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창섭 - 영감의 신비성과 시적 작위의 극대화 -우남정 시인의 투사와 묵언 뒤의 육화
<모던포엠 포커스 12> 영감의 신비성과 시적 작위의 극대화 -우남정 시인의 투사와 묵언 뒤의 육화 엄창섭(가톨릭관동대학 명예교수, 본지 주간) 1. 합리적 해법과 맑은 시혼의 경이로움 격랑 속에서도 또 그렇게 바다 끝 장엄한 태양이 솟아오르듯 비록 대립구도로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현상은 더없이 암울할 따름이다. 어디까지나 이미 죽어간 이들이 못내 갈망했던 오늘의 지금(now)은 ‘나에게 있어 최초의 날이고 최후의 날이라는 그 절박감으로’ 존재감을 스스럼없이 지켜내고 눈부신 꿈과 이상은 다시금 실천궁행할 바다. 차제에 꿈을 실현하지 않으면 불가능 또한 가능한 현실로 이행되지 아니하기에 진리와 자유를 수호하는 이 시대,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응당 위대한 창조 작업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역할을 담당할 일이다. 그렇다. 고정 인식의 틀 깨기라는 발상의 전환을 철저하게 모색하고 자존감에 빛나는 지극히 독자적인 시적 매력과 다양한 삶은 더없이 유의미하다. 까닭에 <난 벤다이어그램을 사랑해> 외 9편의 시편들을 들고 『모던포엠』 통권 218호 「모던포엠 포커스」의 도보도 당당하게 독자들 곁으로 성큼 다가서는 우남정 시인이다. 그 자신은 앞서 제16회 「김포문학상」 대상 수상자이며 충남 서천출신으로 2008년 『다시올文學』신인상을 수상한 뒤에도 창작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으로 끝내 꿈을 성취한 2018년『세계일보』신춘문예의 당선자이다. 차제에 동시대에 몸담은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에 견주어 일부 평론가나 독자들에 의해 ‘평가에 연연하기보다 시 쓰기 자체를 즐기는’ 대상자이다. 아울러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농부의 보폭(步幅)으로 ‘느림의 미학’을 의식한 그 자신의 시편들은 지난한 ‘몸의 시학’과 연유하기에, 일상을 통한 자잘한 감동의 소산일 따름이다. 한편 독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동성과 빛나는 모성의 심리작용은 대상의 포용과 시적 미감에 투사(投射)되고 또 하나 ‘존재의 꽃을 형상화시킨 맑은 영혼의 기도’이기에 가슴 떨리는 전율은 한순간 눈부신 충동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저것 봐, 바다에는 만월이 다시 붉게 태어나고 있어 아 쓸쓸한, 나는 벤다이어그램을 사랑해’를 독백처럼 흘리며 호흡이 긴 산문시 형식을 즐겨 다룬 끝에 “우리, 뱃머리에 누워 밤하늘이나 볼까 곧 세기의 사랑이 시작되겠지 동그라미 하나가 다른 동그라미 속으로 막 닻을 내리고 있어 초승달이 되어가는 가슴, 나는 한입 베어 문 사과처럼 너에게 먹히고 있어 나는 벤다이어그램을 사랑해 끌어당기듯 내어주는 기쁨 같은, 아니 슬픔 같은 놀이,(난 벤다이어그램을 사랑해)”를 즐기는 그 나름의 시적 행위는 가끔 잔상(殘像)이 불투명한 그림자놀이에 잇닿아 있다.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한 사람의 충직한 독자로서 그의 시편을 꼼꼼히 애정을 지니고 읊조리면 까닭모를 한순간의 격정(激情)마저 일상의 평정심을 끌어안는 시적 치유의 가능성이 거듭 확증될 것이다. 각론하고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현대적 주지성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즉물적 대상 에 의한 동일자적 내면인식을 관통해 공감의 영역 또한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비추어서 ‘프리즘을 통과한 빛 하나가 깊어지는 썬 그라스를 쓰고 사랑하는 일은 정말 즐거워’하는 화자 자신의 삶의 일상은 “고독은 농밀해집니다 내가 어디를 보는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요 고이는 눈물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파르스름한 이내 같은 그늘이 감도는 세상은 판타스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뭐든지 자세히 보이는 것은 쓸쓸한 일이거든요(그러면 썬 그라스를 쓰세요)”라는 시편에서 이와 같이 확증되어지듯 그 자신은 주어진 현상에 침잠하거나 즉물적 대상에 몰입하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을 지닌 정신작업의 종사자이기에 시 심리적 일면은 더욱 명백하게 확인된다. 까닭에 「영감의 신비성과 시적 작위의 극대화 – 우남정 시인의 투사와 묵언 뒤의 육화」에 기인(起因)한 투명한 내면의식은 생명의 본체인 우주를 지향한 소중한 삶의 교시이기에 새삼 유의미하다. 또 한편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간대에 ‘존엄한 생명외경과 삶의 구조’로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타자에 관한 조응과 세심한 분별력은 창조적 영혼에 맞물려 있다. 특히 〈아르장퇴유의 센 강변>에서 ‘아르장퇴유’는 센 강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지명이다. 일단 그 자신이 유명한 마네의 회화를 시적으로 형상화하여 “여자의 눈빛이 하얗다/새벽달이 아파트를 넘어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천 개의 조각들은 다 써버렸다/남자의 얼굴 한 조각이 도무지 없다/책상 밑에도 옷걸이 뒤에도 쓰레기통 속에도 없다/그 남자는 한쪽이 뻥 뚫린 채//원근법도 입체감도 사라진 그 숲에서 그들은, 지금 식사 중이다(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시적 분위기는 다시금 선명하게 해명되고 있다. 까닭에 ‘한 순간의 격정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평정을 안겨주고 감미로운 심적 현상을 유지시키는 역동성’은 기대이상의 정신적 결과물로 「합리적 해법과 맑은 시혼의 경이로움」이 내포된 시감상의 즐거움에 맞물린 또 하나의 기쁨일 따름이다. 2. 인식의 비장감과 사유의 이중거리 독자적인 위상의 확립을 위해 다소 인상비평적인 시평을 고려할 때 그 자신의 시사적(示唆的) 의미와 배경은 소외된 인간관계성의 회복을 위해 서로의 간극(間隙)을 좁혀나가는 생명경외감을 극명하게 입증시켜주는 소중한 정신작업이다. 때문에 누구보다 그 자신이 ‘지극히 현대적임을 자처했던’ 독일의 시인 고트프리트 벤이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라는 지적은 사려 깊은 분별력으로 가늠될 바다. 여기서 ‘순진무구함 을 지켜내기 위하여 시적 작업에 몰두한 끝에 자신의 아픔까지도 감내하며 실존적 상황과 치열하게 대응하는 시인’으로 평가해도 거부감은 주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이 특정한 시인의 진정성 있는 술회(述懷)야말로 상이하게도 역동성을 자극하여 놀라운 충격을 안겨주는 현재성은 다시금 지켜볼 일이다. 또 하나 현실적으로 놀라운 현상은 몸담고 있는 시간대에서 새로운 내면의식의 소유자인 그 자신이 “시집을 읽다 엎어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아이스아메리카를 담은 유리컵 옆이었습니다/돌아와 보니,/'긴 수평선 한 가닥이 내 속 눈썹 위에'* 파도치듯 닿았습니다(울퉁불퉁한 바다)”의 예시처럼 한순간 정지한 잔잔한 해수면과는 대조적으로 파도의 충격에 의한 격동적인 바다의 양상을 예리한 투시력(透視力)으로 ‘울퉁불퉁한 바다’로 돌출시켜 ‘무게가 다림질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가야한다’는 화자 자신이 이처럼 평상심의 유지랄까? 감동의 회복을 통하여 삶의 이법을 터득한 주지적인 행위는 새삼 유의미하다. 각론하고 직면한 시대상황에서 저마다 인간은 삶의 흔적을 남기는 존재이기에 때로는 물안개 뒤의 물상처럼 불투명한 기억의 흔적을 소통의 화소(話素)로 형상화하는 편이다. 이 같은 창조적 행위에 의해 가끔 기억과 대상을 인지시키는 적절하고도 당위성이 주어지는 합리적인 해법은 시적 상상력과 맞물린 생명의 재해석에 해당한다. 모처럼 엄숙주의(嚴肅主義)라는 삶의 시간대에서 우남정 시인의 ‘따뜻한 감성과 언희(言戱)에 의한 경계 허물기’야말로 감정의 절제로 불필요한 여백의 틈새를 결코 허락하지 않음은 더없이 주지할 점이다. 여기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 그 자신의 시적 행보는 사려 깊은 분별력을 축(軸)으로 온유한 심성의 감춤에서 비롯된 외연(外延)의 노출을 지극히 경계한 내면인식의 뼈아픈 자기성찰이기에, 다양한 시적 정조를 응축시키는 놀라움은 동일화 양상에 맞물린 결과이다. 이 같은 정황에 의해 그 자신의 시 인식은 담백한 품격을 지닐뿐더러 한층 더 맑은 영혼의 울림이기에 대다수 충직한 독자라면 응당 체감할 미국 문학의 혁명적인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무덤 위 풀은 아름답게 자란 머리카락인 듯하다.”는 <풀잎>처럼 여린 듯 강한 생명력의 결속은 어디가지나 자못 신비로울 따름이다. 그렇다.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비정한 시간대에서 상이하게도 병폐성을 치유시켜주는 매혹적인 역동성은 ‘눈을 감지 않는 인형이, 미미의 집 앞에 잠든’ 풍경처럼 이채롭지만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빨강 노랑 파랑 하양 초록……의 블록들/다만 하나의 조각이었던 그리하여 조각의 집합이었던/이합집산의 무수한 우연이었던 스위트하우스/그 집은 해체되기 위해 있다(레고의 집)”라는 객관적 현상의 배치에 해당함은 물론이거니와 내면의식의 실상이고 또 하나의 상황논리다. 그렇다. 우리가 몸담은 디지털시대에 종종 블록 쌓기 장난감뿐만 아니라 영화와 비디오게임 등까지 관계성을 맺은 이른바 원 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 전략을 이행하는 레고(LEGO) 산업시대의 현장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관심대상의 추이(推移)야말로 그 자신의 아득한 정신적 풍경화로 치환(置換)되기에 시적 모티프는 이채로운 양상의 맞물림이다. 한편 시 심리의 현상에서 ‘꽃은 비에 젖어도 꽃의 향기는 비에 젖지 아니하듯이’ 그 자신의 애씀과 집념을 걸쳐 생산된 결과물은 ‘보람과 감사, 감동을 안겨주는 매개(媒介)로 매순간 작동한다.’는 현재성이다. 짐짓 이 같은 점에서 ‘어둠의 휘장을 찢고 가르고 밤을 건너온 새벽이 번져 있는’ 시간대에 ‘쑥부쟁이 향이 날아오는 즈음’에 “흐르던 실핏줄에/시즙마저 향기로워, 다투어 활자들이 몸을 적셨을까/저 갈피에 잦아든 울음/색이 날아간 자리에 한 마디 절명사를 남겨놓았나//적막 한 편을 낭송한다(꽃의 순장)”에서 확인되는 시적 정감은 저토록 가슴 아려오는 비장감이다. 모름지기 개념상으로 ‘순장(殉葬)은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 사람의 뒤를 따라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죽은 사람을 함께 안치하는 매장법’이지만 모처럼 시적 화자가 선택한 시적 질료에 의해 반짝이는 투명한 눈물이 묻어있어 ‘적막 한 편을 낭송하는 감미롭고도 못내 처연(悽然)한 슬픔 그 너머 <꽃의 순장>’으로 해석되어지는 사실성이다. 그 같은 연유로 혹자에 따라 시적 행위 그 자체는 상이하게도 정신적 빈곤을 체득한 대다수 현대인들에게 미적 주권이 확립된 유의미하고 정치(精緻)한 심성의 발로에 해당한다. 또 한편 잘 다듬어진 목관악기에서 쏟아내는 음계가 한층 맑은 음조인 점에 견주어 따뜻한 감성의 시적 감흥을 느낄 수 있기에 짐짓 시적 치유의 가능성이 가늠되어진다. 여기서 “과거는 망각 속에 잠들어도, 소망을 담은 영원한 빛”이라는 그 나름의 독자적 역동성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몸소 겪어낸 경륜의 잔흔(殘痕)일 따름이다. 따라서 ‘주름은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지는’ 아쉬움이 주어질뿐더러 예시인 <돋보기의 공식>에서 확인되는 현상은 한층 더 극명하게 구도적(構圖的) 처리로 빚어진 시적 기법의 구체화인 까닭에 비교적 사상에 적합하고 음조가 투명한 언어로 장식되어 특이하게도 삶의 고뇌 뒤 비장감마저 묻어있는 제 현상일 것이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하게/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돋보기의 공식>에서 위에 인용한 <돋보기의 공식>은 『세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앞서 간행한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시인동네, 2020)에 수록된 대표시격(詩格)에 해당하는 시편이다. 모처럼 갈등과 대립의 이분법으로 절망의 끝을 확인할 수 없는 현재성에 비춰 자연의 순차(循次)에 거부감이 없는 연유로,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고, 일관성을 지닌 푸른 식물성 언어로 영혼을 정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한 그 자신의 삶에서 빚어진 깊은 사유의 공집합은 ‘못내 다양하고 평이하되 구체적, 체험적이며 리듬과 자유로운 양상(樣相)’을 갖추고 생명의 충동‘에 맞물려있기에 합리적 타당성이 주어지는 점이다. 그 자신의 신선한 감동을 충격적으로 일깨워줄 시적 변주(變奏)는 가끔 ‘구렁’의 제주도 방언인 ‘굴렁’을 시적 질료로 사용하여 “욕창 난 둔덕이 무너져 있었다/음모 몇 가닥이 수풀 우거졌던 자리에 엉켜 있었다/폐정처럼, 깜깜한 구렁이 간신히 밀어낸/검푸른 돌덩이(굴헝)”로 다시금 입증되고 있다. 까닭에 인생의 황혼기에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노모를 각별히 챙기는 딸의 지대한 심사(心事)는 환경론자이며 『침묵의 봄』을 간행한 레이첼 캇슨의 지적과도 같이 “새가 사라진 거대한 숲의 그 참담한 침묵”도 한번쯤 시적 상상력을 확장하여 ‘소외된 외로움이 묻어난 슬픈 자화상’을 묵언으로 관망하며 연계시킬 점은 잠시 지켜볼 일이다. 3. 관조적 담론과 상상력의 극대화 또 한편 정신적 생산물에 해당하는 이미지의 형상화는 깊은 사유의 통로를 관통한 언어의 구도화로 시대적 현상과는 별개의 반전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시적 흐름과 경향, 그리고 차별성을 부할∙통합하는 과정에서 시편의 무게와 비중, 그리고 시학의 예술성이 혼재된 창조물인 잠재적 가능성을 분별하는 작업은 지극히 뜻있다. 차제에 특정한 시인에 의해 삶의 일상에서 그 나름의 고뇌에 의한 정신적 총화인 원형(archetype)의 관점에서 응당 관심을 지녀야할 점이라면 모순해법에 따른 하나의 이치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질서정연한 논리의 해명일 것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어물전의 아낙은 무슨 마음으로/도톰한 살집에 /// 이런 칼집을 냈을까//그냥 모양을 내려고 간이 잘 들라고 품위 있게 구워지라고/속내야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살아왔다고(빗살무늬)”에서 다시 접할 수 있는 ‘선이 빗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진 무늬’는 단순히 토기의 문양만이 아닌 우리네 일상의 소중한 삶의 흔적이다. 그뿐 아니라 무의식이 지배하는 깊음의 공간은 새로운 창조가 예비 된 처소로 변형되는 점이다. 그렇다. 입체적인 구조와 점층적인 효과가 조화롭게 전통적인 맥락에 갇혀 있기에 그만의 차별화 된 진지함은 충격적인 감격을 안겨줄 뿐더러, 두 개의 전도체 사이에서 종종 발견되는 의식의 동일화 양상은 믿음이 주어질 따름이다. 또 한편 ‘세상 지켜낸 힘은 저 묵묵한 마중에 있지만’ 그의 시를 떠받들고 있는 역동성은 놀랍게도 대상의 표리(表裏)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한순간의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 투시력과 주의집중에 있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아울러 “고물고물 숨죽인/보얗고 여린 꽃잎 한 장/반달 같은 발톱에 새순이 돋았나/들뜬 보굿을 밀어올리고 있다(죽은 발톱)”라는 이 같은 현상을 일관성을 지니고 숨죽여 지켜보면 그 타당성은 극명하게 확증되는 사실이다. 특히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사라졌다 그들의 시대는 개혁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급변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울타리가 되어 다음 세대를 지켜내고, 험난한 시간을 묵묵히 걸어온 부모세대가 있어 오늘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그 자신의 시적 변명처럼 모처럼 지나쳐온 삶의 나날일지라도 지혜로운 삶의 잠언(箴言)으로 새삼 통찰할 일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시편을 통한 시의미의 확장은 때로는 전위차(電位差)로 작용하기에 애써 법구경(法句經)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진리의 보편성은 함축되는 조짐이다. 간혹 심리학에서 서로를 적대시할 때 자신의 어두운 측면, 즉 그림자를 상대방에게 상호투시 현상이 발동한다. 따라서 개인적 그림자의 투시(透視)로 가끔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주어지는 점이다. 각론하고 집단적, 원형적 그림자를 투사할 경우에는 인종차별, 희생양 만들기, 원수 만들기, 전쟁과 같은 파괴적인 행위에 이르는 위험성을 인지하기에 대립과 모순이라는 갈등구도에서 부당한 것을 거부하고 오직 예리한 비판의식과 투철한 시 인식은 감당할 바다. 이 같은 시대정황에서 개념도 불투명한 이념의 대립과 코로나 펜더믹 사태로 육제와 영혼이 지쳐있는 현상에서 시 창작에 몰두하며 냉철한 시선으로 사물을 응시하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예리한 메스로 토막 내고 종종 확대하는 과정임은 물론하고 시의 본질인 서정성의 확장을 위한 ‘몸의 시학’이다. 그와 같은 보기로 홀로 아득한 사유를 합리적으로 통용하되 응축된 긴장감에 의해 그만의 체취, 육성, 느낌에 의한 시적 고뇌를 지행 합일하는 그 자신에게 거는 소박한 기대치라면, 현실에 안주를 거부하고 “창조자의 이름에 합당한 것, 신과 시인 말고는 없다.”라는 그 지론에 일체감을 지니되 영감의 비의(秘意)를 해명하는 ‘극소수의 창조자’로서의 엄숙한 역할담당이다. 바로 그것은 매순간 흔들리는 물상의 미동을 포착하고, 인간존재의 탐색을 위해 향방이 불확실한 바람의 통로에 관한 또 다른 길 찾기의 탐색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소외된 인간관계성 회복을 위하여 타자에 대한 언어가 금속성이거나 동물적인 언어를 자정 없이 쏟아내는 혼탁한 산업정보화사회에서 오로지 화해와 상생을 위한 그 자신의 ‘담백한 시격과 따뜻한 감성의 시학’은 시형식의 자유로운 이행만큼이나 신선한 충동이다. 까닭에 푸른 생명의 언어로 시대적 소임을 철저하게 수행하되 모쪼록 ‘역사의 정체성과 품격을 지닌 자존감의 회복’을 지켜내며 현대시문학의 밝은 미래의 정신기후조성에 전념할 것을 끝내 관망할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