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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동지회 'HI-AN' Member]… ‘문경 회동’
▶ 2013년 11월 29일(금요일)~30일(토요일) : 1박 2일
◇ 제1일, 문경 새재 트레킹의 여정(3)
* [제3관문 조령관] —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길목,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 오후 3시 20분, 새재(3관문)에 도착했다. 제1관문을 기점으로 6.5km를 올라온 지점이다. 여기가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가는 마루금이며, 낙동강과 한강이 남북으로 나누어 흐르는 분수령이며,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름하는 고갯마루이다. 줄기차게 달려온 백두대간이 마패봉에서 이곳 조령관의 성문을 거쳐 서쪽의 조령산 연봉으로 이어져 나간다. 오늘 새재 조령관 주변은 일전에 내린 눈이 그대로 소복이 쌓여 있었다.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새재의 고갯마루에 있다.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이곳은 한양의 문물을 접하는 첫 번째 성문(城門)이요,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堡壘)였다.
역사를 말할 때, ‘가정법(假定法)’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도순변사(지금의 육군의 최고사령관) 신립 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제1관문-제2관문-제3관문의 각 관문마다 그 지형과 성체를 적극 활용하여 요소요소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더라면, 야만적인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것이요, 도성으로 가는 한양 길을 그렇게 허무하게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얗게 눈에 쌓인 새재의 마루에 서서 보니 당시의 절박한 상황과 가슴 아픈 역사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처절한 역사도 오늘은 하얗게 눈으로 덮여 고즈넉한 무위(無爲) 자연의 정적이 흐르고 있다. 격정과 눈물이 얼룩진 인간사의 수많은 회한(悔恨)도 천지간 그 무위의 시간 속에서는 이렇듯 적막(寂寞)으로 남으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 오늘 길목을 지키는 것은 굳게 닫힌 성곽의 관문(關門), 정적(靜寂)이 흐르고 있다. 오늘 따라 우리 이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성곽의 가장자리에 하늘을 찌르는 장대한 노송(老松) 몇 그루… 그리고 그 아래 눈에 덮인 자그마한 시비(詩碑)가 자리 잡고 있다. 달성(大邱)이 본향인 조선시대 전기의 최고문장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한양에서 귀향하는 길에,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문득 가깝게 다가오는 대구의 양친에 생각하며 그리움의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조선시대 전기의 문인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도 이 고갯마루에 올라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를 남겼고, 그 옆에 또 세종 때의 문신으로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사봉(沙峰) 이명덕(李明德)의 시비도 자리 잡고 있었다. 성문 가까이 길목으로 나아가니 영(嶺)을 넘는 바람이 매섭다. 그러나 화사한 겨울 햇살이 고요한 성루(城樓)를 비추고 있다. 관문의 왼쪽에서 성곽을 지키고 서 있는 장대한 소나무 세 그루는 다시 보아도 장관이다. 영을 올라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잠자는 노송을 깨워 ‘쏴아~’ 은은한 솔바람으로 울면서 지나간다. 성곽 옆으로 난 큰 길 옆에는 나그네들이 목을 축이던 ‘조령약수’가 있고, 잠시 숨을 고르던 백두대간이 여기서 다시 살아나 가파르게 치고 오른다. 깃대봉-조령산으로 오르는 산길의 들머리인 것이다.
☆… 오늘은 관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충청도 넘어가 보았다. 설풋 기울어진 겨울해가 하얀 눈밭에 화사한 빛살을 뿌리고 있다. 제3관문에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까지는 3km, 가파르게 올라오는 길이다. 그래서 조령관은 한양의 파발(擺撥)이나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하는 곳이다. 과거 급제의 기쁜 소식이 바로 ‘문희경서(聞喜慶瑞)’인 것이다. 고사리에서 올라오는 길은 작년까지만 해도 콘크리트 포장이었는데, 최근 문경새재의 길을 본 떠 마사토 길로 바꾸었다고 한다. 오늘 눈이 쌓여 확인하지는 못했다. 괴산군에서도 관광객이나 탐방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휴양림을 만들고 관문 앞에는 공원을 조성하여 팔각정도 짓고, ‘백두대간 조령’비를 세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제3관문에서 다시 내려오는 길] — 눈길에 드리워진 노송(老松)과 겨울 나목(裸木)
☆… 오늘의 트레킹 정점인 제3관문의 탐방을 마치고,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출발지 1관문으로 다시 회귀하는 것이다. 훨씬 앞서 올라갔던 전민수·여삼동 사장은 우리가 3관문 계곡 길로 올라가고 있는 중에 큰길을 따라 먼저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두 분의 보법은 여전히 히말라야보법이다. 한 걸음 한 걸음 한결같이 느린 걸음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쉬는 사이에도 그냥 걷는 것이다. 빠르지는 않아도 꾸준히 같은 속도로 걷는 것이다. 천지자연과 인생을 묵상하며 걷는 성자처럼…. 올라올 때도 그랬지만 우리가 조령관에서 머문 시간이 많이 지난지라, 우리도 옛길이 아닌 큰길을 따라 부지런히 하산했다. 이진애, 김옥련 여사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 가고, 이상배 대장, 기원섭 그리고 백파가 뒤를 따라 내려갔다. 골짜기에는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해가 이미 산을 넘었다. 골짜기에는 올라올 때보다 공기가 아주 차갑고 싸늘하여 방한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었지만 그 매서운 한기가 살을 파고 들어왔다. 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는 산천, 장대한 노송(老松)과 겨울 나목(裸木)이 드리워진 길을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 [반가운 만남] — 아리랑노래비 앞에서 기다리는 정종용 교수와 방실부인
☆… 그런데 우리가 <문경새재아리랑비> 가까이 내려왔을 즈음, 그 원두막 쉼터에서 단국대 정종용 교수와 방실부인이 거기까지 올라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만남이었다. … 오늘 아침, 정 교수 내외는 중요한 볼 일이 있어 동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문경에 거의 내려오면서 이진애 여사가 전화를 했더니 일이 일찍 끝났다고 하였다.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기사 기원섭이 버스를 타고라도 무조건 내려오라고 했다.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고 새재를 왕복하는 사이 어디에선가 만날 거고, 그리하면 오늘 저녁 만찬과 내일 회룡포를 비롯한 일정에 동행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성 어린 강권(?)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 교수가 직접 차를 몰아 이렇게 우정 내려와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어지간한 열정과 정성이 아니다. 호형호제(呼兄呼弟), 무연히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우정이었다. 방실부인이 왔으니, 참꽃과 연꽃 또한 얼굴이 화사하게 만개했다. 그렇게 만나는 것이 또 얼마나 반가운지, 모두 환호(歡呼)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하산 길의 일행이 7명이 되었다. 앞에서 세 부인이 나란히 걸어가고 뒤에서 네 사람의 사나이가 걷는다.
* [제2관문으로 내려오는 길] — 기원섭, 송림 속의 장엄 독창
☆… 2관문으로 내려오는 송림 속의 눈길, 기분이 한껏 고조된, 뱃심 좋은 기원섭이 그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인적이 없는 산의 정적을 마구 뒤흔드는 그의 노래 소리는 산을 울리고 계곡을 깨우는 장엄(莊嚴) 독창(獨唱)이었다. 평소에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그이지만, 우리의 가곡 ‘보리밭’을 시작으로 윤동주의 ‘서시’, 이태리 나폴리민요 ‘오 솔레미오’에 이르기까지 오늘 고요한 산속에서 연속으로 부르는 그의 굵직한 목소리는 아주 감동적이었다. …우리들이 2관문을 지나고 나니 날이 더욱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약간 녹았던 길바닥이 다시 얼어붙기 시작한다. 같이 걷는 사람 중에 가끔 미끄러질 듯 뒤뚱거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길이 미끄럽다며 앞서 내려간 전민수, 여삼동 사장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노닥거린 시간이 참 많았다. 오후 5시가 넘어서 새재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앞 식당가에 불빛이 환하다. 사위는 이미 어둠이 내렸다. 오늘은 장장 왕복 14km를 걸은 것이다. 다리가 뻐근하고 차가운 날씨에 온몸 얼어붙었다. 일행은 차에 분승하여 문경온천에 내려가서, 따끈한 온천물에 추위와 피로를 말끔히 씻었다. 추운 날,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뜨거운 온천 물맛! 아아, 따끈한 행복!! 심신히 쾌적하다.
* [문경한우 갈빗살을 구우며] — 최주원 문경경찰서장
☆… 저녁 식사는 점촌 역전에 있는 ‘한우곰탕’집에서 했다. 기원섭의 점촌초등학교 후배가 경영하는 한우 전문식당이었다. 미리 예약한 메뉴는 둥근 돌판 위에 굽는 ‘한우 갈빗살’이었다. 그 육질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뒷맛이 향긋한 한우고기는 그 특유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미식가(美食家)인 전민수 사장이 오늘의 고기 맛을 극찬했다. 기분이 좋다. 멀리서 온 벗이 입맛이 좋다고 하니 여간 즐겁지 않다. ‘진짜 최고의 한우 고기 맛’이란다. 그러면서 ‘이런 고기는 상추쌈을 싸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냥 기름소금에 살짝 찍어먹어야 제 맛이라고 했다. 쌈을 싸면 고기 맛을 버린다는 것이다. 좋은 회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일리(一理)가 있는 말씀이다.
☆… 이런저런 정담과 덕담을 나누며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는 중에, 중간에 연락이 닿은 최주원 문경경찰서장이 찾아와 함께 자리했다. 나는 초면이지만 기원섭이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이이고 정종용 교수는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알고 보니 최 서장은 정 교수의 대구 영신고 후배이다. 나도 인사를 하면서 듣고 보니 최 서장은 산양국민학교와 산양중학교를 나왔는데, 산양국민학교 나의 후배였다. 내가 산양 28회인데, 최 서장은 47회, 19년 후배가 된다. 가만히 따져 보니 올해 47세, 매우 이른 나이에 경찰서장(총경)이 된 것이다. 나는 초면이라 더 이상 자세한 것은 물어보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언사에 조리가 있으면서 매우 친근하고 소탈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내 중학교 후배인 고윤환 시장의 자서전[‘용문(龍門)의 꿈 흥덕(興德)의 길’]을 발간할 때, 내가 일조를 했다는 등 각별한 우정을 이야기하였더니, 그 책을 아주 정독을 했다고 했다. 최 서장은 ‘하늘재’와 같은 관내의 유서 깊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청소년 힐링사업에 관심을 갖고 청소년 선도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 젊은 꽃미남 서장이다. 지적이면서도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졌다. 최 서장이 건배를 제의했다. 주제는 ‘안나푸르나’, 최 서장 ‘안나!’하고 선창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푸르나!’하고 외친 것이다. 만남이 참 정겹다!
* [안나푸르나의 추억] — 기원섭, 눈물의 격정 토로 (1) 설산고봉에서의 육체적 한계!
☆…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가운데, 기원섭이 히말라야 트레킹 이야기를 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절정인 초룽패스(5,416m)를 넘을 때의 심경을,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사실 평소 산을 잘 다니지 않는 ‘서초동 불곰’ 기원섭이 히말라야 트레킹에 도전한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었다. 처음 부인도 농담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것은 무리’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그러나 그는 ‘나도 갈 꺼야!’ 하고 뱉어놓은 말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그는 결국 히말라야에 도전했다. 그런데 그 100kg의 거구가 히말라야 설산고봉을 오르며 육체적 한계를 느꼈을 때, 그때의 착잡한 심경, 죽음을 불사하고서도 저 고지를 넘어야 한다는 절박함과 자신의 출행을 격려하는 부인과 손녀딸 이쁜 서현이를 생각하며 다지는 결의, 무엇보다 동행한 대원들에게 누(累)를 끼칠 수 없다는 책임감 등이 머릿속에서 뒤엉겨 들끓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15일 간의 히말라야 트레킹 중, 남모르게 일곱 번을 통곡했다는 것을 고백했다. 당시 정상을 공격하기 전날 밤, 초룽패디(4,500고지)의 롯지에서 혼자 자동카메라를 작동시켜놓고 눈물의 독백을 한 장면은 이미 카페 ‘아침이슬 그리고 햇비’를 통하여 공개된 바가 있다. 초룽패스를 오르는 당일, 첫 쉼터인 ‘하이캠프’를 지나 5,000고지를 넘어섰을 때 가슴을 찢는 어질머리 고소증(高所症)을 느끼고 있을 때, 야크(Yak)를 타고 가는 서양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미칠 듯이 부러웠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고난의 여정을 함께 한 사람이라면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이렇게 이렇게 (마누라가) 어렵게 돈벌고 있는데, 여기를 넘지 못하면 나는 죽어버려야 돼!" 만약 초룽패스를 넘지 못하고 돌아선다면, 그것은 현실적인 죽음보다 못한(치욕적인) 인간적 ‘뒈짐’이라는 이야기다. 그 대목에서 이상배 대장이 끼어들었다. ‘쓰러지면 송장이라도 짊어지고 넘어 갈라고 했어예!!’ 그리하여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 [안나푸르나의 추억] — 기원섭의 격정 토로 (2) 초룽패스 하산길, 불의의 사고
☆… 그러나 그의 눈물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다. 역사적인 초룽패스를 오른 감격도 잠깐, 길고 긴 하산 길에 있었던 발목 사고로 인해 절박했던 상황을 상기하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선두의 전민수, 김석순, 노재성 대원은 앞서 내려가고 뒤를 이어 백파와 여삼동 대원이 한참 떨어져서 내려온 후, 후미에 마일러를 동반한 기원섭이 내려오는데, 이상배 대장이 그 후미를 수습하며 동행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도착해서 묵을 숙소는 묵티나트, 정상에서 10여 킬로를 걸어야 하고, 해발 고도 1,300m를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하산 도중 기원섭이 발을 헛디뎌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발목을 다쳤는데, 얼마나 아픈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동행하는 이 대장이 응급처치를 해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난감해 하고 있던 차에, 그 앞을 지나가는 독일인 부부가 응급 진통제를 주어서 먹었더니 그것이 효험이 있어 조금씩 나아져서 절룩거리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 한편 조금 앞서 내려온 백파는 산 밑의 롯지에서 후미(이상배 대장, 기원섭, 쿡 마일러)의 하산을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을 금방 어두워질 테고, 기온은 급강하하여 아주 매서운 한기가 땀에 젖은 몸을 파고들었다. 초룽패스 그 정상의 그 청명한 하늘은 어디로 가고 먹구름이 시공을 가득 메우며 몰려왔다. 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몰아칠 기세다. 그런데 한참 뒤에 내려온 가이드 겔젠이 손짓 몸짓으로 ‘’똥배가 다리를 다쳤다‘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산행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이게 무슨 소린가. 거구의 기원섭이 발목을 다쳤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셀파 겔젠이 네팔식 영어로 그 정황을 말을 하니, 어느 정도 다쳤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사고가 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후미 대원을 기다려 거의 30분 이상을 차가운 한기(寒氣)에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다시 30분을 기다려도 내려오는 길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젊은 독일인 커플이 산을 내려와 길목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후미대원은 보이지 않았다. 고봉설산에 기상은 악화되고 다친 정도가 심하다면 아아 그 거대한 몸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오만 걱정이 거대한 태산이다. 기다리다 못해 배낭을 벗어놓고 나는 다시 산을 거슬러 올랐다. 도저히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디쯤 오고 있을까. 아니면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닌가. 온갖 두려운 상상을 하면서 다시 무거운 산길을 서둘러 올랐다. 나의 체력도 거의 소진되고 다리도 천근이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으로 스틱을 의지하여 계속하여 올랐다. 그렇게 약 30분 이상을 오르다가 가파른 산록을 올려다보니 세 명의 대원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 분명 우리 대원이었다. 기원섭이 앞서서 스틱에 의지하여 뒤뚱거리며 걷고 그 뒤를 충직한 마일러가 자기의 몸채만한 큰 배낭을 지고, 목에는 기원섭의 무거운 카메라까지 걸었다. 그 뒤를 이(李) 대장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아, 기원섭이 내려오고 있다! 순간 안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눈물이 울컥 솟구쳤다. 잰 걸을 좇아 올라가 경사면의 산록에서 만났더니 기원섭 약간 절기는 하지만 자기 발로 걸어서 내려오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나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연발했다. 아까 롯지에 내려왔던 그 독일인 커플이 고맙게도 은혜를 베푼 것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들으면서 산 아래 롯지까지 내려왔다. 이상배 대장이 후미를 수습하여 내려오는 지혜가 돋보이는 산행이었다.
☆… 그런데 오늘 기원섭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뒤뚱거리며 늦게 내려가는 자기를 생각해서 ‘축지법’을 썼는지 백파가 다시 산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냥 눈물을 왈칵 났다는 것이다. 몸집은 크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감성이 순수한 기원섭이다. 오늘 자리에서 하는 말, (나를 가리키며) ‘이게 일마가 불쌍해 일마가, (날) 잘못 델고 가가 주고…’ 그것은 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인간적인 믿음의 반어(反語)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백파가 응수하기를 ‘그대가 (집에) 못 가면 나도 집에 갈 수가 없어!’ 또 한바탕 웃었다. 지나간 이야기이니 모두들 웃고 있지만, 그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생각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
* [안나푸르나의 추억] — 기원섭의 격정 (3) 묵티낫트 가는 길, 5만원이 아까운 오토바이
☆… 그의 격정의 사설(辭說)을 끝나지 않았다. “근데 감추어진 눈물은 여기에 있는 거야” 하면서 눈물어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발목을 다쳐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 대장이 절룩거리는 나를 위하여 현지의 오토바이를 불렀는데, 요구하는 금액 5만원이 너무 많아서 거절한 거야’ 했다. 그냥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그 5만원이 나에게는 큰돈이란 말이지. 마누라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이다. 내려가는 길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은 무겁고 날은 어두워지고, 음산한 하늘에서 눈발이 분분한데 아직도 내려 갈 길이 멀었다.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다. 결국 절룩거리며 묵티나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걸어보니 장장 6km의 돌밭길이었다. 묵티나트에 도착하니 캄캄한 마을에는 이미 집집마다 환하게 불을 밝혔다. 선두보다 거의 3시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그날 밤 기원섭은 눈물로 쓴 장문(長文)의 메시지를 아내에게 띄웠다.
* [문경시청 앞 <리첸모텔>, 그리고 ‘밤마실’] — <무봉리 순대>집
☆…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문경시청 앞에 있는 <리첸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방을 정하고 나서 기원섭이 밤마실을 선동(?)했다. 아직 10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맛있는 소고기를 구워서 참소주로 가슴을 흥건하게 적신 상태인지라 술을 먹기 위한 외출은 아니다. 집 나와서 그냥 잘 수가 있나. 분위기를 바꿔 정담이나 나누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상배 대장과 전민수 사장, 그리고 정종용 교수는 모텔의 객실에서 그냥 쉬고 싶다고 해서 남고, 나머지 남녀 벗들이 밖으로 나갔다. 배부른 맥주보다는 소주가 났다고 하여 24시간 ‘무봉리순대집’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술잔이 한 순배 돌고나니 기원섭이 술이 취해 도저히 지탱할 수 없다면서 들어가고, 이어서 이진애 여사도 잠이 쏟아진다면서 식당의 구석에 방석을 깔고 누워버렸다. 결국 백파와 여삼동 사장, 그리고 김옥련, 방창숙 여사가 남아서 한참을 놀다가 들어왔다. …♣ (3)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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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설경에 매료되고 ,새재이야기에 매료되고, 여러가지로 흐뭇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