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일본 불교사
3. 헤이안[平安: 794~1183] 시대 불교 II
교학중심의 남도육종南都六宗으로 대표되던 나라시대의 불교는 교학중심의 학문불교이자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헤이안 시대는 진호국가를 표방하면서도 국가 권력에 대해 독립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대처하기 시작했던 시대다. 수행이나 대중 포교 활동과 같은 종교적 실천행이 용인되지 않던 상황 속에서도 사이초는 천태밀교의 천태종을, 그리고 구카이는 진언밀교의 진언종을 개창하여 수행과 함께 대승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국가불교 체제하에서 승려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임은 진호국가를 위한 가지기도에 참여하여 독경과 다라니 등의 암송을 통해 그 영험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특히 《최승왕경》, 《대반야경》, 《금강반야경》, 《법화경》 등과 같은 호국경전의 전독(轉讀)을 통해 천황가의 안녕과 국태민안의 영험을 얻고자하는 호국법회가 주를 이룬다. (중략) 이와 같은 호국법회의 양상이 9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참회’의식이 호국법회에서 강조되었던 것이다. 한 예를 살펴보면, 833년 6월, 역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전국의 승려들이 소집되어 ‘낮에는 《금강반야경》의 전독의식, 밤에는 약사참회(藥師懺悔)의식’이 행해진다. (중략) 그것은 참회의식의 내용이 불보살의 명호를 염송하는 이른바 칭명염불에서 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로 변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낮에는 호국경전의 독경, 밤에는 진언다라니’라는 형식의 호국법회가 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보편화되어 간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2. 고대 일본불교의 밀교화.)
1) 구카이[空海]의 진언종眞言宗
사이초가 태어나고 7년 후인 774년,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 774~835]는 현 가가와현[香川県] 서북부 젠츠지시[善通寺市], 사누키국[讃岐国, 사누키노쿠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속명俗名은 사에키노아타이 마오[佐伯 直 眞魚]로, 사에키씨[佐伯氏]는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찬기국[讃岐国]을 세운 명문 귀족집안이었다. 어머니 아토씨[阿刀氏] 또한 신라계 모노노베씨[物部氏]의 일족으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였다.
구카이가 15세 되던 해인 788년에는, 캄무[桓武] 천황의 3남 이오[伊予]를 가르친 외숙 아토노 오오타리[阿刀大足]에게서 배웠고, 그를 따라 교토[京都]로 가서 유학을 공부하였다. 792년인 18세에는 대학의 명경도明經道라는 시험에 합격, 관료 후보생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인 대학료大学寮에 들어가 중국사서를 비롯한 유교 경전 등을 공부하게 된다. 그렇게 관료로 출세할 수 있었으나 같은 가문 출신인 카이묘[戒明]라는 행자를 만나면서 그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는데, 화엄종 승려였던 카이묘로부터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이라는 행법을 배우고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허공장구문지법은 정해진 작법에 따라 100일간 진언을 100만법 외우면, 모든 경전을 외우게 될 뿐 아니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신비한 행법이다. 이 행법은 중국에 밀교를 전한 인도의 승려 선무외(善無畏, 637~735)가 번역한『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이라는 책에서 비롯하는데,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은 허공처럼 무한한 자비를 지니고 있는 보살로, 지혜智慧와 복덕福德을 한량限量없이 베푼다고 해서 허공장보살이라고 한다.
출가수행을 결심한 쿠우카이가 24세 때 불교의 수승함을 논하며 저술한《삼교지귀(三敎指歸)》의 서문에는 당시 그가 현재의 도쿠사마켄(徳島県) 남부의 다이류지야마(大竜寺山), 고치켄(高知県) 무로토자키(室戸岬) 등지에서 구문지법을 수행하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특히 무로토자키의 미구로도(御厨人窟) 동굴에서 입안에 명성(明星)이 날아 들어오는 신비체험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당시 미구로도 동굴에서는 하늘(空)과 바다(海)만 보였다고 하여 자신을 쿠카이(空海)라고 부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1.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이후 구카이는 대학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홀로 수행한다. 유교와 도교에 정통했던 구카이는, 불교가 이 두 학문을 모두 포괄할 뿐 아니라 사후 세계까지 설명하고 있어 더 우위에 있다고 보았고 흥미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산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던 그는 야마토국[大和, 倭, 大倭]의 한 사찰에서『대일경大日經』을 접하게 되는데, 그 책에 이끌린 그는 밀교를 공부하고자 804년 견당사遣唐使 일행에 끼어 입당하게 된다.
《삼교지귀》의 찬술로부터 입당까지의 수년간은 자세한 전기가 전하지 않아 쿠우카이의 일생 중에서도 가장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부분이다. 다만 이즈음 나라의 쿠메데라(久米寺) 동탑 아래에서 《대일경》을 감득하였다는 전설을 통해, 쿠우카이가 입당을 결심한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대일경》의 오의를 알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1.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구카이는 제16차 견당사의 일행으로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 사신단에는 훗날 천태종을 개창한 사이초[最澄]도 같이 했는데, 이를 계기로 유학 생활 동안 사이초와 교류하며 친분을 쌓게 된다. 구카이는 장안長安의 청룡사靑龍寺에 머물면서 역경승인 불공삼장不空三藏의 제자 혜과(惠果, 746~805, 밀교 제7조)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는다. 중국 진언종을 창시한 혜과는 중국 밀교의 문을 열었던 밀교의 대가였다. 천축국(오늘날 인도)을 갔다 와 여행기『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 신라승 혜초도 불공삼장의 제자로, 인도로부터 귀국한 후 불공과 함께 경전 번역에 착수한다.
원래 밀교는 인도에서의 불교 발전과정 중의 가장 말기에 나타난 것이었지만, 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됨에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꽤 일찍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고밀(古密:雜密)이다. 이것이 당나라시대가 되어 남해무역이 성행함과 동시에 밀교의 본거지인 남인도에서 남해를 통해 직수입 된 것이 신밀(新密:純密)이다. 그것을 최초로 수입한 이는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앞서 북방의 육로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밀교를 전한 이가 있었다. 바로 선무외(善無畏: Śubhakarasimha)이다. 이들 두 삼장 이후를 보통 신밀로 한다. 종래 나라시대의 밀교는 고밀이라고 해 왔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신밀의 성전도 꽤 많이 전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선무외가 번역한『대일경』과『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이다. 허공장구문지법을 초래한 자를 대안사의 도자로 하는 고전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문지법은 도자가 귀국한 718(양로2)년에 일본에 전래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717(당 개원 5)년에 선무외가 당나라에 와서 처음 번역한 구문지법은 그 다음해에 일찍이 일본에 전래된 것이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p. 83~84.)
806년 스승 혜과가 사망하자 구카이는 귀국하여 도쿄도[東京都] 하치오지시[八王子市] 다카오산[高尾山]을 본거지로 삼아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816년 구카이는 사가[차아嵯峨, 52대, 재위 809~823] 천황으로부터 코오야잔[高野山]을 하사받고, 고야산高野山을 중심으로 가람을 건립하고 진언종眞言宗을 창시한다.
816년 6월 쿠우카이는 고야산(高野山)을 국가와 수행자를 위한 도량으로 만들겠다고 사가(嵯峨)천황에게 상표(上表)하고, 같은 해 7월 그것을 허락받는다. 그리고 819년 봄에 고야산의 칠리사방(七里四方)을 결계하고 가람건립에 착수한다. 이 무렵 《즉신성불의(即身成仏義)》, 《성자실상의(声字実相義)》, 《우자의(吽字義)》, 《문경비부론(文鏡秘府論)》, 《전례만상명의(篆隷万象名義)》 등을 집필한다.
821년 현재의 카가와켄(香川県)의 만노이케(満濃池, 일본최대 농업용저수지)의 개수를 지휘하는데, 아치형의 제방 등 당시 최신공법이 구사되었다고 한다. 822년 토다이지(東大寺)에 관정도량 진언원(灌頂道場眞言院)이 건립되고 헤이조(平城)천황이 관정을 받는다. 그리고 823년 교토의 동사(東寺)를 하사받아 진언밀교 도량으로서 개창하는데, 후에 천태종(사이초)의 밀교를 태밀(台密)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동사(쿠우카이)의 밀교를 동밀(東密)이라고 부르게 된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1.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823년에는 역시 사가 천황으로부터 교토의 도지[東寺]를 하사받아 진언원眞言院을 세우고 총본산으로 한다. 고야산과 동사東寺를 거점으로 진언종眞言宗 조직을 체계화하고, 각종 저술을 통해 일본 진언종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다. 진언종眞言宗 총 본산인 현 고야산 곤고부지[金剛峯寺]나, 동사東寺는 수도권 총본산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야산은 히에이산과 더불어 일본 불교 의 2대 성지가 된다.
사이초는 구카이보다 조금 빨리 입국한 까닭에 그를 받아들일 만큼 불교계 상황이 좋지 않았고, 자신을 도와준 실권자마저 사망하여 후원자도 없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평소 구카이를 흠모했던 사이초는 그에게 밀교서적을 빌려 달라고 하였는데, 구카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이 사건으로 둘은 교류가 단절된다. 결국 사이초는 히에이산에 천태종을, 구카이는 고야산에 진언종을 세워 완전히 다른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다소 협력하는 듯 보였으나, 끝내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별하게 되었다.
806년 쿠우카이(空海)가 입당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사이초는 당에서 정식으로 밀교를 배우고 돌아온 그를 밀교의 스승으로 받들며, 제자들과 함께 진엄밀교의 입문관정을 쿠우카이에게 직접 받기도 한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무명이었던 쿠우카이(空海)를 일약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밀교관련 서적을 빌려보거나 제자들을 보내어 밀교를 배우게 하는 등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지만 밀교의 근본경전의 하나인 《이취경(理趣経)》의 해설서인 《이취석경(理趣釋經)》의 대여를 쿠우카이가 단호히 거절하면서 두 사람은 멀어진다. 밀교의 비법을 수행을 통해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다만 문자만을 통해 이해하려는 사이초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것이 쿠우카이의 거절 이유였다. 하지만 사이초의 입장에서는 국가적 공인까지 받은 일문의 수장으로서 그것을 버리고 진언밀교를 다시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춘호/동국대 강사,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0.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 (출처 : 불교닷컴(http://www.bulkyo21.com.))
나라 시대에 성립되기 시작한 신불습합神佛習合 사상은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구카이가 펼친 밀교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된다. 신불습합 사상은 일본의 전통적 신앙인 신도神道와 외부에서 유입된 불교가 융합된 것으로, 일본의 토속신인 가미[神]가 일본에 출현한 부처라는 개념의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 또한 성행하게 되었다. 부처는 근본 실체(本地, 본지)이고, 신도의 신인 가미들은 부처의 화신(垂迹, 수적)이라는 설이다. 불교는 신도와 융합함으로써 자연스레 신앙과 소망의 매개물이 되어, 천태종 또한 밀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2) 구카이 진언종眞言宗의 즉신성불卽身成佛
구카이는 밀교 교파인 진언종의 창시자로, 일본인에게 가장 추앙받는 인물이다. 진언종이 구카이를 신격화시키고 끝없이 예배함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천태종보다 더욱 더 유행했다. 구카이 대사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시코쿠 해안가를 따라 1,200-1,400km를 가야하는 ‘시코쿠 88개소’ 순례길은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일본 사찰을 둘러보다 보면 가끔 거룩하기까지 한 이들 순례객들을 마주치는데 일본은 온통 수행중인가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쿠우카이 이전의 진언밀교는 국가불교 체제하에서 비속한 대증적對症的 주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도에서 직전된 정통밀교를 배우고 귀국하여 그것을 조직화, 통합화함은 물론 진언다라니 이면에 펼쳐진 장대한 밀교적 통일세계의 존재를 일본문화에 각인시킨다. 그리고 쿠우카이에 의해 형성된 밀교문화는 불교를 넘어 일본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사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밀교존상들은 일본불상을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입당 전에 쿠우카이가 수행했던 지역들은 성지로서 정착되어, 시코쿠88개소(四国八十八っ個所), 긴푸센성지 등으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1. 일본 밀교문화의 아버지 쿠우카이(空海).)
진언종의 핵심은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면서 손으로는 수인을 맺는, 그리고 마음은 삼매에 두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수행법이다. 즉신성불은 현신성불現身成佛, 현생성불現生成佛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현실의 육신肉身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성불成佛하는 수행법이다. 이 몸 그대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하여 귀족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높았고, 의식의 화려함과 장엄함으로 인해 천황 등 지배층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이후 진언종은 점차 조정朝廷과 밀착되어 갔으며, 사가[嵯峨] 천황으로부터 ‘어대사御大師’의 직위를 받는다.
사후 구카이는 신앙의 대상이 된다. 다이시[大師] 신앙은 홍법대사 구카이를 신앙하는 것으로, 밀교에서 추앙하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동일시되었다. 비로자나불(Vairocana)은 산스크리트어로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라는 의미로 불교의 진리, 곧 법法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이다. 태양신을 이상화 한 것으로 민간에서는 태양이 소생하는 동지에는 구카이가 방문한다고 하여 무와 팥죽을 준비해 두고 그를 기다리는 풍속이 생겨났다. 오늘날에도 일본 각지의 명찰에서는 삿갓을 눌러쓰고 지팡이를 짚은 맨발의 구카이 동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다이시 신앙의 정점에 있는 홍법대사 구카이는 고야산(高野山)의 오쿠노인(奧の院)의 영굴(靈窟)에서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이루어 생신(生身) 그대로 오늘날까지도 계속 살아 있는 존재라고 숭배되고 있다. 고야산을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서 살아 있는 구카이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들이 속출하며 오늘날에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한 신앙 형태와 그 심화 정도는 일본의 각지에 산재한 구카이가 수행하였다는 장소에서 ‘헨로(遍路)’라고 일컬어지는 많은 순례자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순례복인 흰 옷차림의 등에는 ‘나무대사변조금강(南無大師遍照金剛 : 이 명호는 구카이를 가리키는 것이다.)’이라는 문자를 적고 삿갓에는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고 적어 죽는 순간까지도 구카이와 함께 한다는 신앙심을 나타내고 있다. (박보경,「생활불교의 빛과 그림자」, 2008.)
또 소원 성취를 위한 비밀스러운 밀교의식을 행하는 등 세속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기복적 성격도 강했는데, 무엇보다도 주술적인 진언을 외우는 것만으로 재난을 피하고 복을 받는다는 단순함으로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훗날 기복 신앙적 성격만 강조되어 보편성이 결여된 미신迷信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민중 사이에서 빠르게 전파되어 그가 입적할 즈음에는 가장 강력한 불교 종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천태종와 진언종은 교단조직을 확립하고,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점에서 일본 종파불교의 원형이 되었다. 당시 관승 집단 안에는 사이초의 천태종과, 구카이의 진언종을 중심으로 불교 연구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일승一乘사상, 실유불성설悉有佛性說과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사상은, 헤이안 시대 불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으며 가마쿠라 신불교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마츠오 겐지松尾剛次 지음, 김호성金浩星 옮김,『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 p. 68.)
최징과 공해에게 있어서 최고 진리의 탐구방향은 대조적으로, 최징은 우주를 구극究極적인 방향에서 원심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고, 공해는 우주를 정신의 내면적인 방향에서 구심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징은 구극의 진리에 해당하는 법화경의 일승묘법을 근간으로 삼았고, 공해는 정신의 내면의 신비에 해당하는 진언밀교의 비법을 핵심으로 삼아, 각각 사상·철학의 총합체계화를 꾀했던 것이다.
공해의 사상체계는 훌륭하게 완결된 것으로서 교리적으로는 덧붙일 여지가 없다. 그 때문에 공해 이후의 진언종은 오로지 신비한 체험의 기술을 연마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른바 敎相에 대한 事相의 중시이다. 히에이산은 인격완성의 도량, 진리탐구의 배움터가 되었던 반면, 高野山은 비법전수의 신령한 도량, 신비한 체험의 영산이 되었다. (동국대학교불교문화대학불교교재편찬위원회,『불교사상의 이해』「8. 천태사상의 역사와 전통」에서 인용.)
3) 진언종眞言宗의 총본산 곤고부지[金剛峰寺]
코오야잔[高野山]은 보통 와카야마현[和歌山県]에 있는 해발고도 1,000m 전후의 산들을 일컫는다. 동시에 고야산高野山은 불교의 성지로 그 산에 세워진 불교 사찰 단지를 지칭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특별히 고야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없고, 이 지역 전체를 포괄하여 부르는 이름인 것이다.
816년 홍법대사 구카이는 천황의 승인을 받아 고야산을 중심으로 진언종眞言宗을 창시創始했으며, 그가 수행하고 입적한 영장靈場이자, 진언밀교의 성지聖地이다. 이후 이 지역은 수백 개의 사찰과 수행 도량이 들어서 오늘에 이르는데, 그 중 곤고부지[金剛峰寺]는 819년 구카이가 수행했 곳으로 진언종의 총본산이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1년에 재건되었고, 1869년에야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자체 안내문을 보니 이 장소엔 1131년 도바상황(鳥羽上皇)의 명으로 대전법원이 세워졌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3년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청암사(靑巖寺, 세이간지)를 세웠는데, 후일 흥산사(興山寺, 코잔지) 라는 절과 통합되어 고야산 진언종의 종정격인 관장(管長)이 주석하는 총본산 역할을 담당하다, 메이지 원년 금강봉사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곳 금강봉사는 방장 역할 즉 승려수행, 생활공간, 손님접대 등을 역할을 담당하고, 300 여 미터 서쪽에 자리한 단상가람은(壇上伽藍, 단조가란)은 근본대탑, 금당, 부동당 등 당우를 보유한 신앙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금강봉사 정문인 표문(表門)은 1593년 초창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금강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원래 이 문은 천황, 황족 그리고 고야산의 주요 인사들만 드나들 수 있었고 일반 승려는 경내 우측에 별도로 난 문을 통해 출입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이렇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 표문 입구에 달린 두 개의 등에는 금강봉사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출처] 개창 1200 주년 고야산 진언종 총 본산 금강봉사 (金剛峯寺, 곤고부지), 작성자 종이호랑이)
1593년 초창된 금강봉사金剛峰寺의 정문인 표문表門을 들어서면 주전主殿을 마주하게 된다. 30칸에 이르는 주전은, 길이가 60 미터나 되는 대형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63년 재건한 것이다. 주전은 본방本方이라고도 하는데,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자 수행공간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금강봉사의 본당本堂은 이웃한 절 단죠가란[壇上伽籃] 금당金堂이 대신하고 있어, 고야산의 주요 행사는 단상가람 금당에서 행해진다.
주전의 지붕은 히노키[편백扁柏]를 여러 겹 붙여 만들었는데, 지붕 위에는 물통인 천수통天水桶이 설치되어 있다. 이는 빗물을 받아 두었다가 화재 시 지붕을 적시기 위한 장치로, 화재 시 사람들이 지붕 위로 빨리 올라가게 하기 위해 사다리까지 고정 설치해 놓았다.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축물의 숙명으로 일본이 얼마나 화재에 민감한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물통은 대현관 쪽 지붕에도 설치되어 있다.
작은 반곡선 형태의 주전 소현관은 가라하후[당파풍唐破風]라고 하는 투구 모양의 지붕 장식이다. 완만한 ‘八’자 형태를 그리는 곡선의 당파풍唐破風은 일본의 절이나 신사神社에서 흔히 볼 수 있어 익숙한데, 무사들의 투구모양을 차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사찰이나 성곽, 귀족이나 무가의 저택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당파풍은 그 명칭 때문에 중국 유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 특유의 파풍 형식으로 그 역사는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의 선진적인 문물들을 모두 ‘당물唐物’이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뭔가 새로운 것에도 ‘당唐’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지붕장식에도 당파풍唐破風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日本建築の屋根を特徴づける「唐破風」)
금강봉사에는 반드시 보아야 할 명품 정원, 반류테이[반룡정蟠龍庭]가 있다. 반룡정은 비교적 최근인 1984년 만들어진 정원으로,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정원 양식인 고산수枯山水 정원이다. 고산수 정원이란 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바위 모래 정원으로, 바위로 산을 표현하고, 돌을 쌓아 폭포수를 나타내며, 흰 모래에 물결무늬를 넣어 흐르는 물을 나타낸다.
4) 고야산 신앙중심 단조가란[壇上伽藍]
금강봉사를 나와 오른 편으로 약 300 미터 거리에는 단조가란[壇上伽藍]이 있다. 단상가람壇上伽藍은 구카이가 진언종을 개창하면서 신령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제당祭堂을 건립한 곳이다. 입구인 츄몬[中門]은 고야산 입구에 있는 다이몬[大門]에 대응하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대문大門에 이어지는 중문中門으로 단상가람의 정문이 된다.
단상가람은 1843년 대화재 때 서탑西塔만 남고 모든 당우들이 불탔다. 819년 창건 된 중문 또한 이때 소실되어 초석으로만 남아있던 것을, 2015년 고야산 개창 1,200주년을 기념해 복원하였다. 중문 정면에는 동방을 지키는 지국천持國天과 북방 다문천多聞天, 뒤로는 남방 증장천增長天과 서방 광목천廣目天 등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모셔져 있다. 안타깝게도 단상가람의 건물들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면서 원래의 목조가 아닌 대부분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그러므로 국보인 서탑과 후도도[不動堂] 등 몇 건물을 제외하면 역사적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하겠다.
행운이었는지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승려의 입학식 같은 행사가 있었는데, 그 행렬을 우연히 따라가게 되었다. 지도의 빨간 선을 따라 가며 건물들을 둘러보자. 행렬은 정문이 아닌 곤고부지에서 출발하여 사복로蛇腹路를 따라 왔다.
동탑東塔은 1127년 건립되었었으나, 1843년 화재로 소실되어 1984년에 재건된 탑이다. 단상가람에는 중앙에 근본대탑根本大塔과 더불어 동쪽과 북서쪽에 동탑, 서탑 등 두 개의 탑이 있다. 삼매당三昧堂은 대회당 동쪽에 있는 작은 당으로, 금강계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모셔져 있다. 삼매를 이룰 수 있는 수행당으로 정신집중 수행을 하는 곳이다.『법화경』에 근거한 법화삼매法華三昧와 염불삼매念佛三昧가 거행된다고 하는데, 헤이안 시대 승려이자 와카[和歌] 시인인 사이교[西行法師]의 수행 당이었다. 당 앞에는 서행법사 사이교가 심은 900년 된 벚나무 사이교 사쿠라[서행앵西行櫻]가 있다.
삼매당 다음 대회당大會堂은 도바[조익鳥羽, 일본 74대 천황] 법황(法皇은 불법에 귀의하여 출가한 천황을 말함)의 장녀가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본존은 아미타여래이며 협시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학습을 위한 공간으로 현재 법회가 열리는 공간이다. 불에 타서 소실된 것을 소화昭和 59년, 1984년에 홍법대사 입정 1150년을 기념해 재건하였다.
이어 애염당愛染堂, 부동당不動堂, 근본대탑根本大塔, 금당金堂 등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애염당은 금강계 만다라의 최고위 명왕明王 중 하나인 아이젠묘우오[애염명왕愛染明王]를 모신 곳이다. 인간의 애욕愛慾, 애집愛執은 버리기 힘든 것이기에 오히려 애욕을 통하여 해탈로 인도하는 신이 애염명왕이다. 서로 집착하는 데서 불거지는 남녀 간의 갈등을 풀어주고, 재앙災殃을 막아주는 신으로 부동명왕不動明王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많이 모시는 신이다.
애염당(愛染堂, 안젠도우) 맞은편에는 국보인 부동당(不動堂, 후도도)이 있다. 부동당은 금강삼매원金剛三昧院의 다보탑과 더불어 고야산 건물 중 두 개의 국보 중 하나다. 네 모서리의 모양이 각기 달라 네 명의 장인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동당의 본존은 부동명왕으로 운케이의 작품인 팔대금강동자八大金剛童子가 함께 모셔져 있다. 부동당 앞에는 연못이 있다.
곤폰다이도[根本大塔]는 공해 사후인 9세기 경에 세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차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38년 철근콘크리트로 다시 재건한 것이다.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태장대일여래胎蔵大日如来라는 독자적인 명호로 부르며 주존으로 모시고 있고,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사방에 금강계金剛界 사불四佛을 배치하였다. 금강계 네 부처는 동쪽으로 아촉여래阿閦如來, 서쪽으로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阿彌陀佛), 남쪽은 보생여래寶生如來, 그리고 북쪽에는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를 안치하였다.
진언종의 기본 경전인『대일경大日經』을 근거로 불보살들을 배치한 태장만다라胎藏曼茶羅의 세계를 구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밀교 경전에 설명되어 있는 태장만다라胎蔵曼荼羅의 불상과 금강계金剛界 만다라曼茶羅의 불상을 함께 모신 것은 양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공해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밀교의 진리를 입체적으로 만다라화한 것으로 근본 대탑이라는 이름 자체도 여기서 유래한다.
대탑의 종[大塔の鐘]은 1618년에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1624, 모친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모)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주조한 일명 고야사로[高野四郎]라고 불리는 대동종大銅鐘이다. 거듭되는 재앙으로 4번이나 주조되었는데, 현재 하얀 종각에 설치된 종은 4번째 것으로 높이 2.5m 직경 2.12m이다.
곤도[金堂]는 쇼와[正和, 1312~1317] 원년에 세워졌으나, 1926년 6번째 소실된 후, 1934년 공해 입적 100주년 기념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금당의 본존은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에서 구원해 준다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이고 아촉여래阿閦如來 등이 봉안되어있다. 고야산에 진언종을 창건할 당시에는 강당講堂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고야산 총본당總本堂으로 고야산의 주요 행사는 여기서 행해진다.
롯카쿠쿄조[육각경장六角經蔵]은 다보탑 형태의 경장이다. 12세기 초 도바(鳥羽, 1103~1156, 재위 1107~1123)법황의 부인이 남편의 명복(1156년 사망)을 빌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감색 종이[紺紙]에 은니로 선을 긋고 금가루를 개어 금니[金泥]으로 쓴『감지금니일체경紺紙金泥一切経』을 봉안했던 건물로, 현재의 경장은 1934년에 재건된 것이다.『감지금니일체경』은 무사히 보존되어 레이호칸[霊宝館] 박물관에 소장중이다.
육각경장은 한국 경북 예천 용문사에 있는 윤장대輪藏臺처럼 기단에 손잡이가 달려있어 돌릴 수 있게 한 회전식 경장이다. 나무 손잡이를 잡고 한 바퀴를 돌리면 봉납된 감지금니일체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으로 그러므로 해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감지금니일체경』은『황천경荒川経』으로도 불려 이 경장을 아라카와 케이쿠라[황천경장荒川経蔵]라고도 한다.
어영당과 금당 사이에는 산코노마츠[삼고송三鈷の松]이라고 불리는 세 잎 소나무가 자리한다. 공해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명주明州를 떠나면서 삼고저三鈷杵를 던졌는데, 그 삼고저가 보라색 구름[紫雲]을 타고 일본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공해가 귀국해 진언밀교 도장을 세우기 위해 고야산을 둘러보던 중, 밤에 빛을 발하는 소나무를 발견한다. 거기에 공해가 던진 삼고저가 붙어있어 이곳을 밀교의 중심지로 삼았다는 설명을 안내문은 하고 있다. 다소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이 소나무의 이파리가 삼고저처럼 세 개라(보통 소나무는 2개) 삼고송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참배객들은 이 잎을 가져다 부적처럼 소중히 간직한다고 한다.
미에도[어영당御影堂]는 공해의 위패를 모시는 지불당支佛堂으로 건립되었으나, 후일 대사의 초상화를 봉안해 어영당이 되었다. 어영당은 대사와 제자들의 초상화를 모시는 진영각眞影閣 정도 되는 당우로 고야산에서는 가장 중요한 성소 중 하나다. 일반인은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매년 음력 3월 21일 공해의 입적일 전야에나 공개된다. 이말 벌어지는 법요식, 정어영공(正御影供, 키유시요 미에쿠) 행사 때나 영정에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전야제 때는 수많은 참배객들 손에 들린 꽃과 촛불로 가람 전체가 가득 찬다고 한다.
쥰테이도[준지당准胝堂] 역시 비공개로 준제관음보살准提觀音菩薩을 모신 당이다. 준제관음准提觀音은 범어로 청정淸淨이라는 뜻의 춘디(Cundi)에서 온 곳으로 준지准胝 또는 준니准尼라고 음역된다. 인간 세계와 천상 세계를 청정하게 제도하는 관음으로, 중생의 모든 재화와 재난을 없애 모든 일을 성취시켜 주고, 목숨을 연장시켜 주며, 또 지식을 구하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하나인 준제准提는 무시이래無始以來 과거세過去世부터 부처님의 어머니로 여겨졌다. 부처를 출생시키는 불모佛母이기에 준지불로准胝佛母 또는 칠구지불모七俱胝佛母라고도 하는데, 출가득도의 본존으로 준제불모准提佛母 신앙의 모태가 된다. 한량限量없이 다라니陀羅尼를 설하여 중생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고 전해지는 18개의 팔을 가진 관음보살이다.
쿠쟈쿠도[공작당孔雀堂]에는 공작명왕상孔雀明王像이 모셔져있었으나 현재는 레이호칸[霊宝館]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공작명왕은 불모대공작명왕보살佛母大孔雀明王菩薩이라고도 하며, 불교의 밀교密敎에 나오는 가장 기원이 오래된 대표적인 명왕이다. 독사와 해충을 잡아먹는 공작을 신격화한 것으로, 명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분노하지 않은 자비로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바 법황의 명으로 기우제를 올렸는데, 비가 오자 보답으로 이듬해 공작명왕상을 모셨다고 한다. 공작당은 1926년 금당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함께 소실되었으나, 1983년 홍법대사 입정 1150년 기념사업으로 재건되었다.
어떤 행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 동작을 수차례 반복하였다. 학생들을 맞이하면서 공해가 법을 구해 오는 과정을 상징화해서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무슨 행사인지 일본 사이트들을 검색해 보았으나 찾지 못했고 계속 검색중이다. 행렬은 행사가 끝나자 산노우인[山王院] 쪽으로 이동하였다. 멀리 쇼로[종루鐘楼]가 보인다.
종루 남쪽에는 산노우인[山王院]과 미야시로[御社]가 자리한다. 미야시로 어사는 일명 묘진자[明神社]라고 하는데, 드물게 보이는 절 안에 있는 신사神社다. 산왕원은 지주地主의 신을 산왕山王으로 모시는 곳으로 우리로 치면 산신각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1171년 이전에 창건되었으나 문록文禄 3년(1594)에 재건되면서 어사御社의 배전拜殿이 되었다. 본래 그냥 진수사鎮守社라고 하였는데, 신불분리神佛分離 이후 배전이 되었고, 그러므로 해서 명신사 본전 3곳은 산왕원 본전이 되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안내판을 대강 훑어보니 니우묘진[단생명신丹生明神], 코야묘진[高野明神, 일명 수장명신狩場明神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총사総社[総,十二王子, 百二十伴神]의 세 신사가 병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홍인弘仁 10년 819년 고야산 산록山麓(산의 비탈이 끝나는 비스듬한 아랫부분)의 아마노사[天野社]에 모셔진 지주신地主神을 고야산의 수호신으로 권청勸請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594년에 재건된 명신사는 단생명신, 고야명신(수장명신), 총사의 세 건물, 토리이[鳥居, 도리이], 담까지 모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설에 단생명신과 카리바묘진[수장명신狩場明神]을 여기에 모신 데는 고야산 개창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한다. 공해가 수행에 적합한 곳을 찾고 있을 때, 흑백의 두 마리 사냥개를 지닌 사냥꾼과 만나게 된다.
사냥꾼이 수장명신(고야명신)으로, 그는 개를 주면서 개를 따라가 그 곳에 터를 잡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고야산이고, 공해는 고야산 산신인 단생명신에게 허락을 받아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 두 신을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데, 816년 공해가 고야산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가람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 지역의 신인 고야명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설이 보다 유력해 보인다.
이와 같이 사찰에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도리이가 사찰에는 어울리지는 않지만, 후대에 들어선 것은 아니고 공해와 관련 있는 단상가람 초기부터 함께한 역사적 건물인 것이다.
단상가람 경내 서북쪽 깊숙한 곳에 사이토[西塔]이 있다. 홍법대사 입적 후인 인화仁和 3年(887年)에 세워졌으나 네 차례 소실되었고, 지금의 탑은 1834년에 재건된 다섯 번째 탑이다. 1층은 방형이고 2층은 원형인 일본 최초의 다보탑으로 높이는 27m다. 일본 최초의 다보탑으로 일본에 산재한 다보탑의 원형이다.
앞서 살펴 보았지만 근본대탑엔 ‘태장계대일여래胎蔵大日如来’를 중심으로 금강계金剛界 사불四佛이 안치되어 있고, 이 서탑에는 금강계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태장계胎蔵界 사불四佛이 모셔져 있다. 태장계 사불은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천고뇌음여래天鼓雷音如来, 개부화왕여래開敷華王如来, 보당여래寶幢如來 등을 가리킨다.
이렇게 태장계와 금강계여래를 교차해서 배치한 것은 공해가 전파한 밀교 사상의 핵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양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공해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연유로 공해는 대일여래의 밀교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근본대탑과 서탑을 쌍으로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탑은 그의 생전에는 완공되지 못하고 사후인 886년에나 건립된다. 대가람 건립계획에 기초해 2대 주지 진연대덕이 건립했다고 하는데, 소실된 것을 1834년 재건하여 지금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5) 고야산高野山과 목포木浦 유달산儒達山
고야산에는 5대 중요 포인트가 있다. 첫째가 고야산 전체에 들어가는 대문(大門), 두 번째는 구카이 대사가 즉신성불하고 선정에 든 묘소 오쿠노인, 셋째는 구카이 대사가 창건한 단상가람, 넷째는 고야산 진언종 총본산 금강봉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쓰 가문의 장군묘역인 덕천가영대가 그것이다. 그것에 구태여 한 군데를 추가 한다면 지금 가려는 금강삼매원인데 그건 다보탑 때문이다.금강삼매원은 태생 자체가 구카이 대사의 진언종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400년 정도가 지난 1211년에야 세워진 사찰이다.
금강삼매원은 가마쿠라(鎌倉) 막부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이며 “비구니 쇼군”으로 불렸던 철혈여성 호죠 마사코(北條政子)가 남편을 애도하기 위해 1211년 선정원(禪定院)이라는 절집으로 세운 게 그 시초다. 이후 그의 아들이며 3대 쇼군인 사네토모가 죽자 그의 유골을 안치하는 동시 대대적 개축을 해 “금강삼매원”으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고야산의 중심인 진언밀교와는 하등 관계가 없이 세워진 절집인데 비교적 근세인 에도시대 초기에 진언종 금강봉사의 별원이 된 것이 간략한 역사다. ([출처] 고야산 금강삼매원 (金剛三昧院, 곤고산마이인)|작성자 종이호랑이)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어디가나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디가나 케이블카가 있고, 어디가나 길을 막고 돈을 요구하고, 산 밑 널찍한 주차장에도 주차료 받고, 절 문턱을 넘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 심한 데는 건물마다 돈을 따로 받는다. 거기다 어디가나 감시의 눈초리가 번득인다.
관리 차원에서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될까? 어디가나 빈틈없이 건물들을 세우고 유사한 모양의 정원으로 메워 놓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떨 때는 그냥 번잡할 뿐 편안함이 결여되어 있다. 일본 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풍수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이것일까?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느낌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요사이 한국도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어디가나 출렁다리, 어디가나 케이블카, 물론 편의시설 측면에서는 필요하고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관광 사업만 남았다, 예전같이 산야를 즐기며 숨겨진 문화재를 찾는 설렘은 이제 없어졌다고 하겠다.
단상가람에서 만난 기대하지 않은 행렬은 색달랐다. 문화재로만 접했던 그들의 문화유산은 여전히 삶의 현장이자 종교적 상징이었으며, 신앙의 원천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외국이다 보니 시간에 쫓겨 둘러보는데 급급하였다는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 그 덕에 문화재를 구석구석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건물들을 설명하려고 보니 많은 자료를 찾아보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몰랐던 것들을 배우는 기회도 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목포 유달산에도 홍법대사 공해와 부동명왕의 마애불이 있다. 1920년대 말 일본 진언종의 목포 진출과 함께 이들을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에 조각하였던 것이다.
유달산 일등바위에는 암벽을 이용하여 홍법대사상과 철퇴를 든 무서운 형상의 부동명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부동명왕 옆에는 유달산신이란 각서가 남아 있는데 해방되고 유달산 신사 글자를 지우다가 사자만 지우고 말았다. 또 노적봉에서 일등바위에 이르는 길목마다 88개소의 불상을 안치하여 일본 시고쿠 88사 영장 순례길을 유달산에 재현하였다. 일본 고야산에 본부를 둔 진언종의 목포 진출과 함께 그들이 성인으로 받드는 홍법대사와 비로자나불의 분노존인 부동명왕상을 조각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유달산에 올라 88개소의 영장을 예배하고 마지막으로 홍법대사에게 참배하였다.
해방과 함께 일제잔재라고 하여 88개소의 불상은 철거하였으나 일등바위에 커다랗게 새겨진 홍법대사와 부동명왕상은 보존되었다. 김영삼 정권 때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할 때 목포 유달산 일등바위의 부동명왕상과 홍법대사상도 또다시 철거목록에 올랐다. 철거반원들이 연장을 가지고 부동명왕을 바라보는 순간 부릅뜬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 자신에게 철퇴를 내리치는 모습이 연상되면서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온 몸을 떨다가 용서를 빌고 내려왔다.
유달산 일등바위에 새겨진 부동명왕과 홍법대사는 여러 차례 철거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 목포에는 일제 때 영사관 건물과 동양척식회사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중앙교회. 성산교회. 하나님의 교회등도 일제 때는 불교 사찰로 이용되던 곳이다. (「목포 유달산에 88사 순례처와 일등바위에 홍법대사를 모신 이야기」현장스님의 카스 불교문화대학.)
일본의 시코쿠 일대 88군데의 수행로에 홍법대사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순례하고 있는데, 고야산(高野山) 일대의 승려들은 수도를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더 충격적인 불교관련 유물들이 유달산에 만들어졌었다. 일본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기념행사를 위해 유달산 입구에서부터 일등봉, 이등봉 일대에 불상 88기를 세웠었다.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불상들은 하나하나에 일일이 번호를 새겨 유달산 등산로 곳곳에 세워졌다. 해방이후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그 터와 좌대 부분만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순자,「유달산신사」, 풍수와 함께하는 문화답사 https://cafe.daum.net/poongsooculture.)
6) 헤이안 시대 말기 말법사상末法思想
헤이안 시대 중기가 되자 율령국가체제의 근간이 되었던 토지제도의 변화가 생긴다. 일본은 전통적인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귀족의 장원莊園이 출현하였으며,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끊긴 승려들은 귀족들과 결탁하게 되었다. 종래의 진호국가를 위한 가지기도의 양태도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현세이익을 기원하는 주술적 가지기도로 바뀌게 되었다.
율령국가체제의 근간은 공지공민(公地公民)이었다. 즉 국가의 모든 백성과 토지는 국가의 소유라는 것이다. 국가는 공민들에게 일정 토지를 대여해 주고(구분전), 대신 공민들은 조(組, 세금)ㆍ용(庸, 군역 및 부역)ㆍ조(調ㆍ특산물을 바침)를 부담하는 반전수수법(班田收授法)이 시행되었다. 또한 구분전은 매매나 증여, 상속 등이 불가능하여 공민이 사망하면 다시 국가로 반환되었고, 성인이 되면 국가로부터 다시 구분전을 받는 형태였다.
그런데, 인구의 증가로 인해 공민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구분전이 부족하게 되자 국가는 개간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그 유도책으로서 개간된 토지에 대해 삼대(三代) 동안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이른바 삼세일신법(三世一身法)이 시행(723)되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급기야 개간 토지의 사유를 영원히 인정하는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이 시행되기에 이른다(743).
이를 계기로 자본을 가진 중앙의 귀족들이나 유력 사원, 지방의 호족들이 적극적으로 개간에 나선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사유지를 소유한 유력 귀족들이 등장하게 되고, 천황에게 집중되었던 자본과 권력이 조금씩 귀족들에게 누수 되는 결과를 낳는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3. 국가불교에서 귀족불교로.)
당초 수도를 교토로 옮길 때의 의도와는 달리 승가의 타락과 더불어 부패가 만연하자, 기성 불교교단에 반발해서 불교의 전형적인 형식을 무시하고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일반 민중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출현한다. 이들 비주류 승려들을 히지리[聖]라 불렀다. 이들은 술과 고기를 먹고, 승복이 아닌 옷차림으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아미타 부처의 명호를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단순한 형식의 불교신앙을 전파하였다. 수도 교토에서 보살행菩薩行과 칭명염불稱名念佛의 공덕을 설해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시장속의 성인, ‘이치 히지리[市聖]’ 쿠야[空也, 903~972]가 대표적이다.
922년 오와리노쿠니(尾張国, 지금의 아이치켄 서부)의 국분사에서 출가하여 스스로 쿠야(空也)라고 자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국을 유행하며 도로정비, 교량건설, 사원건설, 우물을 파는 등, 민중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업들을 행한다. 또한 풍장으로 들판에 방치된 시신을 수습하여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며 다시 화장하였다고 하며, 늘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고 다녔기 때문에 그를 ‘아미타히지리(阿弥陀聖)’라고 하였고, 그가 판 우물을 ‘아미타정(阿弥陀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중략)
쿠야의 일생은 형식화되고 고착화되어가던 헤이안 불교계를 일신시키는 새로운 바람이었다. 민중들에게 칭염염불을 보급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다양한 사회사업은 성자라는 칭호로도 부족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에 의한 정토신앙의 보급과 민중적 확산이야 말로 가마쿠라 신불교의 태동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5. 저자의 성자 큐야, 겐신의 ‘왕생요집’.)
당시 많은 사람들은 말법사상에 심취해갔고, 사회에는 일종의 염세주의적 경향이 널리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끊임없는 내란과 양화1년 1181년 6월에 있었던 가뭄, 가을 대폭풍우로 인한 유래 없는 흉작, 1182년에 있었던 역병 등 사회 혼란이 배경이 되었다.
『방장기方丈記』의 저자는 이 양상을 보고 “고약한 냄새가 세계에 가득했다”고 말하고 있고, 또 기요미주(淸水)의 다리 밑에서는 어린 아이를 먹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여,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전재지변을 통한 기근과 굶어 죽은 자의 속출로 한 마을 전체가 백골의 들판으로 바뀌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중략)
정치체제와 사회기구에서 오는 극심한 재해의 비극은 당시 사람들 눈에는 정치의 빈곤과 지배형태에서 초래된 일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천재지변에서 초래된 현실세계에서의 지옥도를 가져오는 것은 다름 아닌 말법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p. 166~167.)
이런 혼란 속에 호넨[法然, 1133~1212]은 왕생往生, 즉 이 세상을 떠나 정토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 다른 잡행雜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하라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제창하였다.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태어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은 대중적 호응을 얻는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천태종에서 독립하여 정토종淨土宗을 세운다.
호넨의 제자 신란[친란親鸞, 1173~1262]도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만 왕생이 이루어진다는 타력신앙을 강조하였다. 그는 룻카쿠도[육각당六角堂]에서의 꿈, ‘유메오츠게[몽고夢告]’를 근거로, 승려가 결혼해도 좋다는 주장을 폈는데, 부처가 꿈에 나타나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익숙하지만 당시 승려의 결혼, 즉 대처帶妻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승려들은 계단에서 계를 받을 때 불음계不淫戒를 맹세하기 때문이다.
이후 그의 제자들은 자유로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계율의 준수도 필요 없게 되었다. 이 전통은 메이지 유신 이후 대부분의 종파들에게 받아들여져 일본 불교의 특징이 되었다. 신란은 또한 정토종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운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 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의 탄생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 가운데 말법사상末法思想이 유행하였다. 오로지 구원만을 위해 염불을 외는 전수專修운동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 염불과 선, 또는『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종파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민중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점점 뿌리 깊게 자리잡아간다. 그중 정토종과 정토진종의 대중적 성공은, 종래의 국가불교 귀족불교에서 민중의 불교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마쿠라시대에 더욱 확대되었다.
일본의 정토신앙은 고려나 조선에서 강력한 대중신앙형태로 발전한 미륵신앙과도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은 아스카 시대 백제로부터 미륵신앙이 유입되었으나 대중의 호응을 얻지는 못하다가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에 이르러 아미타여래 신앙에 기반을 둔 정토종으로 그 적통嫡統 성을 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올 김용옥,『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pp. 192~193.). 한편 중국에서는 미륵신앙이 일찍 쇠퇴하여 지금은 배부른 포대화상 쯤으로 형상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