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누가복음 제19강
말씀 / 누가복음 11:1-13
요절 / 누가복음 11:2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오늘 말씀은 매주 주일마다 고백하는 주기도문,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주님의 기도문은 제자들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주여,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정해 주었으며 그것으로 기도하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18조로 된 기도문을 만들어 예식 때마다 이를 암송하도록 했습니다. 기도문을 가르쳐달라는 것은 그만큼 기도가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얼마큼 기도해야 응답받는지...’, 막연할 때가 많습니다. ‘시험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도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는 기도가 맞는지,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면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인지...’,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다보면 기도가 한없이 어려워지고 피곤하게 다가옵니다.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문을 가졌다면, 그런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해진 기도문대로 하루 세 번 기도하라!, 특별한 절기나 특별한 문제를 만나면 7번해라...’, 매뉴얼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확실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대부분의 기도는 결핍을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성적문제나 건강문제 혹은 내적 한계에 부딪히거나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문제를 만날 때,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한 결핍을 생각하면, 크고 웅장하신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자이시여!,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여!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시여!’, 크고 웅장한 호칭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책임지지 않는 무능력한 아버지, 감정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 저희 세대의 많은 아버지들은 유교적인 문화가운데 자라고 생존 자체를 걱정할 정도의 가난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권위적이며 무능력한 아버지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깊은 상처를 받아 ‘차라리 아버지가 없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는 이 땅의 아버지와 다른 하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아마 마태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많이 실망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반면 누가는 그냥 ‘아버지’라는 한 단어로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은혜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아무리 강한 아버지라도 자녀에게는 약합니다. 아무리 탁월한 승부사라도 아버지는 자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아픔에 약하고 자녀들의 눈물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가 제일 고통스러운 때가 언제입니까! 자녀들이 꼬인 마음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혼날까봐 감추고, 사랑을 의심하고, 부족하다 비난할 때, 아버지는 한없이 비참해집니다. 반면 부족하고 힘든 가운데에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올 때, 아버지의 심장은 뜨거워지고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다. 자녀가 ‘도와 달라’ 손을 내밀고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댈 때, 아버지로 살아갈 존재의미를 갖습니다. 아버지는 보호자이며 양육자입니다. 예수님 시대 아버지는 직업을 전수하는 직장 상사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는 아이부터 성인까지 인생 전체를 함께 하며 양육하고 교육하며 이끌어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의 기도가 그러한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영접해하시고 인생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아버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를 믿음으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성령을 주사 마땅히 들어야 할 말씀을 듣게 하시고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시고 마땅히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이 붙들어야 할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아버지를 향한 기도제목입니다. 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한마디로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위한 기도, 아버지를 위한 기도입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바랍니다. 맛있는 치킨을 사오기를 바라고 아름다운 관광지로 함께 여행 가주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평생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정도의 유산을 남겨주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보다 아버지 가방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 이런저런 인생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먼저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여 온 세상의 주인이신 아버지가 그렇지 않는 분으로 전락하는 것도 아니며, 땅끝까지 확장되어가는 아버지의 나라가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든지 기도하지 않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우주와 생명의 주관자로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끝날까지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다만 나의 삶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이 높여지지 않으며, 나의 영혼과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확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녀가 첫 번째 기도제목으로 붙들지 않을 때, 수많은 기적의 체험하고도 광야에 엎드러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어 버립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망치는 자녀가 되어버립니다. 인간의 타락과 저주받은 세상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감사하지 않은 것에서부터였습니다. 누군가 믿음이 흔들리고 영적 위기에 빠졌다면, 첫 번째 기도제목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닌 자기 영광을 앞세우라는 마귀적인 욕망으로 가득합니다. 세상은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아닌 자기 영역을 확장하라는 목소리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가장 먼저 기도할 때, 세상에 짓눌린 마음이 깨어납니다. 성령의 손길에 눈을 뜨고 영적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세상 분위기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참된 용기와 믿음을 얻을 수 있고 생명구원역사에 쓰임받는 고귀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아름과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기도제목을 가르쳐 주십니다.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양식, 용서, 시험 3가지 기도제목입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양식문제가 절박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지만,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에 선뜻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불신자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잘 먹고 사는데, 왜 우리만 치사하게 양식 문제로 기도해야 합니까!’ 광야시대를 제외하면, 실제 현실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농부들은 년용할 양식, 월급자들은 월용할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의 핵심은 오늘 먹고 살아가는 양식이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잊지 않는 믿음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는 날 동안 양식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 양식 문제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이라도 오늘 예기치 않은 문제로 경제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세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금리가 폭등하고 환율이 치솟고 주가가 폭락하고 있습니다. 물가는 오르고 상반기 무역 수지 적자는 10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탈세계화로 인해 점점 높아지는 진영간의 장벽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걱정입니다. 급변하는 세상만 바라보면, 양식문제로 인해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나보다 많은 양식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며 불평과 원망의 덫에 빠질 수 있습니다. 비교하게 되고 원망이 생기고 마음이 위축되고 인색해지고 다투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상황에서도 오늘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오늘 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러다가 내일이 되면 다시 염려와 불안이 찾아오지요? 그래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일용할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 염려와 두려움의 파도를 넘어 감사하고 헌신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양식 문제가 경제 문제라면 용서 문제는 관계 문제입니다. ‘당신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질문을 바꾸어 ‘보면 화나는 사람 혹은 마음을 답답하게 하거나 어둡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대답합니다. ‘용서’라는 단어를 거창하게 생각하여 그런 것인데, 걸림이 되고 불편하고 등 돌리며 사는 것이 편한 관계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관계성을 회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기회가 있는데도 불편한 마음을 쌓아가고 미움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계속 쌓여져나가면 가정이라도 깨어지고 부르심마저 외면하고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하게 해 주옵시고’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 ‘용서했으니 용서해달라’, 용서하는 것을 전제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위로부터 용서받는 것에 대해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옆으로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는 끔찍하게도 인색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따로 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옆으로의 용서와 위로부터의 용서는 동전의 앞, 뒷면처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고집하면, 그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까지도 깨지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향해 냉랭한 마음을 고집하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식어 버립니다. 저는 누군가를 향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단상에 올라오면,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했던 메시지였는데도 성령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없음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용서가 좋은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쌓아갈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털어내고 영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털어내었는데 다시 미움이 찾아오면 다시 기도하며 털어내고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영혼이 병들지 않으며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시험이란 마귀의 유혹을 말합니다. 이 기도는 누구든지 시험에 들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어린 양들에 대해서만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신앙 경륜이 짧든지 길든지 누구든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잃어버릴 때가 위험합니다. ‘내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시험?’, 그런 생각이 위험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고전10:12) 원수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이등병보다 장군을 쓰러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탁월했던 복음의 일군이 교만의 시험, 정욕의 시험, 물질의 시험에 끌려들어 한순간에 무너지는 일들을 종종 봅니다. 아무리 견고한 댐이라도 작은 구멍이 뚫리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듯이, 시험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든 인생의 비극이 그러합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약점, weak point가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기도할 때 스스로를 돌아보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히 주 앞에 서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주시고 분별력을 주시고 실족하지 않도록 때마다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기도제목을 간청함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5-8절에서는 기도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사람에게 여행하던 벗이 찾아왔습니다.(5) 밤은 깊었는데, 집에는 찬밥은 고사하고 라면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집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햇반 세 개만 빌려줘, 친구가 우리 집에 여행왔는데, 먹을 것이 하나도 없네”(6), 하지만 친구가 달라는 대로 챙겨주려고 하면 집 사람 깨우고 막 잠든 아이들 깨우고..., 어수선해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야! 지금 몇 시냐, 얘들 자고 있는데 그냥 가라”(7),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고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 친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너가 줄 때까지 절대 안돌아갈끼다!!” 더 세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아이들 깨는 정도가 아니라 온 동네를 깨울 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친구는 할 수 없이 일어나서 햇반 세 개를 찾아줍니다. 친구이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구하는 간청함을 인하여 주는 것입니다. 간청함이란 한두 번 구해보고 안되면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줄 때까지 구하고 또 구하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드리면 100%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주님의 약속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이 응답 받습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자주 용기를 잃고 낙심하는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는 영혼이 그토록 적은가? 기도를 너무 적게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지 않는가? 참된 기도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모든 실패의 원인은 기도의 실패에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신자들이 정말 많습니다. ‘기도해볼께요’라고 말을 하는데, 실제로 하루 30분조차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정말 힘든 문제를 만났다면, 그만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고 캄캄하다면, 마음에 빛이 떠오르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는 기도하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습니까!(11)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12) 조폭 아버지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합니다. 생선을 달라 하면 먹기 좋게 회를 뜨고 알을 달라고 하면 계란찜까지 해서 주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 문제로 때때로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어제 주문하면 오늘 날라오는 로켓배송처럼, 기도의 주문대로 신속한 응답이 날라 온다면 마음 상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한시간이든 두시간이든, 피곤함 모르고 무릎 꿇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문과 전혀 다른 것들이 날라 올 때가 있습니다. 좋은 성적을 주문했는데 힘든 성적이 날라오기도 하고, 좋은 양을 주문했는데 힘든 양을 얻기도 합니다. 좋은 동역자 얻기를 구했는데, 좋은 훈련관을 보내실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허공에 대고 기도한 것처럼 아무 응답도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구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이 왔으니, 제 때에 오지 않았으니, 배달사고인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나같은 자의 기도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아버지가 주시려는 궁극적인 선물은 성령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 문제로 연단을 받게 하심으로 성령의 내적 열매를 맺게 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공을 통해 풍성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똑같은 기도제목으로 똑같이 열심히 기도하는데, 이 사람은 편한 것을 받고 저 사람은 힘든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모두는 성령을 받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줄기차게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지혜를 얻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어둠과 내 안에 있는 죄성을 뛰어넘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덧입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끝까지 드림으로써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