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가림성 솔바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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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혼이 서려있는 산성에서 사랑나무를 만나다
부여 땅에 들어서니 구릉 같은 산과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모진 데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순한 산과 낮은 산에 기댄 마을이며, 넉넉하게 펼쳐지는 들판은 충청도 사람들의 느리고 부드러운 말씨를 닮았다.
아니 충청도 말씨가 이런 지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은 금강이 감싸고 돌아가는 부여 땅 남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금강을 가운데 두고
충청남도 논산, 전라북도 익산과 마주한다. 임천면을 지난 금강은 서천 땅으로 흘러들고 이내 서해바다에 닿는다.
부여와 서천, 익산 땅을 적시며 흐르는 금강은 강 주변에 넓고 기름진 농경지를 만들어 풍요로운 대지를 선사했다.
남쪽에서 금강이 흐르는 부여군 임천면은 백제 때에는 가림군(郡)이었다. 가림군은 통일신라 때 임천으로 바뀌었고,
고려·조선시대에는 임천군으로 유지되다가 1914년 부여군과 통합되어 부여군 임천면이 되었다.
백제 때 이름인 가림이라는 지명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가림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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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등산로에 백제의 혼이 서려있는 이름을 불러와 ‘가림성 솔바람길’이라 부르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오늘은 ‘가림성 솔바람길’을 걸으며 살갑고 부드러운 백제의 숨결을 느껴볼 참이다.
가림성 솔바람길은 임천면 소재지를 감싸고 있는 성흥산 줄기를 따라 걷는 길이다.
임천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덕고개에 도착하니 ‘가림성 솔바람길’ 표지판이 방향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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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바람길로 접어들자 이름 그대로 솔숲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경사도 완만하고, 부드러운 흙길이라 산보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줘 여름철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물 흐르듯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걷다보니 내 마음도 물처럼 유연해진다.
걷다가 길가에 설치된 의자에 앉으면 소리 없이 달려온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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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성 솔바람길은 찾는 사람이 많아 잘 닦여있고, 무성히 자란 길가의 풀도 잘 정리되어 깔끔하다.
능선길을 걷다보면 종종 동쪽으로 부여군 세도면, 석성면은 물론 논산시 강경읍의 야산과 농경지가 잔잔하게 다가온다.
각종 야생화도 눈길을 끈다. 원추리가 귤색으로 피어 담백한 아름다움을 전하기도 하고,
까치수염이 하얗게 꽃을 피워 곤충을 유혹하기도 한다. 길가에 피어있는 까치수염에 하늘소 한 마리가 앉아 꿀을 빨고 있다.
풀과 나무는 땅에 의지하고, 곤충이나 새는 풀과 나무에 의지한다. 이들은 이렇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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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은 고요한 숲길을 걸으며 말이 없다.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걷기 삼매경에 빠진 것일까?
천천히 걸으며 흙의 촉감을 느끼고, 자연의 향기를 맡는다. 이윽고 ‘나’라는 존재마저 잊어버린다.
종종 ‘솔바람길’이라 쓰인 이정표가 길안내를 자처하고, 나무들은 여전히 상쾌한 기운을 전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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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명상은 길가에서 발견한 산딸기의 유혹으로 중단된다. 빨갛게 익은 산딸기는 순전히 자연이 준 선물이다.
몇 개 따먹지는 안했지만 새콤달콤한 산딸기가 맛있다. 능선 서쪽 산자락에 임천면소재지가 자리를 잡고 있어
중간 중간 올라오는 길이 많다. 가림성이 가까워지면서 임도를 만난다. 면소재지에서 자동차로도 올라올 수 있는 임도다.
긴 거리는 아니지만 임도를 덮고 있는 단풍나무숲이 소나무 많은 지금까지의 길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길을 걸으며 쓸쓸한 듯 우아한 멋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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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가 끝나는 지점에는 매점도 있고, 크지는 않지만 여러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까지 갖춰져 있다.
가림성으로 오르기 전 충혼사(忠魂祠)에 들린다. 충혼사는 백제부흥운동 당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백제의 이름 없는 병사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매년 4월 여기에서 이름 없는 전사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제가 열린다. 야생풀로 가득 찬 충혼사 마당에
쓸쓸하게 핀 개망초 꽃들이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을 넋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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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사 뒤로는 깎아지른 기암절벽이 길쭉하게 자리하고 있다.
거대한 절벽 옆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마치 별천지로 들어가는 관문 같다.
절벽 안쪽으로 패인 작은 공간에는 꿀벌 통이 놓여 꿀벌의 안식처가 되었다.
바위틈에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려 생명력을 과시한다.
바위는 살아있는 생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지만 생물들이 살아갈 터전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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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성을 품고 있는 성흥산은 부드럽고 완만한데, 성곽이 있는 정상 부위만 가파른 지형을 이룬데다
주변을 거침없이 관찰할 수 있어 산성으로서의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다.
가림성 남문터에 오르기 직전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너럭바위에 서니 주변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가림성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 부소산성으로부터 직선거리로 10km 남쪽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 도성이었던 공주와 부여 땅을 관통하며 흐르는 금강하류의 요충지로, 금강 일대를 한눈에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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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성곽이 바로 앞쪽에서 다가온다. 이 성을 ‘가림성’이라 부른 데에는 백제 때 이 고장 이름이 가림군(郡)이었기 때문이다.
가림성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이 산성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기 이전인 동성왕 23년(501)에 쌓았다.
해발 268m의 성흥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석성과 그 아래쪽에 흙과 돌로 쌓은 토성이 있다. 석성은
둘레 1,350m, 높이 4m 가량 되고, 성 안에는 우물터와 건물터가 있다. 동문과 서문, 남문 등 세 개의 문터도 확인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위직인 위사좌평이 이 성의 축조를 맡았다고 하는데, 이는 이 성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가림성을 쌓은 위사좌평 백가(苩加)는 성을 쌓은 후 동성왕이 이곳을 지키게 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을 살해히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무령왕에 의해 진압되었다.
가림성은 백제시대 성곽 가운데 축조시기가 가장 확실한 산성이어서 백제의 성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가림성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18세기 중엽까지도 산성으로 이용되었다.
가림성은 현재 성흥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가림성이 위치하고 있는 산의 이름이 성흥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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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지로 오르니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산성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서 있다.
이 산에 오르기 전 29번 국도를 따라 임천면 쪽으로 달리면서도 군계일학처럼 서 있는 이 느티나무를 바라볼 수 있었다.
느티나무 거목은 땀 흘리고 올라온 사람들을 자상하게 품어주는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펼쳐지는 주변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수령 400년 쯤 되는 이 느티나무를 사람들은 ‘사랑나무’라 부른다. 드라마 『서동요』 방영 이후
선화공주와 장이(서동, 훗날의 무왕)의 사랑을 상징하는 나무로 널리 알려진 까닭이다.
사랑나무를 약간 떨어져서 바라보니 두 개의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나무 전체의 모습이 역모양의 ♡가 되고, 오른쪽 가지와 남문지가 비스듬하게 ♡를 이루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사랑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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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일출과 일몰 명소로도 유명하다. 금강 너머 동쪽 야산 위에서 올라오는 태양을 바라보며 희망을 꿈꾸고,
사랑나무 가지를 붉게 적시며 지는 태양을 보며 인생을 관조한다. 매년 1월 1일 해맞이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산성 안은 남문지에서 동문지까지 700평 정도가 평지를 이루고 있고, 아래로는 가파른 난공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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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나무 아래 앉아 있으니 청량한 바람이 가슴으로 파고들고, 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이 잔잔하다.
임천면 소재지 뒤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가오는 낮은 산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유유하게 흘러가는 금강과 주변의 들판이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가림성은 외적으로부터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산성이지만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야외미술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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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지 방향으로 성곽길을 걷다가 성흥산 정상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우물을 만난다.
산성터는 아무리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더라도, 군사들이 머물러야하기 때문에 우물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가림성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으니 산성터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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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지나 ‘태사유공지묘(太師庚公之廟)’라는 현판이 걸린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만난다.
후백제를 섬멸한 뒤 남방을 다스리던 유금필장군이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개경으로 가던 길에 임천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무렵 이 지역에서는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하고,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모습을 본 유금필장군이 지역민들에게 군량미를 나누어주고, 둔전을 일구어 민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주민들이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고려 성종은 태사유공지묘(太師庚公之廟)라는 현판을 내려 이 사당에 걸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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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흥산 정상에는 성흥루(聖興樓)라는 편액이 붙은 팔각정자가 세워져 있다.
팔각정자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 후 한고개 방향으로 향한다. 서문지 근처에서 성곽길과 헤어져 내리막길을 걷는다.
성곽을 벗어나자 고요한 숲길이 이어진다.
숲에 마음을 맡기고 걷다보니 어느덧 29번 국도가 지나는 한고개에 도착해 있다.
(2018. 6. 23)
*여행쪽지
-부여 가림성 솔바람길은 백제시대 산성인 가림성이 있는 부여군 임천면소재지를 감싸고 있는 산줄기를 따라 걷는 길이다.
-코스 : 덕고개→구교리 합류점→가림성→한고개(6.9km/2시간 20분 소요)
-난이도 : 보통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덕고개(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 376)
-임천면소재지에 몇 개의 식당이 있다. 임천면소재지에서 29번 국도를 따라 부여방향으로 4km 거리에 있는 풍년가든(041-834-1685)의 한방오리탕은 엄나무 등 여러 한약재를 넣어 깊은 맛이 난다. 생오리구이나 삼겹살, 소머리국밥도 먹을 수 있다. 밑반찬도 수준급.
첫댓글 뜨거운 날씨에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었어요. 이름 그대로 솔바람을 느낄 수 있는 길... 늘 고마워요.^^
무더운 날씨라 시원한 숲길이 좋았습니다.
조용히 걷고 싶은 곳이네용~~^^
물푸레나무님도 많이 걸어보세요.