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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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아껴 썼던 예비비도 거들이 나버리고 사무실을 신암동 새마을 오거리 방향의 다소 규모가 작지만 아담한 곳으로 옮김으로써 당분간은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 할 수 있었다.
보증금 150만원에, 10만원을 다달이 지불해야 하는 월세가 다소의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15평이라면 그런대로 그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지내기엔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이전에 사용했던 집기 비품들은 거의 다 버리고 단출하게 사무실을 꾸몄다. 말이 사무실이지 마땅히 할 일도 없는 터여서 그냥 나만의 자유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여분의 돈이 150만원이 확보가 된 셈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나날의 일상이란, 달리 시도할 만한 사업도 마땅치가 않아 거의 칩거상태라고 해야 하는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으며 공인노무사 1차 시험 문제집을 펼쳐놓고 공부를 한다고는 하나 그것 역시 머리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만이 온통 나의 관심사였으니...... 거기에다 날마다 소주는 한 병씩 마셔야 하고 마시고 나면 그것으로 책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집에 가지 않은 날엔 둘이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가끔씩은 냄비에 밥을 해서 고추장 하나로 반찬을 대신할 정도의 내핍생활을 했다.
파산이후 19개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쪼들리는 생활이 심화되면서 정말 이러다간 다시는 재기치 못하고 영영 이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과 초조함이 나를 엄습해 온다. 사무실에서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전부였으나 신암동으로 옮겨 온 이후부터는 마음이 편치를 않다. 그녀까지 이런 혹독한 고행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먹을 만큼 먹은 내가 정말 몹쓸 짓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자책감으로 속앓이를 한다. 정말 헤쳐 나갈 돌파구는 없을까? 정말 없단 말인가. 자꾸만 초라해져 가는 나의 몰골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메어 온다.
*
하루 종일 머리가 뻐개질듯 쑤시고 아프다. 눈을 감고 누어있노라면 내 몸은 온통 머리통뿐인 것만 같다.
날마다 술로써 나를 짓이기고 남는 건 무엇일까? 내 눈에서 흐르는 이 눈물은 미련 때문인가? 회한의 눈물인가, 절대의 자유마저 내게는 이토록 허용이 되지 않는단 말인가.
속고 속이고 또 그렇게 굴러온 행로. 이 저주스러운 자그마한 몸뚱이가 한없이 지겹···기만 하다. 언젠가 나는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충족되어지는 날 참 나를 찾아 홀연히 나의 길을 찾아 떠날 것이다. 요즘은 왜 이렇게 내가 감상적으로 변해 가는지 모르겠다. 풍랑에 이리저리 좌절되고 꺾이고 짓밟히다 보니 나의 투지와 의지가 많이도 상했나 보다.
이생각저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다 보니 나의 관심사는 온통 그녀를 향한 해바라기와 같은 집착과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혼돈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영희, 고마웠다. 나에 대한 너의 모든 배려와 따스한 손길, 마음 씀씀이 이것들이 아직도 내가 존재해야할 유일한 이유가 되고 있기에......
눈물이 나도록 정겨운 너의 따스한 보살핌이 없었던들 내가 지니고 있는 현재의 좌표가 어찌 온전한 정신으로 지탱할 수 있었으리. 수시로 변해가는 나약함과 시시로 사그라져가는 내 영혼의 불 꺼짐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리.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아픔으로 나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산산이 흩어져 비산하는 어둠의 심연 속에서도 이처럼 나를 자각할 수 있게 된 것, 오직 너의 존재 때문이었음을 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인간이란 참 사악한 존재였지. 가식과 선의 탈을 쓰고 자신의 사악함을 용케도 가리는, 내면에서는 수채구덩이 썩는 악취를 풍기면서도 겉으론 온갖 향수로 위장하며 자신의 현상을 거짓의 가면 뒤에 숨기고 겉으론 웃으면서 행복해하고 으스대는 면상에서 흐르는 저 비굴한 미소와 얄팍한 앵무새의 조잘댐, 한 순간의 행복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 현재를 찬양하는 인간의 군상들.
그래 나도 한 때는 그러했으리라.
그렇지만 어찌할 것인가. 비록 그러한 속성을 알면서도 나 역시 그 길을 가고 있다.
자기합리화를 앞세워, 그렇지만 나는 결코 그런 부류에 속한 인간이 아니다며 항변하고 있지 아니한가.
보다 큰 자유를 위한 순간의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자학 역시 그런 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미화하였고, 너로 인한 나의 모든 사고들 역시 그렇게 합리화 시켜왔지 아니한가.
날이 갈수록 처절한 나의 자각 뒤에 남아 있는 허허로운 체중을 의식하면서, 그럴수록 나의 내면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애써 나는 부정하고 있다.
추잡한 치정인가, 순수한 사랑이란 말인가, 왜 나는 이렇게 너를 쫒는 불나비가 되고 말았나. 너의 체온을 생각하면서, 너와 속삭였던 밀어를 생각하면서, 너의 마음 깊숙이 내가 있기를 바라면서 영원하기를 소망하는 이 모순의 함정.
어둠속에서 천정을 바라보며, 이 암울한 공간속에 허허로운 고독을 감지하면서 두 볼에 흘러내리는 내 눈물의 성격이 '진실 된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기가 막힌 나를 생각해 본다.
*
비가 내린다. 창밖 가로등 불빛 속에 흔들거리는 프라타나스 잎사귀가 생명의 흔들림 같이 나를 비웃고 있다. 촉촉이 젖은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차량들의 불빛에 비치는 뿌연 운무 같은 부슬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이다. 밤비 오는 거리를 마냥 걸으면서 나 자신의 모든 추함을 그 빗속에 씻으면서 한껏 황홀한 기분에 자신을 맡기고 흐뭇해했던 날도 내겐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밤비는 그렇지 않다. 가슴이 짓눌린 듯 답답하고 암울한, 음산한 느낌의 밤비를 보면서 나는 끝없는 질곡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질주하는 차량의 바퀴에 흩어지면서 비산하는 포말마냥 나의 마음이 온통 밤거리에 내 팽개쳐 진다.
나는 자문자답해 본다.
나는 왜 이토록 잠 못 이루고 방황하고 있는가. 이토록 가슴이 북받쳐 터질 것 같은 고뇌의 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젠 완전히 죽어 사멸한 자존심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자기도피적 사고의 결과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이미 18개월 전에 죽어 없어진 내가 아니었든가.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온전히 정립되지 못한 회한의 오열이었던가. 앞길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를 생각할수록 한없이 작아지고 가여워지는 나 자신. 체면의 탈을 쓰고 꼭두각시 놀음을 하고 있는 이 모순. 그리고 내일도 어김없이 꾸역꾸역 걸어가야 하는 껍데기뿐인 나의 행로. 왜, 나는 과감히 모든 것 버리고 현실의 나를 솔직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가. 미련 때문에...... 어찌됐던 어제도 오늘도 현상은 변함없는 그대로인데 이토록 처량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아, 꿈이었겠지. 나의 환영을 내가 아닌 내가 보고 있구나.
창밖엔 여전히 비는 내리고 질주하는 차량들의 뒤로 흩어지는 비산하는 내 꿈을 보는 것 같은 이 밤에, 하염없는 응시 속에 나의 존재는 순간적으로 소멸되고 만다.
*
21시 45분 KBS 1TV에서 열반제란 영화를 보다.
미혹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사바중생의 고뇌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욕망의 정화 때문이요 천잠사보다 질기고 긴 삼세에 걸친 인연의 쇠사슬 때문이다. 생로병사하고 육도윤회하는 인간의 허상에서 벗어나 보살행을 통한 해탈의 길은 먼 것 같으나 그렇지 않기도 하다. 자신의 진면목을 추구하고자 갈망했던 혜광스 큰스님의 열반은 진정 장엄하였고 그것은 곧 끝이 아니라 시작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 우리들. 짧기도 하고 긴 것 같은 세월을 우리들은 그토록 고뇌하면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한순간 번갯불보다도 더 짧디 짧은 행복과 포만의 찰나를 위하여 애타게 갈구하고 시시로 변전되었었던 희노애락들. 행복이 무엇이며 불행이 무엇인가. 현실의 자신이 현실의 자신이며 또한 현실적으로 의식되는 자아가 진실된 자아였단 말인가. 정녕 우리들이 의식하고 감지하는 추함과 아름다움, 사랑과 증오, 그리고 모든 형상 소리 감각 들. 그것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세계에서 우리를 풍요롭게도 하고 우리를 초라하게도 하고, 때론 가슴 아프게도, 황홀하게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시시로 변해가는 무상한 것이요 또 그것이 마음자리의 선택이 아니겠는가. 구도의 길은 한량없고 또 그렇지 많은 않은 것. 진리와 법은 둘이 아니면서 하나이고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돌고 도는 하나인 것을. 그것은 정녕 우리들 마음 가장자리 지극히 오묘함이라.
*
1986년 오월 하순의 동해안 대진 앞바다.
탁 트인 수평선의 물마루가 하늘과 맞닿았다. 비릿한 바닷바람을 맡으면서 하얀 백사장을 걷는다. 우리들이 지나온 발자국들이 금방 파도에 씻기우고 그 포말이 부서지면서 우리의 옷을 적신다. 파도소리는 숫고동의 통곡인양 우리의 귀를 멍하게 하기에 족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노도소리는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킬 만큼 바위를 때리며 부서져 갔다. 멀리 언덕위에 병사들의 초소가 위장망 밑으로 보이고 초병의 모습이 마치 깎아놓은 돌 마냥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 오월 하순이라 해변은 한산하기만 하다.
그녀는 쪼르르 달려 나가 파도에 밀려와 울퉁불퉁하게 패진 모래밭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줍고 있다. 조개껍질이며 파도에 밀리고 깎이어 반질반질하게 변한 크고 작은 돌들을 한 움큼 쥐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나를 쳐다본다. 오월의 푸른 하늘아래 눈부시도록 빛나는 태양빛을 받아 그녀의 얼굴은 싱그러움으로 넘쳐흘렀고 너무도 청초하게 빛나 보였다. 마치 한 떨기 백합화처럼. 오후에 포구의 횟집에서 아침에 머구리배로 잡아온 잡어를 반찬으로 우리는 식사를 했다. 그녀의 기분도 많이 풀린 듯 예전의 발랄함을 되찾고 있는것 같았다. 쉬임없이 조잘거리며 아빠를 연호하는 것으로 보아 예전의 그 생기 있던 모습으로 되돌아 온듯 하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고 그녀의 기분 여하에 따라 내 기분의 기폭이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은 이 시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식사 후 해변을 따라 한참을 가니 옹기종기 해안선 주변과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성성된 작은 마을에 다다랐다. 멀리에는 한 척의 배가 가물가물 떠있고 그 배는 잠시후에 물마루를 넘어서 사라지고 있었다.
“영희야, 여기가 ‘뱃불’이란 곳이야. 그리고 한참을 더 가면 창포, 창포를 지나 돌밭길을 산을 넘으면 거기가 노물이고 그 다음이 오보란 곳이지”
“아빤 어떻게 이곳의 지리를 그리 잘 알고 계세요?”
“지금부터 10년 전이었지. 내가 육군 중위 때 이곳 해안부대 소대장을 맡았고 그 당시 오보동에 소초가 있었는데 작전구역이 노물동, 그리고 창포까지였어. 요즘엔 해안도로가 생겨 차도 다니고 불편함이 없지만 당시엔 길이 없어 바위를 깨트리고 그곳에 철주를 박고 거기다 로프를 설치하여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순찰을 하곤 했어.”
“그랬었군요. 그렇담 그 때 산길을 로프를 잡고 오르내리면서 고생이 많았겠네요.”
“그런대로 지낼 만 했었지. 어쩌다 탁 트인 바다에 와서 두 팔을 벌리고 짙푸른 파도를 보면 그동안 답답했던 도시를 탈출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지만 날이면 날마다 비릿한 바다냄새와 파도, 그리고 망망한 수평선을 마주하며 근무한다는 게 질리는 일이긴 했어. 그리고 이 끈적거리는 느낌도 그렇고......”
“아빠, 그 때의 재미있었던 이야기 좀 해줘요, 네”
“도깨비 불 이야기 해 줄까?”
“네에, 도깨비불이 어디 있어요, 요즘 세상에......”
“옛날엔 해안의 이곳저곳, 그리고 산을 돌다보면 이곳저곳에 화장터가 있었대. 그냥 막 살아가는 바닷가 사람들이 죽으면 때론 산에 매장을 하기도 했지만 노지에서 화장을 하곤 했어나 봐. 아마 오보동에서의 일이었다지. 한 번은 병사가 야간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낙비가 억수로 펴부었는데 마침 뒤를 돌아다 본 경계병이 갑자기 총을 난사하면서 그 자리에 기절하고 말았지. 그래서 난리가 났어. 이곳은 바다를 이용하여 침투하는 적, 또는 무장공비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서 근무를 하게 되는데 어떻게 뒤, 그러니까 산의 절벽을 향해 총을 쏘면서 기절하게 되었는지가 난리의 초점이 되었지. 그 초병이 깨어나 하는 말이 빗물이 폭포와 같이 쏟아져 내리는데 그걸 타고 불덩어리가 자기 앞으로 떨어져 오더라는 거야.”
“불덩어리가 떨어지다뇨?”
“그게 바로 화장을 하다 남은 뼛조각에서 비가 오는 날, 또는 습도가 많은 날에 떠다니는 인이 빗물과 섞여 흘러내린 것이지.”
바다에는 갈매기가 꾸우-꾸우 소리를 지르며 비상했다가 파도를 치면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있었던 많은 이야기를 영희를 위해 해 주었다.
초병이 근무하는데 바다에서 소복한 여인이 초병을 보고 손짓하며 유혹하는 처녀 귀신의 이야기며 노물에서 창포로 넘어가는 돌밭길의 귀신 이야기 등 태풍이 심하게 불던 옛날 난파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며 죽어갔던 그곳에서의 귀신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매우 신기하고 흥미롭게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산자락으로부터 어둠이 짙게 깔린다.
우리는 대진 앞바다의 산중턱에서 민박을 하기로 하고 방을 잡았다. 본체와 조금 떨어진, 평소에 그 집 중학생이 사용했던 방을 빌렸다. 조그마한 초소 규모의 작은 방이었는데 출입구의 문과 바다를 향한 작은 밀창문이 전부인 방은 나무로 짜서 만든 침대가 하나, 작은 책상에다 봉창문의 문지방위에 작은 호롱불의 불꽃이 나풀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어둑한 방안에 야릇한 심지 타는 냄새와 호롱불에 반사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밤이 깊어지자 광란하듯 밤새워 파도는 귓전을 때린다. 바닷가 산중턱의 밤은 비록 오월이었지만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