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창세기 3장
창 3:1 들짐승 중에…가장 간교하더라
뱀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간교한 피조물로 소개된다. “간교하다”는 단어, 아룸(‘arum)은 성경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품성의 경향을 나타내기 위하여 몇 차례 사용되는데(욥 5:12; 15:5), “영리하다” 또는 “교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대개는 “신중하다”는 호의(好意)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참조 잠 12:16, 23; 13:16; 14:8, 15, 18; 22:3; 27:12). 여기서는 후자의 호의적인 의미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왜냐하면 뱀은 하나님이 “좋았더라”, 심지어는 “심히 좋았더라”(1:25, 31)고 선언하였던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뱀의 악한 특성은 타락과 그에 뒤이은 저주의 결과이지, 그것이 창조되었을 당시 그 동물의 특성은 아니다.
창3:4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사단의 첫 번째 질문이 정말 그러했듯이, 의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의도된 것이라면, 그가 뒤이어 한 진술은 권위적인 선언의 모습을 띤 기만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가장 교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 주장은 히브리어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강조법으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반박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사단은 공공연한 거짓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에 도전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가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부른 것(요 8:44)은 옳다
창 3:5 너희 눈이 밝아
사단은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금지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1) 그는 피조물의 행복을 시기하였다. 사단은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그 나무를 금한 것은 그 열매를 먹음으로 너희가 죽을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너희의 주인과 경쟁자가 될 것을 염려해서이다.”
(2) 그의 말은 거짓말이다. 사단은, 그 과일을 먹으면 죽음이 이르러 올 것이라고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하나님의 요구가 가장 가증스럽고 괘씸한 양상으로 제시되었다. 진실에 거짓을 뒤섞음으로써 사단은 하와의 마음을 혼란시켜 하나님의 말과 그의 말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고자 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한 말(2:17)과 유사하게 들린다. “선악을 알 줄”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너희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약속은 현재의 제한된 시야가 뱀의 충고를 따름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창 3:5 하나님과 같이 되어
「제임스왕역」에서 “신들”(gods)로 번역된 동일한 단어 엘로힘(’elohim)이 1, 3, 5절에서는 “하나님”(God)으로 번역되고 있다. 여기서 「제임스왕역」의 번역자들은 「70인역」과 「불가타역」을 따랐다. 올바른 번역은 “너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이다. 이것은 사단의 말(참조 사 14:12~14)의 신성모독적인 성격과 그의 속임수의 심각성을 가장 예리하게 나타낸다
창 3: 7 그들의 눈이 밝아
사단의 모호한 약속의 성취를 기록한 이 말 속에 얼마나 풍자가 담겨 있는가! 그들의 지성의 눈이 열렸다-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무구(無垢)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들의 육체적인 눈이 열렸다-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창 3:7 치마를 하였더라
서로의 면전에서 부끄러운 상태로 서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고자 애썼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치마는 그들이 상실한 무구(無垢)한 빛의 의복을 대신한 가련한 대용품이었다. 양심은 일깨워졌다. 이 부끄러운 감정은 감각에 그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는 의식에 뿌리를 둔 것임은 그들이 그분을 피해 숨었다는 사실로 볼 때 명백하다.
창 3: 8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조용한 저녁 바람이 정원을 상쾌하게 하는, 하루가 끝날 무렵의 하나님의 정기적인 방문은 그 행복한 부부에게 항상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가까이 오는 소리는 놀람의 근원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감히 그들의 창조주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두려움의 원인은 겸손이나 정중함이 아니라 깊은 죄의식이었다.
창 3: 9 네가 어디 있느냐
항상 하나님의 접근을 환영하였던 아담은 이제 숨었다. 그러나 마치 그가 숨은 곳을 몰라서 아담을 부른 것이 아니라, 자복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는 하나님을 그는 피할 수 없었다. 아담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당황하여 스스로 숨었다고 하나님에게 말함으로써 죄를 그 결과 뒤에, 자신의 불순종을 자신의 수치심 뒤에 숨기고자 하였다. 죄의 결과에 대한 그의 의식은 죄 자체보다도 예민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 처한 인간의 특성인, 죄와 형벌 사이의 혼동을 목격한다. 인간은 죄 자체보다도 죄의 결과에 더 민감하며 그것을 더 혐오한다.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여자
하나님은 당신이 아담의 범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질문을 함으로써 그에게 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주고자 하였다. 아담의 대답은, 자신의 곤혹스러움에 대한 우회적이고 회피적인 변명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비난이 되었다. 아담의 품성은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와 같이 변하였다. 자신의 아내를 그처럼 소중히 여겨 그녀와 분리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범했던 그 사람이 이제는 그녀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라며 냉담하고 무정한 반감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말은, 아버지에게 요셉에 대하여 “아버지의 아들”(창 37:32; 비교, 눅 15:30)이라고 말한 야곱의 아들들의 말과 닮은 데가 있다. 죄의 쓴 열매들 가운데 하나는 “무정하”고(롬 1:31) 가혹한 마음이다. 그처럼 연약하고 유혹적인 피조물에 속박됨으로 인해 생긴 자신의 비통한 곤경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암시는 배은망덕의 타락의 심연까지 내려간다
창3:13 뱀이 나를 꾀므로
여자도 자신을 속인 일에 대하여 뱀을 비난하면서 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담도, 그의 아내도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움으로 비난을 피하려고 하였다. 어느 쪽도 회개의 증거를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 가운데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있다. 여자는 자신이 속았다고 항의하였으나, 아담은 자신의 행위가 그 결과를 충분히 아는 가운데 행해진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넌지시 인정하였다.
창3:14 네가…저주를 받아
뱀이 그의 동료들보다도 더 큰 죄의 저주를 감당해야 했지만, 죄의 저주는 그에게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에게도 내린다. 원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아름다웠던 뱀은 이제 날개를 빼앗기고 이 때부터 먼지 속을 기어다닐 운명에 처하였다.
이렇게 하여 생각이 없는 짐승들이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저주는 멀리까지 미치는 죄의 결과를 그에게 각인(刻印)시켜 주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아담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의 죄의 결과를 담당해야 하는 이 피조물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에 격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음이 틀림없다(부조와 선지자, 68). 언제나 악의 상징이 되어왔던 뱀에게는 고통을 당하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 앞에서 죄의 결과에 대한 상징이 되도록 하기 위해 저주가 더 무겁게 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뱀 앞에서 극도의 불쾌감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창 3: 15 내가…원수가 되게 하고
여기서 여호와는 하와에게 말을 건넨 실제적인 뱀에게 말하는 데서 돌이켜 옛 뱀 곧 마귀에게 심판을 선언한다. 예언적인 언어로 표현된 이 심판은 그리스도 교회에 의해서 구원자의 도래(到來)에 대한 예언으로 항상 이해되어 왔다. 비록 이러한 해석이 의심할 나위 없이 옳지만, 그 예언은 또한 문자적으로도 사실임을 지적할 수 있다. 뱀과 사람이 어디서 만나든지 그들 사이에는 무서운 적의가 있다.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사단의 “후손” 즉 그의 추종자들(요 8:44; 행 13:10; 요일 3:10)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영속될 투쟁이 언급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후손”으로 불려진다(계 12:1~5; 참조 갈 3:16, 19). “마귀의 일을 멸하려”(히 2:14; 요일 3:8) 온 이는 바로 그였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상하게 하다”는 히브리어로 슈프(sup)이다. 이 말은 “분쇄하다” 또는 “누워 기다리다”라는 뜻이 있다.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이 분명하다. 비록 예언된 적의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있게 될지라도, 분쇄되어야 할 것은 뱀의 머리요 그의 후손이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복으로 뱀은 단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밖에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창 3: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사모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슈크(suq)는 “쫓아가다, 어떤 것을 간절히 열망하다”는 뜻으로, 그것에 대해 있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열망을 나타낸다. 비록 남편에게 억압되고 출산의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여자는 여전히 남편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느낄 것이었다. 주석가들은 이것이 형벌의 일부냐 아니냐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려 왔다. 이 “사모함”은 여성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남편과 아내의 마음을 더욱더 밀접하게 연합시키기 위하여 주어졌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그 여자는 하나님이 정해 준 남편과의 관계를 깨뜨렸다.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 되는 대신에 그녀는 그를 꾀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남편과 동등했던 그녀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남편은 지배자와 주인으로서 그녀를 “다스릴” 것이었다. 성경에서 아내는 그녀의 주인에 의해 “소유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대부분의 비(非)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여자는 수세대를 통하여 신분의 저하와 실질적인 노예 상태에 처해 왔다. 하지만 히브리인들 가운데서도 여성의 조건은 비록 압제나 노예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명백히 종속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복음의 축복에 관하여 여자를 남자와 동일한 위치에 두었다(갈 3:28). 비록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되어야 할지라도, 그리스도교의 원칙들은 남자와 그의 아내가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경험하도록 이끌 것이며, 각자가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리에 헌신하므로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다스리려”는 시도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참조 골 3:18, 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여호와는 아담에게, 무덤이 그의 확실한 종착지임을 알려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속의 계획(15절)이 그의 현재의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보증해 주는 것임을 이해하였다. 조건적 불멸에서 죽어야 할 운명으로 옮겨진 아담의 본성 가운데 일어난 변화와 더불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무서운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자비로 은혜의 날을 허락받지 못했다면, 죽음은 즉시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생명을 요구하나, 그분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차3:19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이 성경 구절은 어떤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타락과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의 문맥에 삽입되어 혼란을 일으키는 구절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이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었으며 이 믿음을 그가 지금 그의 아내에게 준 이름을 통해 나타냈음을 보여 준다.
하와 (hawwah)는 “생명”을 뜻하며, 여기서 「70인역」은 조에(Zo-e-)로 번역한다. 그것은 또한 고대 페니키아의 명각들에서 발견되는 고대 셈어 형태이지만,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히브리어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아담이 고대 셈어를 말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안되었다. 만일 모세가 당대의 히브리어에 상응하는 말을 사용했다면, 그는 여자의 이름을 하와(hawwah)라고 하는 대신에 하이야(hayyah)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색다른 고어 형태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지식이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4:1에서 하와(hawwah)는 「70인역」에 의해 유아(Eua)로 대충 음역되었는데, 여기서 영어의 이브(Eve)가 유래하였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아담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선고가 막 선언되었을 때에 그녀를 “모든 산 자의 어미”로 보면서 믿음으로 그의 아내에게 “산 자”라는 이름을 주었다. 또한 그는 무덤 너머를 바라보고 그의 아내에게 약속된 후손에게서 그 날 그들이 빼앗겼던 불멸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회복시켜 줄 한 분을 보았다. 우울과 낙담-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으나-속에서 그녀를 “모든 죽을 자의 어미”라고 부르는 대신에, 그는 믿음으로 자신의 눈을 그의 심판자에게 고정시켰으며, 그녀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전일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그녀를 “산 자”라고 불렀다. 그에게 믿음은 진정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였다.
창3:21 가죽옷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보내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힘든 노동과 타락에 뒤따른 극도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줄 보호막에 적합한, 보다 내구력이 있는 의복을 그들에게 마련해 주었다(부조와 선지자, 61). 또한 가죽옷은 그들이 잃어버린 순결함과 죄의 삯인 사망과 그분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죄를 없이 할 하나님의 약속된 어린양을 항상 상기시켜 줄 것이었다. 동물의 보호자가 될 사명을 부여받은 그가 이제는 불행하게도 그 동물들 중 하나의 생명을 그 자신이 취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살기 위해 동물들이 죽어야 하였다.
비록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제사 제도가 이때에 제정되었다(부조와 선지자, 68; 참조 시대의 소망, 28). 다음 장에서 언급될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들이 이 의식(儀式)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만일 하나님이 희생제사에 대하여 명확한 규정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은 사실은 독단적인 처사가 되었을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의 동생과 마찬가지로 요구되었던 바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대에 보편화된 동물의 희생제사는 이 관습의 공통적 기원을 말해 준다.
창3:24 화염검
빛은 항상 거룩한 임재의 상징이 되어 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셰키나의 영광도 지성소 안의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 양쪽에 하나씩 있는 두 그룹들 사이에 나타났다(참조 출 25:22; 사 37:16; 시대의 소망, 464; 부조와 선지자, 349; 각 시대의 대쟁투, 24). “화염검”은 문자적으로 “검의 번쩍임”으로 읽히는 히브리어에 대한 다소 부정확한 번역이다. 낙원의 문을 지키는 실제적인 검은 없었다. 오히려 매우 신속하게 “두루 도는” 검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번쩍이는 반사처럼 보이는 것, 즉 강렬하게 빛나는 중심부로부터 발산하는 번쩍이는 빛줄기들이 있었다. 더욱이 「제임스왕역」과 「개역한글판」에서 “두루 도는”으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 미트합페켓(mithappe-ket)은 “스스로 두루 도는”을 의미한다. 이 동사 형태는 강조형으로, 재귀적인 동작을 표현하는 데만 사용되며, 이 경우에는 “검”이 스스로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다는 결론을 요구한다. 이 찬란한 살아 있는 빛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의 현시(顯示)인 셰키나의 영광이었다. 수세기 동안 하나님에게 충성된 자들은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것 앞에 모였다(부조와 선지자, 62 83, 84).
하나님과 사람의 대적(大敵)을 정복할 권세가 있는 약속된 후손-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얼마나 친절하신가! 하나님의 공의는 죄가 그 형벌을 치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미 타락한 인류를 구속할 길, 곧 하나님의 아들의 자발적인 희생에 의한 길(벧전 1:20; 엡 3:11; 딤후 1:9; 계 13:8)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를 이해하도록, 시각 교재를 제공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제사 의식을 제정하였다. 무죄한 어린양은 인간의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피를 흘려야 했으며, 죄인의 벌거벗음을 가려주기 위하여 그의 가죽을 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항상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적으로 상기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는 인간의 범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내놓아야 할 것이었으며 그의 의(義)만이 인간을 덮어주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이 구속의 계획을 얼마나 분명하게 이해하였는지 모르나, 죄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구속주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고 잃어버린 통치권을 다시 얻으며 에덴의 행복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계시되어 그에게 보증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의 복음은 성경의 중심 주제이다. 성경에서 이 귀중한 복음을 발견하여 타락한 존재 일지라도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감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