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생애와 예술
프레데리크 쇼팽은 1810년 바르샤바 인근 젤라조바 볼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미하우(1771~1844)는 프랑스인으로 16세 때 폴란드로이주했다. 자신을, 폴란드인이라고 확신하고 살았으며 1795년경 폴란드 혁명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귀족의 가정 교사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고, 이 때 귀족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유스티나(1782~1861)와 알게되어 결혼하였고, 둘째로 태어난 아기가 프레데리크 쇼팽이었다. 그가 태어난 해에 1810년 10월에 미하우는 바르샤바 리체움의 프랑스어 교사가 되어 가족들과 함께 바르샤바로 이주하였다.
▲쇼팽이 태어난 집(젤라조바 볼라) 현재는 쇼팽의 박물관이 되어 있다
미하우는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잘 연주하고 유스티는 노래와 피아노에 능숙했기 때문에 쇼팽의 집에는 항상 음악이 넘처흘렀다. 그리고 그 집의 응접실은 바르샤바의 문화인과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드는 살롱이 되었다. 이런 음악적, 문화적 환경속에서 프레데리크 쇼팽은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어린 쇼팽을 본 부모는 그를 음악가 보이체흐 지브니(1756~1842)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지브니는 자유롭게 즉흥 연주를 즐기는 쇼팽의 재능을 살려주면서 한편으로는 바흐와 모차르트 등의 고전을 가르쳤다. 쇼팽은 아직 악보조차 쓸 수 없었던 7세 때에 작곡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 무렵 쓴 g단조 폴로네이즈는 출판되기도 하였다. 쇼팽은 귀족의 궁전이나 살롱에 종종 초대되어 연주하였고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쇼팽(1833)의 판화 그림
1823년 쇼팽(13세)은 리체움(Lyceum_중고등학교)에 입학, 바르샤바 음악원장 유제프 엘스너(1769~1854)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된다. 쇼팽은 그에게서 화성과 대위법을 배우고, 빈 음악을 비릇한 당시의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된다. 한편 엘스너는 쇼팽의 천재성이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귀에 의지하여 피아노 소리를 만들고 그것에 맞는 연주법을 고안해 내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규칙 투성이의 학습으로 쇼팽의 재능을 죽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충분한 배려를 하였다. 이런 교육속에서 쇼팽은 음악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는데, 쇼팽의 음악적 모체 가운데 하나는 폴란드 민속 음악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부르던 민요를 듣고 바르샤바에서 여러 가지 민속 접한 쇼팽이었지만, 리체움의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시골 등지의 생활 속에 살아 있는 민요를 직접 들은 것이 특히 큰 경험이 되었다. 그런 민속 음악의 특징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자신의 음악 어법을 확립하게 된다.
1826년 쇼팽(16세)은 바르사뱌 음악원에 입학, 계속해서 엘스너를 사사하면서 고전 양식의 작품속에 손대는 한편, 바르샤바를 찾아온 명연주가들의 연주를 듣거나 오페라에 빠지기도 하면서 폭넓게 음악 공부를 한다. 1828년에는 베를린으로 가서 신작 오페라와 헨델의 곡 등을 들으며 자극을 받았다. 바르샤바에서 연주한 음악가들 중 쇼팽을 특별히 감명시킨 사람은 피아노의 후멜과 바이올린의 파가니니였는데, 특히 파가니니에게서는 서로 연주 악기는 다르지만 종래의 연주법을 뛰어넘어 새로운 표현 영역을 끌어내려는 자세를 배웠다. 이런 다양한 경험 속에서 그의 음악은 더욱 풍부해지고, 피아노 연주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법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인정된 것은 음악원 졸업 후인 1829년 여름에 찾아간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는데, 주위의 권고로 열린 두 차례의 연주회에서 그는 대호평을 받았다. 오직 화려한 연주법만을 좋아하던 빈에서 섬세하고 미묘한 표현을 추구하는 자신의 연주법이 인정되었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쇼팽은 국제적으로 널리 활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810년대 바르샤바 시가
아버지 미하우는 바르샤바 중학교의 프랑스어 선생이 되어 온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사했다.
이후 쇼팽은 파리로 갈 때까지 20년간 이 도시에서 성장했다. 그가 다니던 음악학교도 여기에 있었다
1830년 쇼팽(20세) 바르샤바로 돌안온 후, 연주가로 활약하기 위해서는 협주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쇼팽은 《f단조 협주곡_피아노협주곡2번》의 작곡에 착수하는데, 이 곡에는 당시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었던 콘스탄치아에 대한 첫사랑의 기억이 담겨 있다. 협주곡은 1830년 3월 17일, 바르샤바에서 열린 본격적인 공개 연주회에서 처음으로 공식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어서 《e단조 협주곡_피아노협주곡1번》의 작곡에 착수하면서 국외에서의 활동을 기대하며 외국으로 진출할 준비를 한다. 바르샤바를 떠나면서 열린 10월 11일 고별 연주회에서 그는 신작《피아노협주곡1번》등을 연주하였는데, 이때에는 그가 연모하던 콘스탄치아도 찬조 출연해 주었다. 그리고 11월 2일 드디어 빈으로 떠나는데, 이것을 마지막으로 쇼팽은 두 번 다시 조국 땅을 밟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 때가(1830년)그의 나이 20세 였다.
쇼팽은 11월 22일 빈에 도착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샤바에서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의 소식이 전해진다.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그가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고조되어 있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 혁명군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을 서두른다. 티투스와 마찬가지로 열렬한 애국자였던 쇼팽도 귀국을 결심하지만, 음악가는 음악으로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는 티투스의 설득에 따라 결국 빈에 남는다. 하지만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인들이 이 혁명으로 말미암아 폴란드인을 적대시하게 되어 빈에서는 쇼팽이 바라던 음악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한때는 여권마저 빼앗겼을 정도였다.
▲1831년 바르샤바 시가의 혁명전
쇼팽은 1830년, 고향을 떠나 빈을 거쳐 1831년에 파리로 향했는데
도중에 시투트가르트에서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신은 없는가 아니면 신 자신이 모스크바 사람인가?' 라고 외치고 고향의 가족을 걱정했다.
이 때에 쓴 작품이 이 《혁명의 에튀드》였다.
1831년 7월 쇼팽(21세)은 마침내 빈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파리로 가는 도중 슈투트가르트에서 러시아군이 혁명을 진압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비참한 조국을 향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근심, 이국 땅에서의 고독과 경제적 궁핍 때문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 무렵의 편지와 수기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혁명》연습곡이나《전주곡집》작품28 중 제24번 등이 이 시기에 구상되었다고 여겨지는데, 훗날 그의 작풍의 한 부분이 된 다이내믹한 감정 표현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1832년 2월 26일 파리 플레이엘 홀에서의
쇼팽(22세)의 데뷔 콘서트 모습
1831년 9월에 파리에 도착한 쇼팽은 그곳에서 파리의 많은 음악가들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었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저쩔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을 했지만, 리스트나 칼크브레너 등이 여러 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 덕택에 이듬해 1832년 2월에는 파리의 플레이엘 홀에서 데뷔 연주회를 열어 성곡을 거둔다. 이를 계기로 경제적 궁핑에서 벗어나고 작품 출판요청도 들어오고 4월경부터는 제자도 두기 시작하여 경제적으로 차츰 안정되어 갔다.
상류 계층의 살롱과 망명한 폴란드인 집을 드나들 기회도 많아진 쇼팽은 피아노 연주로 사교계의 스타가 된 동시에 많은 귀족과 상류 시민의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된다. 당연히 교우 관계도 넓어져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사귀었고, 망명한 폴란드인과는 항상 조국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으며, 프랑스 예술가들의 낭만주의적인 자유로운 사상을 접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의 피아노곡은 서정성과 격렬함을 동시에 가진 극적인 감정 표현, 웅변적이면서도 섬세한 표정의 선율, 대담한 화성의 취급 등 한층 폭넓은 표현을 추구했는데, 이로써 중기의 작풍이 확립되어 가게 된다.
▲마리아 보진스카(Maira Wodzinska 1819~1896). 자화상
1835년 여름, 쇼팽은 동향(同鄕)의 학우 안토니 보진스카네 집을
파리에서 드레스덴으로 찾아갔을 때 안토니의 여동생 마리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그래서 이듬해인 1836년에도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리엔바트 온천지를 방문하여 사랑에 빠졌고,
본인끼리 약혼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실연의 상처를 입었다.
그는 그 때까지 받은 연애편지를 묶고 그 위에
Mojya bieda_모야 바비에다 (나의 비애)라고 쓰고 일생의 추억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1835년 여름 쇼팽은 요양 온 부모와 5년만에 카를스바트에서 다시 만나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바르샤바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보진스카 집안 사람들과 드레스덴에서 다시 만났는데, 16세가 되어 몰라볼 정도의 미인으로 성장한 장녀 마리아 보진스카는 쇼팽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버린다. 이듬해 쇼팽은 마리아게게 구혼을 하였고 그녀의 어머니 보진스카 부인도 허락했지만 ,1837년 부인으로부터 약혼 파기를 알리는 편지가 와서 결국 쇼팽은 실연을 맛보게 된다. 이유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아무래도 쇼팽의 건강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그동안 여러번 쇼팽은 각혈을 한 적이 있다. 아무튼 이 괴로운 사랑의 경험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쇼팽은 마리아와 그녀의 집안사람들이 보내 온 편지를 묶어 그 위에「나의 괴로움(비애)」이라고 적었다.
▲ 쇼팽(1836년). 마리아 보지니스카가 그린 수채화
1836년 가을 쇼팽 26세 때 리스트 애인인 다구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리스트에게서 조르주 상드(1804~1876)_32세를 소개 받는다. 상드는 사회주의적인 성향의 여류 작가로 프랑스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여권신장론을 주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남장을 하고 잎담배를 피우는 등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쇼팽은 그런 점 때문에 처음에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상드 쪽에서는 연하인 쇼팽의 인간성과 음악에 매료되어 버린 듯하다. 쇼팽도 그녀에게 점점 호의를 느끼게 되었으며, 마리아와 파혼한 후 두 사람 관계는 급속히 깊어진다.
1838년 10월 말,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따로따로 파리를 떠나 페르피냥에서 합류, 11월 초 상드의 두 아이와 함께 마조르카(Majorca) 섬으로 향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쇼팽과 몸이 약한 두 두아이의 요양을 겸한 마조르카 행이었지만, 이 시기의 마조르카 섬은 우기(雨氣)로 기후 변덕이 심한 계절이어서 요양은 커녕 쇼팽은 병이 재발, 각혈을 되풀이하며 몸이 완전히 쇠약해졌다. 또 섬 주민들도 푸대접과 차별이 심해 생활은 아주 비참했지만 상드의 헌신적인 간병 덕택으로 쇼팽은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갔다. 그 동안 그는 전부터 작곡을 진행하고 있었던《전주곡집》작품28 등을 완성하고 스케르초 제3번 작품39 등에도 몰두한다.
▲발데모사 수도원의 상드의 방에 있는 상드의 초상
조르주 상드의 백작부인으로서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으나
약 10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문단에 나와 남자복색을 하고 남자 이름을 썼다.
쇼팽보다 6세 위였지만 동거생활에 들어가, 1838년에는 마조르카 섬의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쇼팽이 요양하는 데 간호를 했다.
1838년 겨울, 가슴병을 앓는 쇼팽은 상드와 그녀의 두 아이와 함께
상춘의 마조르카 섬을 찾았다.
그러나 폐병을 꺼리는 섬사람들이 방을 빌려주지 않아 읍내에서 18km나 떨어진
산중의 빈 집 같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안에는 한약방 같은 약국이 있어 쇼팽은 그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생이 많아 요양이 되지 않자, 봄이 오기 전에 돌아왔다.
마조르카 생활은 꺼림직한 추억한 남겼지만 쇼팽과 상드의 관계는 그로 인해 더욱 친밀해졌다. 1839년 2월 그들은 마조르카를 떠나는데 쇼팽은 배 안에서도 각혈을 하여 한동안 마르세유에서 요양한 후, 병이 호전된 5월 말에 마르세유를 떠나 노앙에 있는 상드의 저택으로 향했다. 쇼팽은 기후가 좋은 노앙에 한참 동안 머물렀는데, 평화로운 환경과 상드의 애정에 힘입어 건강을 회복하여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다. 《소나타 제2번》등 몇 의 명작이 이 시기에 나온다. 그리고 10월, 오랜만에 그들은 파리 사교계로 다시 돌아왔다. 쇼팽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상드의 살롱에 모이는 많은 지식인들과 사귄다. 그중에서도 화가와 시인 등과 교제는 쇼팽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1841년 (쇼팽 31세) 4월에는 플레이엘 홀에서 오랜만에 독주회(리사이틀)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 2월에도 연주회를 여는 등 파리에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쇼팽과 상드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1841년부터 1846년까지 매년 초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노앙의 상드 저택에서 함께 지내고 겨울에는 파리로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노앙은 쇼팽의 창작력을 가장 발휘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 배경에는 상드의 더할 나위 없이 극진한 애정이 있었다. 상드와 쇼팽의 관계는, 남녀간의 사랑은 처음 얼마뿐이었고 그 후에는 오히려 누나와 동생, 때로는 어머니와 아들의 애정과 같은 것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상드의 헌신적인 모습은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노앙에 있는 저택의 가장 좋은 방을 쇼팽에게 내주고 모든 생활을 그의 창작과 건강에 맞추어 계획했으며, 일상 생활의 잡다한 일에 그가 관여할 필요가 없도록 신경을 썼다. 상드는 쇼팽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다했다. 1842년 스승 지브니가 사망하고, 친구인 마투시니스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쇼팽이 의기소침해졌 때에도 상드는 다른 친구들을 노앙으로 초대해 쇼팽의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이러는 동안 쇼팽은 원숙기의 걸작들을 만들어내는데, 보다 폭넓은 구성법, 동기 발전 서법에 따른 논리성, 한층 자유롭고 대담한 화성 어법, 폴리포니적 서법의 사용, 환상적 분위기 등이 결합되는 후기의 작풍이 추구되어 간다.
▲조르주 상드의 저택. 마조르카에서 고생을 하고 난 후
상드와 쇼팽은 바르셀로나, 마르세유를 거쳐 노앙의 이 별장에 왔다.
그는 매년 이 곳에 와 그의 만년의 대작을 썼다. 그러나 두 사람은 상드의 의 문제로 오해가 생겨
1846년경 헤어진 후 쇼팽이 죽음에 이르기 까지
서로 만남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1843년경부터는 쇼팽의 건강이 점점 악화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신경과민이 되었고, 상드는 이유 없이 쇼팽의 질투에 괴로움을 당하는 등 두 사람의 관계레 그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1844년 아버지 미하우의 사망 소식을 접한 쇼팽이 정신적 타격으로 심신이 허탈해져 있을 때, 상드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그리고 누가가 쇼팽을 걱정하여 바르샤바를 찾아왔을 때에도 친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하며 상드는 여전히 깊은 애정을 쇼팽에게 쏟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된 실제 원인은 상드의 두 아이 문제였다. 상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들(모리스)는 처음부터 쇼팽에게 반감이 가졌는데, 상드와 사이가 나빴던 딸(솔랑주)은 타고난 간사함으로 쇼팽을 교묘하게 자기 편에 끌어들렸다. 이런 가정 내의 대립이 1845년경부터 표면화되다가 1847년(쇼팽 37세) 솔랑주의 결혼문제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된다. 상드가 딸 부부와 인연을 끊었다는 것을 알게된 쇼팽은 그 경위를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딸이 하는 말만 듣고 상드에게 훈계하는 듯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가 상드를 매우 화나게 만들었으며, 쇼팽에게 보낸 그 편지에 대한 반론에 쇼팽이 답장을 보내 오지 않음으로써 결국 두 사람 사이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분히 오해로 인해 빚어진 결별이었지만 두 사람 관계는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가정 불화에 휩싸이면서 쇼팽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서도《환상 폴로네즈》와《뱃노래》, 첼로 소나타 같은 최후의 걸작이 계속 작곡되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상드와 헤어진 이후에는 그의 창작 의욕도 눈에 띄게 시들어 갔다. 1848년 2월 16일(쇼팽 38세) 플레이엘 홀에서 열린 연후회에서 오랜 친구이며 유명한 첼로 주자인 프랑숌과 함께 첼로 소나타 등을 연주했는데, 이것이 파리에서 마지막 연주회가 되었다. 악화되는 그의 병세를 보고 걱정해주는 친구와 제자들이 곁에 있었지만, 쇼팽의 마음은 고독에 시달린 나머지 창작의 붓을 더 이상 들지 못하게 된다. 그러던 중 제자 중 한 사람이 영국으로 그를 초대해 주었다. 때마침 파리는 2월 혁명 발발로 혼란스러워 쇼팽은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영국행을 결심, 4월에 런던에 도착하였다.
▲쇼팽(1849년) 생의 마지막 해에 촬영한 유일한 사진
런던에서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어전 연주를 비릇하여 공개 연주회와 살롱 연주회로 절찬받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여름에는 스코틀랜드에도 갔다. 이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마음은 더욱 침울해져 각혈이 잦아지는 등 결핵 증상이 더욱 심해졌다. 낯선 영국에 적응하지 못한 쇼팽은 결국 11월말에 파리로 돌아오는데, 이듬해인 1849년이 되어도 병이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지인들이 병문안을 왔으며 심지어 누운채로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고 병상에서 마주르카를 작곡하기도 했지만,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 마침내 1849년 10월 17일 생을 마감했다(39세). 장례식은 10월 30일 마들렌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한 성대한 장례식장이었지만, 주르주 상드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유해는 파리의 묘지에 안치했지만, 유언에 따라 심장만은 그의 누나가 바르샤바로 옮겨 성 십자가 교회에 묻혔다. 쇼팽의 마음은 항상 고국 폴란드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쇼팽의 죽음의 자리에서 노래하는 포토츠카 백작부인
쇼팽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차우에서 달려와 병상을 위문했다.
포토츠카 백작부인은 폴란드에 남편을 남겨두고 혼자서 파리에 살면서
사교계의 꽃 가운데 한사람이 되어 있었다.
3살 연상인 남편이 있는여성과의 연애는 3년쯤 계속 되었으나, 결국 이룰수 없는 사랑이였다.
초상화를 보면 포토츠카 부인은 육체가 풍만하고 매혹적으로 보이는 요염한 매력의 소유자라고 한다.
쇼팽은 포토츠카와의 아이를 갖기를 원했다고 하며 그런 희망을 표시하는 것은
이여인 한사람 뿐이였다 한다.
하지만 쇼팽의 생애와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진 여성은 조르쥬 상드이다.
▲ 쇼팽의 심장비(心臟碑)
그의 유언으로, 그의 심장은 절제되어
그의 누나 편으로 폴란드로 보내어져 현재 성십자가 교회의 성당에 모셔져 있다.
쇼팽의 음악은 서양 음악사의 흐름 속에서도 완전히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아노 작품 대부분은 낭만파의 이른바 「성격적 소품」에 속하는 것인데, 그는 이런 소품 형식 속에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스케르초, 연습곡, 전주곡 등에 있어서는 이전까지의 이 장르들과는 다른 개념을 추구했으며, 야상곡에서는 선구자인 존 필드의 양식을 심화시켰고, 발라드라는 새로운 피아노 장르를 창조했다. 또한 살롱 음악으로서의 왈츠에서 시적 정취를 부여했으며, 민속 음악인 마주르카와 폴로네즈를 민족 정신의 표현을 위한 예술적 악곡으로 양식화하는 등 그의 소품은 어느 장르 할 것 없이 종래에는 없었던 독창성이 나타나 있다.
쇼팽의 독창성으로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역시 피아노라는 악기에 집착하여 이 악기의 표현 능력의 가능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라 하겠다. 쇼팽의 피아노곡의 고도의 기교상 특징은 쇼팽 자신의 피아노 연주법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일반적이었던 화려하고 힘찬 비르투오소적 연주법과는 달리, 아름다운 음으로 리카토를 주체로 하여 리듬과 악센트의 변화 및 미묘한 음색의 변화로 섬세한 표정을 만들어내는 쇼팽 특유의 연주법은 그의 피아노곡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쇼팽의 작품에 보이는 독자적인 선율적, 화성적 어법 역시 피아노라는 악기 및 그의 독특한 연주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선율로 말하자면, 그의 작품이 가지는 특유의 음형과 성악적 요소는 쇼팽 피아노 연주법을 확실하게 특징짓는다. 그 이상으로 독특하고 대담한 것은 쇼팽의 화성적 어법이라고 하겠다. 한 작품 속의 구성법도 독특한 것이 많지만, 그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대담한 조바꿈의 연속과 조성이 불분명한 음의 움직임, 화성의 논리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새로운 소리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듯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년 시절부터 쇼팽은 고전적 화성 어법을 따르지 않고 실제로 피아노를 만지며 귀로 소리를 만드는 방법으로 자신의 음악을 창조했는데, 이러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 발상이 화성적인 대담함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된다.
▲쇼팽의 기념상. 대리석
쇼팽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반라(半裸)의 조르주 상드가 듣는다.
자크 프로망 무리스 작. 파리 몽소 공원.
이러한 선율과 화성 어법을 포함하여, 쇼팽의 음악의 독자성을 이해한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폴란드 민속 음악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민속 음악이야말로 그의 음악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만속 음악이 가지는 선율과 화음의 특징, 선법성, 리듬과 악센트의 특성, 템포, 연주법 등에서 쇼팽은 많은 힌트를 얻고 있다. 물론 민속 음악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작품 속에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을 뽑아내어 그것을 독자적인 방법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어법 속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비단 마주르카나 폴로네이즈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장르의 작품에 해당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선율과 화성, 리듬에 대한 독자성은 어떤 면에서는 피아니스트다운 발상에서 나온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모국 폴란드의 음악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쇼팽이 고전적 전통과 당시의 유럽 음악과 사상에서 많은 부분을 얻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바흐를 사랑하고 특히 그의 대위법을 연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것은 형태마저 달리하여 쇼팽의 음악에 종종 나타나는 폴리포니적(多聲音樂)서법에 살아 있다.
▲ 쇼팽의 피아노
또한 고전 음악에 대한 심취는, 언뜻 보기에는 자유로운 형식적인 그의 작품 뒤에서 작용하고 있는 통일된 논리법과 독자적인 주제 발전 서법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비르투오소적인 경향, 특히 바이올린과 파가니니로부터 쇼팽은 악기의 새로운 표현 영역을 개척하는 자세를 배웠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자유롭고 혁명적인 사상은 원래부터 자유로운 혁신성을 가졌던 그의 음악에 더욱 큰 자극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했던 것은 로시니를 비릇한 당시의 오페라였는데, 인간의 호흡법에 따른 화성적 가창법이야말로 그의 피아노 연주법의 본보기였다. 쇼팽의 선율이 가지고 있는 성악적인 요소와 음형은 벨칸토 오페라에서 영향받은 바 크다. 쇼팽은 이러한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들였지만, 그것들을 완전히 자신만의 음악적 요소로 만듦으로써 그의 작풍이 개성적인 것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쇼팽의 음악 양식은 매우 독자적이다. 그는 그런 독자적인 양식을 통해 폴란드인다운 정신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만족적인 자긍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쇼팽이 민족적 정신과 감정을 스스로 표현하기 위한 서법을 추구한 결과, 그의 독자적인 양식이 나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이란 소리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말한 쇼팽에게 있어서 그 사상과 감정이라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을 초월한, 폴란드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의 그것이었다. 그의 작품이 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한 듯한 것도, 거기에서 민족적 정신을 느끼게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Chopin Waltz Op. 69 No. 1
▲쇼팽이 마리아 보진스카를 위해 작곡한 A 플랫 장조(Op. 69. No. 1)
쇼팽의 개성적 양식은 후기가 될수록 더욱 세련되고 첨예화된다. 형식적으로는 더욱 자유스러워졌지만 그 구성은 더욱 견고하고 논리적으로 변모했으며, 이전부터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냈던 선율법은 더욱 미묘한 표현을 자아냈다. 특히 자유자재로운 쇼팽 특유의 화성법은 후기 작품에 들어와 종종 시대를 앞서갔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한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훗날 드뷔시와 스크랴빈이 쇼팽의 화성법에 주목한 것도 그런 참신함 때문이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허용되지 않지만, 만약 쇼팽이 조금만 더 오랫동안 창작 활동을 지속하여 그런 방향으로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한다면, 바그너나 리스트에 버금가는 음악사의 혁신가로 간주되었을지도 모른다. 쇼팽이라고 하면 자칫 센티멘털한 소품 작곡가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이처럼 강렬한 민족 정신 위에 개성적 양식을 추구한 혁신적인 음악가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한결 친근감을 느낍니다.
좀 더 건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 그래서 실연 당하지 않았더러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더욱 감성이 충만하고 깊고 윤택한 음악이 태어났는지도 모르지만..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어렸을 때 음악을 얼마나 접할 수 있는지가
음악적 재능에 있어서 참 중요한 듯 싶습니다!
천재들은 어릴적부터 뭔가 틀리죠
쇼팽을 흠모하는 할머니입니다. 특히 즉흥환상곡 , 녹턴 20번을 좋아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