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유정 신작소시집
슬픔 외 5편
슬픔 | 남유정
내 몸에 방이 있네
애기 주먹만 한 아니 더 작게는 손톱만한
슬픔이 사는 방
온몸에 번지기도 하고
벌레가 몸을 동그랗게 말 듯 뭉쳐 틀어박히기도 하는
이슬을 매단 산딸기 이파리처럼 푸르고
마른 풀 자리처럼 쓸쓸한
부둣가에 매단 나룻배처럼 나를 묶어 놓은
슬픔이여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밤바다에 요동치는 배처럼
나를 더 흔들어 주겠니?
아예 나를 송두리째 들어 갯벌에 깊이 박히도록
힘껏 내던져 주겠니?
도둑
일렁이는 추억의 나무
밤이면 숲에서 부엉이가 우네
화등잔 같은 눈을 뜨고 지금도 밤을 환히 들여다보는 부엉이
닳고 닳은 기억의 모서리를 쪼네
어머니는 등잔불 아래 양말을 기웠네
자다가 깨어보면 흔들리는 배
출렁이는 밤의 그물 안에 잔별이 뒹굴고
여전히 해진 옷을 기우는 어머니
밤물결에 노를 빠뜨리기 일쑤였던 아버지를
불빛이 이끌어 주었네
젖은 손으로 앞치마를 문지르던
어머니, 등 굽어가는 세월이
물가에 앉아 있네
일생의 시름은 가파르게 흘러
숨찬 어깨를 나무에 기대고
내게 더 멀리 가라 하네
수없이 여닫던 장독
허구한 날 비벼 널었던 빨래
관절은 삐걱거리고
걸어가는 어머니 잔등이 자꾸 앞으로 쏠리네
나는 짤짤 끓는 아랫목에 묻어 놓은 밥의 온기를
훔쳐 달아난 도둑이었네
그 집
나지막이 휘파람 불며 비질하는 소리
우물 옆 앵두 열리는 소리
나팔꽃 덩굴 아래 그늘이 한 뼘씩 자라고
텃밭에 어린 상추 열무 부추 아욱 소복이 돋아나듯
아버지 곁에 어머니, 딸린 식솔들
함박 피어 덩달아 꽃이 잘 되던 집
저녁이면
잘 씻긴 항아리 위로 바람 건너오는
소리, 사륵사륵 사르륵
살구꽃 날릴 때면 밤조차 환해
얘야, 부모 곁은 처마 밑에 소나기 잠깐 피하는 시간이다
머리를 만져주는 어머니 손길에
업어 가도 모르게 잠이 깊고 달던
집
그대가 산사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사이
그대 걸음이 얼마나 더디게
멀리 뻗어갔는지
무장 길었는지
그 순간
그대도 나도 없는 세상을
여전히 평화로이 쑥쑥 자라나는 시간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하늘을
몇 세기 흐르는
사이
나무로 들어간 그대가 이파리들을 가만히
흔들었습니다
내가 가만히 뿌리 내렸습니다
나를 열고 나간 그대가 산사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사이
여름날 오후
회화나무에서 직박구리들이 팔랑거리며 논다
나무도 싫은 기색이 아니다
직박구리 귀에 청포도알 같은 직박구리 웃음이 가득
바람이 그걸 하나씩 꺼내
톡톡 터뜨리며 먹을 때마다
회화나무 그늘이 화들짝 자란다
작은 새들이 한꺼번에 나무 위로 포르르 날아오른다
여을
설악을 잘 안다는 사람에게
설악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언제냐고 묻자
몸을 불리던 폭포 소리가 수척해지고
이파리 가장자리가 고요히 붉어지는
여을이라고 했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사이
여을
가만 더듬어 보니
골짜기가 서늘히 깊어지는 때도
여을
산사나무 열매가 몰래 붉어지고
당신에게 가는 길 모롱이
여뀌풀숲에서 풀벌레가 우는 때도
여을
눈매 가득 강물 소리를 담아 나르는
새들의 날갯짓이 분주한 아침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억새를 켜고 지나 한바탕 허공의 현을 울리는
아, 여을이지요
▣ 시인의 말 / 남유정 ▣
슬픔의 힘
어릴 때 이사를 자주 다녔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낯선 곳으로 옮겨 다녔다. 강이 흐르는 시골이나 작은 도시였다. 물은 빠른 발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갔다. 그 때 알았다. 물은 참 다양한 빛깔을 띤다는 것을. 말갛게 바닥까지 들어내는가 하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으로 무겁게 흐르기도 했다. 여울을 만드는가 하면 유리처럼 잔잔한 수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너는 누구니? 그 물음은 줄곧 나를 따라 다녔다.
그 작은 마을에서 제법 멀리 흘러왔다. 줄곧 나는 슬픔을 키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슬픔을 잊고 사는 동안 슬픔은 기척도 내지 않았다. 슬프지 않을 때엔 이상하게도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니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계속 묻지 않고 살 수 있었다면 시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도지는 병처럼 슬픔이 찾아오는 밤이 있다. 대낮에도 어두운 밤이 오고, 그 어둠 속에서 막막해지는 때, 일상의 허울을 깨고 내게 자꾸 풀지 못하는 퀴즈를 던지는 그 무엇을 나는 슬픔이라고 부른다. 슬픔도 오래되면 나름대로 내공이 쌓이는가 보다. 나는 그 어려운 퀴즈를 이제 농담처럼 받기로 했다. 떼어내려고도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겠다. 물처럼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하는 슬픔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공처럼 거침없이 던지기도 하고 못 본 체 하기도 할 것이다. 짐짓 어깃장도 놓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그것을 풀 수 없을 터이니 잘 가지고 놀아볼 작정이다. 슬프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지 않을 것이며 보듬어 함께 갈 것이다.
슬픔은 때로 광활한 어둠이다. 그 어둠의 바다에 반짝이는 별의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어둠이 없다면 어떻게 빛나는 별을 품을 수 있을까? 슬픔이 없다면 어떻게 시를 건져 올릴 수 있을까? 그것을 즐길 것이다. 슬픔은 기쁨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슬픔의 밥상을 기꺼이 받겠다. 혀로 밀어내며 될 수 있는 한 오래 씹어서 삼킬 것이다. 슬픔의 힘을 나는 믿는다.
◈ 남유정 시인 ◈
▪ 충북 충부 출생
▪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 1999년 『시와 비평』으로 등단
▪ 현재, 서울 경기초등학교 재직
▪ 시집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
▪ E-mail : tsnam200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