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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18구간(지기재-비조령(비재))
1. 산이름 : 윤지미산(538m), 무지개산(441m)
2. 소재지 : 경북 상주시
3. 산행 코스 : 지기재→ 4.55km→ 신의터재(01:10)→ 4.32km→ 무지개산(02:40)→ 4.32km → 윤지미산
(05:00)→ 2.79km→ 화령재(06:30)→ 3.21km→ 산불감시초소(07:30)→ 1.46km→ 봉황산(08:00)→ 3.79km→ 비조령(비재),(09:30)
4.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24.55km, 9시간 30분
5. 산행 인증 : 신의터재 표지석(280m), 윤지미산 표지석(538m),화령재 표지석(320m)봉황산 표지석(740.8m),비조령(비재) 표지석(320mm),
6. 산행 안내 : 상주 모텔 숙박-상주버스-지기재-산행-화령재-화령- 문화식당 숙박,화령장(054-533-3883),
지기재-비조령(비재) 구간
신의터재( 280m)
산의터재 표지석의 앞과 뒤
이 고개는 ‘지방의 관리나 귀양중인 옛 벼슬아치들이 나랏님(御)으로부터 승진, 도는 복직 등 좋은 소식(義信)이 오기를 기다리던 고개’였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어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라하여 ‘어산재’라고도 불린다. 화동면 주민들은 화동재라고 부른다.
왜군들이 김준신 의장의 고향인 화동면 판곡리를 찾아 김씨 일문을 멸하려 하자, 부녀자들이 몸을 던진 곳이 낙화담이라 한다. 이곳에는 고 이은상 선생의 비가 있다.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나네..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의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신의터재 내력을 빌리면 ' 임난 이전에는 신의현이라 불리었고 임난때 의사 김준신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4월 25일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로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저 옛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
무지개산(473m)
선교리와 어선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대간에서 북동쪽으로 400m쯤 벗어나 있다. 서쪽 사면인 금강수계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북, 동, 남쪽은 험악할 정도로 급경사를 이룬다.
산이름은 정상 남쪽 골짜기의 폭포에서 유래했다. 무지개산에는 아름다운 무지개폭포가 있으며, 주변에는 낙화담, 철새도래지, 판곡저수지 등이 있다.
무지개산은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있는 육산이다. 야트막하면서 빼어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지개만큼이나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그러한 산의 하나다.
밤원고개 북쪽의 발치는 갈령에서 남하한 상주에서 가장 긴 내 이아천이 살짝 핥다가 함창으로 북진한다. 밤원에서 하우산까지의 소위 우산(愚山) 칠리강산(七里江山)의 시작인 것이다.
산이름은 정상 남쪽 골짜기의 폭포에서 유래했다. 무지개산에는 아름다운 무지개폭포가 있으며, 주변에는 낙화담, 철새도래지, 판곡저수지 등이 있다.
윤지미산(538m)
원래 소머리산이라고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는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써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장봉으로도 불린다.
판곡리 판곡저수지 북쪽에 있는 산이다. 서쪽으로는 경사가 급하지 않아 농경지가 즐비하지만 동쪽은 경사가 급하여 침엽수 등 경제림만 빽빽하게 심겨져 있다.
\ 이 지역은 대간의 등줄기에 묘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남쪽 아래로 판곡저수지와 제법 너른 들이 펼쳐진다. 대간 종주 중에 드물게 관찰되는 논농사지역이다.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다. 특별한 유래는 발견되지 않는다.
윤지미산의 원래 이름은 '소머리산'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이름이 품고 있는 뜻이 예사롭지 않다. 이 산의 이름은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인생 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서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538m 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 인생을 다 알고 세상을 두루 알고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가까이 있는 낮은 산이기에 세상을 알고 삶을 품어 안는 산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숲은 때로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열게 만들어 준다. 마음으로 느끼고 바라보게 한다.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차를 타고 가면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왜 몇 날 며칠, 몇 달 동안 걷고 있으며 걸어야 하는지 알게 한다.(옮긴글)
화령재의 지킴이 『화령정』과『백두대간 표지석.
상주~청원간 고속국도 화서나들목 -> 국도25호~화서면 상곡리와 신봉리 경계 고개
해발 320m의 화령재에는 화령정(火嶺亭)과 백두대간 표지석이 언제나 오가는 이를 반기며 지킴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1990.6.에 낙성한 정자의 정면에 걸려있는 “화령정건립기”에 따르면 상주의 역사는 물론 화령의 중요성과 화령(化寧)을 예전에는 상령(商嶺),화령(火嶺)으로 쓰였다는 얘기도 전하고 있으며, 그 아래 넓게 조성된 터 위에 2007.11.에 세워진 백두대간 표지석은 가로3m*세로2m*높이1m의 기단위에 높이6m 폭2m의 장대한 석조물로 조성되어 지나는 길손과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악인들의 휴식처로서 손색이 없을 듯 하다.
화령재는 백두대간 상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여암 신경준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산경표』에 의하면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라는 「山自分水嶺」에 의거하여 백두대간과 백두대간에 속한 산들의 위치에 대한 기록으로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를 말하며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나누어진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땅을 동과 서로 나누면서 많은 골과 들을 낳았고 민족의 삶터를 이루었으며 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달리 하였다.
그 길이는 자그마치 1,400km,1,625km,1,800km등 들쭉날쭉하나 화령재 정상에 우뚝 선 백두대간 표지석에는 1,400km로 적고 있다. 남한구간만 약 670km로 통용되고 남한구간의 절반은 문경시 동로면의 대미산 구간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주시의 구간은 69.5km이다.
원래 이름은 화령(化寧)이었으나 지금은 화령(火嶺)으로 바뀌었다. 화령(化寧)이 화령(火嶺)으로 바뀐 것은 시대의 가치관이 변한 탓으로 보인다.
이 지역이 삼국시대부터 삼국이 서로 자치하려고 싸움이 많이 일어난 국경지역이고 김유신 장군이나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시 여겼던 군사 요충지였으며, 6.25 때에도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라는 것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탓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해서 '불 화(火)'자를 붙인 탓에 평안한 땅 화령(化寧)이 불길이 끊이지 않는 봉우리인 화령(火嶺)이 된 듯하다.
이곳은 본래 신라의 답달비군(荅達匕郡)인데 경덕왕 때 화령군으로 고쳐 도안(道安)을 귀속시켰다.
1018년(현종 9)에 상주의 영현으로 삼았고, 그 뒤 직촌(直村)이 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화령의 옛 이름인 답달은 큰 산이라는 뜻으로 소백산맥 서사면에 위치하는 금강 상류의 산간분지를 나타낸다.
조선시대에는 보은에서 이곳을 거쳐 율현(栗峴)을 지나 상주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부근에는 창(倉)과 장림역(長林驛)이 있었으며, 하천을 따라 영동(永同)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의 화동면·화서면·화북면 지역으로 추정된다.
봉황산
팔음지맥 분기봉으로 봉황산에서 시작하여 천택산과 팔음산, 천금산, 천관산을 지나 철봉산 아래 금강에서 마무리되는 57.7㎞의 지맥이다.
백두대간의 숨은 진주 봉황산(鳳凰山·740.6m,경북 상주)은 남쪽으로 윤지미산이 뻗어있고, 북쪽 가까이엔 웅장한 속리산이 있다. 중화지구 화령 북쪽에 있는 산으로 1300여 년 전에 봉황새가 이산에 날아들어 30여 년 간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인근에서는 정상을 봉황머리처럼 원만하게 빼어 올리고, 좌우 양 날개를 길게 펼친 형국이 봉황새 같아서 이런 지명이 붙였다고도 한다.
간식을 하고 한참을 쉬어 간다.
상주에서 황간가는 버스를 타고 지기재에 도착하여 임도로 대간은 이어진다. 백학산 이후엔 대간인지 도로인지 임도인지 도대체 헷갈리게 한다.
폭염이라는 사실을 확인이나 시키려는지 아니면 이런 날 산행하는 아둔한 녀석을 기어코 굴복시켜야 만족하려는지 열기는 또 다른 열기를 모아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한다.
복사열은 얼굴을, 직사열은 머리를 뜨겁게 하여 무기력하게 만든다. 태양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 대간에 “신의터재 4.2km” 남았다는 이정표 아래 앉아 잠시 쉬었다.
이제는 임도가 끝났을 거라는 나의 성급함을 탓하려는지 다시 석산리 금은골마을로 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는 대간 길의 열기가 더욱 극성을 부린다.
더위에 상품 가치를 잃어버린 오이들이 주인에게 버림받아 방치된 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저 멀리서 숲속에 가려진 대간 이정표가 절개지 언덕에 세워져 있다. 풀숲 사이로 힘겹게 서있는 이정표도 더위를 먹었는지 넘어가고 있다. 폭염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식물들에게도 힘들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산으로 고도를 높이는 대간을 따르다 뒤 돌아 보면 백학산과 웅이봉이 멀리 보인다 싶더니 또 만난 임도가 힘들게 한다. 이번엔 비닐하우스로 곱게 키우고 있는 포도는 그런대로 생을 이어가고 있건만 노지에 있는 포도는 더위로 인해 이미 상품가치를 잃어버렸다. 타들어가는 가뭄이나 애타는 농심이 어찌 다를까?
이제 시원한 비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임도에서 도망치듯 산으로 들어가니 소나무향이 진한 편안한 등로가 바람과 함께 이방인을 맞는다.
신의터재에서 329.6봉, 무지개산, 437.7봉, 윤지미산, 화령재를 지나 봉황산에 올랐다가 비재까지 결코 짧지 않은 산행이다. 화령재까지는 중화지구라 산행이 다소 쉽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수많은 왜적을 물리쳤던 김준신 의병장의 높은 혼과 기상이 살아 있는 듯해 보이는 신의터재에서 20번국도 고갯마루에 화동산악회에서 세운 '화동, 상주' 이정표 쪽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가며 대간 11구간은 시작된다.
약 30m우측에 '화령재(11.9km/4시간10분), 신의터재'의 이정표가 있어 넓은 잡풀들이 무성한 등로를 따라 우측으로 꺾어 언덕으로 오른다. 선교공동묘지를 지나 햇살이 나뭇잎을 뚫고 대간을 밝게 비춘다.
산책로 같은 넓은 길을 가다 간혹 통나무로 만든 계단을 오르고, 부드러운 길은 계속되지만 전날 거미가 밤새며 완성해 놓은 거미줄로 인해 나로 하여금 간혹은 스파이더맨이 되게도 한다.
이상한 삼각점이 있는 지도상의 329.6봉을 지나 산림청과 상주시에서 만들어 세운 '서어나무 군락지' 팻말을 지나 약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안부로 내려선다. 고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8부 능선에서 좌측 허리로 꺾어 돌아간다.
이후 '화령재 9.7km, 신의터재 2.2km'의 이정표를 지나자 넓은 개활지에 감나무를 식재한 묵전(默田) 옆으로 하우스로 비닐을 덮어 쓴 포도밭 경작지가 보인다.
개망초가 주인 노릇을 하는 묵전을 지나 농로(임도)와 마주치고 대간은 숲으로 열려 있다. 또 작은 언덕 위에 닿자 '화령재 8.8km, 신의터재 3.1km'의 이정표가 기다린다. 여기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봉우리를 바라보며 약간의 오름길 뒤 무지개산 갈림길에 도착하는데, 이곳 삼거리에서 무지개산은 0.2km의 거리로 대간과 조금 떨어져 있다.
무지개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생략하기로 하고, 윤지미산으로 발걸음을 급하게 옮긴다. 기분 좋은 대간길! 잣나무 조림지역을 벗어나 안부에 내려서니 '닥터블루베리' 팻말이 있는 뚜렷한 사거리를 지나 통나무 계단 경사 이후 내리막에 뒤돌아보니 숲 너머 무지개산이 보이지만 초록의 융성함은 보는 것으로만 만족시킨다.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산은 점심이 오고 있음에도 고요하기만 했다. 마치 묵언(黙言)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처럼 침묵 속에 있었다. 땅에서 울려나는 내 발자국 소리만이 침묵을 흔들며 들려왔다. 깊은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은 내 숨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이런 깊은 고요함이 좋았다.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좋았다. 오로지 산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골에서 불어와 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 나뭇잎 수런거리는 소리, 마른 풀잎들 서걱 이는 소리, 지나는 이들에 아랑 곳 하지 않고 제 노래를 하고 있는 새 소리와 냇물 흐르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숲을 지나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숲의 일부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간은 무명봉 몇 개를 넘고 또 넘는 반복의 연속으로 통나무 계단 오름길 후 또 봉우리에 닿고 또 내리막이 어김없이 펼쳐진다. 능선 우측으로 낙엽송이 하늘을 찌를 듯 빼곡하다.
묘 2기를 벗어나서 능선에 '화령재 3.8km, 신의터재 8.1km'의 이정표를 만난다. 10여 분 산행을 하니 오름길 중간에서 폭염에 힘겨운지 누워있는 '화령재 4.4km, 신의터재 7.5km'의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가 거꾸로 되어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윤지미산으로 오르는 된비알을 맞본다. 우측 아래쪽으로 청원-상주 고속도로가 일부 보이며 차 소리가 들려온다. 윤지미산이 가까워지려는 듯 잠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정상일 거라고 오르면 아니다. 한참을 오르고 올라야만 해발 538m의 윤지미산에 닿는다.
돌무더기 가운데에 매직펜으로 '윤지미산 538m'라 쓴 정상석이 놓여 있어 더욱 정겹고 공터 또한 넓다.
정상은 참나무로 둘러 쌓여있었다. 나무들에 가로막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에 들어가는 즐거움 중 가장 으뜸이라는 조망이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보는 것과 같이 오름은 기분을 좋게 하고도 남았다.
윤지미산의 원래 이름은 '소머리산'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이름이 품고 있는 뜻이 예사롭지 않다.
이 산의 이름은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인생 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서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538m 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 인생을 다 알고 세상을 두루 알고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가까이 있는 낮은 산이기에 세상을 알고 삶을 품어 안는 산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숲은 때로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마음을 열게 만들어 준다. 마음으로 느끼고 바라보게 한다.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차를 타고 가면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왜 몇 날 며칠, 몇 달 동안 걷고 있으며 걸어야 하는지 알게 한다.
한쪽에는 돌을 가져다 사각형의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은 곳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진행 방향으로 '윤지미산(해발 538m)' '화령재 2.9km/1시간, 신의터재 9km/3시간10분'이라 적힌 이정표를 보고 하산한다.
윤지미산에서 화령재로 가는 길은 50여 m 구간 로프를 붙잡고 급하게 고도를 내리다가 곧 등로는 편안하게 진정된다.
비석이 있는 묘를 벗어나자 인삼밭이 바로 앞인 임도(농로)에 내려선다. 대간은 검정 대리석 4개가 나란히 줄서 있는 납골묘방향 우측의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임도를 만나 200m 정도 진행하여 대간은 우측 숲으로 인도한다. 다시 숲길로 이어지면서 보이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많은 차량들의 소음이 이제는 굉음으로 들려온다.
차들이 바로 발 밑 땅 속으로 사정없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보일 때에 바로 화령터널 위에 서 있음이다. 상주~청원 간 고속국도가 시원하게 뚫어져 있는 것을 보고해발 320m의 화령재에 도착했다.
넓은 공터에 '백두대간 화령'이라 새긴 커다란 표석이 있다. 화서면 소재지 방향의 도로 표지판에는 300m 후 삼거리를 알리고 있는데 25번국도 방향에는 '청주.보은', 49번지방도 방향에는 '기산.화북.문장대' 글씨가 적혀 있다. 좌측 도로 300m 지점에 삼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화령재 한쪽에는 화령정이라 쓴 팔각정과 또 다른 화령재 작은 표석이 있다. 화령재 역시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고갯마루로써 한국전쟁 당시에는 우리 국군이 인민군 15사단을 섬멸하는 전승지로 이름 난 곳이란다. 백두대간 중화지구는 화령재까지다. 그동안 뒷산처럼 평탄하고 쉬웠던길이 끝나 섭섭하기는 해도 역시 봉화산에서 비재까지도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다.
화령정이라는 정자 건너편에 작은 조립주택이 있어 관리소인 듯하여 노크를 하니 우리 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분이 나왔다. 본인은 전원주택용으로 이동식 집이라고 한다.
어디를 가도 전기,수도 시설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집이란다. 깊 옆의 주차 공간 같은 곳인데 본인의 땅이라서 좋다고 한다. 설명과 물을 얻어 먹고 다시 도로를 따라 대간 길을 찾아 갔다.
대간을 조금 이탈하여 이글거리는 태양과 맞짱을 뜨며 수청삼거리 방향으로 걷는다. 수청거리 삼거리에서길 건너 대간이 이어져 있어 산길로 빠르게 접어든다.
백두대간 안내도를 지나자마자 거리 표시가 없는 '화령재, 백두대간' 이정표를 만난다. 고만고만한 봉우리 몇 개를 넘고 숲이 우거진 편안한 곳에서 한적한 등로를 따라가다 보면 조망이 터지는 곳에는폭염에 파리하게 떨고 있는 화서면 화령마을의 열기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폭염은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든다. 나 역시 더위와 본의 아니게 맞짱을 뜨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산행 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고도차가 얼마 되지는 않다지만 오르내림이 반복되다가 급경사 오름이 시작되고, 산중턱에 도착하니 '백두대간, 화령재' 이정표가 있고 다시 좌측으로 꺾어 오르막을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해발 580m 봉우리다. 조망을 보기 위해 초소위로 오를까 하다가 포기하고 감시초소를 지나 산행을 계속 진행하기로 한다.
얼마 후 능선으로 이루어진 등로에 서니 오른쪽으로 속리산이 처음으로 조망되고, 후백제 견훤이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대궐터산과 그 좌측으로 문장대 바위 끝이 송곳니처럼 돋아 보인다.
돌아보면 윤지미산과 화서면 소재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앞으로는 우람한 봉황산의 기세가 너무나 당당하게 보여 내 기가 팍 죽는다. 언제 다 오를까? 이보다 더한 숱한 산을 올랐건만 더위로 인해 힘이 자꾸만 든다.
계단을 오르듯 봉우리가 이어지며 점점 고도가 높아지는데 저길 언제 다 오르나 푸념을 하는데 봉황산을 오르는 된비알에 흐르는 땀과. 회색 바다에 잠긴 능선 길이라 보이는 것이 적다.
참나무 숲길인가 싶으면 다시 키 큰 풀과 키 작은 관목이 어우러진 잡목지대다. 희미한 기억과 앞선 사람들이 매단 표지기와 안내판,봉황산에 가까워지자 날씨는 더욱 무더웠다.
백두대간의 숨은 진주 봉황산(鳳凰山·740.6m,경북 상주)은 남쪽으로 윤지미산이 뻗어 있고, 북쪽 가까이엔 웅장한 속리산이 다가와 걷는 내내 눈이 즐겁다.
삼각점 앞에 상주시청 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봉황산' 정상석이 있으며 백두대간 안내판 그리고 마음 놓고 쉬라는 둥그런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나뭇가지로 인해 조망은 불량하지만 오늘 구간에 있어 최고봉으로써 당당히 자리매김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팔음지맥 분기봉으로도 위엄을 갖추었다.
봉황산은머리를 하늘로 곧추세우고 양 날개를 펼친 봉황을 닮은 산세다. 1300년 전 죽실을 먹고 오동나무에서만 잠을 잔다는 봉황이 날아와 30여 년을 살았다는 전설이 서린 산에서 간식을 하고 한참을 쉰 뒤 하산을 서두른다.
5분 뒤 '급경사 위험'을 알리는 팻말에 이어 로프 급경사지역을 지나며 간혹 속리산 방향의 시야가 트이고 창원-상주 고속도로가 보이는 등 조망은 그지없이 좋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산세를 지속하다 길은 다시 순해진다.
비재 가는 중에 조망된 충북알프스의구병산의 연봉들이 멋지게 다가온다.
비재를 내려서기 전 시원한 낙엽송 숲길이 이어진다. 데크 길을 따라 비재의 동물이동통로에서 내려 보이는 “백두대간 비조령“이라는 표지석이 웅장해 보여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내려섰다. 비재(330m)는 날아가는 새의 형국과 같다 하여 비조령이라 불렸다는 고개다.
비재(비조령)에서 내려 버스가 있는 곳을 찾았으나 버스는 없고 해서 화령면의 택시를 불러 문화식당에서 여정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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