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 해적이◆ (수정 증보판)
김슬옹(2018). ≪세종학과 융합인문학≫. 보고사. 591-606쪽.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태조 6년) 한양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일대, 세종마을) 잠저에서 정안군(이방원, 훗날 태종)과 민씨 부인(훗날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다.
1408년 2월(태종 8년, 12세) 충녕군에 책봉되고 심온의 딸과 혼인하다.
1412년 5월 3일(태종 12년, 16세) 충녕군, 충녕대군에 오르다.
1418년 6월 3일(태종 18년, 22세) 세자인 양녕대군(이제)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다.
1418년 8월 8일(세종 즉위년 22세)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앉고 22세의 세자(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다(국보 내려줌).(태종실록 36권)
1418년 8월 10일(양력 9월 9일, 세종 즉위년 22세) 세종이 근정전에서 즉위하다.(태종실록 36권)
1418년 8월 11일(세종 즉위년 22세) 근정전에서 즉위 교서를 발표하며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하기로 다짐하다.(《세종실록》 첫 기록)
1418년 8월 22일(세종 즉위년 22세) 사은사로 북경에 갔었던 원민생(元閔生)이 ‘황제가 세자 교체를 준허(準許)하였다’는 요지의 예부 자문(咨文)을 싸가지고 귀국했다.
1418년 10월 7일(세종 즉위년, 22세) 첫 경연을 열고, 경연관들의 《대학연의》 강론을 듣고 과거 방식과 인재 선발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1418년 11월 3일(세종 즉위년 22세) 임금이 되어 처음으로 경외의 관리들이 행해야 할 7가지 조목을 공문으로 하달하다.
1418년 12월 23일(세종 즉위년 22세)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태종이 세종의 장인인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다.
1418년 12월 25일(세종 즉위년 22세) 정도전이 첨삭한 《고려사》를 고쳐 짓게 하다.
1419년 2월 25일(세종 1년 23세) 기자(箕子, 고조선 때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기자조선의 시조)의 비석을 세우게 하다.
1419년 6월 17일(세종 1년 23세) 상왕의 명으로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가 227척의 배와, 1만 7285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다.(17일은 바람이 심해서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이틀 뒤인 19일에 출정한 것으로 되어 있음)
1419년 9월 20일(세종 1년 23세) 변계량 등에게 《고려사》를 고쳐 쓰게 하다.
1419년 9월 26일(세종 1년 23세) 노상왕(정종)이 인덕궁의 정침에서 63세로 서거하다.
1419년 1월 2일(세종 1년 23세) 대행 상왕(정종) 재궁이 발인하여 능소(陵所)에 이르다.
1420년 3월 16일(세종 2년 24세) 집현전을 확장하여 영전사, 대제학, 제학, 부제학, 직제학, 직전, 응교, 교리, 부교리, 수찬, 부수찬, 박사, 저작, 정자 등의 관원을 두다.
1420년 7월 10일(세종 2년 24세) 태종의 왕비가 중궁(中宮)에 정위(正位)한 지 21년 만에 춘추 56세로 별전에서 훙(薨)하다.
1420년 9월 17일(세종 2년 24세) 천전을 거행하고 왕비의 재궁을 받들어서 현궁에 하관하다.
1420년 10월(세종 2년 24세) 동활자 경자자(경자년에 만든 활자)를 만들기 시작하다.
1421년 1월 30일(세종 3년 25세) 유관과 변계량이 교정한 《고려사》를 세종에게 바치다.
1421년 3월 24일(세종 3년 25세) 주자소에서 경자자를 완성하고, 이천과 남급으로 하여금 인쇄술을 개량하게 하여 하루 수십, 수백 장을 찍을 수 있게 되다.
1421년 6월 9일(세종 3년 25세) 율문의 옥구도(獄具圖)를 참작하여 신장(訊杖)의 교판을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게 하다.
1421년 7월 2일(세종 3년 25세) 서운관에 있던 《천문비기(天文秘記)》를 궁중으로 옮기다.
1421년 10월 27일(세종 3년 25세) 창덕궁 인정전에서 원자 이향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책문을 내리다.
1421년 12월 22일(세종 3년 25세) 형조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조사할 때는 반드시 제1심 판결을 상세히 검토하도록 규정을 정하다
1421년(세종 3년 25세) 남양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다.
1422년 1월 21일(세종 4년 26세) 신문고의 절차와 처벌 규정을 보완하다.
1422년 5월 10일(세종 4년 26세) 태상왕(태종)이 연화방 신궁에서 춘추 56세로 훙하다.
1422년 9월 6일(세종 4년 26세) 태상왕(태종)의 재궁을 발인하여 대모산의 헌릉에 장사지내다.
1423년 2월 25일(세종 5년 27세) 임금의 첫딸인 정소공주가 13세로 죽다.
1423년 6월 5일(세종 5년 27세) 수령의 임기를 30개월에서 60개월로 연장하다.
1423년 7월 3일(세종 5년 27세) 부왕 태종이 승하하고 처음으로 신하들에게 왕지를 내려서, 백성을 은혜로 기르고 어루만져 편안하게 해주고(혜양무수), 백성의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없애주어 모든 백성이 살아가는 즐거움(생생지락)을 느끼게 하라고 이르다.
1423년 12월 29일(세종 5년 27세) 춘추관의 유관, 윤회에게 《고려사》를 고쳐서 다시 짓게 하다.
1424년 2월 8일(세종 6년 28세) 창덕궁 서장문 안에 사청(射廳)을 지어서 상대호군 삼군진무를 입직시켜 활쏘기를 익히게 하다.
1424년 11월 18일(세종 6년 28세)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생(笙)․화(和)․우(芋) 등의 악기를 만들다.
1424년 11월 24일(세종 6년 28세) 지조소(종이를 만드는 곳)에서 호절지(蒿節紙)․송엽지(松葉紙) 등을 만들다.
1425년 2월 2일(세종 7년 29세) 처음으로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다.(동전 주조에 대해 의논하고 이름을 조선통보로 정하다.)
1425년 2월 24일(세종 7년 29세) 박연의 건의에 따라 악학 관련 문신을 두어 악서를 짓게 하다.
1425년 6월 23일(세종 7년 29세)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의 진언에 따라 동반은 4품 이상, 서반은 2품 이상으로 하여금 매일 들어와서 윤대(輪對)하게 하다.
1425년 7월 7일(세종 7년 29세) 왕지(王旨)를 ‘교지’라 고쳐 부르다.
1425년 8월 26일(세종 7년 29세) 남양에서 나는 돌로 ‘석경’이라는 악기를 만들게 하다.
1425년 9월 4일(세종 7년 29세) 가마 모양의 운반용 수레 강주(杠輈) 2백 대를 제작하여 널리 나눠 주다.
1425년 9월 25일(세종 7년 29세) 평양에 단군 사당을 세우게 하다.
1425년 11월 2일(세종 7년 29세) 경상감사 하연이 《입학도설(入學圖說)》, 《사서(四書)》 등을 지어 올려, 이를 사부 학당에 나누어 주다.
1425년 11년 8일(세종 7년 29세) 주자(쇠붙이를 녹여 부어 만든 활자)로 인쇄한 사마천의 《사기》를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1426년 2월 15일(세종 8년 30세) 한성부에 큰 불이 나 경시서와 북쪽의 행랑, 중부․남부․동부의 인가들이 불타다.
1426년 2월 26일(세종 8년 30세) 금화도감을 설치하다.
1426년 4월 17일(세종 8년 30세) 여성 관노기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기존의 7일에 백일간을 더 주게 하다.
1426년 9월 22일(세종 8년 30세) 여진어에 능한 자를 사역원에 속하게 하여 야인관 통사로 삼다.
1426년 12월 3일(세종 8년 30세) 수찬색이 《속육전》과 《등록》을 편찬하여 바치다.
1426년 12월 11일(세종 8년 30세)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는 이를 뽑아 사가 독서(집이나 절에서 국비로 연구하는 제도)를 하게 하다.
1426년 12월 15일(세종 8년 30세) 《신속육전》․《원육전》과 《등록》을 주자소로 하여금 인쇄케 하다.
1427년 5월 15일(세종 9년 31세) 박연이 남양에서 나는 돌로 1틀(12개)의 편경을 만들다. 박연이 석경을 만들어 바치다.
1427년 9월 11일(세종 9년 31세) 《향약구급방(고려시대 1236년, 고종 23년경에 최초 간행 추정)》을 인쇄하여 널리 알리게 하다.
1428년 윤 4월 1일(세종 10년 32세) 경상도에서 인쇄하여 바친 중국의 《성리대전》 50부를 문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1428년 9월 25일(세종 10년 32세) 신백정(천민 계급에 대하여 관아에서 내린 칭호)을 평민과 함께 군사 인원으로 뽑다.
1429년 2월 5일(세종 11년 33세) 금령의 조문을 요약하여 광화문 밖 등지에 내걸게 하다.
1429년 3월 23일(세종 11년 33세) 밤중에 서울의 훈도방 거리에서 왜관의 통역사 이춘발이 홍성부라는 인물이 동원한 폭력배들에 의해 피살되다.
1429년 4월 22일(세종 11년 33세) 강원도에서 《사서대전》 50건을 인쇄하여 바치다.
1429년 7월 18일(세종 11년 33세) 세자의 배필인 휘빈 김씨를 사제로 내쫓다.
1429년 9월 15일(세종 11년 33세) 서울 용산 강상(江上)에 위치한 군자감의 기울어진 건물을 똑바로 세우려다가 승도 다섯 명이 압사하고 30여 명이 부상하다.
1429년 5월(세종 11년 33세) 정초 등에게 명하여 《농사직설》을 짓게 하다.
1430년 1월 26일(세종 12년 34세) 봉상시 윤 이안경을 강원도에 보내어 요도(여뀌섬)를 방문하게 하다.
1430년 2월 14일(세종 12년 34세) 정초 등이 지은 《농사직설》을 각 도에 배포하다.
1430년 3월 5일(세종 12년 34세) 새로운 공법(토지세법)에 대한 여론 조사를 지시하다.
1430년 4월 3일(세종 12년 34세) 상호군 홍사석과 전농 윤 신인손을 각각 강원도와 함길도로 보내어 요도(여뀌섬)를 찾아보게 하다.
1430년 8월 10일(세종 12년 34세) 호조에서 새로운 공법(토지 세금법)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고함(17만 여명의 백성들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 8,657명이 찬성, 7만 4,148명이 반대).
1430년 9월 27일(세종 12년 34세)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박서생의 제안에 따라, 물을 타고 저절로 회전하면서 물을 퍼 올리는 일본식 수차(水車)를 적극 보급하게 하였다.
1430년 10월 25일(세종 12년 34세) 상정소(詳定所)에서 관청에서 복무하는 여종이 아이를 낳을 달과 낳은 후 백 일 동안 휴가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다.
1430년 윤12월 1일(세종 12년 34세) 정인지 등이 《아악보》를 완성하다.
1430년 윤12월 9일(세종 12년 34세) 예문제학 윤회로 하여금 전국 감사에게 내리는 일반교서를 짓게 하다.
1431년 2월 20일(세종 12년 34세) 포천으로 강무를 갔다가 갑작스러운 기상변화로 호종하던 군인 26명과 말 69필과 소 1두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다.
1431년 3월 2일(세종 13년 35세) 명나라에 유학생(김한, 김자안)을 보내 산법(산수)을 배우게 하다.
1431년 3월 17일(세종 13년 35세) 춘추관(春秋館)에서 《태종실록(太宗實錄)》 36권을 편찬하여 올리다.
1431년 4월 25일(세종 13년 35세) 예문관 검열 김문기를 보내서 《태조․공정․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다.
1431년 5월 11일(세종 13년 35세) 주자소에서 《직지방(直指方)》,《상한류서(傷寒類書)》, 《의방집성(醫方集成)》, 《보주동인경(補註銅人經)》 등을 인쇄하게 하다.
1431년 6월 2일(세종 13년 34세)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전례를 들어 공평하고 신중한 옥사 판결을 명하는 《휼형교지》를 친히 지어 반포하다.
1431년 6월 23일(세종 13년 35세) 조서강과 권극화에게 《대명률》을 상정소에서 이두로 번역해 풀이하게 하다.
1431년 11월 4일(세종 13년 35세) 충신도를 모아서 기록하게 하다.
1431년 12월(세종 13년 35세) 노중례 등이 《향약채취월령(鄕樂採取月令)》을 편찬하다.
1432년 1월 19일(세종 14년 36세) 맹사성 등이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편찬하다. 화포(火砲)를 비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다.
1432년 6월 9일(세종 14년 36세) 집현전 부제학 설순이 효자, 열녀, 충신 100인의 행적을 그리고 사실을 기록한 뒤 시를 붙인 《삼강행실》을 편찬하다.
1432년 가을(세종 14년 36세) 천문관측소 간의대(簡儀臺)를 만들다.
1432년 10월 12일(세종 14년 36세)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군역을 치루고 있는 신백정 자제에게 향학(鄕學)에 입학하는 것을 허가하다.
1433년 1월 1일(세종 15년 37세) 회례연에서 편경 연주를 듣고 아홉 번째 줄 소리가 약간 높음을 박연에게 지적하다.
1433년 1월 4일(세종 15년 37세) 상정소 도제조 《경제속육전》을 완성하여 올리니, 임금이 주자소에 명하여 인쇄하게 하였다.
1433년 4월 26일(세종 15년 37세) 최윤덕 등이 15,0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압록강변의 여진족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다.
1433년 5월 3일(세종 15년 37세) 원묘인 문소전이 완공되어 태조와 태종의 신위판을 이안(移安)하다.
1433년 6월 9일(세종 15년 37세) 정초, 박연, 김진 등이 혼천의를 만들다.
1433년 6월 11일(세종 15년 37세) 집현전의 유효통, 노중례, 박윤덕 등이 우리나라 질병과 풍토에 적합한 한의학 책 《향약집성방》 85권을 집필하다.
1433년 9월 16일(세종 15년 37세) 장영실이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다.
1433년 10월 24일(세종 15년 37세) 부민고소금지법을 개정하여, 부민이 자기의 원억을 호소하는 소장은 수리하여 바른 대로 판결해 주되, 관리의 오판에 대한 책임은 묵인하게 하다.
1434년 3월 5일(세종 16년 38세) 노중례에게 명하여 《태산요록(胎産要錄)》을 편찬하게 하고, 주자소로 하여금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1434년 4월 26일(세종 16년 38세) 아기 낳는 여종의 남편에게 30일 휴가를 주게 하다.
1434년 4월 27일(세종 16년 38세) 《삼강행실》을 인쇄하다.
1434년 6월(세종 16년 38세) 밀양에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간행하다.
1434년 6월 24일(세종 16년 38세) 장영실 등이 자격루를 만들다.
1434년 7월 1일(세종 16년 38세) 장영실 등이 만든 새 누기(漏器, 물시계)를 사용하다.
1434년 7월 2일(세종 16년 38세) 이천이 총감독(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참여)하여 인쇄판과 글자에 관한 법을 개량하고, 새 활자인 갑인자(甲寅字)를 만들다. 진양대군 이유(훗날 세조)가 글씨를 써 20여만 자를 만들어 하루에 40장까지 인쇄하여 예전보다 인쇄가 갑절 쉬어지다.
1434년 7월 16일(세종 16년 38세) 갑인자로 《자치통감》을 간행하다.
1434년 10월 2일(세종 16년 38세) 한자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열두띠 동물신 그림으로 시각 표시를 한 앙부일구(오목 해시계)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해 시간을 알게 하다.
1435년 3월 7일(세종 17년 39세) 사헌부에 전지하여 효령 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베푸는 것을 금하지 말게 하다.
1435년 4월 17일(세종 17년 39세) 회암사에 쌀 50석을 내려주다.
1435년 5월 12일(세종 17년 39세) 흥천사의 사리각을 헐고 수리할 것을 승지들에게 이르다.
1435년 9월 12일(세종 17년 39세)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기다.
1435년 10월 19일(세종 17년 39세) 목판을 구주자소(舊鑄字所)에 두고 교서관(校書館)에서 관리하게 하다.
1435년 11월 20일(세종 17년 39세) 《속전》을 수찬할 때 제외시킨 조건들을 주자소에 인쇄하게 시켜서 맨 뒤에다 붙이게 하다.
1436년 4월 4일(세종 18년 40세)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여 인쇄, 배포하다.
1436년 4월 12일(세종 18년 40세) 의정부와 육조의 관계를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바꾸다.
1436년 10월 26일(세종 18년 40세) 두 번째 세자빈 봉씨를 폐출시키다.
1436년 12월 28일(세종 18년 40세) 의정부에 교지를 내려서 양원 권씨를 세 번째 세자빈으로 책봉하다.
1436년 12월(세종 18년 40세) 백과전서인 《운부군옥(韻府群玉)》을 간행하다.
1436년 12월(세종 18년 40세) 《자치통감강목훈의》를 인쇄하기 위해 수양대군 유에게 글을 쓰게 하고 납 활자 병진자(丙辰字)를 만들다.
1437년 4월 15일(세종 19년 41세) 정초, 장영실, 김빈 등이 시계의 일종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현주일구(懸珠日咎)․행루(行漏)․천평일구(天平日咎) 등을 새로 만들다.
1437년 7월 23일(세종 19년 41세)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농사직설》 등을 활용해 농사짓는 법을 백성에게 권장하게 하다.
1437년 9월 22일(세종 19년 41세) 평안도절제사 이천에게 병사 8,000명을 주어서 압록강 너머 여진족을 재차 정벌하게 하다.
1438년 1월 7일(세종 20년 42세) 대호군 장영실이 흠경각(천문 시계인 ‘옥루’를 설치한 곳)을 완성하고 천체를 관측하다.
1438년 1월 10일(세종 20년 42세) 태종에 의해 폐세자되어 경기 이천으로 쫓겨나 살던 양녕대군을 서울에 들어와 살도록 허락하다.
1438년 3월 2일(세종 20년 42세) 임금이 《태종실록》을 보려고 하였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여 그만두다
1439년 1월 13일(세종 21년 43세) 강화의 왜닥씨를 충청도 태안, 전라도 진도, 경상도 남해․하동에 나누어 심게 하여 종이 원료의 생산을 확대하다.
1439년 2월 2일(세종 21년 43세) 서울과 지방의 옥에 대한 설비기준을 마련하다.
1439년 2월 6일(세종 21년 43세) 한성부에서 《검시장식》을 간행하고 각도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1439년 7월 3일(세종 21년 43세)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史庫, 국가의 중요한 책을 보관하는 곳)를 짓게 하다.
1440년(세종 22년 44세) 최치운, 이세형, 변효문김황 등이 검시지침서인 《무원록》에 주해(註解)를 더하고 음훈을 붙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완성하여 올리니, 목판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였다.
1441년 3월 17일(세종 23년 45세) 거리 측정 장치가 붙은 기리고차(記里鼓車)를 만들어 사용하다.
1441년 6월 28일(세종 23년 45세) 정인지에게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게 하다.
1441년 7월 23일(세종 23년 45세) 왕세자빈 권씨가 원손(훗날의 단종)을 낳다.
1441년 7월 24일(세종 23년 45세) 왕세자빈 권씨가 졸하여 조례(弔禮)를 행하다.
1441년 8월(세종 23년 45세) 양수표(강이나 저수지 따위의 수위를 재기 위해 설치하는 눈금이 있는 표지)를 세우다.
1441년 8월 18일(세종 23년 45세) 세자(이향, 훗날 문종)의 아이디어로 장영실 등으로 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다.
1441년 9월 29일(세종 23년 45세) 이선, 박팽년, 이개 등이 명을 받아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짓다.
1441년 10월 18일(세종 23년 45세) 《직해소학(直解小學)》 200본을 인쇄하여 향교와 문신에게 나누어 주다.
1442년 5월 8일(세종 24년 46세) 비의 양을 측정하는 제도를 마련하다.
1442년 8월 12일(세종 24년 46세) 신개, 권제 등이 《고려사》를 지어 올리다.
1442년 9월 3일(세종 24년 46세) 의정부에서 첨사원의 제도를 개정하여 아뢰다.
1442년 9월 12일(세종 24년 46세) 죄인의 사망보고서를 형조에서 자세히 핵실하도록 하다.
1442년 9월 30일(세종 24년 46세) 집현전에 명하여 행정 제도에 관한 《사륜전집(絲綸全集)》을 편찬하도록 하고, 정인지로 하여금 《사륜전집》을 요약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게 하다.
1443년 4월 17일(세종 25년 47세) 임금의 병이 심하여 세자가 정사를 섭행하고 승화당에 남면하여 조회 받도록 승지들에게 명하다.
1443년 12월 (세종 25년 47세) 훈민정음(언문) 28자를 창제하다.
1444년 2월 16일(세종 26년 48세) 집현전에 명하여 《고금운회(古今韻會)》를 언문으로 풀어 쓰도록 하다.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령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훗날 문종)과 진양대군(훗날 수양대군) 유(柔), 안평대군 용(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다.
1444년 2월 20일(세종 26년 48세)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과 더불어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7인 연합 언문반대상소문을 올리다.
1444년 윤7월 25일(세종 26년 48세) 옛 성현들의 교훈이 담긴 《권농교서》를 반포하여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게 할 것을 전국의 관리들에게 하교하다.
1444년 11월 24일(세종 26년 48세) 삼한 국대부인 안씨가 졸하니 염습(斂襲)에 관한 제구(諸具)를 전부 관(官)에서 갖추어 공급하도록 명하고, 부의를 후하게 내려주다
1444년 12월 7일(세종 26년 48세) 5남 광평대군 이여가 창진을 앓다가 20세로 죽다.
1445년 1월 7일(세종 27년 49세) 신숙주, 성삼문, 손수산을 요동에 보내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다.
1445년 1월 16일(세종 27년 49세) 7남 평원대군 이임이 홍역을 앓다가 19세로 죽다.
1445년 3월 30일(세종 27년 49세) 정인지 등이 《치평요람》을 만들다. 이순지 등이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 등을 편찬하다.
1445년 4월 5일(세종 27년 49세)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시가 총 125장)을 지어 올리다.
1445년 9월 29일(세종 27년 49세) 세자가 임금을 대신하여 평강현에서 강무하다.
1445년 10월 27일(세종 27년 49세) 3년에 걸쳐 365권으로 편찬된 의학백과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가 완성되다.
1446년 3월 24일(세종 28년, 50세) 세종의 왕비(소헌왕후)가 수양대군 집에서 승하하다.
1446년 9월 상순(세종 28년 50세)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을 완성하여 펴내다.
1446년 9월 27일(세종 28년 50세) 12율의 기본음인 황종율(黃鐘律)을 낼 수 있는 정확한 황종관(黃鐘管)을 만들고, 그 길이를 기준으로 영조척(營造尺; 목수가 쓰던 자)을 만들다.
1446년 10월 10일(세종 28년 50세) 임금이 대간의 죄를 일일이 들어 훈민정음으로 써서, 환관 김득상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게 하다.
1446년 10월 11일(세종 28년 50세) 이계전과 어효첨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고쳐 짓게 하다.
1446년 7월 17일(세종 28년 50세) 소헌왕후의 재궁을 유주에 태워 헌릉 서쪽 산줄기의 능소에 이르다.
1446년 11월 8일(세종 28년 50세)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6년 12월 26일(세종 28년 50세) 이과(吏科)와 이전(吏典) 등의 하급 관리 시험에 《훈민정음》(해례본)을 시험 과목으로 정하다.
1447년 4월 20일(세종 29년 51세) 관리 시험에 먼저 《훈민정음》(해례본)을 시험하여, 합격한 자에게만 다른 시험을 보게 하다.
1447년 2월 21일(세종 29년 51세) 부민의 수령 고소를 전면 허용하고 해당 수령을 즉시 파출하게 하다.
1447년 6월 4일(세종 29년 51세) 《용비어천가》․《여민락》․《취화평》․《취풍형》 등의 음악을 잔치에 사용하게 하다.
1447년 7월(세종 29년 51세) 세종의 명으로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석보상절(釋譜詳節)》을 저술함(간행은 1449년).
1447년 7월(세종 29년 51세)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저술하다(간행은 1449년).
1447년 9월 29일(세종 29년 51세) 신숙주 등이 세종의 명으로 《동국정운》을 편찬하다. (간행은 1448년)
1447년 10월 16일(세종 29년 51세) 《용비어천가》 550본을 신하들에게 내려 주다.
1448년 3월 28일(세종 30년 52세) 김구에게 언문으로 사서를 번역하게 하다.
1448년 7월(세종 30년 52세) 좌의정 하연 등을 빈청(고급 관리들의 회의실)에 불러, 환관 김득상과 최읍으로 하여금 언문 문서 두어 장을 가지고 오게 한 뒤, 사관을 물리치고 비밀히 의논하다.
1448년 10월 17일(세종 30년 52세) 《동국정운》을 성균관․사부학당 및 각 도에 내려 주다.
1448년 12월 5일(세종 30년 52세) 궁궐에 내불당 건립하고 5일에 걸쳐 경찬회를 베풀다.
1449년 1월 18일(세종 30년 52세) 내불당에서 경찬회를 거듭 베풀고 4일 만에 파하다.
1449년 1월 28일(세종 31년 53세) 《고려사》를 고쳐서 다시 짓도록 명하다.
1449년 10월 5일(세종 31년 53세) 어떤 사람이 하정승을 비난하는 언문 글을 벽위에 쓰다.
1449년 12월 11일(세종 31년 53세)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다.
1449년 12월 11일(세종 31년 53세) 세종 스스로 신악(新樂, 향악과 당악, 아악 등을 참고하여 만든 새로운 음악)의 가락을 조정하다.
1449년 12월 28일(세종 31년 53세) 신숙주 등이 교열한 운서에 대해 한양에온 중국 사신들에게 신숙주,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태평관에 오가게 하며 질문하게 하다.
1450년 윤 1월 3일(세종 32년 54세) 성삼문, 신숙주, 손수산에게 명하여 운서를 중국 사신에게 묻게 하다.
1450년 2월 17일(양력 4월 8일, 세종 32년, 54세) 여덟째아들인 영응대군의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다.
-------- 사후--------
1450년 2월 22일. 명나라 황제에게 부고를 전하다.
1450년(문종 즉위년) 6월 12일, 세종 유언에 따라 소헌 왕후 심씨가 안장된 영릉(당시 광주, 지금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 서쪽 산줄기에 있었음) 서쪽방에 합장하다.
1451년(문종 1년) 8월 25일, 김종서 등이 《고려사》 편찬을 끝내다.
1452년(문종 2년) 2월 20일, 세종대왕의 신도비를 영릉(당시 광주)에 세우다.
1469년(예종 1년) 3월 6일, 세종의 영릉(당시 광주, 지금 내곡동)을 지금 여주(당시 여흥) 자리로 옮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