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화 되어가는 기독교
최근 기독교 인사들 중에는 종교와 정치의 경계선을 넘나들거나 아예 그것을 무너뜨리고 현실 정치 한 가운데 종교적 정치꾼처럼 뛰어드는 위험한 행보를 걷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기독교의 정치화 또는 정치화된 기독교를 허용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이런 형태를 과연 기독교라고, 또는 자신의 복음을 순수하게 실현하는 기독교라고 인정하실까요? 우리는 오래 전부터 신학교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에 대해 많이 들어왔고, 또한 우리나라 헌법도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자들도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자신의 정치이념이나 성향을 갖게 마련이고, 혹시라도 자신의 정치이념이나 성향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집단이나 움직임에 직면하게 되면 설교 단상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메시지를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포장하여 전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정치성향과 다른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언성을 높이거나 심지어 멱살을 잡고 싸우기까지 하는 분들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기독교 정당을 만들려는 시도까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정치화의 길을 가면 얻는 것보다 훨씬 잃는 게 많아질 것입니다. 정치란 본래 이념과 이익 집단들 간의 싸움과 갈등이 발생하는 장소인데 기독교가 한 쪽의 이념이나 이익을 대변한다고 판단되는 순간 반드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선을 긋는 일은 현실적으로 참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사회란 곳은 다양한 정치 성향과 이익 집단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라, 한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성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쪽의 정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공격해야 하고 또 그들의 약점을 파고 들어 선전선동도 하고 필요하다면 가짜뉴스까지 동원하여 상대방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또한 한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다른 쪽 이익집단을 공격하거나 그들의 약점을 과장하여 선동하고 때로는 가짜뉴스라도 교묘하고 퍼뜨려 그들의 명분이나 논리를 허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정치 논리나 이익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허물고 공격하고 대중들이 자신의 소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거짓말도 진짜인 것처럼 포장해서 대중 심리 선동을 잘 해야 하는 것이 바로 현실 정치입니다. 이런 일을 잘 해야 국민들의 여론을 움직여 선거 때 표를 많이 확보할 수 있고 대선이든 지선이든 각종 선거에서 승리하여 수많은 이권들과 정치적인 자리들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과연 기독교가 이런 정치현실의 아귀다툼에 뛰어들어 복음이 가르치는 그 숭고한 정신을 유지하고 전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이 현실정치의 이전투구에 깊이 관여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들의 순수한 정체성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정치란 것은 현실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일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이익집단과 정치성향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현실 사회는 늘 그들 간의 갈등과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테면, 북한과 가능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우리나라 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통일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에 북한에 여러 지원도 해주고 상호간 왕래나 교류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나 정치집단도 있는 반면, 북한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무단도발을 일삼으며 얼마 안 되는 특권층들만을 위해 백성을 탄압하고 죽이는 반인권적 패거리 집단일 뿐이며, 더욱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보았자 핵무기나 만들고 각종 첨단 미사일이나 만들기 때문에 쌀 한 톨이라도 북한 정권에 지원하는 일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양쪽 생각들은 다들 나름대로 전혀 명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현실정치 상황에서는 100% 맞고 틀리다는 흑백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방 논리나 명분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각 정파간의 끈임없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사회 각 이익 집단들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조정하려는 것이 바로 정치여야 하는데, 한국의 현실정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정치는 오히려 갈등과 분쟁을 더 조장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며 화나게 하거나 정치에 오히려 실망하고 등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상대방 정치세력을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타도해야 할 적처럼 여기도 보니 정치 집단들 간에 권모술수, 거짓된 선동, 음해 등 온갖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북한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기라도 하면, 좌파니 빨갱이니 하면서 타도의 대상으로 선동하기 십상이고 그렇게 해야 자신의 지지세력을 규합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반대로 북한과는 어떤 관계라도 끊어버리고 북한정권을 타도 대상으로 접근하기라도 하면 민족 분열론자니 전쟁광이니 냉전론자이니 하고 상대방을 매도하기 일쑤입니다. 현실문제를 이런 식으로 이념적적으로, 때론 당리당략적으로 풀기 위해 온갖 마타도어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정치생리이고, 아무리 착한 선의를 가진 정치 신인도 이런 현실정치의 진흙탕 싸움에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 저 사람이 저렇게 변했을까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현실정치의 벽은 쉽게 깨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자파 정치집단의 당리당략을 따르지 않고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정치신인은 거의 그 세계에서 오래 생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유대사회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
그렇다면 이천년 전에 갈릴리를 무대로 활동하시던 예수님은 실제 어떤 분이셨을까요? 지금 손에 붓과 캠퍼스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의 예수님을 그리고 싶으십니까? 지금 우리가 따르는 그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예수님에게 덧칠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시각들은 엄청나게 다양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때로 유대교의 한 대중적인 랍비로, 때로는 훌륭한 도덕선생으로, 때로는 묵시적인 몽상가로, 때로는 민중 혁명가로, 때로는 어떤 변화도 싫어하는 보수주의자로, 때로는 기존의 기득권과 가치관을 허물고자 도전하는 그런 진보주의자로 그리고 싶어합니다.
오래 전 시내의 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대 대학생들에게 신앙지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소위 운동권 학생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지도교역자인 내 허락도 없이 10여명이 넘는 후배 대학생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 소위 의식화작업이란 것을 했습니다. 그들이 탐독한 책들은 주로 막스 레인주의에 기초한 사회과학 저서들,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를 제국적 매판자본주의로 비평하는 책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 중에 리더로 활동하는 대학교 선배 학생이 하산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금요일 오후 즈음 집으로 귀가하는 그를 만났습니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안수집사님의 아들이었는데, 아주 똑똑하고 말도 잘 하는 친구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너는 도대체 예수님을 믿냐?" "예, 믿습니다. 하지만 전도사님이 믿는 그런 예수님은 믿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예수님은 전도사님이 믿는 예수님과 종류가 다릅니다." "어째서 종류가 다르냐?"고 했더니 "예수님이 이 시대에 다시 오신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부자들과 부패한 권력자들을 향하여 나와 같이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드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안 믿으시지요? 그러니까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 종류가 다른 예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쇠파이프를 듣고 화염병을 던지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셨나요? 그 운동권 학생이 생각한 예수는 분명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압제당하는 자들 위해 싸우는 민중의 투자였지요.
그런데 비슷한 오류가 보수주의적인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발견됩니다. 어떤 분들은 2천년 전에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훨씬 더 보수적인 분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자신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예수님을 덧칠해서 새로운 보수주의자 예수님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보수적인 분이셨을까요, 아니면 진보적인 분이셨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는 어떤 제자가 되어야 하는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쇠파이프를 들고 화염병을 던지며 기득권층과 싸우는 민중의 투사였다면, 우리도 그런 종류의 투사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실제로 보수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그런 보수주의자였다면, 우리도 같은 종류의 보수주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 또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가가 결정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다녔습니다. 예수께서 환영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실제로 그들을 환영하셨고 가까이 대하셨기 때문에 몰려든 것이 분명합니다. 마가복음 2:15은 이점을 잘 말해줍니다. "이는 저희가 (세리와 죄인들)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마태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 (마 11:19). 한역 성경은 이 구절을 부드럽고 점잖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파고스'란 말은 '탐식가'(glutton)를, '오이노포테스'는 '술주정뱅이(drunkard)를 뜻합니다. 당대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는 탐식가요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술주정뱅이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예수님이 탐식가요 술주정뱅이였겠습니까?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지나치게 폄훼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럼데도 여기에는 진리의 요도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사회적인 하층민들과 지탄 받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늘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늘 먹는 분이셨고 그들과 친구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는 이점을 세례 요한과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11:29)고 한 반면, 예수님은 "와서 먹고 마시매 말히기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19절). 세례 요한은 매우 금욕적인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공생에 초기에 한번 금식한 것 이외에는 금식을 잘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대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들의 눈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유대교의 정규적인 금식일도 잘 지키지 않았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습니다. 이런 행동은 그들의 눈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유대사회의 기존 가치관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죄인과 의인을 갈라놓던 유대사회의 전통 가치관의 담을 의도적으로 도전하시고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도 안 지키셨고, 금식일도 준수하거나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음식법과 정결법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은 부정한 죄인들과 친구가 되시고 그들과 먹고 마시고 어울리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평가한다면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어떤 범주에 속할까요? 예수님은 과연 보수주의자였을까요 아니면 진보주의자였을까요?
천국의 초월적 가치관을 따르신 예수님
아마도 보수적인 유대 종교사회의 잣대로 보면 예수님은 기존의 종교적 계율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위험한 진보주의자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에수님의 행동을 단순하게 범주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진보주의자도 아니고 보수주의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의 한 한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초월적인 질서를 세상에 끌어들이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간에 세상의 모든 정치 이념들은 이 초월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상대화되어야고 비판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보다 더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로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처럼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인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그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을 때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가치질서를 끌어들여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 신중심적 개혁주의자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듯이 (막 2: 21-22), 예수님은 자신의 천국복음 전파를 통해서 초월적인 천국의 새 질서가 도래했다고 선포했습니다. 옛 시대의 낡은 가치관과 관습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념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앞에서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 시대의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의인과 죄인을 갈라놓고 그들 사이에 참된 사귐과 교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유대의 종교사회적인 가치관의 장벽에 도전하셨습니다. 옛 시대를 지배하던 이 가치관의 장벽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했습니다. 아무도 감히 이 가치관의 장벽을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려 식탁교제를 나누고 그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환영함으로써 이런 종교사회적 가치관의 담,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별과 분리의 담을 자신의 행동으로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도전적 행동 때문에, 마가복음 3:6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결탁을 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이로써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십자가 죽음을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나 기독교 복음을 세상의 한 정치 이데올로기 안에 가두어 특정정치 집단이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화의 과정을 걸으려는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의 이 초월적 가치관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나 목회자들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정치 성향을 나타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정치성향이나 집단이익이 복음의 이 초월적 가치관을 대체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을 허용하는 순간, 기독교은 더 이상 초월적인 천국의 질서를 전파하기를 포기하고 세상의 한 정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성경 안에서 배운 하나님 말씀의 계시의 빛 속에서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의 정치 집단들의 이념이나 주장들을 판단할 수 있는 이 초월적인 거리두기를 유지해 할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reading my article.
감사합니다.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