였다. 백제·신라와 독립적으로 600년 이상 존속된 마한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옹관(항아리 관)을 만들어내는 등 수준 높은 문명을 갖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의 기폭제가 된 ‘댕기머리 사건’도 났다.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4월 영산강변에서 영산포 홍어축제가 열린다. 10월 나주 금성관 일대에서 선보이는 나주 영산강 문화축제는 나주 역사와 농경생활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나주 문화관광 http://tour.naju.go.kr/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향교[羅州鄕校]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마당 e뮤지암 나주의 역사향기
http://www.emuseum.go.kr/movie.do?action=view&number=270
불회사[佛會寺]
영산강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04429
나주 금성관[錦城館] 나주시 과원동 109-5
1966년 나주공원에 위치한 정렬사(旌烈祠)의 정문으로 이축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
1872년(고종 9)에 그려진 나주의 고지도를 보면, 다른 관아 건물은 모두 그려져 있으나 내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나중에 내아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문간채가 189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고쳐서 원래의 형태를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객사와 아문루, 내아가 함께 아직 남아 있어 관아 건축의 원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羅州 伏岩里 古墳群]
나주 복암리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들이다. 95∼97년까지의 조사를 통해 하나의 봉분(3호무덤)을 비롯하여 32기의 다양한 무덤이 발견되었다
한국에서 천연염색으로 유명한 도시인 나주시! 한국고대문화 중심지인 나주시는 고대로부터 면직물, 실크 및 천연염색 문화가 발달한 도시이다. 영산강변의 평야에 형성된 나주시는 풍부한 물과 기름진 토양, 따뜻한 기후환경으로 인해 고대부터 도시의 형성과 더불어 직물과 천연염색문화가 발달해 왔다
국내 최대 규모의 천연염색박물관인 나주시천연염색문화관.
나주 영상테마파크
옛 고구려의 모습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나주영상테마파크는 역사대하드라마 촬영 문의도 잇따르고 있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다시 거듭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나주영상테마파크 입구에 들어서면 그동안 이곳에서 촬영한 드라마 및 영화에 출연했던 송일국, 한혜진, 전광렬, 이계인, 진희경, 최정원, 정진영, 김정화, 오윤아 등 주연배우의 핸드 프린팅과 출연사진을 배너로 표현한 '스타거리'가 눈에 들어온다.《주몽》《태왕사신기》의 촬영장소
나주 완사천[羅州浣紗泉]
왕건은 고려를 개국하기 전 후삼국 정립의 시기인 903년에서 914년에 태봉국(泰封國) 궁예의 장군으로서 나주에 출진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후백제 견훤과 싸웠다. 어느 날 진(陣) 위쪽 산 아래에 오색 서운이 있어 왕건이 가보니 샘가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서 공손히 바쳤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처녀가 바로 나주 토착세력인 나주오씨 집안 오다련의 딸이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 여인이 곧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부인이다. 장화왕후에게서 태어난 아들 무(武)가 제2대 왕 혜종(惠宗)이 되었다. 그 뒤부터 이 완사천이 있는 마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는데, 왕을 용에 비유하면서 혜종이 태어난 동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샘을 빨래샘, 즉 완사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샘은 천년 이상 끊임없이 넘쳐 흐르고 있는데 1986년에 새로 정화하였다.
완사천 샘가에는 나주오씨 문중에서 세운 장화왕후 기념비가 서 있다. 완사천 위에는 혜종과 장화왕후 오씨를 기리는 흥룡사라는 절이 있었고 절 안에 혜종의 소상을 모신 혜종사가 있었으나 1429년(세종 11) 폐찰되었다.
<사진 나주시청 앞 300 광장에 세워진 고려 태조 왕건과 버들낭자의 사랑을 형상화한 조각. 인근에 첫 만남이 이뤄진 완사천이 그때 그 모습으로 보존돼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http://www.najusim.or.kr/
또 문화재로 지정된 나주역사(羅州驛舍.도 기념물 183호)도 당시 자료사진과 관계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옛 모습으로 복원됐으며 역사 주변은 야생화 단지와 쉼터,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조성됐다.
나주역은 1929년 10월 29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을 계기로 다음 달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11월 3일)으로 번졌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나주역은 일제하 3.1 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이라며 "이 지역 학생들의 역사와 문화, 교육활동의 중요한 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주향교[羅州鄕校]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반남 고분군
반남 고분군에는 대형옹관고분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다. 대형옹관 고분이란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壅 : 항아리)를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 고분 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積石塚), 백제의 석실분(石室墳),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가야의 석곽묘(石槨墓) 등과 구별되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고분 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大型甕棺古墳)은 AD 3세기부터 6세기까지 4세기 동안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3세기경에는 옹관절반을 지하에 묻는 반지하식이었으나 4세기 중반부터는 지상식으로 발전하며 이 때에는 분구의 규모가 훨씬 대형화 되어 그 규모가 40~50m에 이른다.
불회사[佛會寺] http://www.bulhoesa.org/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건하였고, 1403년에 원진국사가 중창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하루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때 원진이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한다.
불회사는 절집 입구에서부터 400~500m 이어지는 진입로의 멋진 삼나무숲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절 어귀에 선 독특한 표정의 석장승도 유명하다. 인도승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면서 사찰로는 영광에 불갑사를 처음 세우고, 佛會寺에서 법회를 열었다 고하여 불회사라 한다.
석관정[石串亭 영산강 제3경]
1695년(숙종 21) 이시창(李時昌)에 의하여 보수되었고, 1800년(정조 24)과 1870년(고종 7) 경 중건되었으며, 1999년 중수되었다. 현재 정면 2칸·측면 2칸 규모이며, 내부에 '석관정기(石串亭記)'를 비롯한 기문과 시문을 적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동백마을에 있다.
석관정에서 바라보는 황포돛배는 영산강 8경 중 제 3경입니다. 이곳은 황포돛길을 따라 석관정, 금강정, 이별바위가 이어져있어 다채로운 수변공간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석관정 맞은편에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주몽을 촬영한 나주영상테마파크도 위치해 있어 활쏘기 등 체험도 즐길 수 있습니다
3경 : 바람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황포돛배와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석관정
영산포구 1897년 목포항의 개항과 함께 전남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아쉽게도 1976년대 영산강하구언이 지어지면서 이제는 배의 왕래가 없어져 기억 속으로만 남아 있는 포구이기도 하다. 영산포구는 이제 ‘홍어의 거리’가 됐다. 홍어의 거리는 나주시 영산동 일대에 홍어 전문 식당가를 말한다.
영산포 등대 등록문화재 제129호. 이 등대는 1915년 건립. 해상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영산포 선창에 건립된 산업시설물. 내륙하천가에 있는 등대로, 등대뿐만 아니라 영산강 수위관측 기능도 하고 있었다
특히 홍어 삼합이 유명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데, 흑산도나 목포에서 잡힌 홍어가 영산강 뱃길을 따라 나주의 영산포구에 도착할 즈음 홍어 자체가 자연적으로 삭아, 지금의 나주 영산포 삭힌 홍어의 유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삭힌 홍어를 처음으로 선보인 곳은 나주의 영산포라는 것이다.
고려 말 때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 ‘공도(空島)정책’에 따라 흑산도 사람들이 나주로 피신하면서 홍어를 전한 것으로 돼 있다.
완사천[浣紗泉]
왕건은 고려를 개국하기 전 후삼국 정립의 시기인 903년에서 914년에 태봉국(泰封國) 궁예의 장군으로서 나주에 출진하여 이곳에 머무르면서 후백제 견훤과 싸웠다. 어느 날 진(陣) 위쪽 산 아래에 오색 서운이 있어 왕건이 가보니 샘가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서 공손히 바쳤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처녀가 바로 나주 토착세력인 나주오씨 집안 오다련의 딸이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 여인이 곧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부인이다. 장화왕후에게서 태어난 아들 무(武)가 제2대 왕 혜종(惠宗)이 되었다. 그 뒤부터 이 완사천이 있는 마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하였는데, 왕을 용에 비유하면서 혜종이 태어난 동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샘을 빨래샘, 즉 완사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샘은 천년 이상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있는데 1986년에 새로 정화하였다.
죽설헌(竹雪軒)
그는 인류가 꿈꾸는 에덴동산처럼 고향의 포근한 아름다움을 오랜 세월동안 부인과 같이 주택과 담장, 대밭, 연꽃 등 나무 한그루 풀한포기 돌하나에 까지 모두 정성어린 감성으로 다듬고 가꾸었다고 전언하였다. 그곳에 화실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더한 그림을 그리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 나오겠으며 살맛나는 인생을 살까 부럽기 까지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죽설헌을 사회에 환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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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용[羅大用] 거북선을 발명. 전라 나주 출생.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수영 수사(全羅左水營水使)로 있는 이순신장군을 찾아가 그 동안 연구한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는 한편 국방에 대한 계책을 아뢰었다.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막하(幕下)에 두고, 거북선 건조를 위시한 모든 전구(戰具)의 준비 계획과 추진에 참여시켰다. 임진왜란 후에도 새 전함인 창선(鎗船)을 창안 건조하였고, 남해현감(南海縣監)으로 있을 때는 쾌속정인 해추선(海鰌船)을 발명하였다.
이 곰탕을 처음 개발하고 보급시킨 집이 전라남도 나주에 위치한 ‘나주곰탕 하얀집’이다.
곰탕 쇠고기와 내장을 넣고 끓이는 국. 양지머리·사태살 등 고기와 양(羘:소의 위)·곱창·부아 등 내장을 될수록 많이 넣고 오래 끓여야 감칠맛이 난다.
설렁탕 사골, 도가니, 쇠머리 그 밖에 뼈·사태고기·양지머리·내장 등을 재료로 쓰며, 10여 시간 푹 곤 국
나주 맛집 나주곰탕 남평할매집 나주지역에서 제일 처음 생긴 곰탕전문점이다. 현재, 곰탕전문점들이 몰려 있는 매일시장에서 국밥을 만들다가 국밥의 이름이 ‘곰탕’으로 바뀌게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곰탕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곳이다. 6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곳은 ‘나주곰탕’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주 맛집 홍어 홍어1번지 국내 최초의 홍어 명장으로 탄생한 안국현씨가 운영하는 음식점. 안 씨가 2대 36년 동안 운영하는 홍어1번지는 코스요리가 유명하다.
나주 맛집 구진포장어거리 나주의 구진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으로 이곳은 장어 맛이 유명하다. 특히 구진포 장어는 미꾸라지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맛이 뛰어나고 건강에도 좋다.
나주 맛집 사랑채 전통식당 나주 시내에 위치한 한정식집으로 나주에서는 드물게 전화 예약이 필요한 식당. 밑반찬은 16가지 이상 짜거나 맵지 않고 적당히 간이 된 나물들. 고즈넉한 전통가옥에서 맛보는 착한 가격의 백반.
나주 배 나주배의 재배면적은 전국대비 13.2%를 점유하고, 전국 생산량의 18.5%를 차지하는 전국 최대의 주산지다. <나주배박물관>
나주영산강문화축제 나주시의 대표적인 문화축제로, 과원동 금성관(錦城館) 일원에서 해마다 10월 하순에 3일 동안 열린다. 역사·전통·농경문화와 대중문화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진행되며 기획·공연·체험·경연·전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나주평야(영산강 제5경) 영산강 유역의 광대하게 펼쳐진 나주평야. 서쪽과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어 주곡농업과 원예농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이 비옥한 평야는 일제시대 수탈현장이기도 했다.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구는 목포항의 개항과 함께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느러지 전망대
“한반도를 옮겨놓은 곳, 나주 영산강에서 맘껏 감상하세요.”
나주시는 공사비 4억원을 들여 한반도 지형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는 동강 옥정 비룡산 정상에 높이 15m, 전체 면적 51㎡ 규모의 전망대를 완공했다고 24일 밝혔다. 영산강 사업 이후 자전거 도로를 이용한 탐방객이 크게 늘어 이들을 위한 관광자원 발굴 차원에서 건립했다.
한반도 지형을 하고 있는 국내 지형들은 대부분 댐이나 저수지 건설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주 느러지는 영산강이 굽이쳐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으로 유명하다.
무안 느러지 영산강은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의 느러지
댕기머리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의 기폭제가 된 ‘댕기머리 사건’도 났다. 나주에서 광주로 오가는 통학기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우리 여학생 머리채를 당긴 일이 독립운동으로 발화됐다. 등교 후 바로 광주에서 불이 붙은 일본타도 시위는 한반도는 물론 북간도까지 들불처럼 번져갔다. 진원지인 죽림동에 나주역사가 보존되고 있다
도래마을 도래마을은 전통 한옥마을로 유명하다. 풍산 홍씨 집성촌으로 마을 한가운데 ‘계은정’이라는 아담한 연못이 있고 야트막한 돌담이 한옥을 에둘러 고풍스러운 멋이 묻어난다.
산포수목원 나주시 산포면 산제리 산포수목원(전남 산림 자원 연구소) 메타세쿼이어 가로수 길 이곳 나주에 있는 산포 수목원은 1박 2일 나주편에 나온 이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죽산보(영산강 제4경) 꽃을 즐길 수 있는 죽산보
가동보는 연장 184m로 수문 형식은 장경간 수문에 적합하며 안전성과 미관성이 우수하고 유지관리가 용이한 Shell Type Roller Gate를 선정했다. 현재 운항중인 황포돛배 뱃길연결과 나주시가 건립 중인 고대나주선 통항을 고려한 열린나루(통선문)를 설치했다.
주요시설은 연장 622m 규모의 공도교과 함께 전망공간을 계획해 이벤트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보와 연계한 다양한 접근로를 설치해 관광객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영산강 살리기 사업을 통해 승촌보 900만t, 죽산보 2700만t 등 총 3600만t의 수량을 추가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표해록[漂海錄]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崔溥:1454~1504. 나주 출신)가 중국에 표류되었을 때의 체험을 1488년(성종 19)에 편찬한 책. 목판본. 3권 21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호 금남(錦南). 김종직의 문인. 1486년 문과중시에 응시하여 아원(亞元:장원 다음)으로 급제, 사헌부감찰(監察)·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으로 승진하고 1487년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 해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주(濟州)에 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부[寧波府]에 표류, 반년 만에 한양 청파역(靑波驛)에 도착하였다. 그 때 주상의 명령을 받고 《표해록(漂海錄)》을 찬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여기에는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풍속·민요 등이 소개되었으며, 특히 수차(水車:踏車)의 제작과 이용법을 배워 후일 충청도 지방의 한발(旱魃) 때 이를 사용케 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1497년(연산군 3)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極諫)하고 공경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던 그는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으며, 여기에서 6년을 지내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1506년 중종 즉위와 동시에 신원(伸寃)되어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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