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순례길 1코스(풍남문-송광사)
고난과 화합의 정신이 옛 정취에 깃들다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이야 호남을 대표하는
도시는 광주이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제주도를 포함한 곡창 호남을 다스리는 전라도의 수부는 전주였다.
전주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도읍지였고,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의 유서 깊은 자취는 여기저기에 많이 남아 있다. 풍남문과 경기전, 전주객사 같은 유적들이 그것이다.
풍남문과 경기전 근처에는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전통있는 도시 전주의 이미지를 고조시켜준다.
역사적인 정취가 남아 있는 전주와 주변의 완주, 김제, 익산을 잇는 아름다운순례길은 전주 풍남문에서 시작하여
한옥마을로 돌아오는 총 9개 코스 240km에 이르는 길이다. 아름다운순례길을 걷다보면 카톨릭 성당·기독교 교회·
불교 사찰·원불교 교당 같은 종교시설을 만난다. 거기에는 여러 종교인들의 고난과 화합의 정신이 스며있고,
조상들의 저항의식도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성찰하고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하는 ‘순례’길이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름다운순례길이 시작되는 풍남문(보물 제308호) 앞에 선다.
차량이 통행하는 로터리 한 가운데에 풍남문이 옛 정취를 풍기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풍남문은 옛 전주성의 남문이다. 전주성은 고려시대 축성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영조 44년(1768) 관찰사 홍낙인이 복구하였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격인 문루가 있었고, 그중 남문을 풍남문이라 하였다.
풍남문(豊南門)이라 한 것은 중국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 풍패(豊沛)였기에,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으로
풍남문이라 했다고 한다. 수백 년간 호남수부의 성곽으로 군림하던 전주성은 일제 통감부에 의해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 와중에서도 풍남문은 남게 되어 1978년부터 3년에 걸친 보수공사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전주를 지켜온 풍남문은 오늘날 전주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한쪽에는 풍남문(豐南門),
다른 쪽에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풍남문은 가운데에 홍예문을 낸 높직한 화강암 기단부 위에
2층의 누각을 올렸고, 양쪽으로 종각과 포루가풍남문 기단과 같은 높이로 세워져 있어 무게감과 안정감을 더해준다.
풍남문은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1894년 1월 고부관아 점령을 시작으로 봉기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태인·금구를 거쳐 4월 27일 전주성까지 손쉽게 함락하였다. 동학농민전쟁 가운데
최대의 승리를 이룬 것이다. 그때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풍남문은 말없이 전주를 지키고 서 있다.
풍남문 옆 광장 사거리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유서 깊은 전동성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7년에 거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전동성당은 호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로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를 찾은 사람들이 풍남문과 함께 꼭 들렀다 가는 곳이 바로 전동성당이다.
길을 건너 전동성당으로 들어가니 가랑비가 내리는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찾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입구에서 전동성당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은 건물의 외형이 아름답고 고풍스럽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하여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 주조에 비잔틴풍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 대구 계산성당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당의 하나다. 명동성당이 고딕 건축양식으로
수직효과를 강조하여 남성적이라면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고풍스럽고 곡선미가 아름다워 여성적이다.
전동성당 주춧돌로 사용된 화강암은 성당 건축이 시작된 1908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헐린 전주성 성곽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성당의 벽체를 이루고 있는 붉은 벽돌의 일부도 헐린 전주성에서 나온 흙을 구워서 만든 것이다.
성당 외부도 외부지만 내부는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전면 중앙을 중심으로 삼등분하여 좁게 보이게 함으로써
앞부분 제단으로 시선이 집중되도록 하였다. 천정을 둥글게 아치형으로 마감하여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더해준다.
전동성당은 실내·외 건축물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영화의 촬영지나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있다.
영화 <약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텅 빈 성당에서 슬픈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도 전동성당에서 촬영했다.
뿐만 아니라 전동성당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했던 곳이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하여 호남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효수를 당했다.
당시에는 민가였는데, 천주교에서 1891년 구입하여 임시 본당으로 삼았다.
100년이 지난 전동성당은 천주교 박해와 우리 역사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전동성당 앞에 서서 눈을 감고 잠시 묵상에 잠긴다.
오늘 아름다운순례길을 걸으며 나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리라 다짐하며 전동성당을 나선다.
전동성당 건너편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이 있고, 그 사이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한옥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기전 정문 앞에 도착하자 앙증맞은 사자 두 마리가 조그마한 비석을 받치고 있다.
“여기에 이르렀거든 누구든 말에서 내리라. 잡인들은 들어오지 말라(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는
문구가 새겨진 하마비(下馬碑)다. 임금님의 어진이 있으니 말에서 내리라는 얘기다.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 하는데, 어진은 진전(眞殿)이라는 별도의 건물에 봉안하였다.
조선 태조의 경우 15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26폭의 어진이 전해지고 나라 곳곳에 진전이 마련되어 있었다.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전주의 경기전 등이 그것이다.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에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뒤 세종 24년(1442)에 경기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현재의 경기전은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한 것이다.
경기전 정문을 통과하자 홍살문 뒤로 외삼문, 내삼문, 정전이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진 외삼문과 내삼문 모두 다른 향교나 서원 건물보다 크고 높다.
정문에서 정전까지 일직선으로 인도가 깔려있고, 양쪽으로 건물과 심지어 담까지도 대칭을 이룬다.
이런 구조가 우리에게 왕실의 권위를 느끼게 해주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엄숙한 자세를 갖게 한다.
내삼문을 통하여 들어가니 어진을 봉안한 정전(보물 제1578호)이 자리하고 있다. 정전으로 가는 길은 가운데로 나 있지만,
이는 신도(神道)라서 사람들의 통행은 양쪽으로 복도가 있는 회랑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회랑 복도를 통하여 정전에 다가가니 태조 이성계의 어진(보물 제931호)이 봉안되어 있다.
여기에 모셔진 태조 어진은 고종 9년(1872) 당시 경기전에 모셨던 어진이 오래되어 낡고 해짐에 따라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 어진을 모사한 것이다.
정전 앞마당에는 드므라 불리는 가마솥 모양의 조선시대 소화기 6기가 있다.
드므에는 화마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드므 안에는 물을 채워나 화재가 발생할 때는 이 물로 초기 진화를 했다고 한다.
경기전 옆에는 고승들의 부도와 비슷하게 생긴 예종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는데,
이는 완주 태봉산에 있던 것을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경기전 내삼문을 나와 전주사고로 향한다.
경기전 동쪽 뒤 옛 전주사고터에 1991년 복원한 실록각은 서책을 보관하기 좋게 2층 다락집 형태로 되어 있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조선전기 4대 사고 중 하나로 조선 성종 때인 1473년 설치되었다.
전주사고에 보관되던 실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될 위기에 처하자 내장산 은봉암과 비래암, 묘향산 보현사 등지를 전전하며
난을 피했다. 4대 사고에 보관하던 왕조실록은 전주사고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어렵게 화를 면한
전주사고본 왕조실록은 이후 다시 인쇄되어 다섯 곳에 보관하였는데, 이때 전주사고는 사고로서 계승되지 못했다.
전주사고에서 경기전 정전 담장 밖을 돌아가는데, 소나무 숲이 그윽하다.
솔숲을 지나니 근래에 지어진 어진박물관이 있다.
어진박물관에는 태조·세종·영조·정조·철종·고종·순종의 어진과 어진을 봉안하던 행렬 그림,
일월오봉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와 영조, 철종 등 세 분뿐이다.
어진박물관에 전시된 나머지 임금의 어진은 상상을 통해 그려진 그림이다.
경기전 영역 곳곳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거목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고목과 어우러진 옛 건물들에서 역사의 향기가 묻어나온다.
경기전에서는 전동성당의 모습도 보이는데,
경기전의 한옥과 돌담 너머로 다가오는 전동성당의 모습이 부조화의 조화를 이룬다.
서양 건축양식인 전동성당과 우리의 전통적인 한옥이 절묘하게 어울린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한다.
경기전 옆의 부속건물들을 지나 경기전 정문으로 나온다. 이제 본격적으로 한옥마을길을 걷는다.
전주 한옥마을은 생각보다 오래된 마을은 아니다. 1930년을 전후하여 전주시 풍남동, 교동 일대에 한옥촌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다가동, 중앙동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것에 반발해서
전주의 유지들이 한옥을 지어 마을을 형성하면서 일본인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주한옥마을은 2010년 11월 국제슬로시티로 지정을 받았다. 한옥마을을 관통하는 태조로와 은행로에는
한옥건물에 공예품판매점이나 식당들이 들어서 있고, 작은 골목에는 전라북도 곳곳에서 옮겨온 고택들이 들어서 있다.
부채와 한지, 전통술, 소리 등 전주를 대표하는 유·무형문화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관과 문화관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옥마을 찾은 사람들로 골목이 붐빈다.
한옥마을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기 위해 오목대로 오른다.
오목대에서 본 한옥마을은 우리의 전통 한옥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상할 듯 살짝 추켜올려진 처마의 추임새며, 나란히 골을 이루고 있는 지붕의 기와에서 한국의 미를 본다.
한옥마을은 경기전 주변 숲과 멀리서 다가오는 산봉우리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생활양식이 한옥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옥마을을 내려다보고 나서 오목대로 눈길을 돌린다. 오목대는 고려말 이성계가 남원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다가 전주이씨 종친들과 전승축하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이때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한고조의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 노래를 통하여 넌지시 역성혁명을 통한 새로운 왕조 개창을 암시하였다.
때마침 이 자리에는 종사관으로 함께 한 포은 정몽주가 함께 있었는데 이성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서 홀로 말을 타고 남천을 건너 지금의 남고산 만경대에 올랐다고 한다.
만경대 벼랑에서 정몽주는 멀리 북쪽 하늘을 우러르면서
스러져가는 왕조의 한을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한 수의 시에 담아 읊었다고 한다.
오목대 앞 비각에는 고종의 친필로 된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地)’란 비석이 있다.
다시 한옥마을로 내려와 아름다운 한옥에 눈을 맞추며 걷다 보니 전주천에 닿는다.
전주천 위에 놓인 남천교에는 청연루라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길쭉한 누각이 한옥마을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천교는 조선후기 다섯 무지개다리로 불리었는데, 주변의 승암산과 한벽루와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남천교는 고지도를 참고하여 2009년 복원한 것이다.
누구나 청연루 마루에 앉아 전주천과 한옥마을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순례길 1코스-2>로 계속
첫댓글 발길 닿은 곳마다 스토리가 있어 조금 더 머물고 싶었던 순례길 이었습니다. 흐린 날씨였는데 회장님의 정성과 수고인 듯 그림이 잘 나온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해요
옛것이 모아져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문화적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것 같아요.
풍남문과 경기전, 전동성당, 한옥마을을 걸으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