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이 살아숨쉬는 향교
사서삼경이나 춘추 그리고 예기 속의 중용 글을 읽으며 올바른 가치관을 가졌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시정잡배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향교 명륜당에 모여 누가 조선 최고의 두상을 가졌는지
최고의 두상(頭上)에 어울리는 제주 조랑말 꼬리인 말총으로 만든 갓이나 탕건을 썼는지
그리고 스스로 조선 최고의 두상이라 하였을 것 같다는 생각도 덧붙인다
지도 참고
관광도시인 통영땅에서 다시 산과 들판과 바다가 있는 고성땅으로 들어와
도산면에 들어서니 허리 굽은 할매와 아주머니 두 분이 저 앞에 지나가신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간다면 모를까 저는 절대로 그냥 못 지나가니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허리 굽은 할매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오면 동네 이장 시켜 주신다고 하신다.
도산면 마을 이장이라... 아름다운 남해바다의 사량도 갈 때 배는 마음껏 타고 갈 수 있을듯한 자리다.
그리고 남해 바닷가에 왔으면 멸치대왕 용안이라도 좀 보고 가야 하는데
어느 주막에서 뼈대 높은 멸치대왕 자제분들을 기름에 들들 뽁아 고운 쟁반에 올려놨을지
도산면 사무소 앞을 지나
오전 10시 지난 시간에 어제 그 주막에 다시 도착
하루 일당 60km 중 45km 반타작은 했으니 마음 편안하고
주막집에서 씻고 마산 진동으로 향한다.
돼지 국밥집에 들러서 아침인지 점심인지 한 끼 먹고 나오니
언놈인지 잡히면 아주 짤라 버릴 글인데
다행이라면 가위는 그려지지 않았다는...
남의 집 담벼락에 소변보는 분들 참고하시고
고성군 마암면 미래교육 지원센터 앞에서
평부 마을 팽나무
500년 된 팽나무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께서 당항포 해전을 치른 후 이곳 장자목에 배를 메어놓고
쫓겨온 왜적들을 모두 무찔렀다고 해서 전승목이라 부른다.
푸른 휴게소 가는 길에
옛길 따라 오르는데 인근에 모텔과 여관은 모두 폐업했는지 문은 닫았고 잡초만 무성하다
4차선 도로가 생기기 전에 다녔던 옛길
푸른 휴게소에 들러
이곳에서
각진 얼음은 뜨거운 발바닥 열기를 식히려고 산 것이고
닭다리는 식어서 맛이 없을 뿐인데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생각뿐이고
배낭은 무겁고 어깨는 빠질 듯 아프고 돌아갈 수 있다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뿐이고
발바닥에 작은 미더덕이 생겼지만 이 길에서 혼자서 얼마나 잘 견뎌 내는지 궁금할 뿐이고
그동안 걸었던 길 머릿속에서 모두 다 비우고 싶을 뿐이고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몸으로 표현해 보는 수행길에 있어 오늘은 또 어디서 자로 가야 하나
식어빠진 닭다리 하나 놓고 오만가지 다 생각해 본다.
고성군 회화면 배둔을 지나고
청량한 달빛이 머무는 회하면 삼덕마을(월계) 할매분과 함께
시들지 않은 청춘이 더 아름답다 했는데
몸은 비록 시들었지만 마음만은 늘 이팔청춘인 대한민국의 모든 어르신들의 건강하고 환한 웃음을 기원드리고
그동안 이 길을 통해서 남으로는 고성, 북으로는 마산으로 이동하는 차량들이 숱하게 다녔지만
지금은 우회길이 생겨 너무 조용한 길이 되어버렸다.
이곳 월계 마을에서 삼덕 저수지를 돌고 고성과 창원땅을 가르는 방말재를 넘어서면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땅이니
대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영남대로는 부산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과거길이며
이곳 통영대로 우측길 고성 마산,창녕,현풍,성주,김천을 넣어야 완전체가 되는 영남대로 길이다.
맑고 깨끗한 삼덕저수지와 멀리 보이는 곳은 넘어야 할 방말재와 우측으로 탁골산 모습
방말재를 넘으며
요즘 산행 기술은 기존의 종이 지도와 나침판을 몰아냈으며
언제부터인가 나 역시 나침판이란 녀석을 멀리하게 되었고 전자 지도에 의지해서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통영에서 상주 방향은 북쪽으로 이어가는 길이니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면 되니
이른 새벽에 북쪽을 지키는 북극성을 보며 방향을 잡는다.
어제부터 지루하던 이어오던 고성땅을 벗어나 창원시땅에 들어와
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전면 사무소
여항산 서쪽 계곡에서 흘러온 지전천을 지나
창원시 애국지사 사당이 곁에 있었지만 가보지 못하고
무슨 건물인지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첩비
잠시 묵념하고
마산- 왜관 190km 중 여항산 자락의 전투지역과 창녕의 돌출부 전투지역 낙동강은 미군이 북한의 도하작전을 저지한
일명 워커라인(미군 사령관 워커장군의 이름)을 사용한 라인이다.
워커라인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 이점
1.개전 이래 최초로 이루어진 전투 방어선이며
2.서쪽 측면 낙동강은 강폭 400-800m으로 형성되었고
기본 수심 2m-4m 강수면폭 200-400m 형성되어 천연의 방어선 구축
3.낙동강 방어선 안쪽은 거대한 보급창고인 부산으로부터 대구. 포항 영덕. 밀양. 창녕까지
병참선 발달로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함
*올여름에 진주에 사시는 젊은 분께서 동해에서 시작하는 워커라인 340km을 하신다 하였으니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준비 잘하시고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읽어 보시고
최후의 마지노선인 워커라인 마지막 구간인 마산시 진동리 지구 전투 상황도
진북면에 들어와
해는 넘어가고 오늘은 75km 지점에서 마무리한다.
인근 주막에 들러 저녁 찾아먹고 잠을 청하기전에 휴대폰 보조 배터리 3개와 렌턴까지 모두 충전 시키고
내일은 경남 창녕군까지 가야 하니 일찍 일어나 걷는다
먼 길 떠나며 휴대폰 배터리가 없으면 기록이 안되니 언제쯤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 문제만 해결되다면 하루 한 끼로 충분하고 잠은 노숙만 하면 되니 알마나 좋은가
진동면은 고려 공양왕 2년에 우산현(牛山縣)이 설치되었다가 조선초 태종 4년에 진해현으로 개칭된 곳이다.
새벽길에 대형 트럭만 진북 일반 산업 공단으로 오고 갈 뿐이고
렌턴 불빛에 보이는 미세 먼지는 또 얼마나 많은지 마스크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겠으니...
전국 6만 편의점 중 이 시간에 도심을 제하고 나면 문 연 곳은 얼마나 될까 싶어 찾아보니 도로가에 문을 열어둔 편의점이 보인다
양반은 새벽부터 컵라면은 먹지 않는다
참고로 이곳 진동면에서 동전 고개를 지나 마산방향의 대곡산과 윗바람재 사이의 쌀재로 넘어 광려천 따라 내서읍-칠원면-낙동강 건너 송진 쇠나루터까지 가는길 40km이 있지만,
낙동정맥 한티재 넘어 가는길 38km과 쌀재 넘어 가는길 두 길 간의 거리는 대략 2km 정도로 비슷하다.
저는 통영에서 고성을 지나 창녕으로 간다면 함안군 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넘었을것 같아 한티재를 넘어 간다.
진동면 사무소 앞을 지나
낙남정맥을 넘어 여항이나 함안으로
함안땅은 20km는 아침 10시 무렵이면 도착할 듯
고도를 점차 올리며 걸음하니 계곡형의 골짜기마다 듬성듬성 집들이 보이고 그 곁 무논에는 개구리 소리가 이른 저녁부터 새벽까지 몸서리 처지게 이어진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이어온 산줄기인 낙남정맥 한티재에 도착하니 바람이 다르다.
광려산 방향으로 부터 먼동이 터 오는데 며칠간 함께 했던 달은 배가 많이 홀쭉해져 있고
백원각(白源閣) 조선 고종 때 여주이씨 이경번,이경무 형제분의 효행을 표창한 정려각인데
부모를 봉양함에 의복을 씻고 음식을 올릴 때 남에게 맞기지 않았으며 또한
어버이가 병환으로 눕자 대변의 맛을 보아 상태를 살폈으며
탕제 시중들기를 8년 동안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여항산을 곁에 두고 있는 여항면
여항산은 함안의 진산이죠
또한 낙남정맥의 주산이기도 하고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함안은 물이 역류하는 특이한 지세인데
이런 역류지형을 바르게 하고자 훤히 트인 진동만이 함안까지 들어왔다면 천하제일의 미항이 됐으리라고 여겼다.
그러기에 배가 다닌다는 뜻으로 남을 여배 여(餘) , 나룻배 항(航) 자를 써서 여항산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항면 함안천 옆에 자리하는 보호수
보호수는 몇 해 전 기준으로 전국에 1만 2천 그루가 있으나 지금은 더 많은 보호수가 있을 것 같고
함안군 함안읍 봉성리 마을에 들어서니 "어라!~ 이 작은 녀석은 뭐지
인근에 향교가 있나 싶어 허리를 낮춰보니 오래된 하마비(下馬碑)가 세월을 이겨가며 서있다.
함안 향교까지 직선거리로 500m 정도인데 조선시대 때 함안향교의 세력이 컸고 영향력은 누구든 말에서 내리게 했던 모양이다.
향교가 자리하는 덕암마을로...
향교 입구에 맞배지붕에 낡은 기와지붕 정사각의 누각이 보인다.
내부를 살펴보니 정후청덕비(鄭侯淸德碑)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광해군 때의 문신이셨던 한강 정구 선생 관련된 비석이다
이분은 퇴계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께 글을 배웠으며 학식과 덕망이 높았지만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후배 양성과 성리학을 알리는데 크게 이바지하셨던 분이다.
비석의 내용은 음!~~`
대한민국 어느 향교를 찾아가던 보이는 은행나무
역사를 이겨낸 500년 된 학자수이다.
병충해 없는 나무이기에 곧게 자라 하늘을 지척에 두고 서있다.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의 붉은 홍살문을 지나
향교에 왔으나 외삼문은 굳게 닫혀있고 경남지방에 많이 보이는 풍화루 글자만 여기가 향교이니 예를 갖추라 위엄 있게 서있다.
조선 초기 때 만들었으나 근현대사인 한국전쟁 때 불타고 새로 만든 향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는 강릉 향교이며
전국 3대 향교로는 전북 장수향교,나주향교 그리고 강릉향교가 있다.
함안향교 역시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의 향교이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까치발로 서고 두 팔을 들어 올려 여러 장의 사진을 담는다
평지에 명륜당을 세우고 좌, 우로 동제와 서제를 두고 있으며
명륜당 뒤로 경사진 곳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그 외 분들 위패를 모신 동무와 서무가 각각의 자리에서 대성전을 모시듯 있다.
예전에는 이곳 함안면이 더 큰 도시였으나 지금은 함안군청 인근의 가야읍에 밀려 점차 쇠락해 가는 면으로 기억될 곳이다.
함안 읍성은 초창기(삼포왜란:부산포, 제포, 염포에 대비해서 만든 곳)에는 북문, 남문, 동문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 서문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읍성을 지탱하던 수많은 돌들은 다른 곳의 읍성처럼 가정집 담벼락이나 주춧돌로 사용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며 푯말만이 그 명성을 대신하고 있음이다
함안면 사무소가 나오고
함성 중학교에 들러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을 찾으러 갔지만 네 마리의 사자가 탑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탑은 근래에 새로 복원한듯하여 그냥 둘러보고 나온다.
함안 주리사지 사자 석탑과 비슷한 유형의 탑은 제천 빈신사지사, 북녘땅 회양 금강산의 금장암지, 구례 화엄사의 사자석탑 4기가 존재한다.
무슨 정신으로 사진은 담지 못하고 그냥 나왔는지...
함안읍성 북문이 있던 자리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며 찾아볼까 하였으나 오늘 해지기 전에 용의 전설을 간직한 화왕산이 자리하는 창녕땅에 들어야 하니
가야읍으로 걸음 한다
함안역을 지나가며
논가에 자리 잡은 괴산리 지석묘를 지나며
함안에 이르러 뒤 돌아보니 여항산으로부터 낙남정맥 산줄기가 이어지는데
지리산 영신봉에서 이어져온 산줄기가 마산 합포구 진전면 봉림리의 발산재 이후로 여항산, 광려산, 무학산-천주산-정병산-대암산, 김해시 용지봉까지 거침없는 조망을 보여준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낙동정맥길에 만나는 고헌산으로부터 본격적인 고봉이 즐비한 영남 알프스가 시작되듯
낙남정맥 또한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
멀리 보이는 우람한 여항산 일대는 6,25 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로 꼽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50년 8월 들어 인민군 6사단은 주공격대상인마산을 에워싸고 파상공세를 폈다. 이에 맞서 8월 14일 미 제25사단은
가야 서북쪽에 있는 십이당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여항산·필봉·서북산·야반산·옥녀봉을 잇는 능선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 고지들은 마산을 사수하는 최후의 방어선이기도 했다.
25사단 24연대는 검안리 남쪽에서 서북산 북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점유했다. 인민군 6사단은 두 차례에 걸친 전투끝
에 수많은 전사자와 군수품 손실로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강제로 징집한 2000명에 이르는 의용군을 긴급히
보충했다 장비가 태부족인지라 전사자가 생기면 그 총을 회수해 전선에 투입하는데 급급했다.
이 때 어느 의용군의 일기에서는 ‘UN군의 포격과 공중공격은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견디어야 할
이 고난 … 몇 고개를 더 넘어야 마산인가·’라고 생사에 갈림길인 극한상황에 놓인 처지를 적어 놓았다.
미군 또한 험준한 서북산과 여항산 탈취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항산 정상은 바로 전투 관측과 전방을 이용하
기에 적합한 고지였다. 특히 8월 15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명령 제82호를 하달했다. 그중 한 대목을 보면 사기
를 진작시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숨 돌릴 사이를 주지 말고 새로운 방어선에서 진지를
구축할 여유를 주지 말라! 전력을 다해서 적을 혼란상태로 몰아넣어 그들의 저항력을 격멸하고 그들의 장비를 파괴하
라!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라! … ’고 독전했다.
이에 힘입어서인지 18일 밤 방호산 부대는 대대적인 집중 공격으로 나왔다. 3일간의 혈전으로 미군은 작전상 후퇴까지
했으며 무려 19회나 뺏고 뺏기는 백병전을 벌였다.
피아간 5천 명 사망
무진정 중노담 연못
괴산제가 자리하는 솟을대문의 돈화문
괴산재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 산생의 손자인 무진정 조삼을 기리는 재실이다.
읽어 보시고
무진정 글씨 현판은 주세붕 선생께서 쓴 글이라고 전하며
조선 명종 22년에 무진(無盡) 조삼(趙參) 선생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서 후손들이 세우고 조삼선생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 부른다.
조삼 선생은 조선 성종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창원, 함양, 성주, 대구 상주지방의 목사(정삼품 당상관의 벼슬로써 외직)를 지냈셨던 분
한번 읽어 보시고
연못에는 수십 그루의 왕버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지난번에 왔을 때 보다 물이 많이 흐리다.
연못에서 본 무진정 동쪽문인 동정문
무진정 아래로는 사대부 집안의 처자 피부를 닮은듯한 백일홍나무도 서있고
함안군청 방향으로 가는 길에 길가에 가로수인 은행나무가 끝없이 서있는데
가을에 오면 들판으로 벼 익는 모습과 함께 아주 잘 어울릴 풍경이다.
멀리 삼봉산과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 지척이고
오늘은 저곳에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아 방향을 옮겨가 본다.
가야읍에서 한 장 담고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군으로 향한다
말이산 고분군
말이산 아라가야 (12개국 중의 하나) 고분군
5세기에서 6세기 약 100년간 조성된 가야국 지배층의 무덤이며
가야시대의 대표적 고분군이 자리하는 말이산 능선 1km가량 따라 127기의 봉토분과 1천여기 이상의 중소형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다.
멀리 경주의 고분군 가는 다르게 산 위 능선 따라 길게 자리하는 게 특징이며 주위가 훤하니 조망이 트여있어 아름다운 곳이다
함안여행을 하신다면 이곳 말이산 아라가야 고분군과 무진정은 꼭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고분군과 멀리 여항과 661 고지
가야읍에서 함안천 건너 가야읍 하검리 마을 안으로 들어와 산인면으로 향하는 작은 고개를 지나
산인면에서 1012번 지방도로인 송산길 따라가며
돌고개를 지나
산인면 운곡리 굼실골 골짜기를 넘어 대산면 대사리로 가야 했지만
옛길은 세월 속에 묻혀있어 찾아가기 겁나고
돌아가기는 하지만 아스길 따라 좋은 길로 진행한다
함안군 대산면에 들어서서
옥렬리 큰고개에서
대사동으로 돌아와 본 무명봉
밭일하시는 분께 여쭈어보니 예전에는 무명봉을 넘어 함안까지 걸어갔다는 말씀을 하신다.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아서 길은 없겠지만 흔적은 있다며
배낭에 든 것이라고는 마시다 반쯤 남긴 물병과 소고기 육포뿐이라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전한다
화개지맥길인 안국산이 지척에 있고 예전에 지맥할때 한여름에 반바지 입고 저곳에서 조난당할 뻔했던 곳
사촌 마을버스 승강장을 지나
대산 일반 산업단지를 지나며 본 저짜 멀리에는 의령의 자굴산과 한우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고
지맥길인 독골고개를 지나서
함안군 칠서땅에 도착하니 날씨는 덥고
발바닥에 미더덕이 하나 생겨 그늘에 앉아 바늘로 찔러 물 몇 방울 빼고 나니 좀 시원해진 듯하다.
웃배골 마을에 들어와
마을 어르신과 잠시 앉아서 이야기 나누다가 일어서며...
강태고개
이 길이나 옆에 위치하는 도둑고개를 넘어야 창녕군 남지읍으로 가는 가장 빠른길인데
칠서면 태곡리 마을에서 칠서 일반 산업단지가 자리하는 대치리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다
칠서면 대치동 마을
대치리에서 본 강태고개
마을에서 칠서 일반 산업단지 안으로 들어와
마산 쌀재 칠원면을넘어 오는길과 한티재를 넘어 오면 만나는 칠서 산업단지에서
창념군 도천면 송진 쇠나루터로 가는길은 창녕 남지의 남지대교나 더 위에 자리잡은 낙동대교를 건너야 하지만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남지 철교 방향으로 진행한다.
함안군 칠서땅에서 본 창녕군 남지철교
낙동강을 건너가면 창녕땅이고 대구가 지척이다. 음!~~~
1950년 6,25 전쟁초기 무렵 8월 15일부터 9월 4일까지
한강 이남의 다리 44개 중 37개 파괴했는데
이곳 남지철교도 그중의 하나다
지금은 모두 복원되어 있어 사진으로만 확인 가능하고
낙동강은 멀리 강원도 태백시 비단샘에서 발원하여 봉화, 안동-문경-상주-구미-대구, 현풍-이곳 창녕까지 흘러와
밀양-양산, 부산까지 흐르는 영남의 젖줄이다.
물은 거의 녹조라떼 수준이라 뭐라 말할 처지가 못되어 강바람만 느끼며 지난다.
창녕 화왕산에서 흘러온 계성천을 건너는데 물은 거의 간장과 된장을 적당한 비율로 썩어 휘졌어 놓은 듯하다.
낙동강 건너 창녕 남지로 들어와 곧바로 도천면으로 진행하는데 뭔 날씨가 7월 중순 날씨 마냥 더운지
송진 쇠나루로 가는 길에 그늘은 금줄 넘어 저짜있고 땡볕은 이짜있고
더버라
낙동강와 계성천이 만나는 곳에 송진 쇠나루 공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으며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경치가 좋고 아름다운 곳이다.
솨니루 유래는 낙동강 인근에 소나무 말뚝이 많아서 쇠나루라고 불렀으며
조선 후기 한양으로 보내기 위한 세곡을 모아두는 강창을 만들어 영산현에 모아두었다가 한양으로 실어 나르던 곳이기도 하다.
도천면 사무소 앞을 지나며
영산면 연지(硯池) 못
선조들께서 영산 고을에 농사와 화재 예방을 위해서 만든 저수지로 가운데 별을 상징하는 작은 섬 다섯 개가 더 있으며
연지라는 뜻은 벼루를 닮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벚꽃 피는 날 너무나 아름답다는 곳인데 좀 더 일찍 올걸 그랬나... 아쉬움도 있고
높이 20m의 600년 된 팽나무와 뒤에 건물은 책실(冊室)이다
책실은 조선시대 영산현 관아의 부속 건물로 책을 모아두고 고을 원의 자제가 공부하는 곳인데
기록이 없어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영산 향교
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국가가 설립한 조선의 자방 교육 기관으로
16세 정도의 나이의 청소년을 교육했던 곳
참고로
서당은 조무래기 수준
향교는 고려때 처음 생겼으며 청소년 수준
서원은 조선중기때 생겼으며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있을 정도였고
그 다음은 성균관이고
이처럼 공부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과거에 급제하는 것
대부분의 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에는 명륜당, 뒤에는 대성전)인데
이곳 역시 전학후묘의 자리에 동제(선배)와 서재(후배)가 자리한다.
지나는길에 본 전북 전주향교는 전묘후학의 위치이며
마지막날 찾아갈 경북 상주 향교는우묘좌학의 자리에 있다.
문이 닫혀있어 대성전은 보지 못했지만 전국 어딜가나 보이는 향교 대성전에는
공자가 첫번째이며 안자, 증자, 자사, 맹자 5 성과 공문십철(공자의 제자 10명),
송조육현(송나라 6명현: 정호, 주돈이, 정이, 소옹, 장재, 주희)등 중국의 성현의 위패와 우리나라 설총, 최치원, 이황, 이이, 정몽주 등
18현을 그 외 성현은 동무와 서무에 봉안하고 있다
낮으막한 산은 영산 읍성이 있던 자리이며
마을로 들어가서 읍성터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마침 댕댕이 두 마리와 마실 나온 어르신께서 보여 길안내를 받으며
가정집 담벼락도 성터이고
어느 집 오래된 돌담장도 성터이고
하루빨리 읍성으로써 정비가 되어야 할 텐데...
영산 읍성지 안내글은 읽어 보시고
구도로(영산 계성로) 따라 창녕으로 가는길에
도로 양쪽으로 한 곳은 메타나무 한 곳은 은행나무가 각자의 구역을 정해서 자란다.
고지저수지에서 본 함안의 여항산과 전투산이 보이고
계성면을 지나며
계성면 명리 마을에 들어와 때늦은 점심과 저녁 겸으로 밀면을 시켰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행여나 화왕산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러 찾아보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맛이니 꼭 찾아가 보시기 바라고
더 어둡기 전에 창녕에 도착해야 할 텐데...
길가에 자라는 메타 나무
저녁 무렵이라 키다리 메타나무가 서 있는 길
아무도 없는 길
외로운 길
어깨는 내려앉을 것 같고
작은 미더덕은 여간 신경 쓰이지 않고
터벅 터벅 걷는 발걸음은 왜이리 무거운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겠는데
어디가 좋을꼬~~~
350km지점 창녕군에 들어와
켄 맥주하나 들고 내일 새벽에 먹을 빵하나 사서 넣고
오늘은 이곳 송림사 옛 절터인 정자에서 잠시 쉬다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잠을 청하기로 한다.
주위에 불은 환하게 켜져 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정자에 올라올까 싶어 두 눈은 살포시 감고 귀는 반쯤 뜨고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간다.
마지막 편은 상주까지
첫댓글 남들과 다른 눈, 방장님만의 그 시선으로 걸음하는 길
향교를 거쳐가는 방장님의 통영대로길
서당-향교-서원-성균관
공부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라면
우리 산꾼들이 산으로 찾아들어 걷는 이유 단 한가지를 들으라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옛부터 이어져온 그 길 속에서
보물찾기 하듯 하나씩 찾아서 이렇게 후기로 좋은 자료 엮어내심에
감사드리며... 전엔 생각해보지 못했던 우리나라 대로길 아주 쪼매 알아가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리에서 등로옆에 방뇨를 하긴 했는데 괜찮겠죠?^^ 함안부터 칠곡까지는 워커라인 따라 올라가시는 거죠??
긴글 잘 일고 갑니다.ㅎㅎ 감사합니다!
다시보니 영남대로랑 워커라인은 약간 차이가 있네요! 워커라인을 가보고 싶긴 하지만 시간과 체력이 나중에 함 도전해 봐야 겠습니다.ㅎㅎ
상주까지 여정 기대하겠습니다.^^
고즈넉한 옛길이 마음에 들고요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