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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5:1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 "이상(異象)"이란 말은 히브리원어로 마카제니, 환(幻 = vision)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언을 받는 잠(Prophetic sleep)에서 된 것이고 외부적인 지각(知覺)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학자들이 있다(Keil, Delitzsch). 그러나 환(vision)은, 외부적인 지각과 관계되어 수취(受取)되는 일도 있다(행 9:1-9, 특히 7절).
"두려워 말라."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 군대를 격퇴했으므로, 그들이 또다시 팔레스틴을 침략할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더러 그런 우려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일설에 의하면, 아브람이 무자(無子)함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뜻이라고 한다(Keil, Delitzsch).
"나는 너의 방패요." 이 어귀의 히브리 원어(아노키 마겐)에서는, "나는"(아노키)이란 말이 강조된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 자신만이 아브람에게 보호자이심을 강력히 지적하신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언제든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된다. 모든 두려움과 염려를 막는 "방패"는, 하나님 제일주의자에게만 함께 하여 주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너의 큰 상급이니라." 이것은, 위에 관설된 "방패"(염려를 막는 방패)란 말에 대하여 해설을 더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염려거리를 막는 방패가 되시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는 그 이상 더 없는 "큰 상급"(갚아 주는 것 = reward)이 되시기 때문이다.
창 15:2,3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이 말씀은 아브람의 의문을 보여 준다. 그는 일찍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적이 있었다(12:3). 그 약속은, 실상 아브람의 "씨(자손)로 말미암아 천하 민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메시아 약속인 것이다(22:18). 그런데, 놀라운 약속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 무자한 아브람은 궁금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그의 의문되는 점을 솔직히 말한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의문은 그의 신앙 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도 또다시 아브람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볼 수 있다. 그는, 14장에 기록된 대로 신앙으로 승리하였던 것이다(14:14-15, 20, 21-24). 그러나 본장 초두에 기록된 그의 의심은 신앙의 퇴보를 말해 준다. 신앙 위인(偉人)도 인간의 근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자기의 의(義)로 구원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의 때문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6절).
창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의심을 깨뜨리기 위하여 그의 후사가 그에게서 난다고 하신다. 본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이 그것을 의미하였다. 13:16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라고 하신 말씀이, 아브람에게서 날 자를 가리키신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변질(變質)될 수 없다. 아브람의 일시적인 불신앙도 이것을 변동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후 1:20).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뭇별"을 보여 주심은, (1) 하나님의 능력도 보여 주신 셈이다. 하늘의 별들의 경이(驚異) 로운 세계는,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나타내고 있다(사 40:26; 시 8:3). 별들의 세계를 지으신 이가 아브람의 자손을 무수하게 하지 못하시랴! (2) 아브람의 자손이 "뭇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약속은, 장차 그리스도를 믿을 아브람의 영적(靈的) 자손들이 많으리라는 약속도 된다(롬 4:12, 16). 그러므로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대한 예언이다. 이와 같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은(6절) 아브람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셈이다. 그 믿음 때문에 그는 의(義)롭다 하심이 된 것이다. 갈 3:16, 2:16 참조.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윗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수한 별들을 보여 주셨다. 그의 자손들이 이와 같이 많으리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그에게 실물 교수(實物敎授)를 하셨다. 그 많은 자손들은, 아브람의 육신의 자손이라기보다는 영적 자손들 곧, 신약시대의 그리스도 신자들을 가리켰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을 관설하신 셈이다. 아브람이, 이와 같이 복음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은 때에 의롭다 하심이 되었다. 구약 시대 신자도 복음 신앙(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4-5)도 믿었겠지만, 특별히 하나님 자신을 믿은 것이 귀하다. 이것이 인격 상대(人格相對)의 신앙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언행(言行)을 믿는다고 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골자를 뽑아 놓은 신앙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란 말씀에 대하여, 바르트(K. Bar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믿음이란 것은 인간적 요소를 제거(除去)한 진공(Hohlraum)이라고 하며, 그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의(義)라는 보장을 받는다고 한다(The Epistle to The Romas, p. 121). 바르트의 이와 같은 해석은, 사람이 심리적 진공에 의하여 하나님을 만나면 그 만나게 된 하나님 때문에 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심리적 진공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믿음과 심리를 서로 단절시킬 수는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믿음에 있어서 사람의 심리적 요소가 구원의 공로나 의가 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성령의 역사 밑에서 옳게 작용할 수는 있다. 신자가 이렇게 붙잡은 하나님은 그에게 구원의 의가 되어 주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의가 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들(아브람의 영적 자손들)을 별과 같이 많게 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5절).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의 의(義)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람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 하심이 된 셈이다. "여기시고"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카솨브인데, 이것은 헬라어 로기조마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무엇이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간주하여 줌을 의미한다. 인간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만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간주하여 주신다. 이와 같은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롬 4:5에 말하기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하였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영생이시다. 이 진리는 근거 없는 우연의 사태가 아니고, 구약 시대에 계시 (啓示)된 대로 성취된 하나님의 진실성에 근거한 것이다. 아브람이 의롭다 하심이 되었다는 창 15:6은, 신약시대의 우리도 위한 것이다(롬 4:23). 아브람은 장차 될 일을 믿어서 의를 얻었으나, 우리는 그 약속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약속대로 이루어진 것을 믿기는, 약속 그 자체를 믿기보다 쉬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이 받는 의(義)는 저축해 둔 어떤 생명 없는 업적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의는 추상적(推象的) 상태가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이니, 곧, 살아 있는 의를 얻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믿게 되고, 또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를 살리는 의를 얻는다(롬 8:10).
창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기가 누구이심을 또다시 알려 주신다. 곧, 그는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분이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시기만 하고 내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저희를 위한 은혜의 약속을 완성하신다(빌 1:6). (2) 그는 그의 택한 백성에게 자기를 알려주시기 원하신다. 이 목적으로 그는, 모든 일을 하신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를 참으로 아는 것이 영생이니(요 17:3).
창 15: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 아브람에게는 믿음이 있다(6절). 이때에 그의 믿음이 약해진 것도 아니다. 믿음 있는 자들도 더욱 확신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어떤 행사를 구할 수 있다. 기드온도 그리하였고(삿 6:17), 마리아도 그리하였다(눅 1:34, 35).
창 15:9,10
이 부분에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곧, 그가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등을 쪼개어 서로 마주 대하여 놓게 하시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는 통으로 놓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상대로 하신 계약 체결의 의식(儀式)이다. 짐승들을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게 하신 계약 체결자가 그 두 사이로 지나심은(17절), 그 계약을 견고히 지키실 것을 맹세하시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그 계약을 견고히 지키실 것을 맹세하시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그 계약을 위반하는 자는, 짐승을 쪼개듯이 쪼갬이 된다는 서약인 것이다(렘 34:18-21).
아브람이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적이나 징조를 보여 주시지 않으셨다. 그는, 기적보다 계약의 의식을 거행하셨다. 하나님의 계약은 그의 말씀의 진실성으로 밑천을 삼는 것이다. 우리는, 기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을 완성하는 줄로 명심해야 된다.
창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 일설에 의하면, "솔개"는 흉한 일에 대한 징조였기 때문에 아브람이 그것을 쫓았다고 한다(Delitzsch).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아브람에게도 미신 사상(迷信思想)이 있었다는 잘못된 해석이다. 아브람이 솔개를 쫓아 보낸 것은, 거기 벌려 놓았던 거룩한 계약 의식의 희생물들을 파괴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구절 말씀은, 또다시 이 기록의 역사적(歷史的) 진실성을 보여 준다. 이 구절 말씀은, 아브람을 하나의 신화적 인물로 생각함에 적당한 재료가 아니다. 솔개를 쫓는다는 말이, 영웅 숭배의 사상(神話的人物을 만드는 사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말씀은, 실제로 역사적 인물이었던 아브람의 행한 일을 그대로 묘사(描寫) 한 것뿐이다.
창 15:12-14
아브람이 "심히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역시 그의 받은 계시(啓示)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아랫절에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고난당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은, 결단코 이교(異敎)의 요술 사상에서 갑자기 횡재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께서로부터 오는 진정한 행복은, 먼저 고난을 전주곡(前奏曲)으로 가진다. 이스라엘이 먼저 애굽에서 고난을 받고 그 뒤에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마련이었다.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그의 자손이 가나안 땅 점령하는 것을 아브람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짧은 시일 안에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신자 자신이 그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 약속을 받은 신자 자신에게 복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가 그 약속의 대상이 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증표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 약속이 그 자손에게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함은, 별세한 영혼이 천당에 들어갈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만일 이 말씀이 선조들이 묘지에 묻히는 것을 의미하였다면, 아브람이 자기 조상들의 묻힌 곳에 돌아갔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브람의 조상들은 가나안 땅에 묻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묻혔다(25:9).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 여기 "사대만에"란 말씀은, 물론 13절에 벌써 나온 400년 동안을 가리킨다. 그 기간은, 아브람의 자손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가서 종살이할 기간이었다. 이렇게 아브람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얻기까지는 400년이란 긴 세월이 걸리도록 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땅(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족속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공평하시다.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라도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기 전에는 멸하시지 않는다. 여기 이른바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족속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족속이 대표적으로 관설된다. 48:22; 민 13:29, 21:21; 신 1:7, 19 참조.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 여기 이른바 "연기 나는 풀무"는, 구름과 같은 모양을 이루어 어두움을 가져온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리는 표상으로서 심판을 상징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대한 진노의 계시(啓示)이다(겔 10:2-4; 계 15:8). 그리고 "타는 횃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계시이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빛이다(출 13:21). 그런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빛으로 임하신 하나님께서 그 계약(契約)의 결성자(結成者)로서 홀로 책임을 지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계약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단독 사역(單獨事役)으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만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것이다. 9-10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홀로 계약의 책임을 지시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 약속 내용은 18-19절에 밝히 나타난다.
창 15:18-21
애급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 이 말씀은, 솔로몬의 시대와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실현되었다(왕상 8:65; 왕하 14:25). "겐 족속"은 유다 남쪽에 살다가(삿 1:16), 가나안 북쪽에서도 살았다(삿 4:11). "그 니스 족속"은 유다 남쪽에 살았고, "갓몬 족속"은 그 동쪽에 살았다. 그리고, "헷 족속"은 오론테스(Orontes) 강 주위에 살다가 유브라데강을 향하여 퍼져 갈 그 미쉬(Carchemish)란 도시를 차지한 바 있었다. 이 족속의 존재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의심한 바 있었으나, 근년의 고고학적 발굴은, 그 족속이 강한 족속으로 있었던 사실을 증명하였다. "브리스 족속"에 대하여는 13:7의 해석을 참조하고, "르바 족속"에 대하여는 14:5를 참조하고,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기르가스 족속", "여부스 족속"에 대하여는 10:15-16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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