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처| 조상호 목사
생화학자 돌프 빈더라는 사람이 ‘과연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생각하여 사람의 몸값을 계산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여러 가지 별난 실험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실험을 실시한 후, 사람의 몸속에서 약 17가지의 물질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새를 기르는 새장 하나 청소할 수 있는 석회석, 못 한 개 정도 만들 수 있는 철분, 차 한잔 정도 달게 할 수 있는 설탕, 세숫비누 5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지방질, 성냥 다섯 갑 정도 만들 수 있는 인, 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화공약품 가게로 가서 인체로부터 분리한 그 물질들의 값을 물어보니, 뉴질랜드 달러로 4달러, 한화로 약 3,000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사람의 몸값은 3,000원이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여러분들의 몸값이 정말 4달러밖에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맥도널드에 가서 빅맥 콤보(Big Mc Combo) 하나 제대로 사 먹지 못하고, 캄보디아 Noodle House에 가서 국수 한 그릇 제대로 사 먹을 수도 없는 가치밖에 지니지 못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4달러의 가치 밖에 안 되는 하찮은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하찮은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루살이 인생처럼 하루하루 아무 의미 없이 마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자기 자신을 깡패로 생각하는 사람은 깡패처럼 행동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찮은 존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된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대로 귀한 존재답게 행동합니다. 사람은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식대로 살아갑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좌절케 만들고 하찮은 존재로 살아가게 만드는 몇 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세 가지입니다.
1) 열등의식
첫째로 열등의식 혹은 열등감입니다. 심
리학자들은 “열등의식이란 자기의 존재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자학증세”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열등의식입니다. 열등의식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생활을 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가서 너희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말하고, 나중에는 “주여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출4:13)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내가 누구길래 수백만의 사람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에게는 리더쉽도 없고, 나는 말도 못하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할까요?
그의 말대로 모세가 그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잘못 보셨을까요? 아닙니다.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모세는 똑똑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로, 목동으로 살다보니, 그의 마음속에 열등감이 생긴 것입니다.
40년 광야 생활 끝에 자기 불신이라고 하는 커다란 병에 걸린 것입니다.
무력감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교만하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방해가 됩니다.
40년 전 모세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했고,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광야에 있으면서 그는 완전히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깨어지는 것까지는 좋은데, 모세의 좋은 면까지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결국 열등의식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열등의식이 생기게 되면 작은 일에도 신경과민을 일으키게 되고, 염려하게 되고, 항상 패배감을 느낍니다. 이런 열등의식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없고,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도 없습니다.
2) 교만의식
둘째로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좌절케 만드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교만의식입니다.
교만이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말합니다. 물론 심리학에서는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소위 ‘자존감’, 영어로 ‘Self-esteem'을 정신 건강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히 여기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건강한 자존심(pride)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과 12절을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원문에는 구절마다 ’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이 드린 기도를 보면, 이것은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꼭 자기를 PR하고 있는 광고문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내용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나는 말씀대로 살았습니다‘라고 하며 ’자기의 의’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 자랑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와 같이 마음속에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교만은 자기 자신의 원래 모습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과장합니다.
원래 모습보다 더 높은 자리로 끌어 올리려는 몸부림을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왕자병 환자가 되고, 공주병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교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뻐기고 폼을 잡지 않습니까? 교만한 마음을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결국은 열등감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만한 마음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3) 비교의식
셋째로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좌절케 만드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비교의식입니다.
열등감의 90%는 나를 남과 비교하는데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나보다 우월하고, 나보다 더 힘 있고,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볼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비교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나온 우리 교회 전도신문인 Real Life 3월호에도 언급했지만, 작년 12월30일자 신문에 ‘질투가 빚은 참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31세의 이모라는 여인은 2년 전 동창모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고교시절 절친했던 친구(박씨)를 오랜 만에 만났습니다. 그 후 혼자 사는 이씨가 서울 송파구 거여동의 박씨 집에 일주일에 서너 번 씩 왕래하면서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삶과는 달리, 화목하게 잘 살고 있는 친구 박씨를 심하게 질투한 나머지, 친구와 친구의 어린 자녀들을 집단 살해하였다는 것입니다. 범인 이모 여인은 경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박씨)의 집에 가면 소외감을 느꼈고 친구의 시댁에서 내가 친구 집에 자주 드나든다며 나를 경계하는 듯한 좋지 않은 말을 해왔다.... 평소친구가 내가 결혼을 못한 것을 무시했다"이씨는 사건 당일 오전 박씨의 아파트에 들러 150만원을 박씨에게 빌려준 뒤 오후 3시께 다시 박씨의 아파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작은방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처럼 가장해 박씨를 안심시킨 뒤, 박씨 아들의 입을 수건으로 막고 보자기를 머리에 씌워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이씨는 이어 `아이들이 깜짝쇼를 보여준다.‘고 하며 안방에 있는 박씨의 눈을 가린 채 작은방으로 유인한 후, 빨랫줄로 만든 올가미로 박씨를 숨지게 했습니다. 이어서 울고 있는 딸의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 질식사시켰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범행 뒤 현관열쇠가 든 박씨의 손가방을 들고 나가 현관문을 밖에서 잠근 후 복도로 통하는 창문으로 손가방을 집어넣고 자신의 집에 돌아갔다가 범행이 발각되어 잡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요?
왜 이모라는 여인이 참혹한 일을 저지른 흉악범이 되었을까요?
물론 신문 기사 제목처럼 ‘질투’ 때문인 것이 분명합니다. 심한 질투가 친구와 친구의 두 자녀를 살해하게 한 원인입니다. 그러면 이 ‘질투’라는 괴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납니까? 질투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생겨납니다. 친구가 무슨 옷을 입든지, 이웃 사람이 무슨 차를 타든지, 다른 사람이 어떤 집으로 이사 가든지 비교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자기를 심하게 비교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질투가 정도를 지나치다보면, 정작 자기 삶에 신경 쓰지 못하여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자기를 과도하게 비교하는 비교의식이 생기게 되면 자기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정리해 보면 이 세 가지 의식, 즉 열등의식, 교만의식, 비교의식은 우리를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존귀한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세상적인 이러한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과점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기 ‘육체대로‘라는 말은 NIV 영어성경에 보면 ’from a worldly point of view‘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세상적인 관점으로‘, 혹은 ‘인간적인 관점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세상적인 관점이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말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인간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영적인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영적인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들의 세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6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主)는 우리 아버지시라.”
여기에서 ‘주’(主)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또 오늘 본문 8절에도 보면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직접 손으로 빚으셔서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대충 돌 던지듯 던져서 만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졸면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39편 13절부터 15절을 보면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묘막측’이라는 말은 영어로 ‘Fearfully and Wonderfully'라는 말로서, 현대인의 성경에는 ’놀랍고 신기하게’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국말에 ‘기가 막히게 멋지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신묘막측하게, 다시 말해서 Fearful하게, Wonderful하게 만드셨다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놀랄만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기이한 존재들입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분들은 스스로를 신묘막측한 존재로 인정하는 반면, 믿지 않으시는 분들은 스스로를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인정하는 분들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묘막측한 존재임을 믿으십니까?” 아멘!
한번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신묘막측하십니다” 다시 한번 인사할까요? “You are so wonderful"
만약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올 것입니다.
한 사람은 유명한 민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고,
또 한 사람은 말콤 엑스라는 사람입니다.
말콤 엑스라는 영화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 말콤 엑스의 전기를 읽다보면 비교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어렸을 때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원망스러운 나머지, 마음에 백인을 향한 증오심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백인을 미워하면서 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백인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백인이 되고자 어렸을 때부터 비누, 스킨 크림 등을 사다가, 그냥 계속 자기 피부를 문질러 댔습니다. 그는 좀더 백인처럼 하얗게 되지 않을까 해서 별별 짓을 다해보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말콤 엑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철저한 흑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그것은 까만 흑인도 나름대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새로운 의식의 전환은 그로 하여금 흑인의 영웅과 지도자로 떠오르는 존재로 만듭니다. 또한 흑인 사회 가운데 이런 말을 유행시킬 정도가 됩니다.
“까만 것도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내가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가진 독특한 특징이 있고 나만의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내 인생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우리를 정말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저와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놀랍고 신기한 존재로 지음 받은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이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스스로 대단한 가치를 지닌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살다보면 실수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몇 개월 전 새벽 기도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여기 100불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제가 이 지폐를 마구 구기겠습니다. 다 구겨져 볼품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이 지폐의 가치가 바뀔까요? 아닙니다. 만약 구겨져 있다고 100불짜리 지폐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입니다. 구겨져 있어도 이 지폐는 여전히 100불짜리 지폐입니다. 이번에는 이 구겨진 지폐를 땅에 떨어뜨리고 제가 마구 발로 밟겠습니다. 이 지폐가 얼마짜리 지폐입니까? 50불짜리나 10불짜리로 가치가 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이 지폐는 여전히 100불짜리 지폐입니다. 지폐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구겨질 때가 있습니다. 짓밟힐 때도 있습니다. 무시당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를 거듭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가치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사람이나 환경에서 나오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아내나 남편, 혹은 부모나 자녀가 나를 귀하게 여겨 주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내 존재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사업에 실패해도, 때때로 죄를 지어도, 가난하고 연약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들의 가치는 하나님만이 평가하실 수 있고, 우리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평가는 언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투자한 존재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투자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투자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실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투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투자하신 것은 세상의 투자와 다릅니다.
저의 대학 동창 중에 함께 강의도 받고 차도 마시던 김모라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1학년 때와 2학년 때까지 스스럼없이 지냈는데, 3학년에 올라가서는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미스 코리아 지역 예선에 나가 1등을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애가 얼마나 바쁘던지 학교에서 그 친구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친구가 본선대회 출전에 앞서 모 미용실에 스카웃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용실에서는 프로그램을 짜놓고 그에 맞게 그 친구를 미스 코리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먹이고 재우면서 피부 마사지를 날마다 해 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걷는 훈련, 말하는 언어훈련, 웃는 훈련, 등 각종 훈련을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분에 전문가를 고용해 투자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오기까지 한 사람당 6천만 원 정도 들어간다고 합니다. 오랜 전에 들은 이야기이니까 지금은 그 금액보다 훨씬 더 들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미용실에서 어떤 사람에게 투자하는 줄 아십니까?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투자합니다. 돈을 좀 투자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다시 말해, 원판이 괜찮은 사람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투자한 후보가 미스 코리아에 당선되면 미용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많은 손님들이 몰려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용실에서는 돈만 들어가고 고생한 보람이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결코 투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논리입니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논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을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투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포기하면서 까지 우리에게 투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투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당하는 고난 때문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격의 부족함 때문에 실수를 하여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조목사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에게 얼마나 투자하였는지 아니? 김집사야, 실망하지 마라.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단다. 내가 투자한 것이 있는데, 내가 너를 포기한 걸 같니? 세상이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너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단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보시며 “내가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잃을지언정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부모가 친구가, 아니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3) 우리는 선한 일을 해야 할 존재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해야 할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목적도 없이 우리를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심하셔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좀 지저분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변기 뚜껑이 왜 만들어졌을까요? 변기를 덮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밥그릇은 왜 만들어졌을까요? 밥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사용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들을 만드셨습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돈 많이 벌어 폼 잡고 살라고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아니면 대궐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라고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누가 웃으라고 만든 유머가 하나 있습니다. 마음씨 착한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거지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뭐든지 들어줄 테니 소원을 세 가지만 말해 보아라.” 거지는 고심 끝에 세 가지 소원을 정했습니다. 첫째로 구걸하는 깡통이 다 녹이 쓸어 새롭게 도금된 깡통이 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도금된 깡통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금된 깡통이 필요하다고 말해놓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이왕 깡통을 받을 바에야 좋은 깡통이 필요할 것 같아, “하나님, 알루미늄 미제 깡통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소원 하나 남았습니다. 거지는 마지막 기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소원이 생겼습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한 밥이 식는 것이었습니다. 따뜻한 밥을 먹고 싶어 드디어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하나님, 이왕이면 보온 도시락을 하나 주십시오.”
삶의 분명한 목적과 달려갈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이 거지같은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우리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에베보서 2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여 하심이라.”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선한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힘쓰고, 선한 일을 위하여 애쓰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느 식당 뒤에 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개들은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고 나서 음식 찌꺼기를 던져 주면, 그것을 가지고 음식 맛이 어떤지 평가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요리사는 식당 뒤에 있는 개들이 자기 음식솜씨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요리사는 날마다 개들의 평가를 신경 쓰며, 개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그 요리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되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식당에서 쫓겨났습니다.
요리사는 누구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까?
요리사는 개들의 평가가 아니라,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손님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낼 때 훌륭한 요리사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람의 평가보다는 우리를 지으신, 그리고 우리에게 투자하신, 하나님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진정으로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일을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는 찬양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저는 이 찬양의 가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 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점이나 실수를 새겨두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각자각자는 특허 상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과 똑같은 사람은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여러분에게 버리고 싶거나 싶은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내 눈이 조금만 컸어도, 내 코가 조금만 우둑 섰어도, 내 키가 한 뼘만 더 컸어도, 내 피부가 조금만 더 희었어도, 등의 약점이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가장 귀한 작품으로 여러분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수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뜻이 있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는 열등의식을 버리십시오.
여러분들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러분들에게 투자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