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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교감, 천성산 한 자락에 둥지 틀다
<양산 천성 초등학교 : 00.09.01-03.02.28>
◎ 발령을 받고
○ 사전 조사 후 조금 놀란 일
학교에 가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교원명부 하나만으로 나는 몇 가지 조사를 해 보았다. 우선 학교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하여 교원명부를 펼쳐보고, 나의 전임 교감이 좀 아는 선배임에 놀랐다.
전임 백인권 교감은 교대 선배로 나보다 1년 먼저 양산으로 승진해 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내 전임 교감이라니 세상은 아주 좁기만 한 것인 듯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학교 규모였다. 26학급, 크다고만 할 수는 없는 규모지만 교감 신참인 나로서는 상당히 버거운 학교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에 근무한 사천초등학교가 38학급이었으니 26학급이 뭐 그리 큰 학교일까만 아무래도 교사로서의 입장과 교감의 입장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버겁겠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또 있었다. 아니,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명단을 살펴보니 28명의 교사 중 남 교사는 고작 3명뿐(그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2명뿐이었다)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내가 주로 근무한 서부경남에서는 학교가 작기는 해도 남교사 구성비 7% 남짓한 학교는 없었었다. 남자가 많아서 꼭 좋다거나 여교사가 많아서 안 좋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지만 그저 상황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교원명부에 의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웅상 읍내에 다섯 개의 초등학교(웅상, 서창, 덕계, 평산, 천성)가 있었는데 26학급의 내가 갈 천성초등학교가 가장 소규모 학교인 점이 놀라운 일이었다. 사천읍에 초등학교 고작 두 개 가 있는 당시의 상황과 비교하면 제법 간이 큰 사람도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09년 지금의 웅상 지역은 더욱 놀랍다. 우선 당시 읍 하나였던 행정구역이 이제는 명동, 덕계동, 평산동, 삼호동, 소주동 등 5개 동으로 확대되었고, 학교 수도 백동, 대운, 신명이 개교(開校)로 보태어져 8개로 늘어났다.
○ 부임 길 이야기
2000년 8월 26일 아침, 전기한대로 전임 교감이 잘 아는 선배라서 전화를 드리고 길을 묻기로 했다. 왜냐 하면 양산이란 곳은 스스로 길을 알 만큼 익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몇 마디 설명을 하던 백 선배는,
"길도 잘 모릴긴대, 내가 28일날 갈낀깨내 고마 내 차로 같이 네리가고로 하자."
참으로 반가운 말씀, 고마운 말씀이었다. 안 그래도 서툰 운전 실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초행길에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2000년 8월 28일, 승진 발령을 받은 양산시 웅상읍 천성초등학교로 부임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근무지인 사천초등학교에 가서 몇 가지 서류들을 챙겼다. 함께 가겠다는 동 학년 선생님들을 만류하는 것도 상당히 힘드는 일이었다.
남의 차에 얹혀 가는 처지라서 설득을 하여 모두 돌려보냈다.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덥기조차 한데 기껏 시간 내고, 큰마음 먹고 학교에 나온 동학년 5명을, 짜증내며 돌아가는 그들을 겨우 보내 놓고 백 교감님께 전화를 하니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예감 속에 이웃에 사는 이재우 선생님께 전화를 했더니 새벽에 벌써 양산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딴에는 철석같은 약속을 태산같이 믿었던 터라 잠시 계산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천성초등학교로 전화를 해 보니 백선배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나를 데리고 간다고 해놓고 우찌 된깁니꺼?"
"아 참, 그랬재?"
그리고는 끝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만 불경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으나 백 선배를 곰 같은 분으로 치부하고 웃고 말았다. 마침 성씨까지 따지면 백곰이 되는 건가?
도리 없이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미 돌려 보내버린 동학년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고 김대홍 교감선생님과 나 둘이만 내 차로 가기로 했다.
남해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서 이정표를 보아 가며 양산교육청에 도착했다.
사령장을 받고는 웅상 가는 길이 완전 초행이라서 학교로 전화를 했더니 백선배가 교육청까지 온다고 했다.
꼬불꼬불한 초행길을 백 선배 차만 보고 달려서 30여 분만에 덕계라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미리 기다리고 계신 교장선생님, 교무선생님. 운영위원장님, 학부모회장님, 학부모회 총무님과 많은 얘기 나누면서 점심을 먹고 학교로 올라갔다.
학교는 지금까지 내가 본 어느 학교보다 최신 시설이었고, 공기 좋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개교가 일천하니(1999년 9월 1일 개교) 시설도 최신식이었고, 중·고등학교와 나란히 교육의 한 단지를 이룬 참으로 좋은 환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때는 길을 잘 못 들어 가깝고 쉬운 길을 두고 부산의 만덕을 경유해서 돌아가는 길로 해서 어렵게 돌아갔다. 집에 당도하여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참으로 우스운 얘기겠지만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원래 길 잘 못 찾기로 유명한 나였고 양산 덕계 지역은 정말 가보지 않았던 길인데다가 당시 새 도로가 중간 중간에 개설되거나 가지가 많아서 더 어려웠던 것이다.
부임길에 함께 해 주셨던 김대홍 교감선생님은 그 후 몹쓸 병으로 젊은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후배들에게 잘해 주는 선배로 정평이 나 있었던 고 김대홍 선배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후배 일 하나 보아 주고 생색이나 내고 보답을 바라고 성에 차지 않으면 사정없이 나무라는 선배들을 보아왔기에 더욱 그 생각 간절해진다.
◎ 첫 교장선생님의 가르침
교감 초임지 천성초등학교에서 모신 이홍식 교장 선생님은 내가 교감으로 승진하여 처음으로 모시는 교장 선생님이기에 발령과 동시에 어떤 분인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더구나 지역적으로 서부경남에서 교직생활을 주로 해 온 나와는 달리 이교장 선생님은 부산을 비롯하여 동부 경남인 양산, 밀양에서 교직생활을 주로 하신 분이니 사전에 조금도 정보를 가질 수 없는 분이라서 더욱 그랬다.
단 하나 내 전임 백교감 선배로부터 내가 전혀 묻지도 않았는데 참 좋은 분이란 말씀을 전해들은 것이 사전 지식의 전부였었다.
○ 첫 인상
이교장 선생님의 첫 인상은 뭐랄까 귀티가 많이 나면서 서민적인 모습을 함께 지닌 그런 분이었다. 자주 여유 만만한 미소로 상대방을 배려하시고 매사를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유도하시는 그런 분이었다. 49년생인 나에 비겨 46년생이시니 꼭 세 살 터울의 바로 위의 형님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 무식한 교장 론
가끔씩 ‘교장은 무식해도 된다.’ ‘교장은 무식해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웃으시면 이상하게 그 말씀이 교감인 나를, 아니, 나의 마음을 지극히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장 선생님이 무식한 분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교사 때 현장연구 논문으로 푸른 기장을 세 번이나 받으셨음은 물론 어느 해는 대통령상을 받으셨으니 어지간한 연구 통은 명함도 못 내밀 그런 진짜 연구 통이시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짐짓 덮을 것은 덮어 주고, 혹 되짚어 깨우쳐줄 때에도 누구에게나 마음 상하는 일 없이도 더 따끔하달 수 있게 하시는 것이 교장선생님의 실체였다.
그럼으로써 선생님들이나 일반직들이 아주 마음 편한 가운데 창의성 있게 맡은 일들을 해 낼 수 있게 하는 어쩌면 고도의 고등전략에 속한다 할 것이다. 훗날 내가 교장이 되어 꼭 본받아야겠다고 혼자 다짐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 이홍식 교장선생님께서 정년 1년을 앞두고 2008년 2월 29일자로 명예퇴직을 하셨다. 전화를 드리기는 했지만 정년을 다 채우시지 않으신 점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갖고 계신 배울 점들이 무궁무진하신 분인데 그게 이제 다 묻혀버리고 말게 되었다는 생각에--------.
○ 진정한 문인
학교 홈페이지 인사말이나 각종 교육 잡지에 발표하신 글들, 직접 강의하시는 다양한 연수회 연수자료 등 이교장 선생님의 글들을 대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참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언제나 불필요한 미사여구의 동원은 찾아볼 수 없고, 늘 자연스런 가운데 설득력 있게 글을 풀어 나가신다. 읽는 동안 감탄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장애물 없는 시내에 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엮어 나가시는 솜씨는 가히 일품에 속한다.
딴엔 나도 여러 종류의 원고를 써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교직생활을 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부탁을 받는 대로 교장, 교감 선생님들은 물론 대상 불문, 종류 불문의 원고 대작(代作)도 참 많이 했기에 글 쓰는 일만큼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교장 선생님의 글을 대하다 보면 언제나 나 자신에게 시조 말고는 넌 아직 많이 멀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식으로 문단 데뷔는 하지 않았지만, 판정을 하는 내가 그럴 자격을 갖추지 못했겠지만 내가 볼 때는 진정한 실력을 갖춘 문인임에 틀림이 없다.
○ 선생님을 최고로
이교장 선생님은 언제나 선생님들을 최고로 치신다. 이는 선생님들이야말로 아동교육의 최 일선에서 교육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쳐서 교육의 결실을 일궈내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그러신다고 본다.
예컨대 운동회가 열리는 계절이면 꼭 선생님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의 운동회 날들을 파악하시어 당일에 연가를 얻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하신다. 하루 동안 자녀의 운동회에 동참하여 자녀 교육에 큰 도움을 주게 하고, 돌아와서는 학급 어린이들을 위해 배전의 사랑을 쏟도록 하면 교육 전체의 얻음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운동회만을 예로 들었지만 실은 모든 학교 경영에 있어서 교사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시는 마음 쓰심으로 간접적인 듯하지만 실은 직접적인 성과 극대화의 길을 스스로 열고 스스로 걸어가시는 것이다.
이교장 선생님이 직접 내게 구체적으로 가르치신 것은 없다. 그렇지만 함께 하는 동안 일 거수 일 투족이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매우 수준 높은 교수활동이었고, 받아들이는 나도 미래를 염두에 두고 받아들였으니 많은 것을 배운 셈이다.
훗날 이교장 선생님이 오봉초등학교 홈페이지에 실으셨던 선생님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신 글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략>
눈 맑고 가슴 순수한 우리 아이들의 영혼에 꽃보다 아름답고 보석처럼 빛나는 감성을 심어줄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희망이 아이들이라면, 아이들의 희망의 돛단배를 움직이는 선생님 또한 우리의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 영혼에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주고, 악함, 추함, 거짓을 아이들 가슴에서 몰아내는 열정과 용기를 가진 선생님, 이름모를 작은 들풀의 새싹에서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경외감을 아이들에게 일깨워 줄 수 있는 지혜로운 선생님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릅니다.
<하략>
◎ 교감 데뷔전 시리즈
○ 교감 일상의 시작
<첫인사>
첫 출근을 하여 조회시간이 되었다. 차분하지 못한 성격 탓으로 준비도 없이 직원들 앞에서 인사 하느라 딴에는 진땀을 빼야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려는 듯,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귀담아 들으려는 듯 직원들의 자세는 참으로 진지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아마도 아는 것 별로 없다는 얘기, 부족한 인간이지만 함께 하는 동안 천성교육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얘기 정도를 했으리라 스스로 짐작 할 따름이다.
조회가 끝나고 식은 땀 처리도 제대로 안된 가운데 아동들 앞에서도 인사를 해야 했다. 역시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아동들 앞에서는 훨씬 쉬웠다. 천진난만한 아동들을 대하는 순간 어디선지 모를 힘이 생겨났는데 천상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세월의 혜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두 가지 다 사전에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 보고 준비를 했다면 더 유익한 이야기들로 보람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우스운 착각>
부임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직원 모임을 갖고 첫째 시간이 시작되어 선생님들이 모두 일어나서 교실로 가자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나갈 뻔 했다. 사실은 화장실이면 몰라도 내가 들어갈 교실은 없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늘 해 오던 대로의 습관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하긴 그게 30년 가까운 세월이었으니 굳어도 단단히 굳은 것을 어쩌겠는가?
그런 것은 또 있었다.
교무실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어느 선생님이,
“교무선생님 전화 받으십시오.”
반사적으로 내가 전화를 받겠다고 일어서는 바람에 웃고만 사건도 9월 초에 있었다. 초임교감이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인가? 겸연쩍게 웃는 것으로 모면할 도리 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도 통과의례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그런 상황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공감을 얻었으니 비단 나만 쑥스럽게 여길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 행사와 교감의 역할 데뷔
<운동회>
2000년 9월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규모가 약간 큰 학교라 전체적인 컨트롤에 신경이 쓰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체육부장을 맡고 있는 전원숙 선생님은 여교사라는 편견을 전혀 갖지 못하도록 성격도 활달하고 매사 치밀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체육부장이 짠 빈 틈 없는 계획에 의해 차질 없이 진행되는 일들은 어쩌면 컴퓨터에 의한 것 마냥 시원스럽게 일사천리였다. 계획이 치밀하고 적절하니 일 또한 시행착오도 없이 잘 진행이 되는 것인가 보다.
운동회에서의 교감의 역할이란 전체적인 진행을 체크하고 조정하는 것 외에는 별 것이 없었다. 식순 중에 경기규칙 발표, 성적 발표만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행하면 되는 일이었다. 손님 접대를 위해 약간 움직여야 했고, 그 외 대부분 천막 아래서 경기의 전반을 살피는 일들이 주 업무였는데 별다른 문제 없이 데뷔전을 치룬 것이다.
<수학여행 아동 인솔>
2000년 11월 10일, 교감으로 승진하여 처음으로 수학여행 인솔 책임자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딴에는 인솔 책임자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골똘히 생각해서 얻은 결론은 일선으로 나서지 말고 이선에서 아동들이나 담임선생님들의 어려움은 없는지를 살피고 경험을 살려 조언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6학년 담임 시절 함께 오신 교감, 교장선생님들이 하셨던 모습에서 삼가야 할 부분은 꼭 삼가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하고 실천에도 옮겼다.
잠 안자고 몰려다니는 아이들 불러 세우거나 꿇어앉혀 놓고, 지극히 준엄한 목소리로
“이노무 자석 니 임마 몇 반이야!”
를 외치는 일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나름대로 잘 실천을 했다.
6학년은 세 반으로 1반 권연숙, 2반 오정년, 3반 구준연 선생님으로 모두 여선생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버스 세대라 통제에 무리는 없었다. 1반의 권연숙 선생님을 중심으로 착오 없이 여행을 진행하는 담임선생님들의 모습이 한없이 믿음직스럽고 고마웠다.
첫 날 저녁 여관에 투숙을 했는데 여관이 좀 한적한 곳이었다. 거의 독립 건물이어서 여관을 나서면 상가나 민가가 거의 없어서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저녁을 먹고는 한가한 시간에 혼자서 로비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덩치 큰 남학생 두 녀석이 다가오더니 어이없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교감선생님, 화투 어디가면 살 수 있습니까?”
요즘 아이들의 어쩌면 소견머리 없는 생각이요, 말이다. 간도 크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전혀 그런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최대한 일상적인 투로,
“아마 이 근처에는 살 곳이 없을 테니 조용히 친구들이랑 다른 놀이나 하거라.”
그러고는 그 맹랑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서 혼자 실컷 웃었다.
<제1회 졸업식과 학사보고>
2001년 2월 19일 역사적인 천성초등학교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999년 9월 1일자로 개교 하면서 이웃 덕계초등학교에서 1학년부터 5학년까지만 분리 개교를 했으니 2000학년도 말에야 첫 졸업식을 하게 된 것이다.
졸업식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장선생님과 몇 번 상의를 드리고 실제로 기획안이 완성되는 동안에 나는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정말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방법에서 벗어나서 정말로 아이들을 위하고 아이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기획이 되게 하시는 것이 그랬다.
졸업장은 학교장이, 수료증은 교감이, 앨범은 운영위원장이, 기념패는 학부모회장이 전 아동에게 수여하는 모습은 적어도 사관생도의 졸업식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었다.
졸업식에서 교감은 전체를 제어하고 살피는 일 외에 학사보고라는 것이 중요한 업무다. 이미 준비 없이 인사말 하면서 나름대로 곤욕을 당한 부임 당시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아예 읽으면 되도록 문장을 시작부터 끝까지 구성하여 읽음으로써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해 낼 수 있었다.
한 학교의 제1회 졸업식에서 학사보고를 하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게 큰 영광이라 생각되는데 그게 개인적으로 교감이 된 후 처음 하는 것이었으니 더욱 영광스럽고 뜻이 깊은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 등잔봉에서 맞는 웅상의 아침
나는 천성 교감 근무 2년 반 동안 자주 아침 일찍 일어나 등산을 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다섯시면 집을 나서서 산행을 즐겼는데 주로 479고지인 등잔봉 등반을 많이 했다.
선우 4차 아파트에 숙소를 얻어 살던 나는 집을 나서서 새진흥 아파트 옆으로 통하는 약한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면 산의 입구에 이르게 된다. 소나무와 참나무 등 여러 종류의 수목들이 어우러진 숲 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전개가 되는데 호흡이 점차 가빠지면서 내가 산에 오르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등산로의 삼분의 이 쯤 오르면 약수터가 있는데 나보다 연세 많으신 분들과 여자분들이 주로 체조도 하고, 에어로빅, 줄넘기 등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무리를 만날 수 있다. 대개 그 지점쯤에서는 아직 어두운 관계로 각자의 일에만 여념들이 없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시원한 약수 한 모금을 받아 마시면 폐부가 온통 청소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쯤이면 걷기 운동의 효과로 온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추위를 느낄 수가 없고 가파른 산을 무릎 짚어 오르다 보면 등잔봉에 다다라 정상임을 확인하는 순간 몸의 열기에 의하여 이마에는 저절로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새하얗게 펼쳐진 서리 밭에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심호흡을 하고 앉아 덕계를 거쳐 명곡, 서창에 이르는 웅상의 시가지 불빛을 보면서 별천지에 온 느낌으로 하루를 열 수가 있었다.
한참 앉았다가 내려오는 방향은 올라간 그것과 다르다.
천성초등학교 뒷편에 전개되는 산골짜기 길을 따라 내려오면 그 상쾌한 기분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출발하여 집에 다다르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 반 정도가 되는데 그러고 나면 이상한 힘이 솟아 다음 일과의 진행에 크나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다음에 싣는 시조는 어느 날 새벽 채 날이 밝기 전에 등잔봉의 정상 서리 밭에서 얻은 것이다.
<새벽 등잔봉에서>
듬뿍 찍은 묵즙으로
쉬다 간 길목마냥
완만한 곡선마디
이어간 산의 윤곽
명멸의 불빛을 접고
새아침을 열어간다
코끝에 다가서는
상그러운 바람 끝이
찌든 세파 덕지 앉은
고뇌를 씻어주면
새로이 깃드는 힘이
가슴팍을 열고 든다
◎ 미타암(彌陀巖)과 잎 새 바람
2001년 어느 가을날 전 직원이 함께 미타암 등반을 실시했다.
미타암이란 암자는 경상남도 양산시(梁山市) 웅상지역 소재 원효산(元曉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기록을 참조해도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초기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 뒤 1888년(고종 25) 정진(正眞)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암자이다.
미타암 등반을 위해 들어서는 산의 초입에서 얼마간을 걸어들면 ‘잎 새 바람’이라는 전통찻집이 있었다. 산길이라 자연스럽게 조가 만들어지고 흩어질 가능성이 크기에 하산 길에는 모두 ‘잎 새 바람’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발길들을 재촉하였다.
찻집을 뒤로하고 아늑한 숲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어느 새 숨이 가빠지고 함께 걷는 직원들과의 대화라도 나눌라치면 저절로 심호흡이 잦아지는 가운데 방향을 꺾기를 두어번 하고나면 미타암이 눈앞에 나타난다.
암자 자체가 마치 처마를 의지한 제비집처럼 굵은 바윗돌 벼랑에 지어져 있어 대웅전을 비롯하여 요사채에 이르기까지의 건물들이 저절로 운치를 가득 안고 있다. 따라서 주변의 경관은 뒷쪽인 위를 봐도, 아래쪽 절벽을 포함한 산 능선을 봐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절경이었다.
우리나라의 사찰들이 그 분위기가 대개 거기서 거기란 얘기는 있지만, 그래도 눈 크게 뜨고 자세히 보면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있을 테고 그 찾은 것들이 바로 그 절의 특징이 될 것이다.
교장선생님과 나, 조용수 교무부장, 그리고도 몇 몇 선생님들이란 이룬 그룹으로 담소하며 걷는 가을 산길이 그렇게 즐거운 길이었다. 지리적 여건 때문에 좁고 길게 이어져 그리 넓지 않은 경내를 돌아보고는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서둘러 내려왔다.
조별로 흩어져 걸은 팀들이 자연스럽게 찻집에 모였다. 인원이 다소 많은 관계로 한꺼번에 수용할 공간은 없었고 주인이 반짝 아이디어로 만들어준 마당의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둘러앉았다. 일제히 대추차 한 잔씩을 주문하고 담소는 계속되었다.
아주 진하고도 달콤한 대추차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늦가을의 한기를 등 뒤로 느낄 때 쯤 불꽃을 일으키며 타는 모닥불과 천천히 덮여오는 어둠이 그렇게 기껍고 운치로울 수 없었다. 일어나는 시심을 재우기는 버거워 도 한 수를 빚었다.
소위 즉흥시조인 셈인데 즉흥이란 글자 그대로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상인지라 고뇌가 덜 들어가서 깊이가 없는 작품일 가능성이 크지만 소개한다.
<모닥불> - 잎 새 바람 마당자리-
가마솥 질화로 삼아
모닥불 피워놓고
둥글게 둘러앉아
지펴내는 세상 얘기
소롯이 솟아오는 정
잉걸불로 타고 있다
등 뒤로 다가오는
늦가을 한기 한 올
대추차 진한 김으로
밀어내는 마당가에
이제 막 내리는 저녁
어둠 한 장 널고 있다
◎ 30년만의 소풍과 운동회
○ 이야기의 시작
1972년 진주교대를 졸업하고(8회) 같은 해에 남해 도마초등학교에 부임하여 5학년을 담임하고 이듬해인 1973학년도에는 6학년을 담임함으로써 교직에서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때 졸업시킨 제자들이 남해 도마초등학교 제29회로 나와는 아직도 끈끈한 인연을 아주 기껍게 이어오고 있다. 그 간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들과 함께한 소풍행사와 운동회 행사를 소개한다.
○ 30년만의 소풍
내가 교감 승진 후 처음 양산시 웅상읍 평산리에 소재한 천성초등학교교감으로 재직하던 2002년 여름, 참으로 아름답고 뜻 깊은(그래 봤자 우리에게만 그렇겠지만) 소풍 행사를 실시했었다.
전기한 남해 도마초등학교 29회 졸업생(당시 42,3세)들 중 부산과 울산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30명가량인데 그들이 주축이 되어서 동창회 모임 때 스승을 초청하여 스승공경과 제자 사랑의 정을 나누다가 그 해 여름 울산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소풍 행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름은 소풍지만 실은 수학여행에 가까운 그런 일이었다. 참가자도 서울, 대구, 진주, 남해에서 20 여 명이나 되었다.
다음은 내가 소풍 행사를 마치고 그 소감을 적은 글이다. 그리고, 그 다음 글은 소풍행사를 주선했던 제자의 글이다. 이 글들은 모든 제자들이 회원이고 내가 주인으로서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그리운 그 때 그 시절>에 올려져 있다.
-나의 글-
<나는 어제 소풍을 갔다 왔다.
참으로 아득한 옛날 같은 1972년에 처음으로 인연 맺은 남해 도마의 그 철없고 순수했던 5학년짜리 아이들이랑.
아니지.
그들은 이미 마흔 하고도 두 세 살이나 되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이지.
소풍인 줄 알고 함께 나섰더니 이건 소풍이 아니고 수학여행이었다.
경주 땅 감은사지, 기림사, 감포, 골굴사, 수중왕릉....
이게 어디 소풍이랴?
역사 기행을 주로하는 테마 있는 수학여행이지.
하루 종일 즐거웠다.
옛날처럼 애 써 호르라기 불지 않아도 되고, 옛날처럼 노심초사 안 해도 좋고
도리어 그들이 나를 챙겨 주어 내가 짐이 되어버린 여행이었다.
다음에는 내가 주최하는 운동회도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자 영만 군의 글-
-안녕히 가셨는지요?-
선생님!
어제 소풍 나들이 즐거우셨습니까?
혹시나
오늘 피곤하진 않으신가요?
선생님은 어제 무엇보다 좋은 게 있었지 않았나 싶네요.
뭐냐고요
종태가 선생님을 우리 친구인줄 알았을 때 말입니다.
물론 모두들 웃기는 했지만요.
아직 선생님께 젊음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제 와 주시어 고마웠습니다.
암튼 늘 건강하시어 젊음을 유지하십시오.
○ 30년만의 운동회
소풍을 마치고 그 해 가을, 나는 도마 29회 제자들이랑 마음먹었던 운동회를 열었다.
장소는 내가 근무하던 양산시 웅상읍 소재 천성초등학교로 정했다. 운동회를 마친 10월 중순이라서 운동회 때 썼던 준비물들로 재미있는 운동회를 하려 했지만 당일 날 그만 비가 왔다. 이런 경우를 두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할 수 없이 체육관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참으로 즐거운 운동회를 할 수가 있었다. 내가 만들어 제공한 현수막을 쳐 놓고 개회식에 이어 즉석에서 종목마다 적당히 두 편으로 나누어가며 경기에 열중했다.
주로 초등학교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우리학교 체육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운동회 물품들을 옮겨와서 진행하였다. 이를테면 지구 공굴리기, 사다리 빠져 나가기, 베 공 던져 넣기 등 다양한 종목에 다들 그렇게 신나할 수 없었다.
다음 글은 그 날 제 엄마 따라 와서 구경하고 즐기다가 간 어느 초등학생의 소감문과 40 넘은 제자의 소감문이다.
-제자 유양엽의 아들의 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어제의 노란 머리 최진우(유양엽 엄마의 아들)입니다.
선생님 학교가 멋졌습니다. 저의 학교는 운동장은 넓지만 학교 시설은 선생님 학교가 더 예쁘고 실내체육관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엄마의 친구 분들과 재미있게 게임을 하였습니다. 오래오래 추억으로 남는 날 이었습니다. 친구 영현(정명화 이모 아들)이와도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축구경기는 정말 신났습니다.
엄마의 친구 분들이 몸살이 안 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신나는 하루였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번 더 가서 그때는 운동장에서 더 신나게 뛰어 놀고 싶습니다. 환절기의 건강 조심하시고 오늘 피곤하신 데 이만 쉬십시오>
-제자 이 복지의 글-
-저 푸른 초원 위는 아니었지만-
선생님....노랫말..처럼...저..푸른초원은..아니지만....
공기..맑은곳에..그림같은...학교에서...생활..하시니...
..너무나...부럽습니다....
..저희들은..끝까지...샘을....귀찮게..하는...존재들이지요...
..그래도...너무나...좋은..추억을...간직하게..되었습니다...
..선생님...덕분에요.....건강하십시요.....
◎ 두 개의 카페 주인이 되다.
○ 그리운 그 때 그 시절
1972년 5월부터 시작한 교직생활 30년이 다 되어 가는 2001년 4월 1일에 나는 그간 혼자 터득한 보잘것없는 컴퓨터 운용 능력으로 내가 주인인 카페를 하나 만들기로 하였다. 대개 이 나이에는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요즈음의 세태요 현실이지만 딴에는 제법 맹랑하고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 이 일을 결심하고 공부도 나름대로 했던 것이다.
이쯤 이야기 하면 제법 거창한 일이라도 이룬 것 같지만 실은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는 일은 참으로 손쉬운 일에 속한다. Daum 카페 사이트에서 안내하는 대로 클릭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껏 하나도 어려운 일이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었다.
우선 카페의 이름은 ‘그리운 그 때 그 시절’로 정하고, 가입 대상은 지금까지 내가 근무한 학교마다 직접, 간접적으로 가르쳤던 제자들과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로 생각을 했다. 학교마다 또는 지역 중심으로 게시판을 만들어 제공함으로써 안부도 전하고, 정을 이어가자는 목적과 함께 나와는 관련이 직접 되지만 학교가 달라 전혀 생소할 내 제자들 간의 연결도 꿈의 일부로 생각했다.
다음 글은 대문에 올려진 내 글과 카페를 방문한 내 제자들의 글 중 학교별 최초의 글들만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언제나 너희들이 그립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의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아직 그 때 그 시절의 그리움과 함께 그 추억도 지니고 산다. 남해 도마(1972.5.1-1977.9.30), 창원 이창(1977.10.1-1980.2.29), 사천 서포 자혜분교(1980.3.1-1981.2.28), 사천 서포(1981.3.1-1986.2.28), 사천 동성(1986.3.1-1989.2.28), 통영 사량(1989.3.1-1992.2.29), 통영 사량 돈지분교(1992.3.1-1994.2.28), 통영 도원(1994.3.1-1995.2.28), 사천 서포(1995.3.1-2000.2.29), 사천 사천(20003.1-2000.8.28)에서 내가 직접 담임 했던 제자들은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다. 2001.4.1 - 김형진(카페 주인)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이창우 입니다. 선생님 까페 개설 축하드립니다. 진작에 방문을 해야 하는데 찾을줄 몰라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4월 7일에 남해 도마초등학교에서 총동창회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29회 동기들이 축구 우승을 했구요. 내년에는 우리29회 동창생들이 주최를 합니다.
그때는 선생님 께서도 꼭 참석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업무시간이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만 나가야 되겠습니다. 다음에 또 놀러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01.10.21 09:33 - 이창우(남해 도마)
건승하신 선생님의 목소리에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가끔씩 선생님이 생각나고 했으나 찾아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어떻게 20여년이 지난 일들을 기억하고 계신 지 ........ 그때 친구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때 제자중에 영준, 호천, 민수등은 아직 미혼입니다. 12명의 동기 중 창포에 살았던 민형이만 10여년전 설악산 빙벽등반 중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저는 통영에서 10년째해양소년단이라는 청소년 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자주 들리겠습니다.
김형진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온라인 가족 여러분 반갑습니다. 혹시 통영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통영은 무척이나 횟감이 싱싱하죠 01.10.24 21:35 - 김용호(창원 이창)
방이 새로워졌군요.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다른 회원님들과 공감대 나누는 얘길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고 해서 글쓰기 할때도 자주 망설여 지곤 했었는데 이렇게 방을 나누기 좋아요.
얘들아 이젠 마음 놓고 얘기하고 놀다갈자. 후!후! 01.10.09 08:43 - 이성화(사천 서포)
선생님 답 멜 잘 받았구요~~ 저를 기억해주신다니....넘기뻐요~~ 답 멜 받자마자 여기 가입했구요~~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전 지금 작업실에 있어요~~아, 음악하는 작업실이예요~~ 제가 작업한 곡을 부른 가수 중에 이기찬이란 가수가 있는데 아세요?
여기에서 작곡한거 편곡하구 그래요~~ 아침엔 비가 많이 왔었는데 이젠 햇빛이 따갑네요~~ 요즘은 작업하느라 정신이 없어요~~헤헤 선생님~~조금 있으면 스승의 날인데 한번도 제대로 축하를 못드려서 죄송하구요~~제가 찾아뵙기에는 조금 먼곳에 계신것같아요~~꼭 뵙구싶은데...제겐 그때의 추억이 넘 소중하거든요...선생님계시는곳이 사천보다 더 들어가나요?? 선생님~~꼭 시간내서 찾아뵐께요~~ 그럼 건강하시구요~~이 카페 자주 들릴께요~~ 꾸벅~~ 01.05.09 14:20 - 김영훈(사천 동성)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주미정입니다. 방금 헌미한테 연락받고 바로 회원 가입했답니다. 그동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어요. 초등학교 당시 미정이 담임으로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교감선생님이 되셨다구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아줌마가 되었구요. 너무 웃기죠. 그렇게도 장난 많이 치고 촐랑거리던 제가 결혼을 했다니 사실 저도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아요. 지금 한참 신혼이라 너무 재미있답니다.
선생님 어떻게 변했을지 정말 궁금해요. 저도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시죠. 우리 그때 함께 공부 했던 친구들 모아서 그동안 못나눴던 이야기 하며 재미있게 한번 놀아 보자구요. 자주 들러서 글도 남기고 친구들한테도 선생님 홈피 있다고 전달 할께요. 몸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01.10.18 12:31 - 주미정(통영 사량)
○ 진주교대 8회 동기회
제자들과의 만남을 위한 카페가 문을 연지 1년 하고도 두 달, 하나의 카페 운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무렵인 2002년 6월 10일 드디어 두 번째 카페를 개업하기에 이르렀다. 이름 하여 ‘진주교대 8회 동기회’ 카페를 개설하여 문을 연 것이다.
이야기 푸는 자리, 생각하고 쉬는 자리, 서울, 부산, 진주 등 각 지역별 게시판 등 모두 13개의 게시판과 기본 자료실, 여행 이야기, 내가 쓰는 주소록 등 4개의 자료실 그리고, 회원들의 자유롭고 가벼운 출입을 위한 끝 말 이어가기, 한 줄 메모장 등 다섯 개의 자유 게시판을 마련하여 활용을 하고 있다.
이 카페는 앞의 제자 모음 카페와 다른 점이 좀 있다.
우선 처음의 반응이 매우 시큰둥했다. 이유는 뒤에 분석된 일이지만 우리 세대 자체가 컴퓨터를 두려워하는 세대다 보니 카페 가입과 드나들기를 좀은 번거롭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뒤에 가입 방법과 출입, 글 올리는 요령 등을 상세히 안내하는 유인물을 발송한 후 가입자도 많이 늘고 활용도도 매우 향상이 되었다. 나는 카페지지 또는 카페 주인으로 분류되고 몇 몇 친구들은 간부사원으로 임명 되어 카페의 질적 신장에 참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제 카페를 개설하고 나서 글을 올린 순서대로 세 친구들의 글을 소개하려 한다.
축하합니다. ^-^ 진주교대 8회 동기회 카페 open 많이 동참하여 카페 자리가 가득하길
김형진님 수고하셨습니다. 바이 바이 02.06.28 13:03 - 김성우
동천선생 그동안 어케 살아가셨소. 바쁘다는 핑게로 -중략- 부디 건강하시고 즐거운 나날이 되시길 바라며 안부로 대신합니다.
이런 자리 아니었으면 언제 이렇게라도 얼굴 없는 글자로 당신의 모습을 대신 되새겨 보는 시간이 무척이나 감회 어리게 즐거웠소 02.06.28 14:52 - 류창현
그 넘 클 때부터 알아 봤더니만/ 이렇게 카페 까지 차려 놓고 ㅎㅎㅎㅎ/ 어디 칵테일 맛도 일품이려니 자주/ 찾아서 목마름을 해소해 볼려유/ 정말 반가우이... 02.11.01 10:33 주영돈
<함께 했던 직원들>
2000.09.01/이홍식(교장선생님), 신창래, 김숙자, 장현자, 황혜숙 ,조정자, 조용수, 고승희, 송호열, 이명희, 김영숙, 안인숙, 류옥재, 탁선애, 박연순, 김소희, 이경민, 이주옥, 강미숙, 윤미숙, 전원숙, 정숙희, 최미숙, 김명희, 권연숙, 오정년, 구준연, 박선진, 조혜숙, 박연희(보건), 고영희(유치원), 김홍렬(서무), 황경희(영양사), 안영희(기능), 장도평(기능), 김철호(기능), 김혜순(기간제), 신성철(운영위원장), 차성혜(어머니회장), 최우미(부회장),이외정(총무),손정락(진흥회장),오주홍(총무)
2001.02.25/김종숙(서무) 2001.03.01/정승호, 조은영, 진영태, 이 진 2001.03.23/설동희(기간제) 2001.09.01/오외환(도내 첫 원로교사) 2002.03.01/최구일(기간제) 2002.09.01/장윤희(영양사), 2003.02.01/김영순(영양사)
세 번째 부임 학교, 추억도 새로워
<사천 서포 초등학교 : 03.03.01-04.02.29>
◎ 같은 학교 세 번째 부임길
2003년 3월 1일자로 양산 천성초등학교에서 사천 서포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사람은 언제나 알고 있는 환경은 두려움이 적은 법이다. 부임길은 참 멀었다. 그러나, 비록 차량으로 달리는 길이지만 그렇게 기껍고 가벼운 마음일 수 없었다. 손수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그야말로 만감들이 교차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이홍식 교장선생님과 신성철 운영위원장 등 일행이 탄 차 두 대는 양산에서 다소 늦게 출발 했고, 나는 좀 일찍 출발하여 사천교육청에 들러서 사령장을 받고 사천휴게소에서 합류하였다.
서포 임지에 닿으니 이한승 교장선생님과 홍성배 교무부장 등 몇 분의 선생님들이 학년 말 휴가 중임에도 학교에 나와 근무를 하고 있었다.
먼 여행에서 막 돌아온 느낌이 그런 것일까? 교사 시절에 두 번에 걸쳐 10년이나 근무를 했던 학교라서 그런지 꼭 친정 나들이 온 새색시의 심정이 이럴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이한승 교장선생님은 처음 뵙는 분이었다. 과거에 사천 근무를 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지만 연령차가 있어서인지 생소했다. 교육철학이 분명하고, 딱 부러지는 학교경영에 명확한 카리스마를 수반한 분이라는 지인의 사전 설명을 떠올리며 많은 것을 배운다는 자세로 임할 것을 혼자 다짐했다.
사전 정보는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딴에는 2월말의 학급배정을 비롯한 교감 업무들을 교장선생님이 해 주시면 워드 작업이라도 도울 요량으로 학교에 나오겠다고 했더니, 아직은 서포 식구가 아니라며 극구 나오지 못하도록 못을 박으시는 것이었다.
이홍식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천성에서 함께 온 소위 부임 수행 인사들을 선창에 있는, 전부터 잘 알던 사랑골 횟집으로 모셔 회와 점심을 대접하였다.
생각하면 내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하셨고 초임교감의 애로사항을 제로화 해 주신 교장선생님이 너무 고마워 남아 있는 내 교직생활동안 배운 것들을 꼭 활용하리라고 혼자 다짐도 했다.
점심을 먹고는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휴게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제의를 했더니, 교장선생님께서는 이제 여기서 헤어지고 다음에는 서로 오가면서 만날 날 있을 거라고 하시는 바람에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어차피 헤어져야할 사람들이니 아쉬움 붙잡고 미적거리는 것은 되려 시간 낭비일 것도 같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할 수 없이 헤어지고 혼자 서포를 통과하다 아는 제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참시 차를 세웠다.
김미애, 6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한 정석환군과 부부가 되어 고향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모범적인 사람들이다. 미애 뿐만 아니라 두 번째 근무 시에 어머니회장을 지내셨던 김민영씨, 김민순씨 자매도 함께였다.
나만 반가운 것이 아니라, 그들도 실제로 반가운 모양이었다.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애는 내가 교감이 되어 다시 부임한 사실이 그렇게 반갑고 좋은 모양이었다.
김민영씨는 아이들이 그간 모두 졸업하여 중학생이었고, 동생 민순씨는 막내아들이 한참 재롱을 부려 웃음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많은 얘기들을 나누느라고 해가 거진 지고난 후에야 우리는 다방에서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날 만난 사람들은 서포에 사는 사람들 중 반가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단히 고마운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날 나눈 이야기들로 나는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자기반성을 할 기회도 가질 수가 있었다.
부임 한 달 안에 몇 몇 사람들을 초청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존경해 마지않았던 남상배 교장선생님, 당시 함께 했던 선생님들 몇 분, 당시의 어머니 회장 등 함께 선창에 있는 사랑골 횟집에서 회포를 풀었던 기억이 새롭다.
◎ 옛을 생각케 하는 카풀
출퇴근은 교대 동기인 홍성배 교무부장과 함께 하기로 했다. 마침 둘의 집이 같은 지역에 있어서 편리했다. 물론 차량은 번갈아가며 운전하기로 하고 내가 안압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관계로 직원체육 회식 등 술을 마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은 내가 운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날은 번갈아 운전을 하기로 했는데 친구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여 아무래도 성배 그 친구가 운전하는 횟수가 훨씬 많았었다.
가끔씩 휴게소에 들렀다. 그럴 때마다 의견을 묻는 것은 거의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기사가 일방적으로 휴게소로 들어가면 한담을 신나게 나누고 그냥 좀 쉬었다가 가게 되어 있었다. 실은 진주에서 서포가 승용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쉬어가야 할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쉬게 되는 것은 여유를 즐기는 그런 차원이었다.
교무부장과 교감, 우리는 오가면서 직책에 대한 것은 애당초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교대 동기 친구로서, 한솥밥 먹는 동료로서 학교 일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그러다 보면 일의 처리가 가닥이 잡히고 최선의 방향이 어떤 것인지가 뚜렷해지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성배 친구랑 출퇴근 시에는 전에 서포에 근무할 때 하께 했던 카풀 멤버들 생각이 가끔씩 나곤 했다.
넉넉한 성품에 언제라도 스스로 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부분이었던 성배 그 친구 열망하던 승진의 꿈을 나랑 함께 하는 동안은 아니지만 이루게 되었다.
그게 기쁜 나머지 축하 전화를 했을 때 밝은 가운데에도 겸손을 잃지 않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제 2009년 3월 1일자로 초빙교장이 된 그에게 전화 축하를 했을 때 예의 그 겸손한 말투는 변함없는 가운데,
“다 주위에서 도와준 덕분”이라며 웃던 그 소리 더욱 정겹게 느껴졌었다.
◎ 스쿨버스를 동승하며
서포초등학교에는 당시 스쿨버스가 세 대나 있어서 자나 깨나 관리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 오늘날처럼 통학 도우미가 고용되어서 아동들의 등하교를 자상하게 돕는 것은 아니었다.
교직원들이 윤번제로 당번을 정하여 스쿨버스를 타야 했고, 상부 관청인 지역 교육청에서는 예산 한 푼 배부해주지 않은 상황에서 일선학교의 스쿨버스 동승 실태를 감독하고 어떤 때는 지시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감으로서 선생님들의 일 부담을 덜어준다는 차원에서 아침마다 번갈아가며 동승을 했다. 딴에는 그게 출근도 안한 남의 교실에 가서 학급경영의 일부를 살피는 교감의 업무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시대 감각에도 맞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 1호 차 기사는 강점성씨로 서포면 조도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코스는 학교를 출발하면 남구를 거쳐 옛 금진초등학교 학구인 금진, 신흥, 굴포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전에 학부형이기도 했던 강주사와는 늘 많은 얘기 나누면서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포초등학교 출신답게 아동들이나 학교를 끔찍하게 아끼는 강점성씨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호차는 이정규 기사가 운행하는 차였는데 코스는 옛 자혜분교 학구 전체였다. 학교를 출발하여 서포 시가지를 지나 자혜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중촌 마을의 바닷가 횟집촌까지 갔다가 돌아와서는 옛 자혜분교를 지나 구포까지 다녀오는 코스였다.
그 코스에는 특히 1979년도에 1년간 근무했던 자혜분교의 폐교건물을 볼 수 있어 옛 일들을 생각하게 하는 탓으로 더 인상 깊었던 기억이다.
이정규 주사는 곤양 맥사가 고향이고 지금도 그 곳에 거주하는데 성품이 몹시 서글서글하고 나이가 나랑 비슷한 관계로 역시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였다.
3호차는 정연학 기사가 운행하는 차였는데 코스는 옛 비토분교 학구 전체였다. 학교를 출발하여 선창을 지나 비토섬을 거진 한바퀴 돌아오는 코스라 상당히 먼 편이었다. 정연학 기사는 젊은이였는데 고향이 거창이라 집에 다녀오는 거리가 너무 멀어 애를 많이 태우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거의 모든 직원이 거창까지 축하차 갔었는데 지금은 거창으로 전출이 되어서 스쿨버스 운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이사 스쿨버스가 있는 학교는 동승보조요원의 급료를 교육청에서 예산으로 배부해 주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당시는 말도 아니 되는 소리인데도 교직원들을 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공문서는 없지만 학교장 또는 교감회의 때 공공연히 이야기 되었고, 사고가 났을 경우 동승자가 없었다면 꼭 학교장의 책임사항으로 곤욕을 겪도록 되어 있었다.
◎ 어이없는 스쿨버스 사건
2003년 9월 초에 있었던 일이다.
이한승 교장선생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근 곤명초등학교로 전출하시고 그 후임으로 거제서 천명진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90년대 중반에 통영에서 인근에 근무를 하셨던 분이라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따라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고, 학교 또한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평온한 나날이 흘러가는 듯 했다.
9월 들어 두 번째 직원체육이 있는 수요일이었던가? 교장실에서의 아침 일과 협의 중에 직원체육 실시를 의논하던 중 교장선생님께서 이번 주에는 안하는 방향으로 하자고 의견을 제시하셨다.
때마침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온 나라가 복구 작업에 한창인데 실내 체육관도 없어 운동장에서 배구를 해야 하니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지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교장선생님께서는 문턱걸이(부임 기념으로 내는 음식)를 오늘 하겠다고 하셨다.
일과를 마치고 다섯 시 경에 선창 마을에 있는 횟집으로 전 직원이 이동하여 행사를 조촐하게 진행하여 여섯 시 경에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가 각자 귀가를 했다. 때가 때인지라 조용한 가운데 아무런 문제없이 행사 하나를 잘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집에 와 있는데 사천교육청 학무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선창에 전 직원이 갔었느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머물렀었느냐? 무슨 목적이었느냐? 등을 마치 죄인 심문하듯이 물어왔다. 잘 아는 선배이기도 하고 상관이기도 하여 사실대로 대답을 했다.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가?”
로 시작하여 시종일관 죄인 심문이나 나무라는 투로 쏟아내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횟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스쿨버스를 촬영하여 진주에 있는 모 신문사에 보낸 사람이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사천교육청과 경상남도교육청에 전화까지 함으로써 사태가 확산 일로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한꺼번에 조용히 이동한다는 생각으로 스쿨버스를 이용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태풍 매미의 여파로 복구에 온 정성 기울이는 시기에 한가롭게 회식이나 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이들 등하교 시키라고 있는 스쿨버스를 술 먹으러 가는데 이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교장선생님과 나는 신문사의 전화도 몇 통 받았다. 기자가 학교 방문을 하고 싶은데 가도 되겠느냐고 질문을 해 오기도 했고 내일 저녁에는 신문에 기사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해왔다. 이제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의논 끝에 오라고 했고, 저지른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벌을 받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다음날을 맞았다.
아침 일찍 출근 하여 교장선생님과 일상 얘기를 나눈 뒤 학교일지를 보고 있는데 도교육청 임장학사가 전화를 했다.
“서포 유지가 걱정이 많지요? 허허허.”
“---이일을 어찌 처리해야 되는지 모르겠소.”
“(전략) 별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만약 나중에 일이 확대되면 학교장 주의...(하략).”
솔직히 임장학사와 통화하고 난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즉시 교장선생님께 통화 내용을 보고하니 교장선생님도 표정이 많이 밝아지셨다. 그리고는,
“우리가 지은 죄가 있다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기다려 봅시다.”
라고 하시고 교장실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유난히 요란스레 울렸다. 사천교육청 학무과장이었다.
그렇게 퉁명스러울 수가 없는 어조로,
“우찌 되 가고 있내? 그라고, 와 경과보고도 안하고 있내?”
“과장님, 별 걱정 안 해도 되겠습니다. 방금 도 임장학사와 통화를 했는데....(하략)”
“머어? 걱정 안 해도 데는 거 좋아 하네. 도 교육청애 전화가 간 것마 해도...(하략)”
도교육청과 지역 교육청의 입장차인가? 아니면?
하부기관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준다면 좀 더 자상하게 해결 방안을 안내해 주고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사람이 다르니 사고하는 방식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도교육청과 지역교육청의 입장 차이도 이해가 가지만 ‘엎어진 놈 뒤통수 찬다.’는 말처럼 가뜩이나 어려워서 전전긍긍하는 하부기관 사람들에게 엄포나 놓고 겁이나 주고------.아무튼 나는 이 일로 많은 가슴앓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은 퇴근도 못하고 교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밤 11시가 넘어도 신문사에서는 학교방문을 하지 않았고, 전화 한 통화도 더 없었고 신문기사도 단 한 줄 나오지 않고 사태는 조용히 마무리가 되었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우리지역 교육청 때문에 지레 난리를 피운 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처음부터 난리를 생각도 해 보지 않았었다. 도 임장학사 전화를 받고 나서는 더 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학무과장의 전화를 받은 후 시키는 대로 경과 보고서를 써서 보내면서도 고소를 금치 못했음을 밝혀 둔다.
물론 남모르게 걱정을 해 주고 혹여 무슨 일 날까봐 애써준 초등계장 신현권 친구, 서포의 시의원 김석관씨 같은 고마운 분들도 있었음을 밝혀 둔다.
그리고, 교장선생님과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다 그만두고 교장선생님이 내게 하신 말씀 한부분만 옮겨 보면,
“교감선생님! 1년 되거든 내신 내서 다른 학교로 가소. 여기는 교육자로서 소신 펼 곳이 못 되요.”
신문기자까지 전화를 걸어 학교방문을 이야기하기까지 했는데 결국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넘어간 것은 지금도 의아하기만 한 일이다. 교장선생님과 나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을 하면서 아마도 별로 이슈가 될만한 기삿거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도 어느 누가 밀고(?)를 했는지는 안개속이다. 다만 이런 일로 많은 가르침을 선사함은 물론 주위를 잘 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 그런 것까지를 바르게 일깨워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스쿨버스는 아동 통학과 현장학습 이외에는 활용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는데 일단 학교장의 판단사항이고 권한사항이니 사용 범위도 그렇게 칼로 두부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되었었다.
◎ 귀신이 곡할 노릇 - 화장실 화재 사건
2004년 1월 어느 날 겨울방학중의 일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과 함께 2층 중앙부에 있는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 때의 시간이 아마 오후 세시쯤이었는데 밖에서 일을 하고 있던 강점성 주사가 난데없이,
“불이야! 동쪽 화장실에 불이 났다.”
하고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복도로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찌된 일인지 우리가 얘기하고 있던 2층 동쪽 끝 화장실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화장실 안에서는 불이 붙어 화재의 초동 상태가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함께 있던 이정규 주사가 황급히 소화기를 챙겨 들고 화재를 초동 진압할 수 있었다. 화재 상황은 화장실 안의 일부가 플라스틱 연기에 의해 보기 흉하게 그슬려 있을 뿐 큰 화재는 아니었다. 내부 천정이 하얀색이어서 검은 그을음은 더 선명히 나타남으로써 흉함의 도가 좀 높았을 뿐이었다.
교장선생님은 그 때 진주의 어느 병원에 입원중이셨기에 모든 것이 내 판단으로 결정도 하고 처리도 해야 했다. 물론 나중에 교장선생님께 경과보고는 하겠지만 우선 자체적으로 수리가 가능하겠다는 판단으로 안도하며 수습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가 빤히 바라보이는 염전 마을에 있는 소방대에서 출동을 한 것이다. 출동과 함께 상부 소방관련 관공서에 신고도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서무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다른 학교 서무를 통해 논의하던 중 교육청에서 알게 되고 급기야는 교육장님에게까지 보고가 됨으로써 교육장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죄송스럽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씀을 드렸다.
“교육장님, 지금은 화재 원인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경미한 화재고 조기진압도 했기 때문에 내일까지 복구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작업을 진행했다. 천정의 그을린 타일은 본교 출신이라 늘 학교를 아끼는 마음이 깊은 강점성 주사가 공사를 진행할 때 업주 모르게 다섯 박스나 숨겨놓았던 것이 있었고 그걸 처리하는데 필요한 나사못까지 따로 확보해 놓았던 것이 있어서 자재비용은 한 푼도 들지 않았다. 다만 전구 나간 것, 스위치, 전선 등속과 바닥 타일 틘 것 일부 등으로 아주 소액의 예산이 들었을 뿐이었다.
화재 진압 당시 들렀던 인근 주민 한 사람이 사흘 후쯤 학교를 방문하여 예산이 얼마나 들었느냐고 물어왔다. 얼마 안 되는 예산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고 했더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갸우뚱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교감선생님, 그날 봉깨내 타일 하고...적어도 칠팔십 만원은 들었실낀대요.”
“쓸 데 없는 말씀 하지 마소. 왜 내 말을 못 믿소?”
서포라는 지역은 옛날부터 고발정신이 강한 지역이었다. 자그마한 꼬투리만 있으면 들추어서 키우려는 심리들을 갖고 있음을 알기에 못을 박은 것이다. 다행히 전에 10년을 근무했던 학교라서 그 사람과는 친분이 두터웠기에 그 사람도 더 이상은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서포는 미련 두지 말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건이었고 부추김이었다.
그 당시도 많은 궁리를 하였으나 정확한 화재의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답은 없다. 다만 방학 중이라서 중 고등학생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레를 보관하는 플라스틱 물통에다가 꽁초를 버렸고, 걸레들이 방학 중이라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라 바짝 마른 상태여서 서서히 불이 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 연이어 터지는 엉뚱한 사건
KDC라는 소위 문제아가 하나 있었다. 아이 아버지가 심각한 시각 장애인으로서 노동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여서 여러 가지로 힘든 가운데 자녀교육도 의도한 바대로 진행하지 못했음인지 아이에게는 좀 문제가 많았다.
흔히 말하는 단순한 도벽이라든가 가벼운 문제를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KDC는 매사 심각하게 엉뚱함을 보이고 어린 마음에도 가질 수 있음직한 상황 판단력은 아예 상실한 아이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더 솔직히 얘기하면 문제 행동들을 수도 없이 일으키고 다니는 그런 아이였다.
10월경에 좀은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화장실 청소용으로 지급된 크레졸을 불특정 다수의 아동도 아닌 불특정의 어느 아이의 얼굴 정면에서 확 뿌려버린 것이다. 담임이 보관하고 있다가 청소시간에만 내어놓는 것을 청소당번도 아닌 녀석이 지나가다가 순식간에 저지를 일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레졸 액은 상대방 어린이의 눈에 일부 들어갔고, 곁에서 본 아이들이 달려들어 KDC의 행동을 제어하는 한 편 수돗가에 데리고 가서 눈을 씻겨 주는 등 어쩌면 어른스런 행동으로 위기를 천만다행의 순간으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한 아이는 동네 병원을 거쳐 진주 경상대학교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고, 구급차를 동원하여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옮긴 것이다. 아이의 상태에 대한 염려스러움에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분히 배타적인 성향의 학부모회에서는 학교 측에다가 아이를 정신병원에 보내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제2의, 제3의 사건을 만들려고 방치한다고 몰아붙이고, 학교의 입장은 아이 하나라도 더 바르게 인도하자는 그야말로 교육적인 입장이 맞섬으로써 상당기간 줄다리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밀고 당기는 대치 끝에 일은 잘 마무리 되었지만 결국은 지역민들의 자가당착(自家撞着)적 생각들과 배려를 모르는 언사나 행동들 때문에 학교로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은 짧디 짧은 사건 일지로 결코 대변이 될 수 없었음을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진행의 과정에서 치료비 등도 많이 부풀림으로써 그게 들통이 나 어른들의 얄팍한 욕심에 동심이 더 멍드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었고, 문제성이 있는 아동이 저지르는 금전적인 피해를 보상해 주는 보험이 있다는 사실도 실은 그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보험회사가 개입이 됨으로써 조사 과정에서 치료비 등을 부풀린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던 일이다.
<함께 했던 직원들>
2003.03.01/이한승(교장선생님), 류민화, 변남수, 정은숙, 박용길, 노환순, 이도인, 조미숙, 홍성배, 김숙정, 손순자, 강미경, 김동영, 이종숙(서무), 조선자(유치원), 박명은(영양사), 김정숙(조리사), 강점성(기능), 이정규(기능), 정연학(기능), 김강호(기능), 문석수(운영위원장), 오갑수(부위원장), 이미영(위원), 김혜숙(위원), 정자일(위원), 하명희(위원), 안문웅(위원), 조현득(위원) 2003.09.01/천명진(교장선생님)
2004.01.10/진지영(서무)
내 모교가 합쳐진 내 고향 학교로
<사천 곤양 초등학교 : 04.03.01-06.08.31>
◎ 곤양행의 작은 사연
2004년 2월 중순 경, 당시 곤양초등학교 하수종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하교장 선생님은 동향인이면서도 그간 한번도 같은 학교 근무는 할 기회가 없었다. 늘상 훌륭한 교육자임은 그분의 교사시절부터 익히 듣고 알고 있기는 했어도 함께 근무를 해 보지 않았기에 사람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인즉, 이번 인사 때 곤양으로 와서 함께 근무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내 처지로는 옮기기 어려운 사정들이 좀 있었고 번거롭기만 할 것 같아 그냥 서포초등학교에서 계속근무를 할 생각이었는지라 좀 당황스러웠고, 그 이유가 현재의 천명진 교장선생님의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병원에 입원중이라서 그랬기에 딱 잘라서 말씀을 드렸다.
“교장선생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이번에 그냥 서포에 있을 생각입니다. 우리 교장선생님께서 입원을 해 계시는데 차마 내신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교감선생님, 알았습니다. 의리 지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다 보면 정작 내가 꼭 가 있어야 할 곳에 못가고 마는 법입니다. 생각 좀 더 해 보시고 마음잡으면 전화나 한 통화 주십시오.”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자꾸만 하교장 선생님의 말씀 중에 ‘내가 꼭 가 있어야 할 곳에 못가고 마는 법’이란 말씀이 되새겨졌다. 딴에는 밤 새 깊이 생각을 했다. 꼭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이기는 하다는 판단으로 결론은 내신을 내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하여 병원에 계시는 천교장 선생님께 어렵게 전근 말씀을 꺼내기에 이르렀고, 천교장 선생님 말씀인즉,
“더 같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곤양 가는 것은 나도 찬성이요.”
사실 그런 작으나마 사연을 안고 곤양 행을 결정했던 것이다.
곤양의 하 교장 선생님은 또 내 큰사위의 백부님이니 사실은 사돈지간이기도 한데 이 점을 염두에 둔 큰사위가 내게,
“어렵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하교장 선생님은 정년이 지나 교직을 떠나셨고, 나도 별 문제 없이 동근(同勤)하다 곤양을 떠난 마당에 가끔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우리는 사돈지간이면서도 러브콜을 하시고, 거기에 응해 스스로가 부족한 가운데 2년 동안 아주 잘 지냈다.”
◎ 나의 기록들을 접하며
곤양초등학교는 면내에 있던 초등학교 셋을 모두 통합한 학교다. 맥사리에 있던 서부모등학교, 검정리의 건흥초등학교, 중항리의 동명초등학교가 통합된 학교들인데 그 중 건흥초등학교는 바로 내 모교였다.
학교 역사관에 정리 보관되어 있는 여러 가지 기록들 중 나로서는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나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어서 관심을 갖고 열람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당시의 수상대장에서 내 이름과 함께 정다운 친구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임명대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초등학교 재학기간은 농촌으로서는 정녕 어려움이 많던 시기였다.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농촌 생활이란 재래 방법으로 농사 지어 식구들 호구 해결에도 어려움이 많았었으니 생활에의 여유라고는 누리기 어려운 그런 일들이었다.
간혹 대농으로 분류되는 몇 몇 집에서만 여유가 있어 남을 도우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는데 남다른 관심을 보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어려운 부류에 속하여 먹고사는 것 이외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던 것을 어린 시절이었지만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신체검사부에 2×3cm짜리 작디작은 증명사진으로 실로 45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내 사진으로 남겨진 모습 중 가장 어린시절의 것이었다.
이런 걸 두고 감개무량한 일이라 해야 마땅하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사진은 얼굴의 정상적인 모습이 반 이상 떨어져 나간 것이어서 실망도 참 컸다.
그렇지만 나에 관한 기록들을 가능한대로는 복사하거나 스캔하여 집에다 보관하게 되었다.
아울러 초등학교 졸업사진은 졸업 때 받았던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동안 관리 소홀로 없어졌는데 귀중한 자료라 여겨 스캔하려고 찾아보니 불행하게도 사진첩에는 우리 기수 졸업사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동기회 모임 때 사진을 보관하고 있는 친구를 물색하여 사진을 빌려서는 스캔 작업을 하여 역사관에도 제공하고 나처럼 분실하고 없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니 참으로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모두 곤양초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하수종 교장선생님의 그 말씀 ‘의리 지키는 것은 좋지만 그런 저런 것 다 따지다 보면 내가 꼭 가 있어야 할 곳에 못가고 마는 법’이 되뇌어지고 고마운 마음 갖게 됨은 물론 스스로의 결행도 참으로 잘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평생교육 문학 동아리 지도
2004학년도에 곤양초등학교는 환경교육 도 자율시범학교 외에도 평생교육 지역 중심학교 업무까지도 추진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이 중 평생교육 지역 중심학교 추진에 있어서 최원욱 업무담당 선생님은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어서 아주 조기에 크나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학부모 동아리 활동을 통한 평생교육의 활성화>를 주제로 내가 맡은 한 동아리의 지도 이야기를 간단히 해 볼까 한다.
문예창작 동아리, 시골학교 학부모들로 구성되어야 하기에 어려움은 예감할 수 있었다. 학창시절에 문학소녀 아니었던 사람이 있을까만 막상 홍보활동 끝에 인원을 모집해 보니 하한선을 겨우 넘긴 11명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학교 선생님 한 분(이현숙 교사)도 함께 신청을 한 상태였다.
처음 시간에 모여 의논을 했다. 문학의 모든 분야를 고루 다루는 방법도 있고, 특정한 한 분야를 세부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 방법도 있을 수 있기에 취지를 이야기하고 의논을 했더니 그들의 의논 결과 답이 이러했다.
“교감선생님이 계획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해서 어린이들에게 적용했던 시조창작 활동을 단계별로 실천해 보기로 했다. 절장시조 5시간, 양장시조 6시간, 평시조 7시간, 그리고, 연형시조 3시간으로 계획을 잡고 매주 목요일 7교시를 엮어 나갔다.
따라하고 늘어가는 정도는 오히려 아이들보다 나은 것 같았다. 우선 11명의 여성들과 함께 진행하는 문예창작 활동은 저절로 생기 도는 그런 일에 속했다. 아이들과 진행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절장시조집, 양장시조집, 평시조집을 복사판으로 발행했다. 책이 나올 때마다 어쩌면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정도가 아이들 못지않았다.
한 학기 과정을 동안에 마무리 하고 아쉬운 마음에 계속 동아리 회원들끼리만 모여 창작활동을 계속하도록 하려고 했으나 농촌의 현실들 때문에 접고 말았던 것이 아무래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 후 세월이 흘러 2007년 여름방학 중에 마산 삼계초등학교에서 열린 교원전통예능경진대회 시조백일장 부문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을 했었다. 심사가 다 끝나고 입상자 명단을 작성하다 보니 사천 동성초등학교 이현숙 교사가 1등급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조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분명 곤양에서의 평생교육 지역 중심학교 문학 동아리에서였다. 그간 이현숙 선생님은 붓을 놓지 않고 습작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정말 보람을 느꼈고, 흐뭇함을 주체하기 힘들었었다.
◎ 육군사관학교 공식 방문
2004년 5월, 뜻밖의 반가운 사연 하나가 육군사관학교에서 보내는 공식 공문으로 전달되었다. 내용인즉, 육사 1학년 생도에 한해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스승의 날 스승을 직접 찾아뵈올 수가 없어 교내로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다.
생도가 유, 초, 중, 고, 학원들을 망라하여 선정한 은사 2명 이내를 초청할 수 있었는데 어쨌든 내가 영광스럽게도 그 대열에 끼어 다녀올 수 있었다.
다음 글은 다녀와서 간단히 스케치한 그 날의 일이다.
2004년 5월 28일 토요일.
오늘 난생 처음으로 육군사관학교 방문의 기회를 얻었다. 그것도 임의 방문이 아닌 초청에 의한 방문이었다.
공식적인 행사의 명칭은 <육사 생도 은사 초청>이었다.
1995년 내가 서포초등학교에서 담임했던 5학년 학생 중에 정영민이라는 학생이 진주 명신고교를 졸업하고 금년에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참으로 자랑스러운 인문계 수석 입학이었다.
그 소식 접하고 정말 기뻤는데 영민군이 스승 초청 대상에 영광스럽고 고맙게도 나를 꼽았던 것이다.
-고교시절 내 진학 희망교로 육사는 1위였다. 그렇지만 주위에서는 말리는 쪽이 더 많았다. 능력은 접어 두고라도 우선 성격과 맞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판단하고 접었었다.-
-그 옛날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국어 교과서에 소개된 육군사관학교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이었는데 지금은 행정구역이 서울 노원구로 되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공식 초청된 스승은 모두 170 여 명, 대부분 1학년 생도들의 중, 고등학교시절의 은사들이었다. 더러 학원 강사를 초청한 생도들도 있었는데 초등의 경우 단 네 명, 그 중 영민군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었던 나와 1학년 때 담임이었던 박종은 선생님을 초청했던 것이다.
10시부터 홍보영화 관람, 11시에 육사 연병장에서 공식 행사 참가, 강의실, 학습실, 도서관 둘러보기에 이어서 점심식사, 영민군이 소속된 5중대 3소대 화랑관 내무실 공개, 교내 시설 둘러보기, 담소의 시간으로 오후 6시가 넘도록 육사에 머무는 동안 참으로 호국간성을 길러내는 육군 장교양성의 요람이란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생도 대표가 낭독하는 스승님께 드리는 편지와 육사 생도들이 합창한 스승의 은혜 노래는 심금을 울리기까지 했다.
둘러본 여러 시설 모두가 믿음직한 가운데 동판으로 새겨진 졸업생 명패에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종필 등 낯익은 이름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지문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글은 방문 후 육사 홈페이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올린 나의 방문 단상이다.
육사 생도 은사 초청 행사를 계획하고, 추진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그 날(04.05.29) 방문에 임했던 5중대 3소대 소속 정영민생도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었고 현재는 사천 곤양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형진입니다.
정영민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실하고 유능하여 담임 나름대로 기대가 컸던 어린이였습니다. 제가 아끼는 저의 자랑스런 제자 정영민 생도는 초등학교 시절 여러 가지 활동을 열심히 하는 어린이였지요. 서예도 수준급이고, 저랑은 현대시조 쓰기 공부를 하여 백일장 대회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지요. 그 날 정영민 생도는 더욱 단단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점 육사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울러 노고에 감사도 드리고요.
◎ 우째 이런 일이 - 스쿨버스 사고
2005년 7월 8일 오후 4시경에 아동 하교를 시키던 스쿨버스 3호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다. 비가 오고 있어 길이 미끄러운데다가 약간의 커브가 있어 가끔 생각지도 않은 사고가 일어나던 지점이기도 했다.
기사와 도우미 교사, 아동 9명 모두 11명이 탑승한 차여서 사고 소식을 접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선 학교 관리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일이 바로 이런 사고이기 때문에 나도 교감으로서 긴장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교장선생님과 함께 현장에 갔더니 벌써 119 구급대가 현장에 와 있었고, 나름대로는 신속하게 구조, 운반 등의 작업들을 일사불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학교로 돌아가시어 사후 처리를 하시고, 나는 아동들이 이송된 진주시내의 한일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먼저 이송된 환자들이 검진을 받고 대부분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호자와 함께 귀가조치가 되었고, 다만 도우미로 탑승했던 김미숙 선생님과 정희정 어린이만 남게 되었다.
김미숙 선생님은 사고 순간 한 어린이를 꼭 껴안고 뒹굴었기 때문에 척추에 충격에 의한 무리가 약간 갔을 뿐인 가벼운 증상이었고, 정희정 어린이는 유리 파편이 허벅지에 박혀서 그걸 제거하고 상처 치료를 위해 남아 있었을 정도의 말하자면 천만 다행인 경미한 사고였다.
그런데, 문제는 사천 소방서와 언론기관이었다. 자세한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허위 보고를 하는 사천 소방서도 문제였고 진주 MBC 방송국에서는 ‘곤양초등학교 스쿨버스가 전복 되어 11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로 보도를 해버리는 바람에 실제와는 다르게 소란을 떨어야 했다.
그 소란이란 것이 쉽게 얘기하여 상부 관청들이 언론 보도를 막지 못했다고 짜증나 하는 태도들을 응대해야 하는 학교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사천교육청 R교육장은 교감인 내게 전화를 걸어서 ‘분산 이송을 안했다는 점’과 ‘많이 다친(실은 많이 다쳤다고 부풀려서 보도된) 김미숙 선생님을 같은 병원에 입원시킨 점’을 들어 나무라는 투로 말을 했다. 이유인즉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다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치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늘 상 그랬지만 그건 상부관청의 횡포라고 나는 단정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해당 교육청의 교육장으로서 가뜩이나 사고 수습에 정신없는 교감에게 자상한 안내나 격려는 애당초 바라지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의 나무람은 지나치게 섭섭함만 안겨 주는 처사에 속했다. 뿐만 아니라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그런 처사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참으로 고마운 이가 한 분 있었으니 당시의 사천교육청 김영시 학무과장님이었다. 과장님은 진심으로 걱정스레 상황을 파악하시고 위로도 잊지 않으셨다.
“김교감, 걱정이 많지요? 그래도 이만 되기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또 학부모 한 사람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나타나서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광기를 부려 음주운전을 했을 거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다니는 등 아동들 상황 파악과 정리보다는 쓸 데 없는 일 처리 하느라고 애를 태워야 했다.
실은 기사는 조금 다친 몸은 아랑곳 하지 않고 조사 받느라고 학교에 남아 정신조차 없는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11시가 넘어서야 병원에는 김미숙 선생님과 정희정 어린이만 환자로 남고 나머지 모두는 이상 없어 퇴원조치한 후 사고 직후부터 학교에서 언론기관과 연락을 취하시는 등 애를 쓰셨던 교장선생님도 병원에 오셨다.
남아 있던 모든 직원들이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모여 그 때까지 미처 해결하지 못한 저녁식사를 하고 방송국과 사천소방서에 정식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기로 하고 12시가 넘어서야 천만다행이었음을 공감하며 헤어졌다.
다음날 ‘MBC 방송국의 방송내용 유감 표시’라는 제하에 과잉 내용 정정보도 요구와 아울러, ‘사천소방서 교통사고 허위보고에 대한 항의서한’을 보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리 항의를 하고 정정보도 요구를 해도 허사였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는 ‘11명 모두 중경상’이라는 말이 워낙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어서 조금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허위보도나 허위보고 자체가 아니라는 주장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이제 다 지난 후이니까 이렇게 글로라도 얘기가 가능하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상황의 연속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의 반 이상이 상부관청들이 자기들 다칠까봐 걱정하고 다그치는 쪽이었다는데서 일말의 서글픔도 느껴야 했다.
물론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다친 이들을 걱정해 주는 당시의 김영시 학무과장님 같은 분도 있었기에 그 서글픔을 이길 수도 있었다.
이제는 스쿨버스 도우미 채용 운영을 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배부가 된다. 당시에는 그런 예산 배려도 없는 상황에서 상부기관인 지역교육청에서는 도우미 직원의 탑승 여부에는 참으로 민완형사의 수사솜씨를 흉내라도 내듯 밝히려 했었던 것도 희게 웃고 넘길 일일 뿐이다.
◎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
2004학년도에는 연구시범학교 과제를 맡아 추진하는 한 편 시범과제와 같은 맥락의 내용으로 교육인적자원부가 공모하는 전국 100대 교육과정에 응모를 했다.
교장선생님의 지대하신 관심과 배려에 힘입어 강동숙 연구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티임이 구성되고 전년도의 도 자율시범과제 운영결과를 토대로 <자연친화적 체험학습을 통한 기초와 기본생활 습관 형성>에 역점을 두고 영성지능 신장을 꾀하는 야심 찬 환경교육과정을 출품하기에 이르렀다.
학교 환경이 잘 조성된 숲으로 대표되는 곤양초등학교는 그 자체가 차별화요, 특성이라면 특성이었는데 그 환경을 활용한 영성지능의 신장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일단 좋은 것이란 결론은 누구나 내릴 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하였다.
결과는 우수 입상, 사천교육청 관내에서는 우리 곤양초등학교가 유일한 학교였다. 물론 다른 시군에서는 최우수 입상학교도 있었다.
마침 다음 해 8월 말이면 하수종 교장선생님이 임기만료로 퇴임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정녕 뜻 깊은 퇴임 기념품을 우리 손으로 장만한 셈이어서 우리 모두는 축배를 높이 들 수 있었고, 기념탑 하나를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 아름다운 정원의 한 구석에 세울 수는 있었다. 우리는 대단히 섭섭하지만 그걸로 만족해야했다.
마치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공연히 우리 작은 시골학교 안에서만 좋아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비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이건 교육부가 공모한 전국대회였는데 상부 관청이 교내대회(?)로 전락시킨 결과이니까 이런 것이 바로 직무유기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지역 교육청에서는 정말로 아무런 공치사 한마디도 없었음이 무척 서운했다. 수훈갑인 강동숙 연구부장께 교육장 표창이라도 받게 해 줄 수 있었다면 나도 교감으로서 직원들의 노고에 표 나는 보상이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요즈음은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공모를 시군 교육청에서 적극적으로 나선다.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공문서에 의한 적극적인 독려가 없었음은 물론, 주무교사에게 주어지는 아주 작은 보상마저도 없었다.
다른 일들에는 더러 담당자 교육장 표창이라는 소위 인센티브가 있는데 그토록 중요한 교육과정을 놓고 겨루는 전국대회 입상 사실에 전혀 무관심했던 그 때의 세태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 교직의 꽃 교장을 향하여
2004 말 나는 교감 근무 5년이 지나서야 교장자격 연수 대상자로 지명이 되었다.
‘이제 나도 단위학교의 최고경영자로 소신을 펼 기회가 오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
관내 교감들 중에서는 모두 4명의 연수 대상자가 선정이 되었는데 나를 포함하여 교감 4명, 장학사 2명이 영광스런 지명을 받은 것이었다.
각 기별로 교원대학교에서 진행되는 중앙 연수에 앞서 경남교육연수원에서 실시하는 시도별 연수는 전원이 함께 했고, 기별 연수에는 내가 4기에, 나머지 셋은 11기에 배정이 됨으로써 나는 8월 무더위에, 나머지는 11월에 충청북도 청원군에 소재한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연수를 받게 된 것이다.
어느 선배가 연수를 받게 된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교장연수는 경쟁을 하는 연수가 아니니 지극히 편한 마음으로 받고 오라.”
나도 그럴 생각이었고 시도연수건 중앙연수건 간에 실제로 그렇게 임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특히 교원대학교 연수 때에는 우리교육청의 공기덕, 박종주 장학사, 산청교육청의 전중효 장학사랑 한 팀으로 승용차를 번갈아 운전하면서 오가는 동안에는 휴게소에 들러 여유로운 마음임을 한껏 과시했고, 연수기간 중에는 공기덕 장학사랑 거의 아침마다 조깅을 즐겼고, 저녁에는 전기한 네 사람이 작당을 한 것처럼 주점으로 몰려다니면서 피로를 풀기도 했다. 넷 다 교대 동기인 관계로 참으로 기꺼웠고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나 공기덕이 이친구와는 아침 시간을 함께하며 맑디맑은 정신으로 진지한 얘기를 수도 없이, 끝도 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같은 공간에 배정된 부산의 이용빈, 충남의 양문석, 김길수, 전북의 이성수, 전남의 최윤창 교장과 경남의 나를 합친 여섯은 모임을 결성하여 연수기간 중에도 저녁 모임을 여러번 가졌었고, 노래방에서의 열창으로 객고를 달래기도 하였다.
연수가 공교롭게도 9월 3일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곤양초등학교에서는 하수종교장 선생님이 임기만료로 물러나셨고, 후임으로 김만도 교장선생님이 부임을 하시는 일이 끝난 뒤에야 학교에 돌아갈 수 있었다.
교원대학교 연수기간 중에 같은 공간에서 지냈던, 소속 시도가 서로 다른 여섯은 이후 해마다 모임을 갖고 있다. 제1회 모임은 2006년 11월에 진주에서 내가 주선하여 진주, 사천, 남해의 관광을 실시했고, 제2회 모임은 2008 1월 말 경에 충남의 양문석 교장이 주선하여 천안과 태안, 서산을 이동하며 때마침 기름 유출로 침체된 그 지역 경제 활성화를 조금이나마 돕고 왔다.
◎ 자승자박의 실천
2005학년도에는 학교에서 특별히 맡은 과제가 없었기에 ‘제6회 아름다운 학교를 찾습니다.’ 공모전에 출품을 하기로 하였다.
<아름다운 학교 운동본부>가 공모하는 이 일은 몇 가지 분야가 있어 학교마다 분야를 선정하여 응모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교육 환경 분야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최원욱 연구부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티임은 최선을 다하여 일을 추진했는데 먼저 a4 용지 34페이지에 이르는 공모전 참가계획서를 아름다운 학교 운동본부에 보내서 예선에 통과가 되면 역시 a4용지 6쪽에 달하는 실사 서면 답변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모두 거쳐 우리학교는 당당히 최우수 입상을 하게 되었다.
지난해에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에 뽑히고도 지역교육청의 홀대(?)를 받았던 경험이 있어 어쩌면 무모하고 쓸 데 없는 일이 아닐까하는 우려도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역교육청에서는 희다 검다 말 한마디 없었고, 아름다운 학교 운동본부에서만 시상식 때 예쁜 기념패와 함께 담당자 교육부장관 표창을 수여하여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래서 또 한 건의 자승자박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혹 관심 갖는 이가 있을까 하여 참가계획서 맨 첫 페이지인 참가 이유를 그대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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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이유로 시작하였습니다.
학교는 오고 싶고 머물고 싶어야 한다. 우리 교사들이 교육에 대한 열심, 아동들의 고운 마음 바른 생각, 학부모와 학교공동체의 단합된 힘으로만 교육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친화적 푸른 환경이 조성된 학교, 학생들의 밝은 얼굴과 고운 마음, 교사들의 연구 의지와 열정, 학부모 및 지역의 모교에 대한 긍지와 교육 지원활동 등은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이다. 우리 학교는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곤양인의 긍지 또한 100년의 역사에 못지않다. 학교 위치는 서부경남의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곤양의 역사는 삼국시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내다보이는 남산, 주위를 휘 감도는 비봉 내, 훤히 뚫린 고속도로는 곤양의 정기를 가득 품고 있다.
본교는 면지역에 위치한 농촌학교로서 경제적 능력은 대체로 큰 편차가 없으며 학부모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도 도시 지역에 못지않다. 한때 30학급 규모이던 본교가 농촌 인구의 도시진출 붐으로 인해 면내의 다른 세 학교를 통합한 지금은 14학급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규모 축소로 철거한 교사들의 자리가 넓어 정원으로 가꾼 것이 지금에 이르러 마치 대학 캠퍼스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생태 숲을 가진 참으로 자랑스러운 학교로의 시작이요 계기였다.
생태 숲 뿐 만 아니라 교육과정 운영 면에서도 열성을 기울여 지난해에는 교육인적자원부가 공모한 전국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에 선정되었다. 이에 더욱 힘을 얻어 2005학년도에는 교육과정 편성 후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등 본교 교육공동체가 학교의 옥내외 공간을 생태학적으로, 친환경적 교수-학습을 돕는 학습의 장으로의 조성에 초점을 맞추어 꿈과 감성이 어우러지는 행복한 학교 조성을 더욱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왔고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맑은 강과 푸른 산, 온갖 생명체들이 살아 숨쉬는 건강한 자연이다. 이에 본교에서는 학교 숲을 활용한 자연친화적 푸른 학교를 조성하여 생명을 이해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어린이들은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다양한 흥미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 본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부 활동 계획과 목적을 세워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첫째, 생태환경이 잘 조성된 숲이 우거진 푸른 학교를 만들고
둘째, 재활용품을 이용한 교육환경을 만들어 자원 절약과 환경보전 의식을 갖게 하며
셋째, 자연친화적 체험학습을 통해 기초와 기본생활 습관형성을 도모하게 하고 있다.
346명의 전교생이 ‘꿈은 준비하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다’는 본교의 캐치플레이즈 아래 즐거운 학교, 재미나는 공부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학교의 본보기이며, 아름다운 학교운동본부와 대한교과서(주)가 공동주최하고 교육인적자원부 후원과 16개 시도교육청의 후원으로 뽑는 ‘제6회 아름다운학교를 찾습니다.’에 적합한 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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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장선생님의 퇴임 준비
2005년 8월 말로 모시고 있던 하수종 교장선생님이 정년 6개월을 남기고 임기만료로 교장직을 떠나야 했다. 하교장 선생님은 남는 6개월을 원로교사로 교직에 남기로 결심을 하셨기에 어쩌면 조금은 어정쩡한 퇴임이 되고 말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퇴임식은 6개월이 지난 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라 여겨지지만 사회적인 풍토나, 사람들의 사고 자체가 그걸 용납하지 않는 쪽이기에 2005년 8월 말 퇴임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비래야 옛날처럼 복잡한 일들로 연결되거나 꽤나 많은 예산이 소요되어 곤란을 겪는 것은 아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교감을 비롯한 선생님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가 처음 겪는 거라서 신경이 쓰이는 일에 속한다.
준비하고 치러야 할 일은 크게 그간의 교직 발자취를 엮는 책자 발간과 퇴임식을 준비하고 치르는 일 밖에 없지만 실은 그 일들이 말처럼 손쉽기만 한 것은 결초 아니다. 나름대로 사전 조사도 해야 하고, 당사자와의 잦은 협의 끝에 일의 범위와 방향도 잡아야 하고 끝나고 나서의 후유증도 없어야 함을 감안하면 결코 장난스럽기만 한 일은 아니다. 특히 교감은 이 모든 일들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입장이니 더욱 그렇다.
참으로 고맙고 다행한 일은 두 가지 일들의 방향을 뚜렷하게 잡아 주셨고 특히, 책자 발간에 관한 일은 교장선생님의 원고는 100% 워드 작업까지 해서 넘겨주셨고, 외부 인사로부터의 원고청탁 대상자도 함께 근무한 인사들을 대상으로 선정을 해서 의논을 드리니 단박에 좋다는 결정을 내려 주셨다. 다만 제자들의 글은 교장선생님이 직접 선정해 주신 두 분으로 결정을 했다.
최정기, 신현갑, 김용길, 강경호, 화성인, 김진태 등 여섯 분의 글을 메일로 받고, 거기에 내가 직접 퇴임시를 써서 보태었고, 나머지 교장선생님의 글은 다음과 같은 차례로 장을 구성하여 편집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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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 연보, 약력머리말 등으로 구성
◯추억의 장 - 교육현장의 추억이 어린 순간들(엄선하신 사진)
◯함께 했던 사람들 이야기 - 제자의 글 2편, 함께 했던 교원들 6명, 퇴임 축시 등
◯교육발전의 염원으로 - 많은 연구 논문 중 두 편의 자선 논문
◯교단에 펼친 꿈 - 소신으로 행하신 교육애의 기록 8편
◯함께 하는 교육 실천을 위해 - 교육 동지들에게 권하고픈 이야기 13편
◯부록 - 관심 깊게 실천하신 교육의 일면으로 강의자료, 인사말 모음, 상장 문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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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죄송스럽게도 편집이 끝난 상태에서 때마침 교장 연수차 교원대학교에 들어가야 했고 그 기간이 무려 한 달이 약간 넘는 기간이라서 이후의 일들은 교장선생님이 직접 하시기로 했다.
그리 하여 294쪽에 달하는 책이 나오게 되었다.
다음 시는 하교장 선생님의 교육문집 <꿈과 소신의 세월> 24쪽에 실린 글이다.
보내 드리는 마음
김형진(곤양초등학교 교감)
강 바다 산을 더해
다가온 서기(瑞氣) 받고
수려(秀麗)한 경관(景觀) 더불어
키워온 꿈 다듬어
하늘이 점지한 이 길
필연(必然)으로 택하신 길
망망대해(茫茫大海) 헤쳐 가는
항해사(航海士)의 심정(心情)으로
어린 순 고이 가꾸는
참 농부(農夫)의 지성(至誠)으로
길러낸 님의 동량(棟樑)들이
이 나라를 빛내 가고
백년대계(百年大計) 한 복판에
선구자(先驅者)로 서신 님이
스스로 다진 기단(基壇)에
하나 둘 올린 업적(業績)
찬란한 빛을 뿌리는
금자탑(金子塔)을 쌓았네
역경(逆境)은 기회로 알고
불의(不義)는 마주 서며
순리(順利)의 세월(歲月) 속에
때로 아픔이 있었어도
언제나 꿋꿋한 님께
사랑 모아 보냅니다
이제 시름 접어 두고
평온(平穩) 깃든 마음으로
남보다는 님을 위한
삶이기를 절원(切願)하는
이 시각(時刻) 광영(光榮) 함께한
우리 합창(合唱) 들으소서
◎ 두 교육장님 퇴임과 나
2004년 3월에 전임 김일랑 교육장님이 정년을 맞았을 때 초등계장 신현권 장학사가 김 교육장님의 활동 상황을 엮어 사진집을 만들고자 하는데 필요하다며 권두 축시 한 편을 부탁해 왔다. 김일랑 교육장님의 고매하신 인품과 교육철학에 흠모하는 마음 금하지 못했던 나는 당장 승낙을 하고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빚어 보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은 나중에 정년퇴임식에 다녀오신 교장선생님의 전언에 의하면 식 중의 한 부분으로 퇴임시를 낭송함으로써 작품의 가치가 더욱 빛났다는 얘기였다. 존경하는 교육 선배님의 퇴임 길에 초라한 일이지만 일조를 한 것 같아 마음도 매우 흡족해 했었다.
그로부터 1년하고도 반이 지난 뒤 이제 혼자만의 오해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의 발령을 6개월 저 뒤로 밀쳐냈다고 보여지는 장본인이 교육장을 끝으로 정년을 맞게 되었다.
당시 초등계장 구용효 장학사가 내게 전화를 해 왔다.
“선배님, 지난 번 김일랑 교육장님 때처럼 교육장님 퇴임 시 한 편 써 주시면 안 될까요.”
“구 장학사님, 안 되겠습니다. 구 장학사님 퇴임이면 내가 정성을 다하여 ...”
어찌 생각하면 옹졸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글을 쓴다고 앉으면 울화로 점철될 일을 스스로 하게 되면 그게 더 자신을 이상한 인간으로 만들게 되는 것 같아서 무조건 싫었다.
내가 왜 그런 대답을 하는지를 구용효 장학사도 너무나 잘 알기에 설명도 필요 없었고, 되씹을 필요도 없이 얘기는 끝낼 수 있었다.
이제 그 때 김일랑 교육장님의 정년을 맞아 신현권 당시 초등담당 장학사의 부탁을 받고 딴에는 숙고하며 빚은 시조를 소개하고자 한다.
스승은
세파(世波)를 모로 받는
항해사(航海士)의 신념(信念)으로
출범(出帆)의 닻을 올린 건
어제인 듯 새로운데
눈 막고 귀 막은 일상(日常)
쏜살인 듯 스쳤는가
한마디 언어라도
가볍지는 못한 삶에
어쩌면 지난 세월(歲月)
묵묵히만 가꾼 터전
뿌려온 의지의 씨앗
동량으로 자랐는가
일상의 상념(想念) 저 끝
송이송이 열린 법열(法悅)
파아란 가슴팍마다
사랑으로 건네주고
비워온 님의 가슴에
법열과(法悅果)만 익혀왔다
희끗한 머리숱이
아미(蛾眉) 끝을 어루만져
구슬리고 영글어온
구원(久遠)의 뒤를 보며
해거름 들길을 걷는
참 농부의 심상(心象)이여
아아라한 세월(歲月) 저 쪽
더워오는 가슴가슴
이제는 그 영상(映像)도
눈에 가물 흐린 것을
그 사랑 헌신(獻身)이었기
명경(明鏡)으로 비쳐온다
-김일랑 교육장님의 정년에 부쳐-
곤양초등학교 교감 김형진(2005년 3월)
◎ 꿈에 그리던 CEO
2006년 3월에 나는 교장 발령을 고대했다. 그러나 참으로 허망한 결과에 교직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했다.
우리교육청(사천) 관내에서 신규 교장이 하나만 발령을 받아도 당연히 그건 나일 거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너무 강하게 했던 탓이다. 아니지, 나는 아직도 세상을, 아니면 세상 사람들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생각한 탓이었다. 결론은 3월 발령은 전혀 아니었고. 대단한 실망감을 혼자 감수해야만 했다.
내가 조금은 자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대기하고 있던 네 사람 중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나보다 교감경력은 1년 반씩이나 적었고, 교장강습도 같은 해에 나만 4기였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11기에 받았던 사람들이다.
물론 점수로 줄 서는 상황에서 근무성적 평정이라는 교육장의 절대 권한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세상을, 세상 사람들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수 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웬만큼만 억울한 마음이면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라고 하는 짧디 짧은 중얼거림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으련만 몰려오는 회한과 원망은 오뉴월의 서리는 저만치 가라였다. 교직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받는다고 여겨지는 스트레스도 그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간단히 내가 근무한 실적이 평정자의 눈에 차지 않았겠거니 여기면 될 일이지만 2년 계속 시범과제 해결과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 입상으로 실질적인 교육성과를 거양했고, 해당연도에는 전국 아름다운 학교 공모로 환경부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한 학교의 교감이었으니 아무리 자가당착인지를 따져 보아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세 살짜리 아이가 생각해도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실수가 제일 크다는 어느 선배의 충고를 들으며 쓴 웃음 웃고 만 것은 지금 생각해도 쓴 웃음만이 해결책이었다.
그 교육장님, 전에 학무과장 시절에 급하게 자기의 직속상관인 교육장님의 ‘박재삼 시 비 건립’ 등 무슨 인사말 원고 등속이 필요할 때에는 전화해서 급하게 원고 만들어 메일로 보내라는 등 부려먹더니만------.
3월 한 달을 바쁜 가운데 속 좀 끓이며 보내고 4월이 되어 고까짓 것 하고 살려니 이제는 선배님들의 전화가 또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속상해 할까봐서 3월중에는 전화도 없더니만 이제 안정을 찾았음을 감지들 하셨음인지,
“어이 김 교감, 와 네가 요분애 발령이 안 났는고?”
그러고 나면 한동안 나 혼자서 뒤집어진 속 바로 챙기느라고 애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전화는 끊임없이 왔다. 모두들 나를 아끼는 선배님들이라서 고맙기 그지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렸다.
‘지가 갖고 있는 지 잣대로 잰 것인데---.’로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6월이 지나 7월 중순에 마지막으로 그런 전화를 받았는데 좀 특이한 분의 전화였다. 교육청 관리과의 어느 계장님이었다.
“교감선생님! 마음 많이 상하셨지요? 지금 생각을 해도 이해가 안갑니다. 그렇지만 이제 곧 발령 날 것이니 모두 잊으십시오.”
이건 관리과에서도 내가 3월 발령 대상에서 제외된 것, 다시 말해서 근평을 잘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은 화제가 되었었음을 중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모든 일들은 기억의 저 편으로 돌리고 드디어 2006년 9월 1일자로 남해 남명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인간은 끝도 없이 옹졸한 존재인 것인가? 아니면 다들 안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인가? 퇴직하고 야인이 된 그 선배를 예식장이나 산책길 등지에서 만나면 반가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우울함은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아직은 끝도 없는 수양을 더 해야 할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2008년 중반에는 그 선배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얼핏 전해 들었다.
“자석, 제가 뭣 땜에 제일 앞서야 하는대.”
이건 잊고 살려는 내게 ‘엎어진 놈 뒷통수 차는 격’이나 아닐지? 아니면 약한 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나 아닐지?
<함께 했던 직원들>
2004.03.01/하수종(교장선생님), 박용숙, 최복자, 이향례, 이현숙, 강동숙, 최원욱, 문향자, 정분임, 하향실, 한덕봉, 남정숙, 문규현, 김순렬, 류정희, 김진태, 최은경(유치원), 김미숙(유치원), 유은아(서무), 석인희(영양사), 이연선(조리사), 김원채(기능), 김성춘(기능), 황철진(기능), 고장선(기능), 표명호(기능),
김소라(과학보조), 박동삼(기간제), 김경희(기간제), 이경희(기간제), 하영숙(기간제), 황지연(특수보조) 2004.08.01/박명자(조리사) 2004.10.13/이정규(기능), 오윤주(기능)
2005.03.01/이덕희, 권순현, 김정순, 이채상, 김현지, 문미경(유치원) 2005.03.10/박남준 2005.06.27/하영숙(기간제), 이경희(기간제), 이지영(유 강사) 2005.08.01/강용범(기능) 2005.09.01/김만도(교장선생님) 2006.01.01/오언주(서무) 2006.03.01/박복희, 권민애, 한은희, 우혜경, 이성림, 손정미(유치원), 정욱희(유치원), 윤현수(유치원)
2006.05.01/김종은(기능) 2006.05.10/하미애(영양사 기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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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의 새내기 교감선생님 시절의 추억을 접하면서 많이도 웃기도 했습니다- 평교사와 같이 첫째 시간이 시작되어 교실로 함께 나가실 뻔 했던일, “교무선생님 전화 받으십시오.” 할때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겠다고 일어서셨던 사건-저도 충분히 경험을 했거든요...
그리고 선배님은 초등교 교직생활에서의 최고의 CEO가 되실때까지 끝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셔서 많은 제자분들이 선배님을 찾으시지 않나 하는생각이 들어 한없이 부럽기도 하고 그런분이 저의모교선배님이심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좋은 쪽으로만 해석을 해 주셨습니다. 고맙게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