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 두 사람 생각이 난다. 거의 50년 전에 만난 두 여인. 그 기억이 뇌 한구석에 묻혀있다. 그 추억이 가슴 쪽으로 내려오더니 볼룩 튀어나온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끼리의 만남은 훗날을 기억하라고 흔적을 남기는 거 같다.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마음에 남아 떠나갈 줄 모른다. 사람이 생각난다는 것은 ‘미안해’하거나 ‘고맙다’라거나 ‘그립다’는 감정이 살아 있다는 의미다.
인연의 시작은 이렇다. 1975년 5월 초순이다. 대학 입학 후 첫 축제가 있는 날이다. 한 달 전쯤 대학 선배 소개팅으로 만난 파트너를 축제에 초대했고 그녀는 ”오겠다“고 했다. 청량리 시계탑에서 만나기로 했다. 축제가 보통 5시에 시작하니까 4시쯤 만나기로 한 것 같다. 그날은 봄비가 옷에 젖을 듯 말 듯 내리는 날이었고 나는 장우산에 옅은 하늘색 양복 차림이었다.
약속 시간 40분쯤을 지나도 그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 올까’ 실망과 궁금증에 머리속이 범벅이 되었다. 남자가 여성 기다리는 시간에 인내심과 진실성을 테스트하던 그 잔혹한 시절이었다. 그때 헐레벌떡 숨찬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안홍진 씨죠“ 하는 여성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발머리로 기억된다. 그녀도 정장 차림에 역시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예“ 하니까 ”여기 오기로 한 제 친구(이름 기억이 안 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제가 대신 왔어요” 난 “예. 아아.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다. “내가 용기 있게 오늘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고 물었어야 했다. 삐쭉 망설이고 쳐다만 보니 돌아가 버렸다. 미팅 주선한 선배는 "파트너 여성이 늦더라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매너는 알려주었지만, 그날 나의 경우 같은 '대타(代打)가 오더라도 꼭 초대해야 한다'는 귀뜀은 없었다. 난 융통성이 없었다. 고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되니 철이 덜든 탓이었다. 선배 탓으로 돌리긴 싫지만 내 첫 경험 탓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다. 단순히 친구를 위해 소식 전달만 하려 왔다고 생각하면 난 바보일 것이고 그렇다면 덜 미안하다.
태어나서 처음 가는 축제인데 홀로 축제에 나타나면 친구들한테는 불쌍하게 보였을 거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내가 즉시 귀가하게 되면 집안 식구들은 영문도 모르고 의아해 왜 일찍 왔냐고 물을 것이고, 알게 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가 아닌, 학교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어떻게 해야 좋지’ 고민하면서 걷다가, 용기 비슷한 오기가 가슴을 부추겼다. 여기서 길 가는 여학생에게 즉석 제안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 다짐이 끝나자마자 뒷모습에도 광채가 빛나는 한 여인이 운명처럼 나타나 걸어가고 있었다. 매력이 넘치는 바지 차림에 옆구리에 책과 노트를 낀 사람. 저 여인더러 ‘한 시간만 내달라고 해보자’ 했다. 10미터쯤 떨어져 미행했다. 지금 기준으론 스토킹이다. 육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육교를 따라 걷다가 내려가면서 부탁해 봐야지 하는데 도로 옆 책방으로 들어갔다. 난 즉시 걸음을 멈추고 길 옆으로 비껴 기다렸다. 예상대로 육교를 오르고 내려갈 때였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저 오늘 학교 축제인데 한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정중한 말투로 제안했다.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묵묵부답으로 앞쪽으로 걸었다. 당시 여인에게서 ‘No는 Yes의 암묵적 신호’라고 확신하고 있던 바였다. 아아! 순간 '이 여인이 허락했구나' 난 직감했다. 난 다시 “한 시간만 내주세요” 좀 더 자신 있는 어투였다. 그녀는 “딱 한시간 이예요” 승낙이 떨어졌다. “미인은 용기 있는 자가 차지한다”라거나 ‘하늘에 사는 천사는 이렇게 만나는구나’ 생각했다.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축제에서 이것저것 이벤트도 하고 사 먹기도 했다. 난 즐거웠는데 이 여인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며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제 집에 가야 합니다.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좀더 한 시간 더 달라고 애원했지만 “너무 늦으면 혼납니다”라는 대답뿐이었다. 끌려가듯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면서 “연락처만라도 가르쳐 주시죠” 했지만 얼굴만 쳐다보며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면 “제 주소를 드릴게요“ 하고 종이쪽지에 적어 주었다. 그렇게 그 여인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버렸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며칠 전이었다. 첫눈이 발목까지 차는 날이었다. 막냇동생이 형 ”엽서 왔어“ 했다. 주소가 없는 겉봉투엔 <백○심> 이름뿐이었다. 축제 때 그 여인이었다. 주소도 안 밝히고 뿌리치고 사라진 그 여자였다. 뜯어보니 김영랑의 시(詩) ”진정한 사랑은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고 밝은 가을 달밤에 피어나는 하얀 박꽃처럼 순수하답니다“로 시작하는 구절의 시가 적혀 있었다. 하트 모양으로 오려 붙인 두 개의 붉은 낙엽이 옆에 나란히 있었다. 주소가 안 보여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 낙엽을 뜯어내 보니 안쪽에 잉크로 적은 자그마한 글씨의 주소가 숨죽이고 있지 않은가. 보물찾기 1등 당첨된 기분이었다.
그날은 민들레 꽃송이만 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코트를 걸치는 둥 마는 둥 하고 그 주소지를 찾아 나섰다. 7개월 전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다. 몹시 추운 날이었지만 내 눈초리를 보고 추위가 내 곁에 낄 겨를이 없었을 거다. 두세 군데 연탄 가게, 복덕방에 수소문 끝에 주소를 찾았다. 옛날 대궐집 스타일의 나무 대문 가운데 둥그런 쇠고리가 달린 집이었다. 요비링을 누르니 초등학생 또래 아이가 나왔다.” 사촌 누나인데 저녁 9시쯤 온다“고 했다. 조금 떨어진 곳, 어느 집 지붕 처마 밑에서 얼어 죽은 듯 꼼짝 않고 기다렸다. 저녁 밥 생각이 나긴 했지만 참았다. 그리고 만났다. 다방에 가서 차를 마시는 내내 그녀의 얼굴은 부시도록 빛났다.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군대 입대 영장을 받아 놓은 지 1달 남짓 되는 시기였다.
그때의 황홀했던 감정이 지금 이 순간에도 되살아난다. 이 세상엔 그녀와 단둘만이 있는 착각이 들었었다. 그때 그녀를 다시 만난 시간은 완전히 멎은 듯했었다. 그 순간의 내 심장도 멈추는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 같은 태세였다.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고, 헤어지면 필히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게 인연의 섭리이다. "첫 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라는 말이 맞는가 보다. 그 사람들과의 짧은 만남의 의미는 '아직도' 살아서 삶의 조그만 에너지가 되고 있다.
(2024년 6월 7일 14.9 매)
첫댓글 와~~!
알퐁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안 선생님이 이런 글도 쓰시는구나' 생각하며 집중해서 읽었어요. 제 글이 늦어져서 선생님의 글을 뒤늦게 읽고 놀랐어요. 추억의 여인에 대해서 추억하며 이토록 자세히 기억하신 걸 보면 정말 좋아하셨군요. 뒤늦게 보내온 엽서 이야기, 집앞에서 추위를 무릎쓰고 기다리신 선생님의 모습이 정말 낭만적이네요.
지금이라면 휴대폰으로 연락이 가능했을 텐데ᆢ 그 시절의 진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지송 김영신 선생님, 정말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글을 읽어 주시고 과분한 칭찬을 해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들었더라도 사춘기 고교 줄업하던 해, 1975년 의 이야기기는 생생히 살아 있는 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았네요. 넘 재밌어요. 순수한 청년의 풋풋한 사랑, 열정이 모아져
지금 글을 쓰시는군요. 1975년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나니 기분 좋습니다. 청량리역 시계탑 아래 하늘색 양복을 입은 청년이
장우산을 들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 모습이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엄희자 안젤라 선생님, 과분한 칭찬을 해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직도>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수필을 쓰라고 하니, 불현듯 1975년 그때 그 여성이 떠올라 썼습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일이라 생생히 기억이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