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득관시조(得貫始祖) 한라군(漢拏君)
가. 충덕사(忠德祠)
이곳 양과동(良瓜洞)은 우리 조상의 세거지(世居地)이다.
탐라성지에 삼신인이 현신(現身)하심에 만대향화(萬代香火)를 받들게 되었으니 그중 한 어른은 양을나 성왕이시다. 이때는 서기전 2373년쯤이니 단군성조와 때를 같이 한다.
그 후 시조할머니의 선외가인 벽랑국의 왕래가 잦아지고 가장 가까운 뭍으로 터전을 옮기게 되었으니 이가 탐진(耽津: 지금의 강진) 땅이오. 다시 물줄기를 따라 내륙 깊숙한 곳에 이르러 취락(聚落)을 이루는 곳이 바로 삼환의 하나인 마한의 바닷가 포구(浦口) 이장(泥場: 흙맛. 지금의 양과동)이었으니 때는 B.C 400년 쯤이었다.
노령산맥이 줄기차게 뻗어 내린 서석(瑞石: 무등산)을 기봉으로 용사기륙(龍蛇起陸)한 건지산(乾芝山)을 안대삼아 이곳에 정착한지 300여년이 되어서는 한 때 마한 효왕(孝王) 6년 B.C 108년 우리 양씨 판도가 확장되어 이곳을 양과동이라 이름하였고 건지산(乾芝山),금당산(金堂山),사월산(四月山) 과 대촌,서창을 비롯한 극락강(極樂江) 동으로는 마인리(馬靭里)까지 근접 일원을 양과동이라 구전되어 전해진다.
우리 조상은 이와 같이 고려말 이조 초기의 혼란기 을사사화(乙巳士禍 : 易姓革命의 亂世)를 피하여 영암,나주,능주, 광주 등지에 출향하기 전까지 실로 천여년 이곳에서 영화를 누리며 개척영위(開拓營爲)하였다.
그 후 이곳은 휘(諱)석재(碩材) 선조의 장증손(長曾孫)인 문성공(文聖公)의 외가 후손인 경주최씨가 정착하였다.
유서 깊은 세거지(世居地)에 충덕사를 세우다.
국가성쇠의 변천에 따라 한 성씨 역사의 부침기복(浮沈起伏)도 무상하였음을 다 아는 바이지만 우리도 예외 없이 조선초기의 을사사화에 천여년 영화를 누렸던 세거지 양과동을 버리고 각지에 살 곳을 찾아 흩어지니 그 후 500여년은 실전(失傳)된 조상의 설단(設壇)이나 사우(祠宇)도 없이 궐향(闕享)한지 오래였지만 이제 늦게나마 후손들이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성을 모아 이 유서 깊은 조상의 세거지에 사우를 세워 조상영령에 향화(香火)를 밝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당연하고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 경유를 살펴보면
1987.6.21 한라군대종회를 창립하고
1988.12.5 사우 건립지를 확보하고
1989.9.5 사우 건립의 구체안이 의결되고
1991.12.21 사우 건립을 기공하여
1992.7.15 사우가 준공되니 검사를 마치고
1993.3.15 선조 25위를 봉안하고 예성하였다.
이는 실로 우리 종사의 획기적인 새 장을 열었던 대거사였으니 그간 이 종사에 헌노(獻勞)하신 종언과 물심양면으로 진심갈력(盡心竭力)하신 헌성자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여기 헌성금 총액은 4억231만원이며 헌성자는 758명에 이른다. 이제 우리는 한라군을 주벽으로 25위 현조(顯祖)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5일에 춘계대제를 매월 초하루를 봉심일로 정하고 자손의 도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1300여년의 해한(解恨)이 아닐 수 없다.
봉안된 선조는 작위품계(爵位品階) 2품 이상의 무관이 8위요 문신이 15위이니 다른 곳에서 보기 드믄 충현선조(忠賢先祖)이기에 이 사우를 충덕사(忠德詞)라 이름하고 내삼문의 명제를 돈화문(敦和門)이라 하니 숭선(崇先) 유후(裕後)하는 우리 종족이 이 문을 드나들 때 화목이 더욱 두터워질 것을 염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