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좀 가난하게 삽시다.
김동윤
'사람들과의 사이에 사랑과 평등의 관계를 가지기 위하여 나는 가난한 삶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마하트마 간디, 일생을 진리를 향한 열정적 탐구로 살다간 분의 말씀이다.
간디는 일찍이 산업혁명 후 발달한 물질적 풍요와 그것의 편리함을 영국 유학시절 경험했었다. 그러나 그는 인도에 돌아와 손수 물레로 옷을 지어 입으면서 가난한 삶을 선택해 살았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랑과 평등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일생을 진리 탐구에 몰두했던 분이었기에 '가난한 삶'이라야만 이웃과 더불어 사랑과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이며, 그 이치를 깨달았기에 그렇게 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는 것 보다 어렵다'고 했고, 부처님은 '온 우주가 다 동원되어도 한 사람의 욕구를 채울 수는 없다'고 하셨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비록 물질세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욕구까지도 포함한 말씀이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가난한 삶'이야 말로 진리에 가까이 다가 설 수 있고, 천국에 가까이 갈 수도 있고, 또 욕망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해탈의 길로도 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성현들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왜 '가난한 삶'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가난한 삶'이란 물질지향적 삶과 반대의 자리에 있는, 즉 정신지향적, 생명존중 지향적, 자연과 동화되어 우주의 질서 속에서 편안해지기를 추구하는... 등을 포괄적으로 정의 한 것이다. 즉 '가난한 삶'이란 물질적 풍요와 그것이 가져다 준 편리함에 대한 욕구를 최소화 시켜 나가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생명존중의 삶을 살면 저절로 물질적 욕구는 최소화되어 나가는 것.
필자는 몇 년 전 대구 팔공산 파계사 아래 한걸 마을에서 살 적에, TV 등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생활한 적이 있다. 현대인으로 그것도 언론에 근무하면서 연락 수단인 전화와, 뉴스를 제공하는 TV를 멀리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얼마간은 불편함이 많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화와 TV가 없는 자리에 다른 것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산새소리, 밤하늘의 별, 맑은 시냇물 소리, 들녘의 깨끗한 초록 빛깔들...
뿐만 아니다. 멍멍거리는 강아지가 다정한 친구로 다가왔고 개울에 살고 있는 송사리며 미꾸라지들에게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미꾸라지며 송사리들이 맛있는 매운탕 재료로 보이지 않고 더불어 사는 생명체로서의 아름다움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강아지들은 도저히 보신탕과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병 속에 갇힌 미꾸라지 한 마리 몸부림치는 것이 그리도 마음 쓰여 저놈을 저대로 버려 놓으면..
부산에서 팔공산 한걸 마을까지 그놈을 가져와 한걸 맑은 물에 놓아주니 뚫어지게 내 얼굴을 뒤돌아보고 간다. 미꾸라지 그놈 그리도 선명히 잊혀지질 않는다.
그때의 느낌 한 구절이다. 자연과 친숙해진다는 것은 자연을 즐긴다든지 자연과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문명의 이기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야만 지워진 그 자리에 별과 바람과 소리와 빛깔이 채워지게 된다. TV를 끄고 라디오를 끄고 걸어서 다녀보자. 그러면 소쩍새 울음소리가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릴 것이다. 나무가 다가와 말을 할 것이고…
삶의 파란 싹들이 이렇게 새로 돋아나면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본질적 삶의 희열로 젖어들지 않을까!
버려진 미꾸라지 한 마리 시냇물에 놓아주던 날, 나는 왜 성인들이 '가난한 삶'을 통한 생명존중적 삶을 강조했는지, 또 그들이 그렇게 생활했는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없이 가볍고 유쾌해진 심신心身의 환희를 체험하면서…
1997년 말에 참 재미있는 뉴스가 하나 있었다. 고아원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예년에 비해 월등히 많아 졌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1997년 말이라면 우리나라가 IMF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한 달여 지난 시점이다. 하루에 수백 개의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그에 따른 실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때이다.
그런데도 사회복지시설을 찾는 따스한 온정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것이 단지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 일어난 일회성 아이러니에 불과한 것일까?
조용히 주위를 살펴보면 변화는 하나의 물결처럼 번져가고 있다. 옷 수선 가게에 손님이 부쩍 늘었다. 그 중에서는 수선비가 새 옷 구입비 못지 않는데도 수선해 입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풍요라는 그늘에 묻혔던 '가난한 삶'의 아름다움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다.
물질적 욕구를 줄여 나간다는 것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 속에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씨앗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지향적 삶에는 필연적으로 무절제의 모습이 숨어 있다. 그렇게 되면 진실되고 겸허한 마음이 사라지며 건방지고 교묘한 의식이 기세를 부리게 된다.
비록 IMF구제금융이란 외부적 자극이 몰고 온 경제적 타격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 욕구를 줄여 나가는 것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 된다.
그리하여 그 본질적 아름다움에 희열을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물질지향적 삶을 살래야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서투른 낭비를 습관처럼 해왔다. 우리가 흥청망청하면서 누렸던 문화는 세계인에게 '천민자본주의'라는 손가락질을 받기까지 했다. 이제 경제적 타격을 받으면서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정신 지향적 삶, 가난한 삶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출처 : http://www.chungamsa.com/chungamjinew/html/17main04.html
김동윤님은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동아대학교 박사과정 사학과 수료, 영남일보 논설위원, 現 영남일보 기자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