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간 자기 소개 때 이야기했던 요즘 연작으로 쓰고 있는 연애 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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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나랑 썸 아니면 뭔데
이수는 양손에 늘 1.5L 사이다와 오렌지주스를 들고 왔다. 퇴근하고 오는 것도 힘들 텐데 왜 매번 무거운 음료를 사 오냐고 물으니, 무료로 수업을 듣는데 뭐라도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난 모 재단의 지원을 받아 청년들을 대상으로 다큐멘터리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수는 그 수업의 수강생이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이수가 사 온 단 음료를 잘 마시지 않았다. 나는 평소엔 먹지 않는 단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고, 그래도 남으면 사무실에 챙겨왔다. 남은 음료를 볼 이수의 마음이 신경 쓰였다.
한 번은 수강생들과 윤동주 언덕에서 시를 읽는 소모임을 했다. 수업 외에는 처음 만나는 자리라서 어색한 긴장이 흘렀다.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시 낭송을 다 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뒤풀이까지 생각했던 난 맥이 빠졌다. 이수와 내가 덩그러니 남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장대비였다. 우리는 돗자리를 머리에 함께 쓰고 일단 비 피할 곳을 찾아 뛰었다. 한 가게의 처마 밑에 섰는데, 비는 더 거세졌다. 빗소리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우리가 서 있던 가게는 부암동에서 유명한 계열사 치킨집이었다. “술 마셔요?” 내가 묻자 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을 안 먹는 나와 먹는 이수의 실랑이 끝에 우린 감자튀김과 생맥주 2잔을 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 대해 아는 건 이십 대 후반의 여성 개발자라는 것뿐이었다. 평소라면 두세 개씩 손으로 집어 먹었을 감자튀김을 포크로 하나씩 찍어 먹었다. 비를 맞아 추웠는데 따뜻한데 들어오니 노곤했다. 술도 금방 올랐다. 이야기 도중 이수가 얼마 전 퀴어축제에 간 이야기를 했다. 어? 이수도 성소수자인가? 생각했는데 이수는 친구들이랑 갔다는 말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퀴어축제에 퀴어만 가라는 법은 없으니까. 나도 그곳에서 이성애자 친구를 여럿 만났다. 섣불리 넘겨짚지 말자, 괜히 오바하면 내 정체성만 들키니까. 경계심이 들었다.
“저는 사실 바이에요.”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까. 조금 전까지 섣불리 말하지 말자고 경계했으면서. 서른 생애 한두 번밖에 안 해본 커밍아웃이었다. 술을 마셔서 긴장이 풀렸나. 낯선 사람이라 방심했나. 아니면 그의 정체성을 떠보고 싶었던 걸까. 이수는 고개만 끄덕일 뿐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는 아무말 없었다. 얼떨결에 나만 정체성을 밝혀버린 꼴이었다. 화제를 돌리려고 난 이전에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했던 경험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할수록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는 그날 끝까지 조용히 앉아 내 말만 들었다.
활동가 남성과 4년 연애 끝에 잠수 이별 당한 나는, 활동가도 남성도 아닌 일반인(?) 여성과 연애하겠다 결심한 터였다. 이수는 그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아니, 이건 다 꿰맞추기식 변명이다. 그냥 이수에게 끌렸다. 묵묵히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행(음료수 사오기)을 하는 그가 좋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않는 초연함이 좋았다. 소모임이 지루할 때 슬그머니 도망친 사람들과 달리 이수는 끝까지 남아 나와 뒷정리를 해주었다. 돈 벌려고 컴퓨터공학과에 갔다는 그 단순함과 솔직함도 좋았다. 일(job)이 무어냐고 물으면, 일(1)은 신의 언어라고 말하는 엉뚱함까지도.
이수의 SNS를 뒤졌다. 카톡 프로필에는 맥북 사진뿐, 정체성을 추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페북에도 온통 개발에 관한 뉴스뿐이었다. 성소수자라고 어디 써 붙이고 다니면 안 되나. 뒤풀이마다 이수 옆에 앉았다. 대화를 은근슬쩍 연애 이야기로 주도했다. 이수는 딱 한 번 연애했는데, 상대는 남자였다. 그날 집에 가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입에 물고 소리를 질렀다. 20대 때, 헤테로 여성을 5년이나 짝사랑한 혹독한 경험이 있는 난 마음의 시동을 끌 수 있을 때 꺼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여태 남자만 셋을 만나지 않았나. 꼭 경력직이어야만 성소수자가 아니니까. 그가 양성애자일지, 범성애자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희망에 군불을 땠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직진이었다. 뒤풀이에서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에 빠져 있을 때 은근히 물었다. “퀴어 축제 갔다며요, 그럼 퀴어에요?”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가볍게. “음, 저는 퀘스처너리에요.”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퀘스처…뭐? 퀘스처너리는 말 그대로 물음표, 아직 정체성을 몰라 탐색하는 상태란 의미였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모른다고? 그럼 왜 나랑 어제 새벽까지 통화한 거예요? 오늘 점심 잘 먹었냐고 왜 물어봤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자기 정체성을 몰라요, 그런 이상한 말 어디서 배웠어요. 누가 들어도 꼬장꼬장한 말들이 올라왔지만, 쿨해 보이고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 그런 것도 있구나. 그럼 언젠가는 찾는 거예요?” 최후의 희망을 걸고 물었다. “모르죠.” 그래, 모르니까 퀘스처너리겠지. 그걸 알면 퀘스처너리인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다음부터 이수를 볼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이제 찾았어요?” 물으면 이수는 몇 번이나 자기는 퀘스처너리라고 답했다. 이수에게 그런 정체성도 있다고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 달려가 따지고 싶었다. “그럼 여자랑도 사귈 수 있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대놓고 정답을 말해주는데도, 이수는 눈만 크게 떴다. 나를 놀리는 건가. 그는 음료수를 꾸준히 사 오는 성실함으로 세 달 동안 꾸준히 퀘스처너리라고 답했다. 그 말만 들어도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이래서 다들 정체성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앱으로 만나는 건가. 동성애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는 이렇게 험난한 것인가. 그러면 어젯밤에 왜 앞으로 내 말 잘 듣겠다고 한 건데, 밥 잘 먹고 다니라고 말라서 걱정된다고 왜 한 건데. 너랑 나랑 썸 아니면 뭔데!
첫댓글 집에 와서 씻고 누워서 폰을 들어 카페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재밌는 얘기를 읽으니 있던 잠도 다 달아나네요 >.< 흥미진진해서 단숨에 읽었어요! :) 이 탄 언제 나오나요?!
오와! 소설처럼 단숨에 읽었어요. 과연 이수는 어떤 마음일까 ? 두근두근 설레는데요. 작가의 애타는 심정도 고스란히 느껴지고요! 저도 2탄이 궁금합니다!!!
응원할께요!! 도리 반장의 연애도 글도요!! ^^
도리님은 사랑 앞에서는 직진이시군요. ^-^
1은 신의 언어라고 말하는 엉뚱한 개발자와 새벽내내 어떤 대화를 했을지 넘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