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먼저 시 한 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밤
밤은 편안하옵니다. 옥에서 풀려 남 몰래 출옥한 사람의 오랜 휴식처럼 편안하옵니다. 아무도 곁에 없어도 한없이 고적해도 있는 것이라곤 그저 캄캄한 어둠뿐이어도
생존하는 자들의 고독처럼 밤은 그저 편안하옵니다. 들리는 것이 영원, 생각하는 것이 영원, 소망하는 것이 영원,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모여 소곤소곤 시간을 이어 가는 깊은 정적뿐이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숙명은 남고.
이것이 요즘 나의 밤의 정경이옵니다. 6월 10일, 안성읍에 있는 안성여자중학교에 가서 문학 강연을 했습니다. 안성여자중학교는 1943년, 그러니까 해방 전에 세워진 오랜 세월을 가지고 있는 안성에서 제일 가는 여자 중학교라 하겠지요. 오래간만에 접하는 소녀들, 참으로 맑고, 밝고, 청순한 찔레꽃 같은 소녀들이 자욱히 앉아서 내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소녀들이 자욱히 앉아서 내 이야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이 소녀들이 자라서 안성을 이어가는 빛나는 어머니들이 되겠지요. 고향을 빛낼.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 지구는 어디나 타향이자 고향이겠지만, 자기가 태어난 곳의 흙은 정답지요. 언젠가는 사라지니까. 실로 이 세상은 가숙(假宿)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또, 항상 아름답게 사시길. (199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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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서는 2016년 4월 26일부터 새로이 조병화 시인의 서간집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 편운재에서의 편지』를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이 책에는 조병화 시인이 인생에서 흔히 부닥치는 다양한 문제들에 관한 견해와 느낌을 편지형식으로 쓴 124편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앞으로 이 글들을 매주 한 편씩 여러분들께 보내드리오니, 조병화 시인이 여러분들에게 직접 보내는 편지라 생각하며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조병화 시인의 다정다감한 글 속에 담긴 삶의 지혜와 조언을 통해, 우리의 바쁜 일상을 되돌아 보고 마음에는 잔잔한 위안을 받으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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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생애를 미리 정리해 가는 글
이 서신은 나의 생애 말년에 있어서의 나의 생활이며, 나의 생각이며, 나의 상념이며, 나의 인생관입니다.
이것을 나의 고향 집 '편운재에서의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서 1993년 1월 1일부터 1996년 1월 16일까지 124회에 걸쳐서 쓴 특정 인물이 없는 나의 서신 문학입니다.
제1신부터 제105신까지는 청소년을 위한 교양 월간지 『2000년』에 이미 연재를 했고, 제106신부터 제124신까지는 이것에 새로 보충한 겁니다.
나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생애의 종말 의식이 강해져서 늘 나의 생애를 미리 정리해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이 편지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이렇게 도중에 출판되어 한편 부끄럽기도 합니다.
곧 끝날 것만 같은 생명이 아직도 길게 남아서, 언제 어떻게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생명을 지금도 이렇게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편지들 속에서는 나의 전부가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에 부끄럽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나를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겐 다소 참고의 말씀이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둥지 출판사 황근식 시인에게 감사드리며.
1996년 여름 안성 편운재에서 조 병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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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모여
소곤소곤 시간을 이어 가는
깊은 정적뿐이옵니다./
그 정적 속에서 영원을 읽는 노시인의 눈길이 밤보다 더 깊은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