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극(極)이요, 자는 모(某)이다. 공의 선조는 광주인(廣州人)으로 고려의 대장군 방걸(邦傑)의 후예이다. 성조(聖朝)에 들어와 좌참찬을 지내고 시호가 사간(思簡)인 성(省)과 호조 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익헌(翼憲)인 윤덕(潤德)이 가장 드러났다. 3대를 전하면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황(滉)이니, 바로 우리 선묘(宣廟) 본생가(本生家)의 매부로 특별히 예우했으며, 고관(高官)에 추증하고 광양군(廣陽君)에 봉하였다. 정언 응원(應元), 현감 시성(時聖), 별검 신행(信行)을 거쳐 부사 서우(瑞羽)에 이르니, 바로 공의 선고이다. 선비는 풍산 홍씨(豐山洪氏)로 직장 만도(萬燾)의 따님이다.
공은 숙묘(肅廟) 병자년(1696, 숙종22) 여름 6월 3일에 태어나서 갑술년(1754, 영조30) 여름 6월 18일에 별세하였다. 묘는 광주(廣州) 영장산(靈長山) 덕곡(德谷)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으니, 광양군의 묘소 동쪽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학생 익령(翼齡)의 딸이며, 태종(太宗)의 왕자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정복(鼎福)과 정록(鼎祿)이고, 딸은 오석신(吳錫信)에게 시집갔다. 정복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경증(景曾)이요, 딸 하나는 어리다. 정록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정복은 전임 사헌부 감찰로 막 벼슬을 내놓고 상주 노릇을 하고 있다. 피를 토하는 병을 앓아 위급한 지경에까지 이르러 붕우들이 걱정하였으며, 나 또한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몸을 보전하여 효도를 끝까지 잘 마치라고 권하였다. 지금은 조금 정신을 수습하여 그 선고(先考)의 평생을 기록한 가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진영(眞影)이 본래의 모습과 달라도 다른 사람이라 합니다. 더구나 부친의 가장을 지으면서 터럭만큼이라도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있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러한데도 믿지 못한다면 이것은 선인(善人)을 속이는 것이다. 또 더구나 내가 익히 들은 것이 있음에랴.
부사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할 때에 사람들이 이르기를, “아무개 같은 아들이 있으니, 필시 곁에서 도와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논의하는 데 참여하였다가 당시의 의론과 어긋나 정거(停擧)의 처벌을 받았다. 후에 정거의 처벌이 풀렸으나 다시는 시험장에 나아가지 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으며, 《영대문답(靈臺問答)》을 저술하여 뜻을 드러냈다.
집에 있을 때는 효도를 다하여 부드러운 음성과 온화한 낯빛을 하였으며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부자리 등 침구를 저녁에 펴 드리고 아침에 개는 일을 몸소 하고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았다. 부모가 편찮으시면 변을 맛보며 신에게 기도하되 반드시 숨어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몰래 엿본 이만이 알 수 있었다.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공은 외부에 있어서 미처 임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훗날에 상을 당해 급히 달려가는 이를 볼 때마다 문득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늘 아침 일찍 일어나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을 다하며 말하기를, “아버지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이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는다면 증조와 고조까지 미루어도 아버지가 아닌 이가 없는 것이니, 추모하기를 한결같이 해야 하지 어찌 감히 태만히 하겠는가.” 하였다.
성품이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괴롭거나 힘든 일도 참고 이겨 냈다. 겉과 속이 같았으며 홀로 있을 때나 남이 볼 때나 차이가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너그럽고 느긋하며 즐겁고 화평하였으니, 비록 속임을 당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희롱하는 말이나 속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노비를 부를 때에도 천한 칭호로 부르지 않았다. 항상 이르기를, “나는 세 가지 말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재물과 이익, 여색, 남의 과실이다.”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집안사람들에게 훈계하고 뒷일을 잘 정리하게 하였다. 손짓하여 부인을 나가라 하고 담담히 숨을 거두었으니 군자의 바른 죽음이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말을 하면 반드시 깨끗하였고 / 言必中淸
행동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네 / 行不詭倫
스스로 법도를 지킬 뿐 / 守之在身
남과 더불어 다투지 않았다네 / 物與不競
병든 것이 아니라 가난하였으니 / 匪病伊貧
아름답도다 그 사람이여 / 夫夫其人
[주D-001]고관(高官)에 …… 봉하였다 : 안황(安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義州)로 임금을 호종했다가 계사년(1593, 선조26)에 강서현(江西縣) 행재소(行在所)에서 졸하였다. 왜란이 끝나고 갑진년(1604)에 논공행상을 할 때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으며, 형조 판서에 추증되고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海左集 卷36 贈刑曹判書安公諡狀》[주D-002]익령(翼齡) : 《순암집(順菴集)》 권25에 실려 있는, 황덕길(黃德吉)이 지은 〈순암선생행장(順菴先生行狀)〉과 〈선비공인이씨행장(先妣恭人李氏行狀)〉에는 ‘益齡’으로 되어 있다.[주D-003]부사공이 …… 때 : 《성호전집(星湖全集)》 권61에 있는 〈울산부사안공묘갈명(蔚山府使安公墓碣銘)〉에, “울산 부사에서 파직된 후 무주(茂朱)로 내려가 자호를 ‘양기옹(兩棄翁)’이라 하고 은거하다가 영조 11년(1735) 모월 모일에 별세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주D-004]병든 …… 가난하였으니 : 공자(孔子)의 제자 원헌(原憲)이 노(魯)나라에서 몹시 곤궁하게 지낼 적에 자공(子貢)이 화려한 수레를 타고 방문하여 말하기를, “아, 선생은 어찌하여 이렇게 병들어 지내십니까?〔嘻 先生何病〕” 하자, 원헌이 대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워서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병든 것이라 한다.’ 하니,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라오.〔憲聞之 無財謂之貧 學而不能行謂之病 今憲貧也 非病也〕”라고 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莊子 讓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